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금요일 연재해 온 '알기 쉬운 성서해석학' 연속 강좌를 이번 8강을 마지막으로 마칩니다. 안진섭 목사는 오랫동안 성서학을 가르쳐 온 학자이자 현직 목회자입니다. 강의의 수준은 신학교의 해석학보다는 조금 더 쉬우면서 현장 목회자나 성경 연구자들에게 실제적인 도움이 될 수 있는 정도의 것이라고 안 목사는 밝혔습니다. 설교하고 성경을 연구하는 분들께 많은 도움 되길 바랍니다. -편집자 주

처음에 말씀드린 것처럼 성서를 해석할 때는 크게 다음과 같은 단계를 거쳐야 합니다.

첫째, 본문이 속한 책의 개론 공부하기
둘째, 본문 관련 역사적 배경 조사하기
셋째, 본문 문맥 살피기
넷째, 본문 구문 분석하기
다섯째, 본문 주요 단어 의미 파악하기
여섯째, 종합적으로 본문의 핵심 메시지 찾아내기

그동안 한 번에 한 단계씩 각 단계를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모든 연구 결과를 종합하여 본문의 핵심 메시지를 찾는 단계까지 왔습니다. 마지막 강의에서는 신약의 한 본문을 정하여 위에 제시한 모든 단계를 거쳐 본문의 핵심 메시지를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은 누가복음 1:67~79입니다.

67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하여 이르되 68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69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70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71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일이라 72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73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라 74.우리가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받고 75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76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 77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78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79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개역개정판)

첫 번째 단계는 본문이 속한 책에 대한 개론을 먼저 공부하는 것입니다.

신약 개론서나 주석의 서론을 보면 저자, 독자, 연대, 목적, 신학적 주제 등 다양한 개론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중에서 본문을 이해하는 데 주로 도움이 되는 것은 책의 기록 목적과 중심 주제(혹은 신학)입니다. 양용의 교수가 설명하는 누가복음의 신학 가운데 일부를 인용해 보겠습니다.

누가는 구원사에 대한 자신의 관심을 철저히 하나님 중심적으로 제시해 나간다. 물론 이것은 누가의 이야기 가운데 하나님이 자주 언급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보다는 이야기 전개의 주된 초점이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데 모아진다는 뜻이다. 누가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활동에 대한 자신의 관심을 그의 복음서 초두에서 '하나님 내 구주'(눅1:47)라는 마리아의 고백을 통해 잘 드러내 보여 준다. 누가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성취되는 것에 큰 관심을 가지는데, 그것은 구원과 관련된 구약의 예언들이 성취된 것에 대해 자주 기술함으로써 구체적으로 드러난다(참조. 눅 1:67~79; 2:28~33 3:4~6; 4:16~21). 아울러 누가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시는 분이 예수라는 사실과, 예수의 구원 활동 배후에 성령께서 계신다는 사실을 명백히 한다(눅3:21~22; 4:16~21). 누가는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구원 계획의 성취에서 예수와 성령의 적극적인 역할을 이처럼 확고히 인지하고 있었다(양용의 <누가복음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누가복음의 장르, 신학, 구조' 14~15쪽).

양용의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누가복음은 구원을 계획하시고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사가랴의 찬가'를 보면 사가랴의 찬가가 어떤 메시지를 전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가랴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구원의 길을 예비하는 자인 침(세)례요한을 보내 주신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늙은 엘리사벳에게 아들을 잉태하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그 아들을 통하여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더 나아가 메시아를 보내 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이와 같이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달린 일입니다. 성서 해석자는 먼저 본문을 책 전체의 신학적 주제의 빛 아래서 조명해 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 본문의 핵심 메시지를 놓치지 않고 파악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 담긴 구체적인 메시지는 다음 단계에서 다룰 여러 연구들을 통해 자세히 조사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단계는 본문과 관련된 역사적 배경을 조사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건과 관련된 역사적 배경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개론서나 주석을 참고하면 됩니다. 이 본문의 역사적 배경을 알려면 신구약 중간사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구약성경의 마지막 선지자인 말라기의 예언을 끝으로 이스라엘은 긴 암흑 속으로 빠져듭니다. 그때부터 침(세)례요한이 등장할 때까지 약 400년간 이스라엘은 영적 암흑기를 보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외세의 지배를 받고 있었고, 종교적으로는 타락한 종교 권력자들에게 착취를 당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메시아에 대한 기대는 넘쳐났지만 진짜 메시아는 오지 않고 거짓 메시아들만 들끓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태가 무려 400년 이상 지속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한편 이스라엘의 존경받는 종교 지도자였던 사가랴는 늙어서도 아들이 없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자식이 없이 늙어 간다는 것은 저주받은 가정이라는 뜻입니다. 자식을 하나님의 은총으로 생각하던 사회였기 때문에 자식이 없이 늙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사가랴의 절망적인 상황은 이스라엘의 절망적인 상황을 함축적으로 보여 줍니다. 사가랴가 아들이 없이 늙어 가는 것처럼 이스라엘은 메시아는커녕 예언자도 등장하지 않은 채 점점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가랴에게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 아내 엘리사벳이 요한이라는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자식이 없이 늙어 가던 사가랴에게 기적적으로 아들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 아들은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가 될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곧 깊은 암흑 속에 빠져 있던 이스라엘에게 이제 한 줄기 소망의 빛이 비추어진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사가랴의 가정은 바로 이런 이스라엘의 역사적 배경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성서 해석자는 반드시 본문의 역사적 배경을 참고하여 본문을 해석해야 합니다.

