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는 '알기 쉬운 성서해석학' 연속 강좌를 매주 금요일 8주간 연재합니다. 금요일 연재인데 2강이 늦어져서 주말 동안 많은 분들이 기다리신 것 같네요. 안진섭 목사는 오랫동안 성서학을 가르쳐 온 학자이자 현직 목회자입니다. 강의의 수준은 신학교의 해석학보다는 조금 더 쉬우면서 현장 목회자나 성경 연구자들에게 실제적인 도움이 될 수 있는 정도의 것이라고 안 목사는 밝혔습니다. 이번 강의부터 강사의 강의를 직접 듣는 것 같은 입말체로 바뀌었네요. 계속적인 성원 바랍니다. -편집자 주

성경을 해석할 때는 크게 다음과 같은 단계를 거쳐야 합니다.

먼저, 본문이 속한 책의 개론 공부하기
둘째, 본문 관련 역사적 배경 조사하기
셋째, 본문 문맥 살피기
넷째, 본문 구조 분석하기
다섯째, 본문 주요 단어 의미 파악하기
여섯째, 종합적으로 본문의 핵심 메시지 찾아내기

물론 항상 일정하게 이런 단계를 거쳐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이 모든 것이 한꺼번에 종합적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습니다. 또한 때로는 이 여섯 가지 단계 가운데 어떤 단계에 더 집중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원칙적으로 본문을 해석할 때는 이런 단계를 거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제 이런 순서로 창세기 39:19~23을 연구해 보겠습니다.

[창 39:19~23] 그의 주인이 자기 아내가 자기에게 이르기를 당신의 종이 내게 이같이 행하였다 하는 말을 듣고 심히 노한지라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가두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첫 번째 단계는 본문이 속한 책에 대한 개론을 먼저 공부하는 것입니다.

구약 개론서나 주석의 서론을 보면 저자, 독자, 연대, 목적, 신학적 주제 등 다양한 개론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중에서 본문을 이해하는 데 주로 도움이 되는 것은 책의 기록 목적과 중심 주제(핵심 메시지)입니다. 송병현 교수의 엑스포지멘터리 창세기를 보면 창세기의 신학적 주제를 네 가지로 제시합니다. 필자가 송병현 교수의 책을 예로 드는 이유는 쉽게 접할 수 있는 우리말 책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책을 참고해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1) 지속되는 하나님의 창조와 재창조 사역
2) 하나님의 주권
3) 소명
4) 언약의 주권적인 이행

이런 주제를 파악하고 본문을 살펴보면 본문의 메시지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39:19~23은 요셉의 이야기 중 일부입니다. 요셉은 족장 가운데 한 명이고 창세기가 그를 통하여 보여 주려는 것은 위의 신학적 주제 가운데 네 번째 주제와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요셉은 계속 고난 가운데 처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조상들과 맺은 언약을 따라 요셉의 인생을 인도하십니다. 이런 신학적 주제를 참고하지 않고 본문으로 바로 들어가면 요셉 이야기를 한 인간의 영웅담으로 오해하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단계는 본문과 관련된 역사적 배경을 조사하는 것입니다.

사건과 관련한 역사적 배경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개론서나 주석을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본문의 경우는 성경 역사를 조금만 아는 사람이라면 굳이 주석을 참고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요셉은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연결하여 주는 인물입니다. 그를 통하여 이스라엘은 기근을 피해 생존하게 되었고, 장차 출애굽하여 한 민족을 이루는 기초를 놓았습니다. 본문에 따라서 역사적 배경이 아주 중요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 본문의 경우는 이 정도만 이해해도 큰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세 번째 단계는 본문이 위치한 문맥을 살피는 것입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데 제일 중요한 것은 문맥을 살피는 것입니다. 이 본문이 어떤 이야기가 전개되던 중에 나온 것인지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문맥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본문의 앞 뒤, 더 나아가 책 전체를 여러 번 읽어야 합니다. 이 본문의 문맥을 파악하려면 창세기에 있는 요셉의 생애를 여러 차례 읽어야 합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의 생애는 대략 네 단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단계는 아버지 야곱과 함께 지내던 어린 시절의 요셉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하던 노예 시절의 요셉입니다. 세 번째 단계는 보디발 아내의 모함으로 감옥에 갇힌 죄수 시절의 요셉입니다. 네 번째 단계는 애굽의 총리가 되어 나라를 다스리는 요셉입니다. 지금 우리가 연구하려는 본문은 그 중에서 세 번째 단계인 감옥에 갇힌 죄수 시절의 요셉입니다. 요셉은 모함을 당하고 누명을 쓴 채 감옥에 갇혔습니다.

네 번째 단계는 본문의 구조를 분석하는 것입니다.

