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가 그들의 편에 설 것인가> / 곽은경, 백창화 지음 / 남해의봄날 펴냄 / 288면 / 1만 5000원

어스름한 그늘, 막다른 골목 끝에 한 사람이 서 있다. 사진 속 사람은 마치 궁지에 몰린 누군가를 지켜 주겠다는 몸짓으로 서 있다. 하늘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는 모습은 어두운 한 켠에서도 희망을 보고 싶다는 의지로도 보인다. 책의 표지를 보고 묘사한 것이지만, 곽은경, 그녀에 대한 표현이기도 하다. 국제 NGO 활동가로 20년 넘게 세계를 다니며, 가장 어두운 현실의 현장에서 약자들의 편에 서고자 했던 그녀의 삶을, 작지만 요즘 가장 주목받는 출판사 중 하나인 '남해의봄날'이 책 한 권에 성실히 잘 담아 줬다.

이 책에는 또 한 명의 저자가 있다. 백창화는 곽은경의 오랜 벗이다. 20대의 첫 직장에서 상사로 곽은경을 처음 만났다는 백창화는 지금까지 그 우정을 이어 오면서 친구의 가는 길을 기꺼이 응원해 주었다. 1인칭 시점으로만 가득한 자서전은 자칫 과잉이 될 수 있는데, 친구이자 작가인 백창화의 사랑과 존경을 담은 글은 곽은경을 더 잘 이해하게 해 준다. 두 명의 스토리텔링은 책을 만드는 이들이 독자를 향해 품은 또 다른 애정의 방식이기도 하다. 이 책의 큰 장점이다.

<누가 그들의 편에 설 것인가>는 크게 두 가지를 보여 주고자 한다. 곽은경 자신의 삶과 곽은경이 보아 온 세상에 대한 이야기다. 격동의 80년대에 대학 생활을 하면서 그녀는 대학 강의실, 도서관보다 거리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았다. 가톨릭학생회에서 열심히 활동했던 그녀는 대학을 졸업한 지 4년이나 지난 87년 어느 날, 프랑스 파리에 있는 국제가톨릭학생운동(IMCS)에서 일해 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는다. 주변의 수많은 반대는 당연했다. 프랑스어는 알파벳도 모르는데 그녀는 결국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녀의 국제 NGO 활동은 그렇게 급작스럽고 무모하게 시작되었다.

곽은경이 25년간의 국제 활동 속에서 다녔던 나라들은 목차로만 봐도 깊은 무게감이 느껴진다. 그녀는 많은 나라 중에 인도의 카스트제도 아래 고통받고 있는 불가촉천민 '달리트'에 대한 이야기를 가장 먼저 소개한다. 1999년에 처음 인도를 방문한 이후로 15년째 초조한 마음으로 달리트 문제를 주목하고 있다고 한다. 21세기의 지구상에 가장 불행한 사람들로 달리트를 보게 된 것 같다.

그녀가 만난 달리트 여성들의 이야기를 읽으면 머리와 가슴이 먹먹해진다. 자신들과 처음으로 한 자리에서 식사를 해 준 한국인 인권 운동가에게 한 달리트 여성이 마음을 열고 꺼낸 질문은 '한국이나 프랑스에서도 여성들이 생리를 할 때 격리 수용하나요?'였다. 카스트의 '정'과 '부정' 개념에서 비롯된 고약한 풍습 때문인데, 여성의 생리가 부정한 것으로 취급당하면서 생리 중인 여성들은 집에서 쫓겨나서 며칠간을 밖에서 잠을 청해야 하는 것이었다.

"나는 한국이나 프랑스에서는 오히려 생리를 할 때면 쉬라고 생리휴가를 주는 등 주변에서 배려해 준다고 했더니 그들이 오히려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리곤 곧 밝은 얼굴이 되었다. 여성들이 생리를 하는 게 부정한 일이 아닐뿐더러 오히려 배려받아야 하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이 여성들은 강당 문을 열고 나가면 앞으로 생리 때도 집에 머물겠다는 시위를 시작할 것이다. 생리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죄인처럼 고개 숙이지 않으며 당당하게 잠 잘 공간을 요구할 것이다. 그들이 찾아야 할 권리를 하나 더 마음에 새기게 된 것이다. 나는 그 어린 여성들이 처연하고 또 아파서 가슴이 저려 왔다. 이것이 인도에 살고 있는 수천만 달리트 여성의 삶이고 더하지도 빼지도 않은 그들의 현실인데 이들을 위해 과연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내 안에서 의문은 커져만 갔다." (본서 46쪽)

결국 달리트들이 인권을 되찾기 위해서는 제도가 바뀌어야 하고, 이를 위해선 결국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개혁적인 지도자를 배출해 내야 하는 것이 시급한데, 인도 전체 달리트의 인구를 다 합쳐도 25% 정도 뿐이라는 것이 통탄스럽다. 그래도 이들을 돕기 위한 우정과 사랑의 연대는 중단되면 안 된다. 그렇게 현장에서의 생생하고 아픈 경험들은 고스란히 곽은경의 활동 동력이 되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학살의 현장 한가운데서, 시에라리온에서의 만난 극도의 빈곤, 문맹 국가의 뼈아픈 한계에 신음하는 마다가스카르 등 세계의 고통 속에서도 비추는 가느다란 희망의 한 줄기 빛 때문에 그녀는 몸을 사리지 않고 일했다. 엄청난 출장과 업무량을 몸이 이기지 못해 허리 디스크로 몸져눕기까지 하면서도 말이다.