세 번째 단계는 본문이 위치한 문맥을 살피는 것입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데 제일 중요한 것은 문맥을 살피는 것입니다. 이 본문이 과연 어떤 이야기가 전개되던 중에 어떤 맥락에서 나온 것인지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문맥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본문의 앞뒤, 더 나아가 책 전체를 여러 번 읽어야 합니다. 이 강의에서는 본문이 어떤 말씀들에 뒤이어서 나오는지만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은 누가복음 1장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누가복음 1장은 서론(1~4절)에 이어 바로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가정을 보여 줍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늙어서도 자녀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사가랴가 성전에서 제사드릴 때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 그 아내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 아들은 주의 길을 예비하는 아이가 될 것입니다. 사가랴는 그 말을 믿지 못했다가 일시적으로 말을 못하게 됩니다. 그로부터 6개월 후 천사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나타나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할 것을 예언합니다. 이에 마리아는 친척 엘리사벳을 찾아가 함께 기쁨을 나눕니다. 그 후 엘리사벳이 해산하고 천사의 예언을 따라 이름을 '요한'이라고 짓자 사가랴의 혀가 풀립니다. 그때 사가랴가 기쁨에 겨워 하나님을 찬송한 내용이 바로 본문입니다. 이런 문맥을 생각하면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을 잊지 않고 메시아를 보내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네 번째 단계는 본문의 구조를 분석하는 것입니다.

구조 분석을 하라고 말하면 많은 목회자들이 너무 어렵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주석가들이 너무 전문적이고 난해한 구조 분석을 시도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성서 본문의 구조를 분석할 때 가장 먼저 할 일은 우선 본문을 여러 차례 읽어 보는 것입니다. 본문을 여러 번 읽어 보면 본문의 구조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사가랴의 찬가(눅 1:68~79)를 여러 차례 읽어 보면 본문이 크게 두 단락으로 구분된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68~75절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인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는 내용이고, 76~79절은 주의 길을 예비할 아들 요한을 축복하는 내용입니다. 이런 경우 해석자들이 좀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부분은 68~75절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가랴의 찬가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송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송시를 해석할 때, 성서 해석자들이 주목해야 할 부분은 하나님의 성품과 행하신 일 등 시인이 직접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이 찬송시에서 좀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부분은 68~75절입니다. 그중에서도 이 본문의 해석자들이 가장 유념하여 살펴보아야 할 부분은 바로 68절입니다.

