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 쉬운 성서해석학' 연속 강좌를 매주 금요일 8주간 연재합니다. 안진섭 목사는 오랫동안 성서학을 가르쳐 온 학자이자 현직 목회자입니다. 강의의 수준은 신학교의 해석학보다는 조금 더 쉬우면서 현장 목회자나 성경 연구자들에게 실제적인 도움이 될 수 있는 정도의 것이라고 안 목사는 밝혔습니다. 설교하고 성경을 연구하는 분들께 많은 도움 되길 바랍니다. -편집자 주

필자가 2강에서 소개했던 성경 해석의 단계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본문이 속한 책의 개론 공부하기
둘째, 본문 관련 역사적 배경 조사하기
셋째, 본문 문맥 살피기
넷째, 본문 구조 분석하기
다섯째, 본문 주요 단어 의미 파악하기
여섯째, 종합적으로 본문의 핵심 메시지 찾아내기

4강에서는 그중에 두 번째 단계인 본문과 관련된 배경 지식이 본문 해석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본문과 관련된 배경 지식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성서 배경에 관한 책이나 역사적 배경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는 주석, 혹은 성서 배경 사전을 참고하면 됩니다.

1. 역대하 5:2~14

2이에 솔로몬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윗 성 곧 시온에서부터 메어 올리고자 하여 이스라엘 장로들과 모든 지파의 우두머리 곧 이스라엘 자손의 족장들을 다 예루살렘으로 소집하니 3일곱째 달 절기에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다 왕에게로 모이고 4이스라엘 장로들이 이르매 레위 사람들이 궤를 메니라 5궤와 회막과 장막 안에 모든 거룩한 기구를 메고 올라가되 레위인 제사장들이 그것들을 메고 올라가매 6솔로몬 왕과 그 앞에 모인 모든 이스라엘 회중이 궤 앞에서 양과 소로 제사를 드렸으니 그 수가 많아 기록할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었더라 7제사장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그 처소로 메어 들였으니 곧 본전 지성소 그룹들의 날개 아래라 8그룹들이 궤 처소 위에서 날개를 펴서 궤와 그 채를 덮었는데 9그 채가 길어서 궤에서 나오므로 그 끝이 본전 앞에서 보이나 밖에서는 보이지 아니하며 그 궤가 오늘까지 그 곳에 있으며 10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것도 없으니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나온 후 여호와께서 그들과 언약을 세우실 때에 모세가 호렙에서 그 안에 넣은 것이더라 11이때에는 제사장들이 그 반열대로 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정결하게 하고 성소에 있다가 나오매 12노래하는 레위 사람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과 그의 아들들과 형제들이 다 세마포를 입고 제단 동쪽에 서서 제금과 비파와 수금을 잡고 또 나팔 부는 제사장 백이십 명이 함께 서 있다가 13나팔 부는 자와 노래하는 자들이 일제히 소리를 내어 여호와를 찬송하며 감사하는데 나팔 불고 제금 치고 모든 악기를 울리며 소리를 높여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되 선하시도다 그의 자비하심이 영원히 있도다 하매 그때에 여호와의 전에 구름이 가득한지라 14제사장들이 그 구름으로 말미암아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하나님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개역개정)

이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려면 먼저 역사적인 배경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씀의 역사적 배경은 두 가지로 나누어서 살펴야 합니다. 한 가지는 솔로몬의 성전 봉헌이라는 사건이 벌어진 시대의 역사적 배경이고, 다른 한 가지는 역대기를 기록할 때의 역사적 배경입니다. 역대기는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 기록되었습니다. 아마도 포로에서 돌아온 어떤 사람이 기록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가지 역사적 배경을 모두 고려하여 이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먼저 솔로몬이 실제로 이 성전을 봉헌할 때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말씀은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을 완공하고 성전 봉헌식을 하기 위해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를 성전으로 옮겨 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솔로몬은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모든 지파의 족장들을 다 예루살렘으로 소집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레위 사람들이 언약궤를 메어 옮겼고, 성소에 도착한 후에는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지성소 안으로 옮겼습니다. 언약궤를 성전에 안치한 후, 나팔 부는 자와 노래하는 자들이 일제히 소리를 내어 나팔 불고 제금 치고 모든 악기를 울리며 소리를 높여 여호와를 찬송하여 감사하였습니다. "선하시도다 그의 자비하심이 영원히 있도다." 그때 여호와의 전에 구름이 가득하였습니다. 그 구름은 여호와의 영광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성전을 봉헌할 때 구름으로 성전을 채우신 것은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성전을 받으셨다는 표시입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할 때는 이스라엘이 최고의 절정기를 누릴 때입니다. 부왕 다윗의 탁월한 통치로 인하여 솔로몬은 튼튼한 정치적 기반 위에서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솔로몬의 통치 이후에 나라는 더욱 부강해졌고, 이제 드디어 숙원 사업이었던 성전도 완공하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백성들은 선하시고 자비하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아마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로 다 형언할 수 없는 감격 가운데 이 찬송을 불렀을 것입니다.