이 본문의 경우는 별도의 구조 분석이 없어도 본문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해석할 때 구조 분석을 철저하게 해야 하는 책은 구약의 시편과 신약의 서신서들입니다. 시편은 다양한 시적 구조에 따라 기록되었습니다. 또한 서신서는 매우 치밀하고 정교한 문법적, 수사학적 구조에 의해 기록되었습니다. 따라서 시편을 연구할 때는 시적 구조를 잘 살펴야 하고, 신약의 서신서를 연구할 때는 문법적, 수사학적 구조를 철저하게 분석해야 합니다. 이 본문은 문학 장르상 이야기에 해당됩니다. 이런 이야기의 경우는 본문의 구조를 치밀하게 분석하는 것보다 이야기의 흐름을 살펴보는 것이 더 유익합니다.

다섯 번째 단계는 본문에 나오는 주요 단어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을 이해하는 데 가장 도움이 되는 부분은 바로 주요 단어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어떤 단어가 주요 단어인지 찾으려면 본문을 여러 차례 읽으면서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파악하면 됩니다. 물론 그럴 때는 당연히 1~4단계에서 조사한 것에 기초하여 파악해야 합니다.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비록 요셉이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지만 그런 중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그에게 은혜를 베푸셨다는 사실입니다. 첫 번째 단계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그 이유는 하나님은 당신의 언약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핵심 메시지를 담고 있는 단어는 무엇일까요? 본문을 여러 차례 읽어 보면 그런 핵심 메시지와 관련 있는 단어가 눈에 띕니다. 그 단어들은 21절에 있는 '인자'와 '은혜'입니다.

이제 이 단어들을 자세히 연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둘 중에서 어느 단어가 더 중요할까요? 필자가 보기에는 인자가 더 중요한 단어입니다. 그 이유는 인자는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직접 더하신 것이고 은혜는 간수장에게 간접적으로 받게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창세기의 중심 주제 가운데 한 가지가 언약의 주권적인 이행이므로 우리가 주로 살펴보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어떤 일을 행하는가에 관한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의 핵심 메시지를 파악하기 위해 우리가 주로 살펴보아야 할 단어는 인자라는 단어입니다.

단어를 연구할 때는 단어 사전과 함께 성구 사전을 활용해야 합니다. 우리말 성구 사전만 보면 인자라는 단어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 번역된 '인자'가 원어에서는 어떤 단어인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 원어 성구 사전을 보면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지만 원어를 모르는 경우를 가정하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런 경우 먼저 로고스사에서 출판된 '스트롱코드성경'을 활용할 수 있습니다. 스트롱코드성경에는 각 단어마다 스트롱 번호가 있습니다. 그 번호를 보고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스트롱코드히브리어헬라어사전'을 보면 인자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헤세드'를 번역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아울러서 그 헤세드가 구약성경의 어느 곳에서 사용되었는지 그 용례들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그 용례들을 하나씩 살펴보면서 의미를 정리하면 됩니다. 우선 이 본문과 가까운 곳에 나온 용례들을 먼저 찾아보고 그 다음에 창세기 전체, 혹은 용례가 많지 않다면 구약 전체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용례들을 찾아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말 성경만 보아도 그 의미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찾아서 조사하여 비슷한 것끼리 묶어 보면 헤세드에는 크게 두 가지 뜻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헤세드의 첫 번째 의미는 법적인 계약관계에서 계약을 충성스럽게 지키는 것입니다.

[출 20:4~6]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이 말씀에서 6절에 있는 은혜라는 단어가 바로 '헤세드'입니다. 출애굽기 20장은 십계명을 통하여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계약을 맺는 내용입니다. 계약을 맺을 때는 두 당사자가 각자 지켜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4~5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지켜야 할 내용입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지켜야 할 내용입니다. 그 다음에 있는 말씀은 하나님이 지키겠다고 약속하신 내용입니다.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이 계약을 지키지 않는 자에게는 삼사 대까지 심판하고, 계약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풀겠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헤세드는 계약관계에서 계약의 내용을 충성스럽게 지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헤세드의 두 번째 의미는 법적인 의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베푸는 자비로운 행위를 가리킵니다. 구약성경 룻기는 룻이라는 이방 여인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룻의 시어머니의 이름은 나오미입니다. 나오미는 남편과 함께 흉년을 피하여 모압 지방에 가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남편이 죽었습니다. 그 후에 또한 두 아들마저 이방 땅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결국 시어머니와 두 이방인 며느리들을 포함하여 세 명의 과부들만 남았습니다. 그 후 이스라엘 땅에 흉년이 그치자 나오미는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며느리들에게는 제 살 길을 찾아 떠나라고 합니다. 한 며느리는 떠났는데 룻은 떠나지 않고 시어머니를 따르겠다고 고집을 부립니다. 결국 나오미는 이방 여인 룻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사실 룻이 굳이 시어머니를 따라와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제 갈 길을 찾아간 다른 며느리처럼 시어머니를 떠나도 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룻은 시어머니를 따릅니다. 나중에 룻은 보아스를 통하여 언약의 계보를 잇기 위하여 보아스를 찾아갑니다. 그 자세한 내용은 지면 관계상 생략하겠습니다. 나중에 보아스는 룻을 칭찬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이르되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가난하건 부하건 젊은 자를 따르지 아니하였으니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룻 3:10) 여기서 인애라는 단어가 바로 헤세드입니다. 룻도 젊은 남자를 찾아 떠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룻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룻은 이방 여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남편의 집안에 충성을 다합니다. 그것이 바로 '헤세드'입니다. 법적인 의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인 사랑으로 행하는 것, 그것이 바로 '헤세드'입니다.

