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예수 세미나(Jesus Seminar)'에 속한 역사적 예수 연구의 전문가로 널리 알려진 미국의 신약성서학자 마커스 보그Marcus J. Borg의 저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말하다(원제: Speaking Christian, 2011)>가 번역·출판되었다. 보그는 지금껏 단행본만 26권을 출판하였는데, 그 가운데 국내에는 이 책을 포함하여 11권이 번역되었다. 단독 저자로서는 꽤 많은 양의 저서가 국내 독자들에게 소개된 셈이다.

보그를 비롯해 크로산(John D. Crossan), 호슬리(Richard A. Horsley), 윙크(Walter Wink) 등 역사․문학적 비평에 근거한 연구서들도 그간 적지 않게 소개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논의는 신학대학의 울타리를 넘어 지역 교회에까지 영향력을 미치지는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문자주의(literalism)'에 근거한 근본주의적 신앙의 옹벽이 대다수의 교회에서 여전히 견고하기 때문일 것이다. 근본주의 신앙에 관한 종교 사회학적 차원의 문제 제기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다양한 형태의 근본주의적 신앙이 미치는 영향력은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문자주의'에 사로잡힌 근본주의적 성서 읽기가 파놓은 덫에 걸리지 않으면서도 기독교 신앙의 의미를 새롭게 되새길 수 있는 신학적 논의들이 더욱 활발히 전개되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는 이유이다.

▲ <그리스도교 신앙을 말하다> / 마커스 J. 보그 지음 / 김태현 옮김 / 비아(대한성공회 교육국) 펴냄 / 1만 3000원

Ⅱ.
이 책의 부제이기도 한 '왜 신앙의 언어는 그 힘을 잃었는가?'라는 질문은 미국의 상황을 전제로 한 것이지만 동시대 한국의 기독교인들에게도 의미 있는 물음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인)의 언어는 가장 신뢰할 수 없는 종교(인)의 언어가 된 지 이미 오래다. 말'만' 번지르르한 사람들이라는 이미지는 기독교인에 대한 이웃들의 평가에서 늘 빠지지 않는 항목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종교의 타락은 곧 종교 '언어'의 타락을 의미한다. 신뢰를 잃어버린 언어를 통해 그 언어가 매개하는 '으뜸가는 가르침[宗敎]'에 이를 수 있는 길은 없다. 그렇기에 한 종교의 쇄신은 제도적인 변화에만 있지 않고, 종교 '언어'의 의미를 새롭게 되새기려는 노력을 통해 더욱 구체화된다.

보그는 오늘날 기독교의 위기는 결국 '언어의 문제(8쪽)'에 다름 아니라고 말한다. 기독교인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낱말들―구원, 하느님, 예수, 부활, 자비, 죄, 용서, 회개, 거듭남 등―이 그 역사적(성서적) 출현의 맥락을 떠나 표류하고 있는 데에 오늘날 기독교의 근본 위기가 있다고 본 것이다. 그렇기에 저자에게 기독교 신앙의 쇄신은 곧 기독교적 '언어'를 쇄신을 의미한다. 익숙한 낱말들의 낯선 의미를 탐색함으로써 문자주의의 지배를 넘어선 성서 언어의 은유적 차원을 회복하는 것은 결국 '언어'를 통해 오래된 종교의 새 길을 모색하려는 시도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보그는 전문성의 영역에 함몰되지 않는 쉽고 평범한 언어로 농익은 성서 연구의 결실을 독자들에게 전달해 왔다. 그러나 이번에 번역된 책은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대중성이 돋보인다. 영문판 서문-국역본에서 서문은 제외되었다-에서 밝히고 있듯 이 책에 포함된 대부분의 논의는 그동안 저자가 다른 책에서 다뤄 온 신학적 주제들과 중복되는 내용을 적지 않게 포함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 책에서 새로운 학문적 논의를 기대했던 독자들은 다소 실망감을 느낄 법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실망감은 입문서로서 이 책이 지닌 장점으로 인해 말끔히 사라진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말하다>는 지금껏 국내에 소개된 보그의 책 가운데 그의 신학적 입장을 포괄적 주제에 걸쳐 가장 잘 정리해 낸 탁월한 입문서이다. 이 책은 기독교에 대한 편견에 사로잡힌 비기독교인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소개하는 좋은 안내서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기독교인들에게는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낱말들의 성서적 의미를 일깨우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문자주의적 해석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이 있지만 마땅한 대안이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읽으면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교회 안팎의 세미나 모임에서 함께 읽고 토론하는 것도 이 책을 활용하는 한 방법이 될 수 있겠다.