국제 인권 운동가로 살게 되면서 늘 확신만 가지고 살았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는 자신의 흔들림을 담담히 고백한다.

"1987년 10월, 25년이 지난 지금 다시 되돌아봐도 내게 확신은 없었고 질문에 대한 답도 마련되지 않았다. 신념도 확신도 없이 선택했던 파리행. 동료들에게, 또한 나 자신에게 '바로 이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답을 갖고 있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막연하게 내 맘속에선 지금 내 안의 '벽'을 깨지 않으면 다음 세계로 나아갈 수 없으리라는 두려움 같은 것이 있었다. 지금의 나의 현실이, 세계에 대한 나의 인식이, 불평등하고 부조리한 세계에 대한 나의 비판이 그저 말장난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문을 열고 바깥으로 한걸음 걸어 나가야 할 것 같았다. 불도 없이 그저 깜깜한 어둠 속일지라도 그 한걸음을 내디딜 때,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그 어떤 것일지라도 주저 없이 나아가야 한다는 마음속의 강한 외침이 나를 이끌었다." (본서 90쪽)

기독인들, 우리끼리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이따금 소명과 비전에 관해서 이야기 나눌 때가 있다. 그럴 때 종종 듣는 소리가 바로 '하나님이 부르셨다'라는 놀라운 신적 고백이다. 그런데 이런 고백을 하기까지 무수한 검증과 확인 과정을 거친다. 자꾸 외부로부터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힐 만한 증거를 확인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조그만 징조(?) 하나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며 긴가민가를 끊임없이 고민하는 과정을 우리는 소명으로 향하는 과정으로 쉽사리 포장한다. 모세도 하고, 기드온도 하니까 너도나도 따라 해 보지만, 사실 하나님의 보편적인 뜻이나 부르심은 그런 특별 절차를 꼭 밟는 것으로만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황량한 현실과 상황 한가운데로 내던져짐으로, 원래의 예상대로 진부하게 흘러갈 수도 있고, 전혀 뜻 밖으로 전개될 수도 있다.

곽은경의 청년 때, 인권 운동에 뛰어들기 직전의 심경을 접하며 나는 소명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우리는 신적 부르심의 외형적 얼개가 눈에 딱 들어왔을 때에야 하나님이 '비로소' 나를 부르셨다고 생각한다. 완벽한 착각이다. 하나님은 늘 우리를 부르시고 계신다. 우리의 닫혔던 양심과 마음이 아주 조금 '이제야' 열렸을 뿐이다. 곽은경은 그런 양심의 외침 자체를 자신의 소명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 양심에 반응하는 것에는 명백한 대가가 따른다. 결국, 이 대가를 감당하겠는가의 문제를 선택하는 것인데, 이것이 방향성의 사안인 것처럼 착각하거나 아니면, 숨기려 한다.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소명은 그런 것이 아닌 것 같다. 늘 심오하게만 다루길 원했던 소명에 정직해져야 한다.

국제 인권 운동가로서의 업적이나 내용과 더불어 그녀가 이 삶을 살게 되기까지의 소회를 주목해 보면 특히 청소년들과 청년들에게 큰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출판사가 이 책을 '행동하는 멘토' 시리즈의 첫 번째 책으로 세상에 내놓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곽은경도 처음부터 이만한 크기의 삶을 감내할 만한 그릇으로 출발한 게 아니라, 번민과 갈등, 고통 속에서 한걸음씩 멈추지 않고 걸어왔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현실과 꿈 사이에서 극심한 고민을 겪는 젊은 세대들과 어른들이 교회에서 함께 읽으며 소명에 대해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누면 더없이 좋을 것 같다. 꿈에 대한 이야기라면 뭐든지.

나 역시, 이 책을 통해 마음에 큰 홍역을 앓았다. 책을 다 읽고 더욱 두려워졌다. 하지만 그만큼 용기를 얻었다. 기한을 계속 넘겨오며 쓰지 못했던 이 서평을 이제 마무리하는 것이 그 증거다. 부딪혀 보기로 했다면, 부딪혀 보자는 것이 나의 결론이다. 두렵고 떨려도 내가 정했다면 더 이상 고민만 하고 있지 말아야 할 것을. 왜 그리 돌아서 왔는가, 나는.

"사십 대라는 시기는 어찌 보면 인생에서 가장 황금기가 아닐까. 누구나 출세하고 싶고, 이름을 얻고 싶어지는 나이. 그것을 얻기 위해 많은 이들이 원칙을 포기한다. 자신의 꿈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이도 많지 않고 혹여 질문을 했더라도 조건들 때문에 흔들리게 마련이다. 그러나 한번 꿈을 선택하고 나면 그 다음엔 자신이 생긴다. 내가 한 선택에 대한 자신감. 내가 한 선택에 대해 책임지는 삶. 많은 사람이 그런 도전이 없는, 아니 무서워 쉽사리 도전 자체에 대해 이미 고려조차 하지 않는 선택을 하며 자기 일상과 타협하고 사는 것을 본다. 나는 바닥을 뛰며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가슴 벅차게 사는 인생을 택한 내 자신이 늘 자랑스럽고 고맙다." (본서 2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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