히브리 시의 경우 첫 문장이 그 시의 핵심적인 주제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복 있는 자는'이라고 시작하는 시편 1편의 주제는 '복 있는 자가 누구인가'라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시작하는 시편 23편의 주제는 '나의 목자되신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물론 항상 그런 것은 아니기 때문에 해석자는 본문을 여러 차례 읽으면서 주제를 파악해야 할 것입니다. 아무튼 이 본문의 핵심적인 주제도 역시 첫 문장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68절)" 사가랴는 입을 열어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우리말 성경은 접속사를 빠트려서 이 문장의 구조를 알기 어렵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NASB같은 영어 성경을 참고하는 것이 좋습니다. "Blessed be the Lord God of Israel, For He has visited us and accomplished redemption for His people(68절)" 개역개정과 NASB를 비교해 보면 중요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NASB에는 중간에 'for(왜냐하면)'라는 접속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개역개정은 원문에 있는 접속사 호티(왜냐하면)를 생략하였습니다. 접속사를 넣어서 읽어 보면 68절의 구조가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주절은 하나님을 찬송한다는 내용이고, 종속절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사가랴가 하나님을 찬송하는 이유는 이스라엘을 돌보시고 속량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섯 번째 단계는 본문에 나오는 주요 단어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이 본문과 같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에서 주요 용어를 찾으려면 주로 하나님이 하신 일을 살펴보면 됩니다. 이 시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은 돌보시고(68절), 속량하시고(68절), 구원의 뿔을 일으키시고(69절), 긍휼히 여기시고(72절),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신 것(72절) 등입니다. 그런데 그중에서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연구해야 할 단어는 68절에 있는 두 단어, 곧 돌보시고, 속량하셨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시의 경우 첫 문장에서 이미 시의 핵심적인 주제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가랴는 지금 하나님께서 돌보시고 속량하셨다는 사실 때문에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두 단어 중에서 우리가 더욱 집중하여 연구해야 할 단어는 '돌보다'라는 단어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신 결과로 우리가 속량, 곧 죄사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돌보신 것이 먼저고, 그 돌보신 것의 결과로 발생한 것이 속량, 곧 죄사함입니다.

이제 '돌보다'라는 단어의 의미를 연구해 보겠습니다. 우선 68절을 세 가지 번역을 대조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개역개정)"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찬양받으실 분이시다. 그분은 당신의 백성을 돌보아 속량하시고(표준새번역)"
"Blessed be the Lord God of Israel, For He has visited us and accomplished redemption for His people(NASB)"

우리말 성경의 두 번역은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둘 다 '돌보다'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그런데 NASB는 'visit(방문하다)'이라는 단어로 번역하였습니다. 우리말 성경과 영어 성경은 번역 자체가 완전히 다릅니다. 이런 경우 해석자는 좀 더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원전의 의미를 찾아보아야 합니다. 어떤 분명한 이유가 있어서 이와 같이 서로 다른 번역이 나왔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단어의 연구는 7강 단어 연구법에서 다루었던 부분을 인용하여 설명하겠습니다. 스트롱코드 성경을 보면 이 단어의 스트롱코드는 1980번입니다. 이제 스트롱코드 사전 1980번을 찾아보면 이 단어의 뜻과 용례가 나옵니다. 이 단어는 헬라어로 '에피스켑토마이'로서 1)자세히 보다 선택하다 2)보러가다, 방문하다 3)찾아주시다, 돌보다라는 세 가지 뜻이 있습니다. 이 단어의 의미를 좀 더 분명히 알기 위해서는 이 단어가 사용된 용례들을 찾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단어가 사용된 용례들을 조사해 보면 몇 개의 그룹으로 구분됩니다.

1) 자세히 보다, 선택하다
[행 6: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개역개정)

2) 방문하다
[눅 1:78]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개역개정)
[행 15:36]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개역개정)

3) 찾아주시다, 돌보다
[마 25: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개역개정)
[행 7:23] 나이가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볼 생각이 나더니(개역개정)
[히 2:6] 그러나 누구인가가 어디에서 증언하여 이르되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개역개정)
[행 15:14]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그들을 돌보신 것을 시므온이 말하였으니(개역개정)

