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 쉬운 성서해석학' 연속 강좌를 매주 금요일 8주간 연재합니다. 안진섭 목사는 오랫동안 성서학을 가르쳐 온 학자이자 현직 목회자입니다. 강의의 수준은 신학교의 해석학보다는 조금 더 쉬우면서 현장 목회자나 성경 연구자들에게 실제적인 도움이 될 수 있는 정도의 것이라고 안 목사는 밝혔습니다. 설교하고 성경을 연구하는 분들께 많은 도움 되길 바랍니다. -편집자 주

필자가 2강에서 소개했던 성경 해석의 단계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본문이 속한 책의 개론 공부하기
둘째, 본문 관련 역사적 배경 조사하기
셋째, 본문 문맥 살피기
넷째, 본문 구조 분석하기
다섯째, 본문 주요 단어 의미 파악하기
여섯째, 종합적으로 본문의 핵심 메시지 찾아내기

이제 순서에 따라 본문의 문맥을 살피는 것이 본문 해석에서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겠습니다. 만약 누군가 제게 성서 해석에서 제일 중요한 요소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저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문맥'이라고 말씀드릴 것입니다. 그 정도로 문맥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성서 해석에서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입니다. 제가 보기에 한국교회 설교자들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문맥과 관계없이 본문을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문맥과 관계없이 본문을 해석하면 성서를 오해하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집니다. 특히 책별 강해 설교가 아닌 주제별 설교나 제목 설교를 하는 분들은 문맥을 떠나서 본문을 해석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합니다.

1. 마가복음 4:35~41

35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36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37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38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39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40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41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개역개정)

이 사건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가를 조사하기 전에 성서 해석자가 먼저 할 일은 이 말씀의 문맥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복음서를 해석하는 사람들이 종종 저지르는 실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각 사건을 독립적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물론 복음서에 나온 사건들은 각각 독립적인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전에 복음서는 전체가 한 책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복음서는 여러 사건들을 단순하게 나열한 것이 아닙니다.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전할 목적으로 예수님의 말씀과 예수님께서 행하신 사건들을 한 권의 책으로 엮어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서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복음서 전체가 한 권의 책이라는 관점으로 읽어야 합니다. 실제로 처음 복음서를 받은 1세기 독자들은 전체를 한 자리에서 읽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오늘 우리는 복음서 전체를 한 자리에서 설교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성서 시대와 우리 시대 사이에 존재하는 언어적, 문화적, 역사적 간격 때문입니다. 그런 간격 때문에 오늘 우리는 본문에 관한 해설을 자세히 들어야만 말씀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 현실 때문에 오늘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복음서에 나오는 한 사건을 설교 본문으로 삼아 상세한 해설을 곁들여 설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서를 가지고 설교하는 사람은 복음서 전체의 문맥에 따라 본문을 해석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저자의 의도를 놓치지 않고 설교할 수 있습니다.

이제 마가복음 4:35~41의 문맥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말씀의 바로 앞에는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비유들이 나옵니다. 마가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소개하는 책입니다(막 1:1). 그런 목적에 따라 마가는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신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에게 소개합니다. 그런데 이런 비유의 말씀만 보면 예수님을 한 사람의 랍비 정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단지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친 훌륭한 율법 선생 정도가 아닙니다.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막 1:1). 우리 예수님은 자연 만물을 다스리는 신적 권능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래서 비유를 가르친 말씀 바로 뒤에 풍랑을 잔잔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모습이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뛰어난 율법 선생을 넘어 자연을 통제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와 같이 본문의 문맥만 잘 살펴도 해석자는 마가복음 전체에서 이 본문이 어떤 기능을 하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습니다.

2. 마가복음 7:24~30

24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방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25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에 엎드리니 26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27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28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29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30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이 말씀은 흔히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말씀의 본 내용을 연구하기 전에 해석자는 먼저 앞뒤 문맥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 사건의 앞에는(7:1~23) 정결과 부정의 주제에 관하여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가르치는 말씀이 나옵니다. 바리새인들은 장로들의 전통에 근거하여 정결과 부정을 판단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고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알고 있던 전통적인 정결과 부정의 개념을 뒤집으신 것입니다. 그런 논쟁 후에 바로 이어서 수로보니게 여인의 사건이 나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유대인들이 부정하다고 생각했던 이방 여인입니다. 게다가 그녀의 딸은 귀신 들린 상태입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딸을 고쳐 주심으로 그녀와 그녀의 딸을 정결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더 이상 신분이나 질병에 따라 정결과 부정이 결정될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또한 이 사건의 바로 다음에 나오는 사건을 살펴보십시오. 이 사건의 바로 뒤에도 계속 같은 주제로 연결되는 사건이 나옵니다. 이 사건의 바로 뒤에는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고치시는 사건(7:31~37)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치유가 일어난 지역이 이방인 지역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방 지역과 이방인들을 모두 부정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부정하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 이방 지역에서 연속적으로 치유를 행하십니다. 이는 곧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정결과 부정의 개념이 잘못된 것임을 일깨워 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두 사건(수로보니게 여자의 믿음과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의 치유)은 정결과 부정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7:14~23)의 실례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본문의 단어와 구문 등을 살피기 전에 해석자는 먼저 이와 같이 문맥을 살펴서 본문의 중심 주제를 파악해야 합니다. 상세한 해석은 그 다음 단계에서 할 일입니다.

