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 쉬운 성서해석학' 연속 강좌를 매주 금요일 8주간 연재합니다. 안진섭 목사는 오랫동안 성서학을 가르쳐 온 학자이자 현직 목회자입니다. 강의의 수준은 신학교의 해석학보다는 조금 더 쉬우면서 현장 목회자나 성경 연구자들에게 실제적인 도움이 될 수 있는 정도의 것이라고 안 목사는 밝혔습니다. 설교하고 성경을 연구하는 분들께 많은 도움 되길 바랍니다. -편집자 주

제가 2강에서 소개했던 성경 해석의 단계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본문이 속한 책의 개론 공부하기
둘째, 본문 관련 역사적 배경 조사하기
셋째, 본문 문맥 살피기
넷째, 본문 구문 분석하기
다섯째, 본문 주요 단어 의미 파악하기
여섯째, 종합적으로 본문의 핵심 메시지 찾아내기

이제 성서 해석의 다섯 번째 단계인 본문에 나오는 주요 단어의 의미를 파악하는 법을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단어의 의미를 가장 바르게 파악하는 길은 헬라어와 히브리어 성경과 사전을 활용하여 원어적 의미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원어를 정확히 알지 못해도 원어에 기초한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 강의에서는 원어를 모르는 분들도 스트롱코드 사전과 킷텔 사전을 활용하여 원어적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을 설명해 보겠습니다.

1. 이끌다(요한복음 21:1~14)

1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2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3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4날이 새어 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5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6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7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8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거리가 불과 한 오십 칸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물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와서 9육지에 올라 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10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시니 11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12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13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14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개역개정)

이 말씀을 읽다 보면 이상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6절에서는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다고 했는데, 11절에서는 그물을 육지로 끌어 올렸다고 한 것입니다. 성서 해석자에게는 세심한 관찰력이 필요합니다. 성서 해석자는 전체를 통전적으로 보는 안목과 함께 분석적으로 보는 훈련도 해야 합니다. 왜 6절에서는 물고기가 많아 들 수 없다고 했는데, 11절에서는 그물을 끌어 올렸는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고 했을까요? 이런 경우 성서 해석자는 본문에 나오는 단어의 의미를 조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은 6절에서는 '들다'로 번역하였고, 11절에서는 '끌어 올리다'로 번역하였습니다. 스트롱 성경을 찾아보면 이 두 단어는 본래 원문에서 '헬퀴오'라는 단어이며 스트롱 번호로는 1670번입니다. 이제 스트롱 성구 사전을 찾아보겠습니다. 스트롱 성구 사전에서 1670번을 찾아보면 신약성경에 모두 6번 등장하는데 그중에 5번이 요한복음에 나옵니다. 신약성경에서 6번 나오는데 그중에 5번이 요한복음이라면 그것은 요한복음 저자가 이 단어를 특별히 자주 사용하고 있다는 뜻이 됩니다. 이런 경우 성서 해석자는 각 용례를 문맥에 따라 연구해야 합니다.

6: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이 말씀에서 이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구원의 주도권을 강조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말씀에 따르면 한 사람의 구원은 하나님이 선택하고 이끌어 주셔야만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끌어 주실 때 비로소 그 사람은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12:32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이 말씀의 의미도 6:44과 유사합니다. 예수님께서 승귀하시면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자신에게로 이끌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도 이끄신다는 말은 구원론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이끌겠다고 말한 것에 근거하여 만인구원론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문맥을 보면 이 말씀에서 말하는 '모든 사람'은 '차별이 없이 모든 사람을'이란 뜻으로 해석됩니다.

18:10 이에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데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 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이 말씀에서 '이끌다'라는 동사는 단순히 칼을 뺀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경우는 우리가 지금 연구하는 요한복음 21:1~14과 큰 관련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제 이런 연구에 근거하여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처음에는 물고기가 너무 많아서 그물을 들 수 없다고 했는데 예수님께서 잡은 고기를 가져오라고 하신 후에는 그물을 끌어 올렸을 뿐만 아니라 그물이 찢어지지도 않았습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물고기를 잡은 것은 단순히 많은 고기를 잡아 큰돈을 벌게 되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미 제자들을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자들은 여전히 물고기만 잡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을 다시 찾아가서 다시 한 번 기적적으로 많은 물고기를 잡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건이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6:44과 12:32에서 '이끌다'라는 동사는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예수님)의 주권적인 이끄심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와 연관지어 해석한다면 이 말씀은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앞으로 수많은 영혼을 구원할 것을 암시합니다. 앞으로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끄심을 통하여 수많은 영혼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능력은 부활하신 예수님께로부터 나옵니다. 모든 능력의 근원이신 예수님의 인도를 따라 순종하면 제자들은 수많은 사람을 구원하는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많은 물고기를 잡은 그물을 끌어 올리는 모습에는 이와 같이 깊은 구원론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2. 아끼다(에베소서 5:16)

