들어가면서

▲ <하느님을 찾는 사람> /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 지음 / 김준우 옮김 / 한국기독교연구소 펴냄 / 268쪽 / 1만 2000원

명불허전(名不虛傳)이라고 우리에게 <예언자>라는 책으로 유명한 유대교 랍비 아브라함 헤셀의 기도와 상징주의에 대한 저술을 대하면서 몇 가지 기대감이 생겼다. 헤셀은 평생 신비주의와 유대교 윤리를 가르쳤다고 하는데, 그 나름의 기도 신학은 어떨까? 수천 년을 이어 온 유대인들의 기도 관행은 어떤 것이었을까? 도대체 유대인들은 무슨 내용으로 기도할까? 구약 이외에 유대인들의 심오한 전통 속에서 발견되는 기도에 관련된 성찰과 깨달음은 무엇일까?

그런데 그의 책을 읽어 가면서, 깨닫게 되는 것은, 본서가 어떤 학문적이고 조직적인 책이 아니라는 점에서 평소 하듯이 이 책의 내용을 논리적으로 분석하려던 시도는 그만두어야 했다. 오히려 본서를 통해서 들려지는 기도와 상징주의에 대한 저자의 사색과 묵상을 우리 시대와 개신교적 상황 속에서 고민하는 가운데 적용점을 찾는 방식을 추구해 보기로 하였다.

본서는 크게, 헤셀의 딸 수산나 헤셀이 쓴 헤셀의 일대기를 다룬 서문과, 기도의 본질을 다룬, 1(내면의 세계), 2(사람과 말), 3(자연스러움이 목표다), 4(계속하는 것이 길이다)장과, 상징주의와 본질의 상관관계를 다룬 5장으로 나눌 수 있다. 기도에 관한 장들에서는 기도란 말이냐 마음이냐, 개인 기도냐 공동체 기도냐, 공중 예배의 형식이 중요한가 아닌가, 관습들과 예식들의 중요성의 문제를 다룬다. 마지막으로 상징주의 단락에서는 상징이 주는 긍정적인 기능과 그 한계, 그리고 상징주의보다는 하나님의 규례의 문자주의적 실천에 더 중요성을 주어야 함에 대한 논의가 있다.

1. 기도란 무엇인가

유대인들은 오랜 침묵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알고 있다. 침묵의 기도는 유대교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오랜 전통이다. 눈물 콧물을 동반한 '통성기도'는 우리나라 개신교의 고유 브랜드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오랜 침묵은 유대인들의 '홀로코스트'뿐만 아니라, 구약에서도 낯선 내용이 아니다. 우리 시대에도 흔한 상황이 아닌가? 여전히 우리는 하나님을 찾지만, 하나님은 언제쯤 우리를 찾아주실지… 여기서 찾는다는 말(책의 원제가 Man's Quest for God이다)은 "하나님의 행방이 묘연해서 찾아다닌다"는 의미일 수도 있지만, 원래 "하나님을 찾는다"는 말은 구약에서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말도 되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구한다"는 다중적으로 쓰이는 표현이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자신의 뜻을 전부 계시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뜻을 밝혀 실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도 우리에게 기도가 필요한 이유가 뭘까? 성경 시대를 비롯한 지금까지의 고통과 혼란의 시기에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어떻게 기도하고 있는가? 그러한 면에서 저자는 기도란 '말하는 방식이 아니라 통찰의 길'이라고 말한다(13쪽). 오래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섬기던 신실한 유대인의 입장에서 기도는 하나님의 침묵의 의미에 대한 통찰의 여정이라는 의미다. 기도는 그러한 신비에 도달하는 길이며 그러한 신비에 반응하는 인간의 대답이다. 그러나 기도는 "만병통치약도 아니며, 행동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다( 66쪽). 우리가 겪고 있는 '위험이나 부족함'은 기도가 '자라나는 터전'을 만들어 준다(67쪽).