3. 누가복음 1:67~80

67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하여 이르되 68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69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70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71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일이라 72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73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라 74우리가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받고 75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76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 77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78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79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80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누가복음 1:67~80은 흔히 '사가랴의 찬가'라고 부르는 찬송시입니다. 이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문맥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찬송시의 바로 앞에는 침(세)례요한의 출생 기사가 나옵니다. 침(세)례요한의 출생 기사가 나온 직후에 이 찬송시가 나오는 것을 볼 때, 이 시는 사가랴가 아들을 얻은 후 기뻐하면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좀 더 넓은 의미의 문맥을 살펴보겠습니다. 침(세)례요한의 출생 기사 앞에는 메시아를 잉태한 마리아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송시가 나옵니다. 또한 본문의 바로 다음에는 예수 탄생 기사가 나옵니다. 침(세)례요한의 탄생 기사와 사가랴의 찬송시의 앞뒤에 예수 탄생에 관한 기사가 나온다는 것은 침(세)례요한의 탄생과 예수님의 탄생이 깊은 관계가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문맥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본문을 살펴보면 사가랴의 찬송시가 단순히 아들을 얻은 것을 기뻐하는 찬송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찬송시는 메시아의 길을 예비할 선지자의 탄생을 통하여 메시아가 오셔서 자기 백성을 구원할 것을 내다보며 찬송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의 해석자는 단지 한 가정의 자녀 출생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구원이라는 관점으로 본문을 해석해야 합니다. 문맥을 통하여 본문의 메시지를 모두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문맥은 본문의 의도를 어느 정도 이해하여 해석자가 엉뚱한 방향으로 본문을 해석하지 않도록 막아 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 찬송시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파악하려면 해석의 전 과정을 충실하게 거쳐야 합니다.

4. 마태복음 12:30과 마가복음 9:40

먼저 다음 두 구절을 비교해 보십시오.

[마 12:30]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막 9: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이 두 구절만 보면 예수님께서 완전히 서로 반대되는 말씀을 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마태복음 12:30에서 예수님은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마가복음 9:40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2:30에서 예수님은 매우 배타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마가복음 9:40에서는 대단히 포용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언뜻 보면 상호 모순되는 말씀처럼 보입니다. 이렇게 서로 모순되는 말씀이 나올 때는 두 말씀이 위치한 문맥을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1) 마태복음 12:24~30

24바리새인들은 듣고 이르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 25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26만일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어떻게 그의 나라가 서겠느냐 27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되리라 28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29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강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30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2) 마가복음 9:33~40

33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34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35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36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37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38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39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40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저 마태복음의 문맥은 예수님과 사탄의 영적 전쟁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보고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방하였습니다. 그 비방에 대하여 예수님은 분명한 논리로 반박하셨습니다. 만약 누군가 귀신의 왕의 힘으로 귀신을 쫓아낸다면 그것은 결국 자기들끼리 분쟁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고 있다고 밝히셨습니다. 마 12:30은 바로 이런 영적 전쟁에 관한 문맥에서 나온 말씀입니다. 사탄과 벌이는 영적 전쟁터에서는 중립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함께하지 않는 자는 예수님을 반대하는 자입니다.