[엡 5: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개역개정)

스트롱코드 성경과 스트롱코드 사전을 찾아보면 '아끼다'라는 동사는 1805번 '엑싸고라조'라는 단어를 번역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단어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려면 먼저 성구 사전을 사용하여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가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 조사해 보아야 합니다. 성구 사전을 찾아보면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모두 네 번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갈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개역개정)

[갈 4:5]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개역개정)

[엡 5: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개역개정)

[골 4:5] 외인에게 대해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개역개정)

위의 용례를 보면 에베소서 5:16에서 '아끼다'라고 번역된 단어 '엑싸고라조'는 크게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 가지는 ‘아끼다’라는 뜻이고, 다른 한 가지는 '속량하다'라는 뜻입니다. 먼저 왜 이렇게 한 단어가 완전히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는 두 가지 뜻으로 사용되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전을 찾아보면 '엑싸고라조'는 본래 '(물건을) 사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장에서 어떤 물건을 살 때는 단순히 '사다'란 뜻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 문화에서는 시장에서 노예를 사고 파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노예를 살 때도 단순히 내가 일을 시키려고 살 수도 있지만 때로는 노예를 풀어 줄 목적으로 살 때도 있습니다. 그때 노예를 사는 것은 내가 그를 사서 결국 그를 노예의 신분에서 풀어줄 목적인 것입니다. 그것을 '구속'이라고 합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이 단어에 '구속하다' 혹은 '속량하다'의 뜻이 생겼습니다.

이런 배경을 이해한 상태에서 에베소서 5:16을 묵상해 보면 그 말씀에 담긴 깊은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시장에 아무리 좋은 물건이 있어도 내가 값을 지불하고 사지 않으면 내 것이 아닙니다. 내가 돈을 주고 사야만 그때부터 내 것입니다.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흘러가는 시간은 내 것이 아닙니다. 흘러가는 시간을 아껴서 잘 사용해야 비로소 그 시간이 내 것이 됩니다. 지금 이 시대는 너무 악한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흘러가는 시간을 잘 선용하여 내 것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세월을 아끼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3. 찾다(출 4:31)

29모세와 아론이 가서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장로를 모으고 30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신 모든 말씀을 전하고 그 백성 앞에서 이적을 행하니 31백성이 믿으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찾으시고 그들의 고난을 살피셨다 함을 듣고 머리 숙여 경배하였더라(개역개정)

이번에는 '찾다'라는 단어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스트롱코드 성경으로 이 단어를 찾아보면 6485번이라고 되어 있고, 다시 그 번호로 스트롱코드 사전을 찾아보면 히브리어로 '파카드'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사전의 용례를 보면 '파카드'는 구약성경에서 매우 빈번하게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파카드'의 가장 기본적인 뜻은 '방문하다'입니다. 파카드는 일반적으로 누군가를 방문한다는 뜻으로 자주 사용됩니다. 그렇다면 그런 기본적인 의미로 본문을 유추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방문하셨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 땅에서 400년 이상 노예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방문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방문하시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하나님께서 사람을 방문하실 때는 크게 두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한 가지는 그 사람을 돌보려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그 사람을 징계하려는 것입니다. 스트롱코드 사전에 나오는 파카드의 여러 가지 뜻을 보면 '돌보다'라는 뜻도 있고, '습격하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출애굽기 4:31에서는 '돌보다'라는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때로 이 단어가 '습격하다'라는 의미를 갖기도 합니다. 여기서 '습격하다'라는 뜻은 악한 자를 징벌하시는 하나님께 사용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방문하실 때는 그와 같이 크게 두 가지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 기초하여 본문을 가만히 묵상해 보면 그 속에서 깊은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애굽에서 노예로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언약을 믿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하나님은 오시지 않고 무심한 세월만 흐릅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내셨습니다. 드디어 하나님의 구원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에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장로를 다 모으고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전하고,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증거로 이적을 행하였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찾아오셨다고 믿고 하나님께 경배합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방문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형편을 살피고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자리에 방문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감격적인 일입니까?

