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에엑! 꾸에엑!"

'웬 돼지 멱따는 소리인가…' 싶었는데 정말 돼지를 잡는 소리였다. 타클로반 동쪽에 있는 카부이난에 사는 안드레스 레고냐(41)의 집에서 서너 명의 사내들이 돼지의 다리를 끈으로 묶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의 아내 카스민(37)의 어머니가 태풍에 휩쓸려 세상을 떠났다. 죽은 지 40일째 되는 날을 기념하기 위해 돼지를 잡아 상을 차리려는 것이었다.

9살, 7살 먹은 두 딸은 마닐라에 있는 사촌에게 잠시 맡겼다. 태풍이 지나간 후 아이들은 비만 내려도 예민해지고 울음을 쏟아 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집이 찢겨져 나가는 것을 지켜본 아이들에게 트라우마가 생긴 탓이다.

거듭되는 구호 현장에서의 변수

▲ 감리회 필리핀지방회는 공항에서 발이 묶였다. 세부에서 쌀을 싣고 출발한 차가 연착됐기 때문이다. 짜증이 날 만도 하지만 남녀노소, 지위에 관계 없이 모두 땀 흘리며 구호물자를 날랐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카부이난은 타클로반 시내에서 차로 한 시간 정도 걸리는 지역이다. 카부이난은 재해를 당한 후 구호 물품을 많이 조달받지 못했다. 마닐라 안티폴로에서 사역하다가 재난이 터진 후 타클로반으로 달려온 강병기 선교사는, 가장 많은 구호가 진행된 타클로반도 시내를 제외하고는 충분히 구호물자를 지급받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기독교대한감리회(감리회) 삼남연회 필리핀선교지방회가 12월 16일 카부이난을 찾아 쌀·라면·설탕·우유·통조림 등 구호 물품을 전달했다. 현장 탐사를 한 강 선교사가 이 지역과 지방회를 연결했다. 감리회는 벌써 두 번째 타클로반을 방문하는 것이다. 12월 2일부터 6일까지 타클로반에서 의료 선교 활동을 진행한 바 있다.

필리핀지방회는 자체적으로 모금 활동을 벌여 약 2300만 원 상당의 구호물자를 준비했다. 농심이 3000만 원 가량의 라면을 감리회에 후원했다. 수백 개의 라면 박스를 실은 25톤 트럭이 마닐라에서, 쌀 등의 물품을 실은 버스와 트럭이 세부와 레이테섬 남쪽에서 출발했다. 지방회와 총회에서 목사와 장로, 교인 20여 명이 나머지 물품을 싣고 16일 오전 9시 타클로반 공항에 도착했다.

하지만 구호 물품을 옮기는 과정에서 계속 변수가 생겼다. 레이테섬 남쪽에서 출발한 트럭의 타이어가 펑크 났고, 세부에서 오는 버스는 배가 연착돼 출발이 늦었다. 원래 16일 새벽에 도착해 공항에서 나머지 물품을 실어야 할 버스가 오지 않자 당장 공항에서부터 차질이 생겼다. 강 선교사가 군부대에 구호물자를 실을 트럭을 빌려 달라고 요청했으나, 지휘관은 해당 지역이 자신의 관할이 아니라며 거절했다.

공항에 발이 묶인 필리핀지방회 사람들은 서둘러 지프니(군용 지프를 개조한 차량)를 빌려 물품을 옮겼다. 레이테섬 남부에서 출발한 트럭은 펑크 난 타이어를 교체하느라 예상 시간보다 늦게 도착했다. 계속 계획이 틀어져 신경질이 날 만도 했지만 그럴 겨를이 없었다. 약속한 시간에 최대한 닿기 위해 남녀노소, 지위를 가리지 않고 모두 물품 박스를 옮기는 중노동에 매달렸다. 뙤약볕 아래 모두가 땀을 뻘뻘 흘렸다.