Ⅲ.
저자는 기독교의 언어가 본래의 성서적 맥락을 떠나 왜곡되고 곡해되는 두 가지의 근본원인을 지적한다. 하나는 그가 '천당과 지옥 해석틀(heaven and hell framework)'이라고 부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문자주의'이다. 이 책의 1장 '그리스도교 언어를 말한다는 것'과 2장 '문자주의를 넘어서'는 나머지 22장 전체의 주제를 다루기 위한 방법론적 논의를 포함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보그는 '천당과 지옥 해석틀'과 '문자주의'에 포획되지 않는 기독교적 언어의 동시대적 의미를 탐색해 나가고 있다.

보그는 '내세', '죄와 용서', '우리 죄를 위한 예수의 죽음', '믿음'의 네 가지를 핵심 내용으로 하는 해석의 틀(천당과 지옥 해석 틀)이 기독교적인 언어의 의미를 형성하는 데 중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형성된 의미가 성서와 초기 그리스도교에서의 의미와 사뭇 다르다(19쪽)"는 사실에 있다. 기독교의 언어들이 출현하게 된 역사적 맥락을 살피지 않은 채 '천당과 지옥 해석 틀'로 기독교의 언어들을 이해하려고 할 때 오해와 왜곡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또한 보그는 문자주의적 해석이 '전통적인' 것이라는 보수주의자들의 편견에도 문제를 제기한다. "성서 무오설과 문자주의는 개신교가 시작될 때부터 그 일부였던 게 아니라, 17세기 신학 저서에 처음 등장하고 이후 한참 시간이 흐른 뒤인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의 일(31쪽)"이라는 점을 상기시키면서 문자주의가 "지식에 대한 과학적 방법과 근대 과학을 낳은 계몽주의에 대한 응답(30쪽)"에 다름 아니었음을 지적한다.

'천당과 지옥 해석틀'과 '문자주의'를 넘어서기 위해 저자가 제시하고 있는 대안적 성서 읽기의 방식은 '역사-은유적 접근(32쪽)'이다. 역사적 접근은 그리스도교 언어를 절대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상대적relative'인 것으로 보려는 시도인데, 이를 통해 성서를 오늘날의 상황과 깊이 '관련된related to' 문헌으로 읽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즉, 역사적 접근을 통해 '그때' '그 상황'에서 '그들'에게 의미했던 바가 무엇이었는지를 물으면서, '지금' '이 상황'에서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되물으려는 노력이 역사적 이해의 초점이라고 하겠다. 또한 은유적 접근은 언어의 지시적 의미를 넘어 '잉여 의미'에 주목하는 성서 읽기의 한 방식이다. 곧, 하나의 낱말이 지닌 문자적·사실적 의미 너머에 있는 은유적 의미에 주목함으로써 근대 과학적 합리성이 추구하는 객관적 사실의 언어로부터 해방된 성서적 언어의 의미를 추구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핵심은 "그 이야기 자체의 사실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에 있다(37쪽)."

Ⅳ.
저자가 제시하는 역사-은유적 성서 해석은 상식의 수준을 크게 넘어서지 않는다. 그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기보다는 이미 200여년에 걸쳐 독일과 영미권을 중심으로 발전되어 온 성서해석학의 오래된 흐름을 바탕으로 잘못 사용되어 온 신앙적 언어를 바로잡는 데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서구 신학계에서 역사 비평 방법론은 이제 수용의 단계를 넘어 그 근대적 한계를 성찰하는 극복의 단계로 나아가고 있다. 그러나 근본주의적 신앙의 기득권이 여전히 공고한 한국의 개신교 안에서는 역사 비평 방법론의 수용을 두고 여전히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문자주의'라는 단일한 해석의 잣대에 집착하는 것은 인간적 경험의 산물에 불과한 '하나의 관점'을 절대시하려는 시도에 다름 아니라는 점에서 신실한 믿음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우상 숭배적 관념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개신교가 문자주의적 성서 해석에 집착하는 동안 많은 신자들이 교회를 떠났다. 계몽의 주체가 된 이들에게 문자주의의 주술은 더 이상 힘을 발휘하기 못하기 때문이다. 하여, 오늘날에는 교회와의 적절한 거리 두기가 오히려 진실한 신앙의 표지로 인식되는 역설적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지금이야말로 익숙한 교회의 언어들을 낯선 눈으로 다시 읽어야 할 때이다. 오랫동안 잘 안다고 생각해 왔던 낱말들에 얽힌 편견을 걷어 내고, 각각의 낱말이 태동했던 삶의 자리를 톺아보며 그 의미를 새롭게 새기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노력은 그 자체로 이미 훌륭한 신앙의 훈련이기도 하다. 인식의 한계를 끊임없이 인정하는 지적인 겸손의 실천임과 동시에 예상치 못했던 의미와의 사건적 만남을 통해 하느님께로 가까이 나아가는 신비의 체험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홍정호 / 신반포감리교회 목사, 연세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선교학)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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