4. 돌보다(눅 1:68)

[눅 1:68]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개역개정)

누가복음 1:68은 사가랴의 찬가에 나오는 첫 문장입니다. 늦은 나이에 아들을 얻은 사가랴는 기쁨에 가득 차서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68절의 후반부는 하나님을 찬송하는 이유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사가랴가 하나님을 찬송하는 이유는 두 단어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돌보다'라는 단어이고, 다른 하나는 '속량하다'라는 단어입니다. 그중에서 '돌보다'라는 단어를 연구해 보겠습니다. 먼저 이 단어의 스트롱코드는 1980번입니다. 이제 스트롱코드 사전을 찾아보면 이 단어의 뜻과 용례가 나옵니다. 이 단어는 헬라어로 '에피스켑토마이'로서 1)자세히 보다, 선택하다 2)보러가다, 방문하다 3)찾아 주시다, 돌보다 라는 세 가지 뜻이 있습니다. 이 단어의 의미를 좀 더 분명히 알기 위해서는 이 단어가 사용된 용례들을 찾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단어가 사용된 용례들을 조사해 보면 몇 개의 그룹으로 구분됩니다.

1) 자세히 보다, 선택하다

[행 6: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개역개정)

2) 방문하다

[눅 1:78]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개역개정)

[행 15:36]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개역개정)

3) 찾아 주시다, 돌보다

[마 25: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개역개정)

[행 7:23] 나이가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볼 생각이 나더니(개역개정)

[히 2:6] 그러나 누구인가가 어디에서 증언하여 이르되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개역개정)

[행 15:14]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그들을 돌보신 것을 시므온이 말하였으니(개역개정)

이 단어를 이렇게 세 그룹으로 분류하여 보면 이 단어에 담긴 의미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선 이 단어는 누군가를 돌볼 목적으로 방문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방문한다는 뜻과 함께 돌본다는 뜻이 많이 나오는 것입니다. 또한 사도행전 6:3과 같이 일꾼을 선택하는 것도 역시 적합한 일꾼이 누군지 알기 위해 찾아본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단어에는 기본적으로 누군가를 찾거나 돌볼 목적으로 방문한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복음 1:68에서 이 단어는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을까요? 누가복음 1:68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당시 사가랴는 자식이 없이 늙어 가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존경받는 제사장으로서 자식이 없이 늙어 가는 것은 대단히 수치스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무엇인가 죄가 있어서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의 천사의 방문을 통하여 사가랴는 자기 아내에게 아이가 생겼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얼마 후 사가랴의 아내 엘리사벳은 아들을 출산합니다. 그 아이의 이름은 침(세)례요한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68은 침(세)례요한의 탄생 이후에 사가랴가 기뻐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가랴의 찬가'에 나오는 첫 문장입니다.

사가랴는 자신에게 아들을 주신 것을 하나님께서 자신을 찾아온 것이라고 이해했습니다. 자식이 없이 늙어 가는 자신을 긍휼히 여기셔서 하나님이 친히 자기 가정을 방문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가정을 찾아가신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하나님께서 얼마나 그 가정을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셨으면 친히 방문하시겠습니까? 사가랴는 그런 하나님의 방문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를 돌보셨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5. 약함(고린도전서 2:3)

[고전 2: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개역개정)

스트롱코드 성경을 보면 '약함'이라는 단어는 769번이라고 표기되어 있습니다. 769번을 스트롱코드 사전으로 찾아보면 '아스테네이아'라는 단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단어는 1)문자적인 의미로 육체의 약함, 질병, 모든 종류의 약함, 인간의 육체가 상속받은 나약함 등의 뜻을 가지고 있으며 2)상징적인 의미로 나약함, 혹은 비겁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단어의 의미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이 단어가 사용된 용례를 모두 찾아보아야 합니다. 지면 관계상 바울서신에 나온 용례들만 찾아보겠습니다.