저자는 유대교 영성가답게, 말의 기교(립서비스)가 아니라, 침묵(마음)이 더 중요한 기도라고 말한다. 기도는 인간의 애씀이 아니며, 또한 심리 작용도 아니다. 기도는 하나님에게 '우리의 인생에 관여하시도록' 창문을 여는 것이다. 기도는 하나의 사건이다. 기도는 하나의 (개인적인 관심을) 고백하는 것이며 (공중 기도문을 읽을 때의) 공감이다. 원래 기도에는 영적인 갈망, 겸손, 드높임, 찬양과 감사의 요소가 있지만, 우리 개신교의 기도는 일방적인 독백이며 요구일 뿐이다. 기도는 말하는 사람의 웅변과 호소력에 의존하지 않으나 우리는 기도를 개인주의적이며 경쟁의 싸움터에 몰아넣고 있다. 저자는 개인 기도와 기도문 모두의 부족함을 넘어서는 것으로 내면의 질적 기도가 외면의 양적 기도보다 더 낫다고 말한다. 또한 정해진 기도 시간과 기도할 마음이 날 때의 기도와의 차이도 말한다. 말의 기도를 넘어서려면 침묵과 희망이 최고의 예배 형태라고 말한다(109쪽). 하나님의 위엄 앞에 침묵하는 것이 중요하다(시 65:2, 합 2:20, 습 1:7 등). 그러므로 말의 기도는 예배(의 도)를 벗어난 요구의 삿대질에 불과하다. 다시 말하자면, 예배가 빠진, 기도회는 없다. 저자는 개인 기도보다 공동체에서 예배 가운데 드려지는 기도가 더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기도와 예배의 출석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지 공동체를 섬기는 일이 아니다(122쪽). 회당(교회도!)의 관심도 참석자의 수를 늘리는 일에 골몰한다. 그러나 예배와 공동체라는 영적인 문제들은 행정 기술에 의존할 수 없다. 기도와 예배는 사람들로 하여금 영적으로 집중하게 만드는 시간이지, 장소가 아니다(126쪽). 기도는 기도자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서 있게 하는 것이다. 설교는 청중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서 있게 하는 것이다.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그 앞에서 희생 제사를 드리는 자들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 가진 것 가운데 가장 좋은 것(허영, 오만, 선입견, 위선의 말, 시기심 등)을 불태운다(152쪽).

기도하기 위해 설교하라(164쪽). 기도의 정신을 가르쳐라. 기도는 찬양과 감사의 요소가 (주된 것으로서) 가장 중요하다. 이점을 잊지 말라. 저자는 마지막으로 순종으로 드려지는 기도를 강조한다. 그러나 관습이 본질을 외면하지 않게 해야 한다. 관습이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민하그인데, 그 말의 자음을 거꾸로 하면, 게힌놈(지옥)이 된다.

2. 상징주의와 본질을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

구약에 상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상징에 대한 반감은 십계명의 '형상'에 대한 금령에서 비롯된다고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성전(소) 기물이라든지, 하나님의 말씀에 사용된 중요한 상징(주의)은 배제될 수 없다. 그러나 구약이 긍정적으로 말하고 있는 유일한 상징은 사람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상징(즉 형상과 모양)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인간에 대한 폭력이나 차별이나 살인 행위는 신성모독이다(228쪽). 또한 상징이 갖는 한계를 논한다. 세상은 상징이 아니다. 도덕은 상징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은 문자주의가 우선한다. 이 말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매우 구체적이며, 극히 현실적이며, 문자적이며 사실적인 문제"라는 것이다(278쪽). 상징은 하나님을 이해하게 하는 것이지만 계명은 하나님의 뜻을 완수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 앞에 놓인 여러 가지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완수해야 할 필요를 말씀을 통하여 기도를 통하여 재확인할 뿐이다. "우리는 고통을 상징적으로 겪지 않는다. 우리는 말 그대로 참으로 깊은 고통을 겪고 있다. 상징적인 치료는 돌팔이다. 하느님의 뜻은 실재이거나 아니면 망상이다(257쪽).

나오면서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가 기도할 때 정작 모르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우리의 뜻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하나님은 말씀을 통하여 다 말씀하셨지만, 우리는 그것을 부인하거나 무지하거나 망각하려 하기 때문에 기도가 필요한 것이다. 비록 이 책이 유대교적 배경하에서 쓰인 것이지만, 21세기 한국을 살아가는 개신교도들에게도 그의 예언자적 메시지와 함께 기도의 영성과 실천의 필요성에 대한 매우 훌륭한 지침서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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