'헤세드'라는 단어에는 이와 같이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한 가지는 계약을 지키기 위해서 충성하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계약과 관계없이 사랑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 의미 가운데 어떤 의미가 더 중요할까요?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처음에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셨고, 나중에는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 전체와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방적으로 그 계약을 깨트렸습니다. 그들은 십계명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계약 조건에 따르면 한 쪽이 계약을 파기하면 상대방도 그 계약을 이행할 의무가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그 순간에도 여전히 인자를 베푸십니다. 자기 백성이 언약을 어겨도 하나님은 결코 그 분의 인자를 중단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 헤세드는 법적인 의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에 대한 사랑으로 베푸는 자비로운 행위를 가리킵니다. 계약을 지키기 위해 충성한다는 의미보다 자발적으로 사랑을 베푼다는 의미가 더욱 중요합니다.

필자가 위에 정리한 것들은 헤세드가 사용된 여러 용례들을 찾아보고 정리한 것입니다. 용례들을 찾아서 그 내용을 조사할 때도 언제나 해당 본문이 위치한 문맥 속에서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찾은 의미들을 종합하면 위와 같은 결론에 이를 수 있습니다. 만약 성도들에게 이런 용례들의 의미를 설명한다면 여러 구절을 설명하는 것보다 그중에서 가장 쉽게 이해될 수 있는 용례들만 한두 가지를 인용하여 설명하는 것이 좋습니다. 물론 그렇게 가장 이해하기 쉬운 용례를 인용하려면 성경 연구자는 가능한 한 많은 용례들을 연구해야 할 것입니다.

여섯 번째 단계는 지금까지 연구한 것을 종합하여 본문의 핵심 메시지를 찾는 것입니다.

창세기 39:21에서 하나님은 요셉에게 바로 그 헤세드를 베풀었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요셉에게 인자를 더해야 할 의무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요셉과 언약을 맺은 적이 없습니다. 굳이 따지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사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수없이 깨트렸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편에서 보면 그 언약을 지켜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또한 요셉이 어렸을 때 꿈을 꾸게 하신 것도 역시 하나님 편에서 그것을 이루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계약관계에서 벌어지는 의무라고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베푸시는 헤세드는 설명이 안 됩니다. 그저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으로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헤세드를 베풀고 계신다고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결국 헤세드는 하나님의 본질적 성품입니다. 그분은 단순히 계약을 이행하기 위해 의무감으로 헤세드를 베푸시는 것이 아닙니다. 본래 그분이 헤세드가 풍성하시기 때문에 그 헤세드를 요셉에게 베푸시는 것입니다.

요셉은 어린 시절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꾸었습니다. 형들이 자신에게 절하는 꿈이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까지 포함하여 모든 형들이 다 자신에게 절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요셉은 그 꿈을 마음에 품었습니다. 그렇지만 요셉이 처한 현실은 그 꿈과는 정반대였습니다. 꿈에서는 높은 자리에 오르지만 현실에서는 점점 낮은 자리로 내려가고 있습니다. 채색 옷을 입던 요셉이 노예의 옷을 입었고, 노예의 옷을 입던 요셉이 죄수의 옷을 입었습니다. 더 이상 내려갈 수 없을 정도로 요셉은 낮은 자리로 내려갑니다.

그 후에 요셉은 감옥에서 두 관원장을 만납니다. 한 사람은 바로의 술을 맡은 관원장이었고, 또 한 사람은 바로의 떡을 굽는 관원장이었습니다. 어느 날 두 사람이 꿈을 꾸었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의 꿈 내용은 포도나무에 세 개의 가지가 있고, 싹이 나서 꽃이 피고 포도송이가 익었는데 술 맡은 관원장이 그 즙을 바로의 잔에 짜서 바로에게 드린 것입니다. 요셉은 그 꿈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포도나무의 세 가지는 사흘을 가리키는 것이므로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전직을 회복시킬 것입니다." 요셉은 그 사람에게 자신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와 있으므로 당신이 잘되거든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당신이 잘되시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아뢰어 이 집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나는 히브리 땅에서 끌려온 자요 여기서도 옥에 갇힐 일은 행하지 아니하였나이다.(창 40:14~15)"

