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 태풍 하이옌이 지나간 지 두 달, 타클로반은 생각보다 빠르게 옛 모습을 되찾고 있다. 12월 13일부터 27일까지 2주 동안에도 달라진 모습이 눈에 확 뜨일 정도다. 공항은 골조가 앙상하게 드러나 있던 지붕을 모두 보수했고 수하물 컨베이어 벨트도 고쳤다. 시내는 차와 상인들로 북적댄다. 음식점과 쇼핑몰도 하나둘씩 문을 열었다. 교외에도 시장이 서 제법 활기차다. 이제 대부분의 집에 물이 나오고 일부 지역에서는 전기도 공급되고 있다. 살아난 사람들은 어떻게든 다시 살아간다.
2주간의 취재가 끝났다. 14일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취재하며 여러 가지 한계를 만났다. 한국교회 주요 교단들은 이제 막 본격적으로 구호를 시작하는 단계였다. 현지에서 이동하는 게 쉽지 않아 다른 피해 지역을 오가기만 해도 하루 이틀이 날아갔다. 반타얀 섬에 다녀오는 데에만 3일이 소요돼 다른 취재 일정을 포기해야 했다. 기독교 NGO의 활동 현장은 거의 손을 대지 못했다. 2주라는 시간은 생존하기에는 길었지만 취재하기에는 빠듯했다.
그래도 타클로반에서 만난 여러 선교사들을 통해 한국교회가 필리핀의 재해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지 큰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태풍을 직접 경험하거나 소식을 듣고 지체 없이 현장에 뛰어들어 구호와 사역을 계속하고 있는 선교사들은 한국교회의 관심을 감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우려했다. 현장을 무시한 즉흥적이고 과시적인 구호 문화가 교단과 교회, 복지 단체들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재해는 필리핀에서, 컨트롤은 한국에서?
타클로반에서 사역하는 한 목사는 최근 전화 한 통을 받고 난감했다. 한국에 있는 한 교회에서 걸려 온 전화였는데 옷을 한 무더기 보낸다는 것이었다. 교회에서 필리핀 구호에 쓰기 위해 자체적으로 바자회를 열어 모은 옷들이었다. 취지는 좋았지만 현지에서는 짐만 될 뿐이다. 이미 타클로반 시내에는 옷을 파는 상인들이 많다. 옷을 한국에서 필리핀으로 옮기는 데 들어가는 비용만으로도 현지에서 수백 벌을 살 수 있다.
왜 이런 난센스가 일어나는 걸까. 한국교회가 현지 사정을 참고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생각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이다. 필리핀을 돕자고 계획했을 때부터 바자회를 열기까지 한 번이라도 현지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에게 연락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타클로반의 경우, 재해 후 한 달 정도가 지난 시점부터 다른 지역에서 쌀을 사서 들어올 필요가 없었다. 타클로반에 이미 많은 쌀이 들어왔기 때문에 돈만 있다면 쌀은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한국교회가 굳이 마닐라나 세부 등 다른 지역에서 쌀을 사서 비행기나 트럭에 싣고 들어온다. 그러면서 쌀 몇 톤을 나눠 줬다며 흐뭇해한다.
한 복지 재단은 책 수백 권을 보내겠다고 했다. 물론 책을 주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겠지만, 지금 당장 먹고살 음식과 집이 없는 사람들에게 책을 건네는 게 타당할까. 전기가 끊기고 해가 빨리 넘어가니 랜턴이 좋겠다, 햇볕이 강하니 이왕이면 태양열이면 좋겠다 싶겠지만 실제로 태양열 랜턴을 나눠 주면 도로 시장에 나오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한다. 현지 상황을 알아보지 않고 탁상 앞에서 머리만 굴려 얻은 결과다.
현지 선교사들은 구호를 진행하기 전에 현장 조사를 하는 게 필수라고 입을 모았다. 그래야 적확한 구호를 할 수 있다. 현지 상황을 잘 아는 선교사들이나 구호단체에 문의하고 그들의 답변을 지침으로 삼아야 하는데, 한국교회가 스스로 컨트롤 타워가 되려고 하다 보니 엉뚱한 구호를 하게 되는 것이다. 한 선교사는 "구호를 진행하기 전에 제발 한 번이라도 묻고 했으면 좋겠다"며 답답함을 토로했다.
장기 재건 계획, 집 짓는 게 능사가 아냐
재해 후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긴급 구호보다는 장기적인 재건이 점점 중요해진다. 필리핀도 현재 긴급 구호 기간을 마무리하고 장기 계획을 진행하고 있다. 구호가 장기로 접어들수록 더욱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긴급 구호는 음식·물·텐트 등을 나눠 주는 것으로 끝나지만, 재건 사업은 사람들이 다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터전을 마련해 줘야 한다.