이제 역대기가 기록된 시점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앞에서 간단히 말씀드린 것처럼 역대기는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때는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이후입니다. 바벨론의 침략으로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었고, 수많은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이제 백성들은 포로지에서 돌아와 예루살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 포로지에서 돌아와 폐허가 된 예루살렘을 바라보는 역대기 기자의 심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폐허가 된 예루살렘에서, 무너진 성전 터 위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이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선하시도다. 그의 자비하심이 영원히 있도다." 나라가 융성할 때 이런 찬송을 부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나라가 멸망한 때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을 노래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생각한다면 이 말씀을 통해 역대기 기자가 우리에게 도전하는 메시지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라를 빼앗기고 성전은 무너진 이 상황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은 선하시고 자비하다고 찬송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교회가 부흥하고, 우리의 삶이 형통할 때만이 아니라 처절하게 실패하고 넘어진 절망의 상황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을 찬송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메시지를 생각한다면 오늘날 목회자들이 이 말씀을 예배당 건축을 위한 설교 본문으로 사용하는 것은 역대기 기자가 의도한 것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것입니다. 실은 이 말씀은 고난 속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송하라고 당부하는 역대기 기자의 도전인 것입니다.

2. 누가복음 1:5~25

5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한 사람이 있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의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 6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7엘리사벳이 잉태를 못하므로 그들에게 자식이 없고 두 사람의 나이가 많더라 8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의 직무를 행할새 9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전에 들어가 분향하고 10모든 백성은 그 분향하는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더니 11주의 사자가 그에게 나타나 향단 우편에 선지라 12사가랴가 보고 놀라며 무서워하니 13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14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태어남을 기뻐하리니 15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16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그들의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라 17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 18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이다 19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받았노라 20보라 이 일이 되는 날까지 네가 말 못하는 자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네가 내 말을 믿지 아니함이거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어지리라 하더라 21백성들이 사가랴를 기다리며 그가 성전 안에서 지체함을 이상히 여기더라 22그가 나와서 그들에게 말을 못하니 백성들이 그가 성전 안에서 환상을 본 줄 알았더라 그가 몸짓으로 뜻을 표시하며 그냥 말 못하는 대로 있더니 23그 직무의 날이 다 되매 집으로 돌아가니라 24이 후에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잉태하고 다섯 달 동안 숨어 있으며 이르되 25주께서 나를 돌보시는 날에 사람들 앞에서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하더라(개역개정)