이제 마가복음의 문맥을 살펴보겠습니다. 막 9:38~39만 보면 이 말씀도 역시 영적 전쟁에 관한 문맥에서 나온 말씀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앞에 있는 33~37절을 보면 이 말씀이 어떤 문맥에서 나왔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섬기는 제자도에 관한 문맥에서 나온 것입니다. 서로 누가 크냐고 다투는 제자들을 보고 예수님은 섬기는 제자도를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끼리 서로 섬기려면 누가 예수님의 제자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런 문맥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40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끼리 서로 포용할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기독교 공동체 내에서는 서로 포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탄과의 영적 전쟁에서는 절대로 포용할 수 없습니다. 문맥에 따라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한 구절만 보면 서로 완전히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문맥 속에서 말씀을 연구하면 각 말씀은 제각기 고유한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 해석자는 언제나 문맥 속에서 성경을 해석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5. 고린도전서 13장

1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4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8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9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11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2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3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개역개정)

이 단락의 앞뒤에는 은사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12장은 여러 다양한 은사를 다루고, 14장은 그 중에서 예언과 방언을 주로 비교하여 다룹니다. 그런데 그 둘의 사이에 위치한 13장은 '사랑'을 주로 다룹니다. 그렇다면 이런 문맥 속에서 이 단락이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이겠습니까? 바울은 은사를 설명하다가 그 은사를 사용하는 내적 동기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는 은사가 풍성한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늘 시끄러웠습니다. 자신이 선호하는 지도자를 따라 파벌을 형성하고 있었고, 은사의 문제로 시기하며 질투하고 있었습니다. 왜 이런 문제가 발생하고 있었을까요? 그토록 풍성한 은사를 받은 성도들이 왜 이렇게 많은 갈등을 일으키고 있었을까요? 그 이유는 은사를 사용하는 동기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은사를 자기 과시용으로 사용하였습니다. 그 결과 교회가 늘 시끄러웠습니다. 은사를 사용하는 내적 동기는 언제나 사랑이어야 합니다. 형제와 자매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은사를 사용하면 그 은사는 교회를 살리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랑이 없이 자기 과시용으로 은사를 사용하면 교회는 시끄러워집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랑으로 은사를 사용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통하여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은사와 열매의 균형'입니다. 12장과 14장에서 다루는 방언이나 예언 등이 은사라면 13장에서 다루는 사랑은 열매입니다. 갈라디아서 5:22~23을 기억하십시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사랑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가운데 제일 처음에 나오는 대표적인 열매입니다. 성령의 열매가 풍성한 사람이 성령의 은사를 사용하면 그 은사는 공동체를 유익하게 합니다. 바울은 지금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성령의 열매와 성령의 은사의 균형을 잘 이루라고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성령충만한 사람은 은사와 열매의 균형을 이룬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6. 에베소서 1:16~23

16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17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19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20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21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22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23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위에 인용된 말씀 가운데 22~23절을 연구할 때 그 앞에 나오는 문맥을 살피는 것이 얼마나 유용한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선 22~23절의 내용은 예수님을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세우셨고, 교회는 그의 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이시고, 교회는 그의 몸이라는 비유는 바울의 교회론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에 담긴 핵심적인 의미가 무엇일까요? 단순히 이 비유만 생각하면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맥을 살펴보면 의미가 매우 분명해집니다.

먼저 16~19절은 바울의 기도입니다. 그 기도의 마지막 구절은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교회에게 주신 능력이 얼마나 큰 것인지 너희가 알기를 원한다고 기도합니다. 그 다음에 20절에서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셨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에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에 관한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음을 정복한 능력을 드러낸 사건이고, 그리스도의 승천은 이 세상에 대한 통치권을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일으켜 하나님의 오른 편에 앉히심으로 만물의 통치자로 세우셨습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이 바로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시고 교회는 그의 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가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은 당신의 능력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교회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므로 그리스도의 능력은 곧 교회의 능력이 됩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붙어 있는 한, 교회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이 그 능력의 지극히 크심을 알기를 기도했고(19절), 죽음을 정복한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과 이 세상에 대한 통치권을 설명한 것입니다(20절). 이제 교회는 바로 그 능력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붙어 있기만 하면 교회는 그의 강력한 능력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고, 교회는 그의 몸이라는 비유를 통해 전하고자 했던 바울의 메시지입니다. 문맥을 잘 살피는 것은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특히 비유는 그 비유가 나오게 된 문맥을 잘 살펴야만 그 비유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바르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7. 에베소서 5:21~6:9