▲ 필리핀지방회는 시내에서 한 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카부이난에서 구호물자를 전달했다. 아직도 시내를 제외하고는 구호품을 충분히 받지 못했다. 2000여 명의 주민들이 공터를 가득 메웠다. 몇몇 현지인들이 자발적으로 배분을 도왔다.ⓒ뉴스앤조이 구권효

카부이난 주민 2000여 명에게 '끝까지' 구호 물품 전달

감리회는 오후 세 시가 넘어서야 마을 공터에서 구호물자를 배분하기 시작했다. 공터는 2000여 명의 주민들로 가득 찼다. 주민들은 줄을 서서 차례로 물품을 받아 갔다. 몇몇 현지인들이 자발적으로 쌀과 라면을 옮기고 빈 상자를 치웠다. 미리 적어 놓은 명단을 확인하고 물품을 지급하면서 정신없이 시간이 지나갔다.

갑자기 소나기가 세차게 쏟아져 물품 배분이 잠시 중단됐다. 듬성듬성 뚫린 공터 지붕 사이로 비가 들어왔다. 한쪽에 세워 둔 대형 트럭 쪽에서 아이들의 요란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이들은 지방회 사람들이 불어 주는 풍선을 튕기며 빗속에서 한껏 뛰어놀고 있었다. 어른들은 그런 아이들을 바라보며 함께 웃었다. 비가 아이들의 옷을 씻어 내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사람들의 상처를 씻어 내는 듯했다.

▲ 소나기가 내려 배분이 잠시 중단된 사이, 아이들은 감리회 사람들이 불어 주는 풍선을 가지고 재밌게 놀았다. 구경하는 사람들도 함박웃음을 지었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오후 6시 해가 지자 주위는 금세 깜깜해졌다. 감리회는 랜턴으로 불을 밝히며 구호 활동을 계속했다. 세부에서 출발한 버스가 끝내 도착하지 않아 500명의 주민들에게 번호표를 나눠 주고 다음 날 다시 오겠다고 약속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 덜컹거리는 지프니 안에서 모두 고개를 떨구며 쪽잠을 잤다. 다음 날 이른 아침 몇 사람이 카부이난으로 가 배분을 마쳤다.

17일 오후에는 타클로반 공항 근처 해피 홈 타운에 있는 타클로반교회(김영환 목사) 주변 주민 250명에게 쌀과 라면, 우유를 지급했다. 이날도 역시 남녀노소, 지위에 관계없이 모두 땀을 흘렸다.

▲ 필리핀지방회의 구호는 해가 지기까지 계속됐다. 세부에서 쌀이 도착하지 않아 나머지 500명에게는 번호표를 주고 다음 날 이른 아침 배분을 완료했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김영환 목사, "타클로반 사람들은 '선한 사마리아인'"

▲ 김영환 목사는 재해를 겪고 도망가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선한 사마리아인 같은 현지인들을 만나 마음을 돌렸다고 고백했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필리핀지방회는 17일 오전 타클로반교회 개척 설립 예배를 드렸다. 해피 홈 타운 안에 있는 허름한 건물의 2층, 10평 남짓한 공간에서 김영환 목사는 교회를 시작했다.

김 목사는 개척 예배에서 그동안의 소회를 털어놨다. 그는 올해 초 사명을 품고 타클로반에 들어와 개척을 준비했다. 하지만 11월 초 태풍이 지나간 후 그는 도망을 생각했다고 솔직하게 고백했다. 작은 아들이 부상을 당했고 아내와 큰 아들의 심신이 많이 약해진 상태라고 했다.

그의 마음을 돌린 건 현지인들이었다. 태풍과 쓰나미로 모든 살림이 부서지고 당장 먹을 것을 고민하고 있을 때, 같은 건물에 사는 한 필리핀 사람이 그에게 음식을 대접했다. 한 현지인 목사는 김 목사에게 군항공기가 뜨고 있다며 빨리 여기를 벗어나 심신을 회복하라고 했다. 세부에서 만난 한 가정은 무일푼으로 타클로반을 벗어난 김 목사에게 현금 5000페소(약 11만 8700원)를 쥐어 줬다.

김 목사는 선한 사마리아인을 만난 것 같았다고 말했다. 도움을 준 현지인들과 포옹하며 꼭 타클로반에서 다시 만나자고 약속했다. 이럴 때일수록 타클로반에 영적 재건이 필요하다는 그들의 요청에 눈 감을 수 없었던 김 목사는 약속을 지켰다. 

▲ 감리회는 17일 오전 공항 근처 해피 홈 타운에 있는 한 이층집에서 타클로반교회 설립 예배를 드렸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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