복음서의 역사적 배경은 두 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께서 사역하시던 시대의 역사적 배경이고, 두 번째는 복음서를 기록한 사도들이 사역하던 시대의 역사적 배경입니다. 해석자는 본문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어떤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될지 잘 판단해야 합니다. 때로는 두 가지 역사적 배경을 다 살펴보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이 본문을 바르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의 역사적 배경을 보다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려면 우선 신학교에서 공부했던 성서 배경에 관한 책을 다시 읽어서 성서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기본 지식을 잘 갖출 필요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신·구약개론이나 각 주석의 서론을 찾아서 역사적 배경을 공부하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기 전 유대 땅은 대단히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 종교적인 측면에서는 말라기 선지자의 예언이 끝난 후 더 이상 선지자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 말은 곧 하나님의 계시가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는 뜻입니다. 그 결과 유대인들은 영적인 암흑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 사이 근동 지역에서는 열강들이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다툼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런 강대국들의 속국이 되어 주권을 잃어버린 상황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때 이스라엘은 정치적으로 로마의 속국이었습니다. 종교적으로는 영적인 암흑기를 보내고 있었고, 정치적으로는 로마의 지배를 받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역사적 배경에서 본문에 나오는 사가랴를 살펴보십시오. 사가랴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흠이 없는 제사장이었지만 늙도록 자식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식이 없는 것을 하나님의 저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런 배경에서 생각한다면 사가랴는 지금 지극히 비참한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제사장이라는 존경받는 직책을 수행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자신을 계승할 자식이 없는 저주받은 인생이었습니다. 사가랴에게는 장래에 대한 아무런 소망이 없습니다. 자식이 없이 늙어가고 있는 사가랴의 소망 없는 모습은 나라를 잃고 하나님의 계시도 사라진 이스라엘의 모습을 함축적으로 보여 줍니다. 지금 누가는 사가랴의 모습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절망적인 운명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역사적 배경을 이해한 다음에는 그런 역사적 배경이 본문과 어떤 관계 가운데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런 역사적 배경을 이해한 상태에서 사가랴를 주목하여 보면 사가랴라는 한 개인의 절망적인 상황이 이스라엘이라는 한 국가의 암울한 운명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배경을 생각하고 본문을 연구하면 이런 사가랴의 집안에 아들이 태어난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가랴의 집안에 아이가 태어나면 영적인 암흑기도 곧 끝이 날 것입니다. 그 아들이 태어나 자라면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는 자가 될 것이고, 곧 이어 메시아가 등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본문은 영적 암흑기에 빠져 있던 이스라엘의 비참한 모습을 보여 주면서 동시에 암울한 역사를 향해 비추어지는 한 줄기 빛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와같이 본문의 역사적 배경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본문의 핵심 메시지를 파악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3. 누가복음 21:5~9

5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6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7그들이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그러면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런 일이 일어나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8이르시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며 때가 가까이 왔다 하겠으나 그들을 따르지 말라 9난리와 소요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하지 말라 이 일이 먼저 있어야 하되 끝은 곧 되지 아니하리라(개역개정)

본문은 성전 멸망에 관한 예수님의 예언적 선포의 말씀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AD 70년에 로마의 티투스 장군에 의해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복음서를 해석할 때는 예수님 시대의 역사적 배경과 함께 복음서가 기록된 사도들 시대의 역사적 배경도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 말씀을 하신 예수님의 시대는 성전이 아직 무너지기 이전이고, 이 말씀이 기록된 시점은 성전이 무너진 이후입니다. 유대인들은 성전 멸망이라는 전대미문의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한 직후에 이 복음서를 읽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은 성전 멸망이라는 역사적인 배경을 떠나서는 바르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있어도 예루살렘 성전만은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전쟁이 벌어졌을 때, 많은 유대인들이 성전으로 피했습니다. 성전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성전이라는 장소는 결코 안전한 곳이 아닙니다. 오히려 몰려 있다가 몰살당하기 쉬운 곳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전쟁이 났을 때 성전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성전은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것은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본문은 유대인들에게 크나 큰 충격을 안겨 주었던 바로 그 사건인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한번 이 복음서를 읽고 있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입장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루살렘 성전이 멸망했을 때,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크게 두 가지 차원에서 절망했습니다. 한 가지는 예루살렘 성전이 멸망했으므로 세상이 끝났다고 생각한 절망이었습니다. 성전을 절대시하던 사람들은 성전이 멸망한 것 자체를 세상이 멸망한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또 한 가지는 예루살렘 성전이 멸망했는데도 예수님이 재림하지 않는 상황에 대한 절망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는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예언을 역사의 종말에 대한 예언으로 오해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워낙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한 사고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무너질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세상의 종말을 상징하는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날이 오면 세상의 종말이 오고, 예수님께서 영광 중에 재림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무너졌는데도 예수님의 재림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성전의 멸망 자체도 충격적인 사건인데, 약속했던 재림이 이루어지지 않자 그들은 깊은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누가는 그들에게 예수님의 예언의 의미를 바르게 가르쳐 줄 필요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분명히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오니즘이라는 사상을 갖고 있었습니다. 말세가 되면 세상은 시온, 곧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재편될 것이라는 사상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중심에는 예루살렘 성전이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절대시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성전이 힘없이 이방인들의 손에 무너지는 것을 보고 이들은 큰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 역사적인 현실 앞에서 많은 유대인들은 절망했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인 유대인이 아닌 유대계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성전 멸망으로 인하여 절망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이 절망했던 것은 성전이 멸망했는데도 예수님이 재림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전 멸망과 재림이 동시에 벌어질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성전은 멸망했는데 재림은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절망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본문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 기초하여 읽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역사적 배경 아래서 이 말씀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예루살렘 성전을 소망의 대상으로 삼지 말고 다시 오실 예수님을 소망의 대상으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동시에 다시 오실 주님을 기억하고 기대하며 항상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4. 요한복음 8:12~20