이 단어를 이렇게 세 그룹으로 분류하여 보면 이 단어에 담긴 의미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선 이 단어의 의미는 누군가를 돌볼 목적으로 방문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방문한다는 뜻과 함께 돌본다는 뜻이 많이 나오는 것입니다. 또한 행 6:3과 같이 일꾼을 선택하는 것도 역시 적합한 일꾼이 누군지 알기 위해 찾아본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단어에는 기본적으로 누군가를 찾거나 돌볼 목적으로 방문한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단어를 연구할 때는 단어에 담긴 구약적 배경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약에 나오는 헬라어의 단어에 어떤 구약적 배경이 담겨 있는지를 알려면 70인역(LXX)을 참고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일반적인 성서 해석자들이 70인역 성경을 직접 찾아서 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이런 경우 킷텔 사전이나 주석을 참고하여 파악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 강의에서는 John Nolland의 WBC주석을 참고하여 설명하겠습니다. John Nolland의 주석에서 1:68을 찾아보면 에피스켑토마이는 히브리어 성경의 '파카드(방문하다)'라는 단어를 70인역(LXX)에서 번역한 단어입니다. John Nolland는 친절하게 구약성경에 나오는 파카드의 용례를 제시합니다. 그 용례들을 하나씩 찾아보면 이 단어의 구약적 배경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강의에서는 그중에 출 4:31과 룻 1:6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출 4:31을 찾아보겠습니다. "백성이 믿으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찾으시고 그들의 고난을 살피셨다 함을 듣고 머리 숙여 경배하였더라."(개역개정) 여기에서 '찾으시고'라고 번역된 단어가 누가복음에서 '돌보다'라고 번역된 에피스켑토마이의 배경이 되는 단어입니다. 그 단어의 본래 뜻은 '방문하다'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애굽에서 고통당하는 자기 백성들의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모세를 통하여 자기 백성을 방문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방문하시면 그저 왔다가만 가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찾아오시면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대통령이 어느 집을 한 번 방문하기만 해도 그 집의 문제는 거의 해결됩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방문하시면 얼마나 놀라운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주 심한 노역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원래 요셉이 애굽의 총리로 있을 때, 흉년을 피해서 애굽으로 이주해 갔는데 세월이 흐른 후,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자 히브리 백성들은 노예로 전락하게 됩니다.

히브리 백성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의 삶의 정황은 전혀 언약과 관계가 없이 흘러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큰 민족을 이루어서 땅의 모든 민족에게 복을 주기는커녕 지금 애굽의 노예가 되어서 아무런 소망이 없이 매일 강제 노역에 시달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의 약속은 사라지고 더 이상 아무런 소망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그 순간,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더 이상 이스라엘을 기억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상 하나님은 그들을 기억했고 그들을 찾아가셔서 방문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곤고함을 살피셨습니다. 그때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에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방문하시면, 하나님이 돌아보시면 그때부터 구원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이제 룻 1:6을 살펴보겠습니다. "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개역개정). 이 말씀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라고 할 때, 그 '돌보다'라는 단어도 또한 '파카드'입니다. 이 말씀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 말씀의 의미를 정확히 알려면 룻기의 배경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룻기의 주인공은 룻이지만 1:6의 주인공은 룻의 시어머니인 나오미입니다. 나오미는 사사 시대에 유대 지방에 흉년이 들었을 때, 남편을 따라서 두 아들과 함께 모압 지방에 가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낯선 이국땅에서 나오미는 남편을 잃고 두 아들과 함께 살게 됩니다. 그 땅에서 두 아들이 결혼을 하여 며느리를 얻었는데 그만 두 아들마저 죽고 말았습니다. '나오미'라는 이 여성의 인생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고국에 흉년이 들어서 낯선 이국땅에 남편과 아들들을 믿고 이민을 왔습니다. 그런데 그만 그곳에서 남편과 아들 둘을 모두 잃었습니다. 참으로 기구한 인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극히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한 가지 기쁜 소식을 듣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방문하여 양식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새로운 소망을 품고 고국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바로 그 말씀이 1:6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흉년으로 인해 아무것도 없이 절망적인 상황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양식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돌아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백성을 방문하신 것입니다.

이제 이 단어에 담긴 풍부한 의미를 알게 되었으므로 본문으로 돌아와서 눅 1:68에서 그 단어가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앞에서 설명드린 것처럼 눅 1:68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당시 사가랴는 자식이 없이 늙어 가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존경받는 제사장으로서 자식이 없이 늙어가고 있는 것은 대단히 수치스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무엇인가 죄가 있어서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의 천사의 방문을 통하여 사가랴는 자기 아내에게 아이가 생겼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얼마 후 사가랴의 아내 엘리사벳은 아들을 출산합니다. 그 아이의 이름은 침(세)례요한이었습니다. 눅 1:68은 침(세)례요한의 탄생 이후에 사가랴가 기뻐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가랴의 찬가'에 나오는 첫 문장입니다.

사가랴는 자신에게 아들을 주신 것을 하나님께서 자신을 찾아온 것이라고 이해했습니다. 자식이 없이 늙어 가는 자신을 긍휼히 여기셔서 하나님이 친히 자기 가정을 방문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 중에 있는 한 가정을 찾아가신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하나님께서 얼마나 한 가정을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셨으면 친히 방문하시겠습니까. 사가랴는 그런 하나님의 방문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를 돌보셨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고려한다면 사가랴는 단지 자신에게 아들을 주신 것만 찬송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신구약 중간 시대 동안 예언자도 없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사가랴의 가정에 주의 길을 예비할 자인 침(세)례요한이 탄생한 것입니다. 사가랴는 자기 아들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소망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자기 백성을 방문하신 하나님을 찬양한 것입니다.