장기 재건 사업으로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게 집 짓기다. 태풍으로 집이 무너진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당장 살 수 있는 집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신중하게 하지 않으면 안 하느니만 못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필리핀 사람들은 대부분 다른 사람의 땅에 살기 때문에 무너진 곳에 집을 지으려면 땅 주인의 허락이 필요하다. 다른 지역에 아예 주거 단지를 세울 계획이라면 사람들이 자신의 일을 하면서 그곳에 거주할 수 있는지를 잘 살펴야 한다.
실제로 한국교회는 크게 실수한 경험이 있다. 2006년 필리핀 레이테 섬에 산사태가 났을 때, 모 교단은 필리핀교회연합(UCCP)과 손잡고 집을 수십 채 건설했다. 7년이 지난 현재 그곳에는 산사태 이재민이 아닌 전혀 엉뚱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 이재민들이 원래 살던 곳과 동떨어진 곳에 집을 지었기 때문이다. 또 부실 공사와 UCCP의 투명하지 못한 자금 운용 문제가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이번에는 예장합동과 한교연 등이 집을 짓기로 했다. 한국교회필리핀재해구호연합은 UCCP를 통해 10억 원 규모의 장기 재건 사업을 계획하고 있다. 이런 소식을 접한 한 선교사는 이미 진행 중인 곳은 어쩔 수 없지만 교단과 연합 단체들이 좀 더 신중하게 다시 생각해 주길 바랐다. 그는 정부가 이미 집을 짓고 있기 때문에 한국교회가 직접 집을 지을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현장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집 짓기 외에도 할 일은 얼마든지 있다. 기아대책과 월드비전 등 몇몇 NGO들은 지금 타클로반의 부서진 학교를 보수하기 위해 힘을 모으고 있다. 교실, 칠판, 학용품 등등 각각 지원 역할을 분담했다. 필리핀에 있는 대부분의 학교는 1월 초에 개학한다. 시기를 맞추기 위해 NGO들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복구해야 할 것은 학교뿐만이 아니다. 거리에 넘쳐나는 쓰레기를 치우는 소소한 일도 누군가는 도와야 한다. 타클로반은 곳곳에 쓰레기가 수북이 쌓여 있어 위생 상태가 좋지 않다. 마닐라에서 사역하는 한 선교사는 교인들을 동원해 타클로반의 집과 거리를 청소해 주려고 했지만, 타클로반까지 오는 경비가 만만치 않아 계획을 접었다. 그는 한국교회 교인들이 직접 오는 비용을 차라리 필리핀 교회 교인들의 교통비로 지원하는 게 훨씬 효율적이라고 말했다.
필리핀 교회가 직접 필리핀을 도울 수 있도록
한국교회가 '직접' 하기보다 필리핀 교회를 통해 구호를 진행하는 것은, 단순히 구호뿐만 아니라 필리핀 교회까지 염두에 둔 방법이다. 필리핀 교회 사람들이 움직이면 일단 한국에서 직접 사람이 오는 것보다 비용이 절감돼 같은 돈으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현지 교인들의 의식도 전환된다. 재해가 발생했을 때 다른 나라의 원조에 의지하기보다는 자국민의 고통에 동참하고 도와야 한다는 태도를 기를 수 있다. 이렇게 되면 필리핀 교회의 이미지도 재고할 수 있다.
현지인을 대상으로 하는 교회보다 좀 더 여력이 있는 한인 교회는 교인들이 뜻만 모으면 재해 현장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마닐라에 있는 임마누엘한인교회(조현묵 목사)에 다니는 유학생들은 재해 후 매주 열댓 명씩 타클로반으로 내려가 도움을 주고 있다. 12월 26일에는 타클로반 시청에서 대형 찬양 집회를 열었다. 이들은 교통비를 모두 스스로 감당하는데, 비행기값이 너무 뛰어서 30시간 버스를 타고 가는 청년들도 많다. 만약 이 비용이라도 한국교회가 대신해 준다면, 임마누엘교회는 부담을 덜고 지속적으로 타클로반을 지원할 수 있을 것이다.
필리핀 사람들이 직접 필리핀 사람을 돕는 것을 목표로 움직이는 단체들이 있다. 조현묵 목사, 김낙경 목사(마닐라한인감리교회), 김현중 선교사(동산교회) 등 현지 선교사와 한인 교회 목사 6명은 '세이브 더 필리핀'이라는 이름으로 모여, 어떻게 필리핀 교회가 스스로 재난을 당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다. 기아대책 서상록 선교사도 학교를 복구하는 사업을 타클로반 현지 교회와 함께 진행하고 있다. 그것이 재해 지역과 필리핀 교회 모두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이라 믿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