[롬 6:19]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롬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고전 2: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고전 15:43]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고후 11:30]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고후 12:5]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

[고후 12: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고후 12: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고후 13:4]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

[갈 4:13]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딤전 5:23]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위장과 자주 나는 을 위하여는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위의 용례들을 조사해 보면 바울이 어떤 의미로 약함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지 어느정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단어는 일반적인 의미로 '약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바울서신, 그중에서도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는 이 단어를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강조하는 약함은 자기 학대에 빠진 비관주의자의 탄식이 아닙니다. 바울이 '약함'이라는 단어를 즐겨 사용하는 이유는 '약함 안에서', '약함을 통해서', '약함에도 불구하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약함에도 불구하고, 아니 약함을 통하여 일하시는 하나님, 그 전능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자신의 약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의미를 통하여 바울이 가지고 있던 '약함의 신학'이 무엇을 지향하는지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강함이 자기 자신의 약함을 통하여 일하시는 것을 경험한 사람은 두렵고 떨림 가운데 더욱 더 하나님께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7. 혼잡하게 하다(고린도후서 2:17)

[고후 2:17]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개역개정)

이 말씀에 나오는 '혼잡하게 하다'는 단어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스트롱코드 성경을 보면 2585번이라고 표기되어 있습니다. 또한 스트롱코드 사전에서 2585번을 찾아보면 헬라어로 '카펠류오'라고 하는데 '장사하다, 소매하다, 교역하다, 섞음질을 하다'라는 뜻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단어의 경우는 신약성경에 단 한 번밖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성구사전을 통하여 여러 용례들을 찾아볼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단어처럼 신약성경에 단 한 번만 나오는 단어의 경우는 어떻게 그 의미를 파악해야 할까요? 이런 경우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자료 가운데 하나가 바로 킷텔 사전입니다. 킷텔 사전은 신약성경 외의 다른 문서들에서 그 단어가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킷텔 사전은 영어로 된 방대한 사전이지만 다행히 단권 요약본은 우리말로도 번역되어 있습니다. 킷텔 단권 원어 사전에서 '카펠류오'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καπηλεύω 행상하다, 장사하다
1. 헬라에서의 용례. 이 단어는 '소매상을 하다'를 의미하며 사기나 탐욕이라는 뉘앙스를 지닌다. 철학에서 이 단어는 돈을 받기 위해 가르치는 것을 의미한다.
2. LXX과 필로에서의 용례. 이 동사는 LXX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이사야 1:22에 나오는 κάπηλος(소매상인)는 대체로 좋지 않은 의미를 지닌다. 필로는 에세네파의 행위를 가리키는 말로 καπηλεία(소매업)를 사용하나 거짓 선지자의 장사 행위를 가리키는 말로는 다른 단어들을 사용한다.
3. 신약에서의 καπηλεύειν. 신약에서는 고린도후서 2:17에서만 나오는데 여기서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파는 장사꾼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고 주장한다(cf. 행 20:33; 살전 2:3ff.). 바울이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i)돈을 받기 위해서 말씀을 전해 주고(말씀을 전한 대가로 선물을 받는 것과는 달리, 고전 9:14); (ii)말씀을 혼잡케 하는 것이다(cf. 고후 4:2에 나오는 병행구). 바울이 마태복음 10:10에서 주님의 규칙을 받아들이고 있기는 하지만 자신이 탐욕스럽다거나 거짓된 장사를 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지 않기 위해 생활비를 지원받을 그의 권리를 포기한다. 전도자는 말씀에 대한 헌신, 하나님 앞에서의 책임감 및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에 의해서만 지배받아야 한다(신약성서 신학 사전, 475)

위의 설명은 우리말로 번역된 신약성서 신학 사전(킷텔 단권 원어 사전)의 해당 부분을 어색한 번역만 일부 수정하여 인용한 것입니다. 이런 설명을 참고하면 성서 해석자는 고린도후서 2:17에서 바울이 어떤 의미로 이 단어를 사용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당시 고린도에는 돈을 벌기 위한 목적으로 철학을 가르치는 떠돌이 철학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마치 이러저리 떠돌아다니는 장돌뱅이처럼 도시를 순회하며 철학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책임감을 가지고 철학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목적은 돈을 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처럼 돈을 벌기 위한 목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돈을 벌 목적으로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은 성경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혹은 청중들의 입맛에 맞게 왜곡시킵니다. 바울은 그렇게 돈을 벌 목적으로 말씀을 왜곡하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자신은 그렇게 돈을 위해 말씀을 왜곡하는 자가 아니라고 분명히 선포합니다. 심지어 바울은 그런 오해를 피하기 위해 정당하게 받을 수 있는 생활비 지원마저 포기하고 스스로 일해서 돈을 벌면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단 한 번만 등장하는 단어를 해석할 때는 이와 같이 신약성경 외의 다른 문서들의 용례를 통하여 그 의미를 유추해야 합니다.

8. 빌립보서 2:5~11

5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개역개정)

빌립보서 2:5~11은 단어 연구가 본문 해석에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지 알 수 있는 좋은 예입니다. 이 강의에서는 지면 관계상 위 본문에 밑줄 친 단어들만 살펴보겠습니다.