5:21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22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23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24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25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26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27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28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29누구든지 언제나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함과 같이 하나니 30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라 31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32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33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 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 6:1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2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3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4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5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6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7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8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 9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5:21)는 대전제 아래에서 아내와 남편의 관계(5:22~33), 자녀와 부모의 관계(6:1~4), 종과 상전의 관계(6:5~9)를 다룹니다. 각 관계에 대한 세부 내용을 살피기에 앞서 성경 해석자는 먼저 각 관계를 시작하기 전에 제시된 대전제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 대전제는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피차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해석자는 그 구절(5:21)을 세 종류의 관계에 대한 대전제가 아니고 바로 앞에 있는 예배에 관한 말씀의 결론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말 개역개정판은 5:21을 바로 앞에 있는 구절들에 묶어서 단락을 구분하였습니다. 그러나 헬라어 성경은 단락 구분을 다르게 하였습니다. UBS 4판 개정판 헬라어 성경은 5:21을 그 다음 단락을 시작하는 구절로 구분하였습니다. 본문에 대한 단락 구분은 이와 같이 해석자마다 달리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단락을 구분하든 중요한 것은 5:21이 세 종류의 관계를 시작하는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5:21은 세 종류의 관계와 어떤 방식으로든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필자는 5:21이 세 종류의 관계에 대한 대전제로서 주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세 종류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상호 복종의 원리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당시는 남편이 아내보다, 부모가 자녀보다, 주인이 종보다 더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을 때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아내와 자녀와 종에게만 무엇인가를 요구하고 있지 않습니다. 남편과 부모와 주인에게도 요구 사항이 있습니다. 남편에게는 아내를 사랑하라고 하였고, 부모에게는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하였으며, 주인에게는 종들을 위협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세부 내용을 살펴보아도 에베소서 5~6장에 나오는 세 종류의 관계는 상호 복종의 원리 아래 주어진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와같이 성경을 해석할 때 문맥만 잘 살펴보아도 본문을 곡해하는 일은 많이 줄일 수 있습니다.

8. 요한계시록 7장

1이 일 후에 내가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 2또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받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 3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해하지 말라 하더라 4내가 인침을 받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침을 받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 5유다 지파 중에 인침을 받은 자가 일만 이천이요 르우벤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갓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6아셀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납달리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므낫세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7시므온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레위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잇사갈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8스불론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요셉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베냐민 지파 중에 인침을 받은 자가 일만 이천이라 9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10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11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12이르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더라 13장로 중 하나가 응답하여 나에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 14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15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16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17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이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요한계시록 전체의 구조를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의 본론 부분에는 세 종류의 심판, 곧 인 심판, 나팔 심판, 대접 심판이 나옵니다. 세 종류의 심판은 각각 일곱 차례씩 벌어집니다. 이 말씀은 그중에서 여섯 번째 인 심판과 일곱 번째 인 심판의 사이에 나옵니다. 왜 인 심판을 다루다가 중간에 갑자기 14만 4000과 셀 수 없는 무리를 다룰까요? 심판에 관한 내용을 계속 다루면 아마도 독자들은 두려운 마음을 가질 것입니다. 실제로 요한계시록을 읽으면 두렵다고 말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런 두려움은 자연스럽게 한 가지 의문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저토록 무서운 심판이 벌어진다면 그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래서 요한계시록 6장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납니다. "누가 능히 서리요?" 그토록 무서운 심판이 벌어진다면 과연 누가 그 앞에 설 수 있겠느냐는 질문입니다. 요한계시록 7장은 그런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입니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 7장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있을까요? 요한계시록 7장에는 14만 4000과 셀 수 없는 무리, 두 그룹이 나옵니다. 어떤 이들은 14만 4000과 셀 수 없는 무리를 서로 다른 그룹으로 오해합니다. 그러나 14만 4000과 셀 수 없는 무리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 두 그룹은 같은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14만 4000은 민족적인 배경에서 지상의 교회를 표현한 것이고, 셀 수 없는 무리는 우주적인 배경에서 하늘의 교회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결국 14만 4000과 셀 수 없는 무리는 같은 교회를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14만 4000이 곧 셀 수 없는 무리입니다. 이들은 결국 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받은 자, 곧 구원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7장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는 이런 무서운 심판 가운데서도 그분의 백성들을 철저하게 보호하고 지키신다는 사실입니다.(안진섭 <누가 이 세상의 주인인가> 66~67쪽)

안진섭 / 침례신학대학교 학부(Th.B.)와 신학대학원(M.Div.)을 졸업한 후 미국 루이지애나 주에 위치한 New Orleans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약성서 사본학으로 박사 학위(Ph.D.)를 받았다. 유학 중에는 뉴올리언스침례신학대학원 강사와 신약본문연구소 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귀국 후에는 오랫동안 침례신학대학교 학부와 신학대학원에서 헬라어와 성서강해 과목을 가르쳐 왔다. 새누리교회 대표목사를 거쳐 현재는 새누리2교회 대표목사로서 바른 해석학에 근거한 복음적인 성경 강해로 한국교회 강단을 성경적으로 회복하는 일에 헌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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