12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13.바리새인들이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증언하니 네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도다 14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여도 내 증언이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거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15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아니하노라 16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17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언이 참되다 기록되었으니 18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느니라 19이에 그들이 묻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20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헌금함 앞에서 하셨으나 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개역개정)

이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유대인의 절기 가운데 하나인 초막절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유대인의 삼대 절기는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입니다. 그중에 초막절은 계절상 가을인 10월에 있었던 절기입니다. 초막절이 되면 유대인들은 야외에 텐트를 치고 축제를 즐겼습니다. 과거 자신들의 조상들이 40년간 광야에서 장막을 치고 살았던 때를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말씀은 바로 그 초막절 축제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 초막절의 마지막 날에 유대인들은 두 가지 의식을 벌였는데, 그중 한 가지가 '빛의 조명'입니다.

'빛의 조명'이란 이런 의식입니다. 당시 성전에 있는 여인의 뜰에는 거대한 촛대가 있었습니다. 그날 밤이 되면 관제의 축제를 벌이기 위해서 그 촛대에 불을 붙입니다. 그렇게 촛대에 불을 붙이는 것은 상징적으로 성전에서 타오르는 빛이 예루살렘을 환히 밝힌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실제로 그 빛이 예루살렘 전체를 밝힐 수는 없습니다. 말 그대로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의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그 자리에서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류모세 <열린다 성경 절기 이야기> 244쪽).

이 빛의 이미지는 구약적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광야생활을 할 때 하나님은 불기둥으로 자기 백성을 인도하셨습니다. 출 13:21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불기둥은 어두운 밤에 앞을 비추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불기둥이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한다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인도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시 27:1에서는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불기둥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빛이십니다. 바로 그 빛이신 하나님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셨습니다.

시편은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곧 빛이라고 말합니다. 시편 119:105에서 시인은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광야에서는 불기둥으로 자기 백성을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이제 가나안 땅에서는 말씀으로 자기 백성을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주셨습니다. 말씀의 빛으로 어두운 세상을 사는 자기 백성을 인도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런 배경을 근거로 예수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에는 빛과 어두움의 이원론적인 개념이 나타납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5)." 여기서 빛은 예수님을 가리키고 어둠은 사탄의 지배를 받는 세상을 가리킵니다. 빛이신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지만 악한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합니다. 빛과 어둠의 이원론적인 개념은 요 3:19~21에도 나타납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여기서도 역시 빛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빛이신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지만 악한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합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은 자신의 악한 행위가 드러날까 염려하여 빛이신 예수님께 오지 않습니다. 요 12:46에는 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빛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자기를 믿는 자들을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신 주님께서는 마 5:14에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왜 요한복음에서는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시고, 마태복음에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엄밀히 말하면 우리는 빛 자체가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빛 자체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모시고 그 빛을 반사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에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빛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두운 세상에 빛을 비추어 세상을 구원해야 합니다. 참 빛이신 예수님을 세상에 전파하여 세상 사람들을 구원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치열한 영적 전쟁을 치러야 합니다. 빛이신 예수님을 세상에 증거하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한 가지는 말로 선포하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행동으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산상수훈에서는 그 빛을 비추는 것을 착한 행실로 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치열한 영적 전쟁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장악한 어둠의 세력과 싸워야 합니다. 그런데 그 싸움은 총이나 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착한 행실로 어둠의 세력과 싸워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종교인들도 본래는 이런 영적 전쟁을 위하여 부름받은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방의 빛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사명을 바르게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성전의 촛대에 불을 밝히고 밤새 축제를 벌이기는 했지만 그 의식의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 성전의 촛대에 불을 붙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행위는 곧 그들이 세상 속에 들어가 그런 빛을 비추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두운 세상에 삶으로 빛을 비추지는 않고 단지 성전에 불을 밝히고 축제를 벌이기만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초막절에 벌어진 '빛의 조명'이라는 의식과, 의식에만 빠져 있던 당시 유대교의 모습을 알면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신 것의 의미를 보다 더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5. 요한계시록 3:14~22