1) 이 마음 - 스트롱코드 성경으로 이 단어를 찾아보면 5124번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시 스트롱코드 사전으로 5124번을 찾아보면 마음이라는 단어는 없고, 단순히 '투토'라는 지시대명사가 나옵니다. 우리말 성경은 두 번이나 마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헬라어 성경에는 이 구절에 마음이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습니다. 단순히 지시대명사로 '이것'이라고 되어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 마음을 품으라'로 번역 문장은 단순히 '이것을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생각하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여기서 이것은 앞에서 언급한 태도를 가리킵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 2:2~4)" 결국 우리말 성경에서 '이 마음'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단지 각 사람의 내면의 마음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대하는 우리의 삶의 태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2) 본체(6절)와 형체(7절)와 모양(8절) - 본문 6~8절에는 비슷하게 보이는 단어 세 개가 연속적으로 나옵니다. 이런 경우 해석자는 원어의 단어를 반드시 찾아보아야 합니다. 스트롱코드 성경을 보면 본체와 형체는 3444번이라고 표기되어 있고, 모양은 4976번이라고 표기되어 있습니다. 스트롱코드 사전을 찾아보면 3444번은 '모르페'라는 단어이고, 4976번은 '스케마'라는 단어입니다. 헬라어 사전을 찾아보면 '모르페'는 변할 수 없는 본질을 가리키는 단어이고, '스케마'는 때와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는 외형적 모양을 가리키는 단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스트롱코드 성구 사전을 찾아보아도 이 구분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6절과 7절에서 '모르페]는 본질을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같은 본질을 가진 분인데 종의 본질을 취하셨습니다. 그러나 8절은 의미가 다릅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사람의 모양(스케마)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이 단어는 고린도전서 7:31에서도 한 차례 더 사용되었습니다.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여기서 이 세상의 외형이라고 할 때 '외형'이라는 단어가 바로 스케마입니다. 이런 사실을 보면 스케마는 상황에 따라 바뀔 수 있는 외형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를 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다만 자기를 비우신 것입니다. 이 말은 신적 특권을 스스로 비우시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일시적으로 사람의 모양을 입으신 것이지 영원토록 사람의 본질을 입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육신으로 존재하실 때만 사람이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서의 본질은 영원합니다. 이 세 구절에 나오는 두 단어는 이와같이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원어적 의미를 찾아보지 않으면 본문을 정확하게 해석해 낼 수 없습니다.

3) 근본 … 본체시나 - 위에서 본체라는 단어를 자세히 다루었는데 이번에는 '근본 … 이다'라는 단어를 살펴보겠습니다. 스트롱코드 성경에서 근본이라는 단어를 찾아보면 5225번이라고 되어 있고, 다시 스트롱코드 사전에서 5225번을 찾아보면 '휘파르코'라는 단어로서 '실재하고 있다'라는 뜻을 가진 것으로 나옵니다. 스트롱코드 사전은 자세히 언급하지 않았지만 킷텔이나 바우어 사전을 찾아보면 '휘파르코'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아는 'be동사'와는 다른 단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단어는 변할 수 없는 본질적인 존재 방식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이런 사실을 보면 왜 바울이 흔히 쓰는 'be동사'를 쓰지 않고 '휘파르코'를 사용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실 때, 예수님은 근본적인 신성을 버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근본적인 신적 본질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런 사실을 정확히 표현하기 위해 변할 수 없는 본질적인 존재 방식을 가리킬 때 쓰는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빌립보서 2:5~11과 같이 예수님에 대한 교리적 내용을 담고 있는 본문을 해석할 때, 해석자들은 특히 각 단어를 조심스럽게 해석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리적으로 잘못된 설교를 하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안진섭 / 침례신학대학교 학부(Th.B.)와 신학대학원(M.Div.)을 졸업한 후 미국 루이지애나 주에 위치한 New Orleans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약성서 사본학으로 박사 학위(Ph.D.)를 받았다. 유학 중에는 뉴올리언스침례신학대학원 강사와 신약본문연구소 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귀국 후에는 오랫동안 침례신학대학교 학부와 신학대학원에서 헬라어와 성서강해 과목을 가르쳐 왔다. 새누리교회 대표목사를 거쳐 현재는 새누리2교회 대표목사로서 바른 해석학에 근거한 복음적인 성경 강해로 한국교회 강단을 성경적으로 회복하는 일에 헌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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