여섯 번째 단계는 지금까지 연구한 것을 종합하여 본문의 핵심 메시지를 찾는 것입니다.

이 본문의 핵심 메시지는 하나님께서 절망에 빠진 이스라엘을 방문하여 그들을 돌보시고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본문을 연구한 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방문하셨다는 것을 어떤 단어로 표현하는 것이 좋을지 오랫동안 묵상해 보았습니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그 단어는 '하나님께서 돌아보셨다' 혹은 '하나님께서 방문하셨다', '하나님께서 감찰하셨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복합적 의미를 가장 잘 담고 있는 말은 '심방'이라는 단어입니다. 심방한다는 것은 상당히 복합적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심방은 단순한 방문이 아닙니다. 방문하는 것을 포함하지만 단순히 방문하는 것 자체를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심방은 그 대상자가 살아가는 형편을 살피고 그를 위로하고 격려하여 그 어려움을 극복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심방을 받는 사람이 곤란한 문제에 직면해 있는데 심방하는 사람이 도울 힘이 있다면 실제로 그를 도울 것입니다. 심방이라는 말이 함축하고 있는 이런 복합적인 의미를 생각할 때 오늘 본문의 핵심적인 주제를 담고 있는 단어인 '돌아본다'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말은 바로 이 '심방'이라는 단어입니다.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가랴를 심방하셨는데 이미 하나님은 심방하기 전에 사가랴의 형편을 아셨습니다. 자식이 없이 늙어가던 그의 인생의 곤고함을 기억하셨습니다. 사가랴가 자식이 없이 늙어 가는 모습은 아무 소망 없이 살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곤고함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곤고한 삶을 바라보면서 그 조상 아브라함과 맺은 약속을 기억하셨습니다.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라(72~73절)"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스러운 삶을 바라보면서 그 조상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셨습니다. 큰 민족을 이루게 하고 복의 전달자가 되게 할 것이라는 약속을 기억하셨습니다. 사람은 약속한 것을 기억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반드시 기억하십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와 맺은 약속을 잊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 하나님은 그 약속에 따라 사가랴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찾으십니다. 저 높고 높은 보좌에 계신 하나님이 이 낮고 천한 땅에 심방 오신 것입니다. 사가랴는 그 사실을 생각하고 감격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조상과 맺은 약속을 기억하시고 그 약속에 따라 자신과 자기 백성의 형편을 돌아보기 위해 심방 오셨다는 사실에 감격했습니다.

그래서 사가랴는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왜냐하면 그가 자기 백성을 심방하시고 구원하셨느니라." 그렇다면 하나님이 인간을 심방하면 어떤 결과가 벌어집니까. 69절을 보십시오.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여기서 구원의 뿔이라는 말은 능력있는 구원자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뿔은 고대 근동에서 힘의 상징이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다윗의 보좌에서 내려올 권능의 왕, 곧 메시아를 가리킵니다. 천사 가브리엘은 탄생 예고에서 예수님에게 이 역할이 위임될 것이라고 분명히 약속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심방하면 구원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사가랴를 심방했을 때 사가랴에게 자녀가 생겼습니다. 그러나 사가랴는 자신에게 아이가 생긴 것이 단순히 늙은 부부에게 아이를 주셨다는 생물학적인 출산의 의미만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사가랴는 그 아이가 구원의 역사를 예비할 아이인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76~77절을 보십시오.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이 아이는 장차 선지자가 되어 메시아보다 앞서 가서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는 아이가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의 백성에게 죄 사함을 통한 구원을 깨닫게 할 것입니다. 78절에 보면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임한다는 말은 68절에 있는 돌아본다는 말과 같은 단어입니다. 새벽녘에 떠오르는 태양이 우리를 방문한다는 것입니다. 아침에 해가 떠올라서 어두운 곳을 비추는 것을 해가 떠서 우리에게 찾아온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아침에 해가 떠오르면 어둠이 물러갑니다. 추위가 물러갑니다. 여기서 떠오르는 태양은 하나님의 긍휼, 하나님의 자비를 가리킵니다. 사망의 그늘에 앉아 있던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그의 긍휼하심과 자비하심으로 찾아오십니다. 깊은 절망과 낙담에 빠져 있는 자에게 자비로우시고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심방 오십니다.