14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15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17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18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21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2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개역개정)

이 말씀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에 관한 말씀 가운데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말씀입니다. 그중에서 15~16절 말씀은 자주 잘못 이해되는 말씀입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많은 성도들이 이 말씀에 나오는 "차든지 뜨겁든지 하라"는 말씀을 차가운 신앙을 갖든지 아니면 뜨거운 신앙을 가지라는 말씀으로 이해합니다. 그때 차가운 신앙은 지적인 신앙을 가리키고 뜨거운 신앙은 열정적인 신앙으로 해석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 말씀은 차가운 지적인 신앙을 갖든지 아니면 뜨거운 열정적인 신앙을 가지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과 관련된 배경 지식을 알면 이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됩니다. 필자의 요한계시록 강해 <누가 이 세상의 주인인가>에서 인용한 다음 설명을 보십시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저는 편의상 제 책을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뢰할 만한 주석이라면 어떤 주석이든지 이런 내용 정도는 대부분 담고 있습니다.

당시 라오디게아 주변에는 유명한 두 가지 물이 있었습니다. 히에라폴리스에는 뜨거운 온천수가 있었고, 골로새에는 시원한 물이 있었습니다. 히에라폴리스의 온천수는 치료효과가 있었고, 골로새의 시원한 물은 마시는 물로 유명하였습니다. 그러나 라오디게아의 물은 미지근하여 쓸모가 없었습니다. 무더운 여름에 상온에 방치한 미지근한 물을 마시면 토해 버리고 싶습니다. 이 말씀은 영적 상태를 물로 비유한 것입니다. 토해 버리고 싶다는 것은 인간의 위선과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거부반응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교회 성도들의 위선과 죄악이 너무 심하여 하나님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안진섭 <누가 이 세상의 주인인가> 35쪽)

위의 설명에 따르면 '차든지 뜨겁든지 하라'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책망은 차가운 성경 공부파가 되든지, 뜨거운 오순절파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라오디게아 성도들의 위선과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거부반응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경의 배경에 대한 바른 지식은 성경에 대한 결정적 오해를 방지해 줍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해석하는 자는 성경의 역사적, 문화적 배경에 대해 반드시 연구해야 합니다.

성경 본문에 대한 배경 지식을 연구하는 것은 본문을 바르게 해석하기 위한 큰 틀을 잡아 주는 역할을 합니다. 배경에 대한 기초 지식이 없이 본문을 묵상하면 본문의 의도와 전혀 다른 묵상을 오래 하다가 엉뚱한 해석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해석자들은 반드시 본문의 배경을 조사해야 합니다. 물론 어떤 본문은 굳이 배경을 조사할 필요가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역사적 배경이나 문화적 배경과 관계없이 일반적인 진리를 다루는 본문도 있습니다. 그러나 4강에서 다룬 본문들의 경우는 한결같이 배경에 대한 바른 지식을 요구하는 것들입니다. 최근에 IVP에서 출간된 <성경 배경 주석>, <성경 주석>, <성경 신학 사전> 등은 이런 정보를 얻는 데 크게 도움이 됩니다. 그 외에도 본문의 역사적 배경을 담고 있는 여러 주석들을 참고하면 됩니다.

안진섭 / 침례신학대학교 학부(Th.B.)와 신학대학원(M.Div.)을 졸업한 후 미국 루이지애나 주에 위치한 New Orleans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약성서 사본학으로 박사 학위(Ph.D.)를 받았다. 유학 중에는 뉴올리언스침례신학대학원 강사와 신약본문연구소 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귀국 후에는 오랫동안 침례신학대학교 학부와 신학대학원에서 헬라어와 성서강해 과목을 가르쳐 왔다. 새누리교회 대표목사를 거쳐 현재는 새누리2교회 대표목사로서 바른 해석학에 근거한 복음적인 성경 강해로 한국교회 강단을 성경적으로 회복하는 일에 헌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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