하나님이 심방하시면 어둠이 물러가고 빛이 임합니다. 하나님이 심방하시면 죽음이 물러가고 생명이 임합니다. 하나님이 심방하시면 문제가 사라지고 평강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은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서 곤고한 삶을 살던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심방 오셨습니다. 가장 놀랍고 극적인 심방은 바로 메시아가 이 땅에 탄생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원수의 압제에 시달리고 있는 그 백성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그 백성과 맺은 약속을 기억하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을 찾아오시되 구약 시대와 같이 천사의 모습으로 오지 않으시고 인간과 같은 모습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자기 백성들이 당하는 고통을 친히 체휼하시고 그 고난에 동참하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심방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심방하고 계십니다. 내 삶에 들어오셔서 내 모든 문제를 들으시고 살피시고 해결해 주시기 위해 지금도 내 마음의 집에 방문하고 계십니다.

2000년 전에 주님께서 유대 땅을 방문했을 때,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을 품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릅니다. 주님께서는 평화의 마을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던 예루살렘에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 땅에 진정한 평화를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주님의 심방을 거절했습니다. 눅 19:41에 보면 우리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에 가까이 왔을 때 성을 보시고 우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암탉이 새끼를 품듯이 예루살렘을 품으려고 했지만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심방을 거절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이 그 죄악으로 심판받을 일을 생각하면서 우셨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주님의 심방을 거절하고 심판을 받게 되었지만 그 시대의 많은 백성들은 주님의 심방을 받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남의 것을 토색하며 살던 삭개오의 집에 우리 주님께서 심방하셨을 때, 삭개오는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고 토색한 것은 네 배나 갚겠다는 놀라운 결단을 하게 되었습니다. 남편을 다섯 번이나 바꾸며 고단한 인생을 살던 사마리아 여인의 삶에 우리 주님께서 심방하셨을 때, 그녀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놀라운 변화를 체험했습니다. 빈 그물질에 지쳐 있던 베드로에게 우리 주님께서 심방하셨을 때, 베드로는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았을 뿐만 아니라 일생 동안 수많은 영혼을 낚았습니다. 우리 주님의 심방을 받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변화되었습니다. 75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 주님을 만난 후 그들은 평생토록 거룩함과 의로 주님을 섬기면서 살게 되는 놀라운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우리를 심방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말씀으로 우리의 삶에 찾아오십니다. 때로는 우리와 나누는 기도 가운데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또 때로는 다른 사람의 모습, 소자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우리를 심방하기를 원하셔서 우리에게 찾아오신 주님을 기쁨으로 맞아들이십시오. 여러분의 삶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사가랴는 처음에 하나님의 심방을 이해하지 못하고 거부했지만 결국 수태 중인 10개월 동안 침묵하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해하고 믿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때 그의 입이 열리고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던 그 백성을 심방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그 하나님을 향해 찬양하게 된 것입니다.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왜냐하면 그가 자기 백성을 심방하시고 구원하셨느니라."

1단계에서 6단계까지 거친 후에 해석자는 본문 전체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정리해야 합니다. 본문의 핵심 메시지를 정리할 때는 주석을 참고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1~5단계까지 연구한 것을 기반으로 해야 합니다. 이렇게 연구한 것을 가지고 설교할 때는 연구한 모든 것이 아니라 설교의 핵심 주제에 적합한 것을 추려 내어 설교해야 합니다. 또한 본문에 나오는 단어를 설명할 때는 가능하면 성경의 용례를 찾아서 설명하는 것이 좋습니다. 본문 연구가 은혜로운 설교로 연결되려면 설교자는 깊은 묵상을 통하여 적절한 적용을 이끌어 내야 합니다. 본문 연구가 끝났다는 것은 설교를 준비할 수 있는 기본이 갖추어졌다는 것을 의미할 뿐입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묵상과 기도를 통하여 성도들의 상황에 맞는 적절한 설교를 준비해 내야 합니다. 이 강의는 설교학 강의가 아니고 해석학 강의이므로 설교에 대해서는 직접 다루지 않는 것을 양해해 주십시오.

8주 동안 부족한 사람의 원고를 읽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성서를 연구하는 동역자님들의 여정에 부족한 사람의 글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만족합니다. 졸고를 연재해 주신 뉴스앤조이에도 감사드립니다. -필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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