떡 굽는 관원장의 꿈은 흰 떡 세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있고, 맨 윗광주리에 바로를 위하여 구운 음식이 있었는데 새들이 와서 그 음식을 먹어 버린 것입니다. 요셉은 그 꿈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세 광주리는 사흘을 의미하므로 앞으로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을 처형하여 나무에 매달 것입니다." 실제로 사흘 뒤 바로의 생일에 요셉의 해몽대로 술 맡은 관원장은 전직을 회복하고, 떡 굽는 관원장은 처형당했습니다. 요셉의 해몽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자신의 해몽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요셉은 기대를 걸었을 것입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자신의 해몽대로 전직을 회복하였으므로 이제 자신을 변호해 줄 것이라고 기대하였을 것입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이 지긋지긋한 감옥에서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요셉의 희망은 무참히 깨집니다. 본문 40:23을 같이 보겠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 술 맡은 관원장은 요셉의 해몽대로 복직되었지만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잊었습니다. '기억하다'를 히브리어로 '자칼'이라고 합니다. 술 맡은 관원장은 요셉을 '자칼'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2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왜 술 맡은 관원장은 요셉을 기억하지 못했을까요? 요셉은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요청했었습니다. 40:14을 보십시오. "당신이 잘되시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아뢰어 이 집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이 말씀에서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할 때, 그 은혜라는 단어가 바로 헤세드입니다(성구 사전의 용례를 통하여 이런 사실은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셉은 그에게 헤세드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였습니다. 히브리어로 자칼하지 못했습니다. 왜 자칼하지 못했을까요? 그에게 헤세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헤세드가 없었기 때문에 자칼하지 못했습니다. 그에게 요셉은 단지 불쌍한 히브리 노예였을 뿐입니다. 아무리 요셉이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하여도 그는 여전히 히브리 노예일 뿐입니다. 당시는 노예의 인권 따위는 안중에도 없을 때입니다. 노예 따위에게 무슨 헤세드를 베풀겠습니까? 결국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한 이유는 요셉을 향한 헤세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사실을 통하여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술 맡은 관원장에게는 헤세드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요셉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에게는 헤세드가 있습니다. 본문 39:21에 이미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하시고 요셉에게 인자, 곧 헤세드를 베푸셨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요셉에게 헤세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요셉을 기억하십니다. 헤세드가 없는 관원장은 요셉을 기억하지 못했지만 헤세드가 있는 하나님은 요셉을 기억하십니다. 이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술 맡은 관원장은 헤세드가 없어서 요셉을 기억하지 못했지만 헤세드가 풍성하신 하나님은 요셉을 기억하십니다. 그러므로 요셉이 의지할 대상은 술 맡은 관원장이 아닙니다. 요셉이 의지해야 할 대상은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요셉도 인간입니다. 그래서 잠시 술 맡은 관원장을 의지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의지하는 것은 실망만 줄 뿐입니다. 요셉은 결국 감옥에서 죄수의 옷을 입고 2년을 더 보냅니다. 그 기간 동안 요셉은 묵묵히 하나님의 때를 기다립니다. 나중에 바로의 꿈을 해몽하는 것을 보면 그는 감옥에서도 여전히 하나님과 깊은 영적 교제를 나누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만약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포자기하며 살았다면 어떻게 바로의 꿈을 해몽할 수 있었겠습니까? 나중에 바로의 꿈을 해몽한 것은 그가 감옥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았다는 반증입니다.

1단계에서 6단계를 거치면 이렇게 본문의 핵심 메시지를 정리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여러 주석들을 참고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렇지만 성구 사전을 활용하여 성경의 여러 용례들을 연구하여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훨씬 더 좋습니다. 그렇게 여려 용례들을 찾아볼 때, 좀 더 풍부한 이해를 위해서 주석을 찾아보는 것은 매우 긴요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성도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거나 설교를 할 때는 성경 자체를 가지고 예를 들면서 설명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렇게 본문의 핵심 메시지를 파악하면 그 다음 단계에서는 깊은 묵상을 통하여 자신이 말씀을 가르칠 청중에 맞게 적용할 메시지를 찾아서 설교하면 됩니다. 이 강의는 설교학 강의가 아니고 해석학 강의이므로 설교에 대해서는 직접 다루지 않을 것입니다.

# 긴 강의를 읽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지상 강의 방식으로 하기 위해서 가능하면 현장감 있는 구어를 사용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다음 주부터는 본문 해석을 위한 각 단계를 한 주에 한 단계씩 다루겠습니다. -필자 주

안진섭 / 침례신학대학교 학부(Th.B.)와 신학대학원(M.Div.)을 졸업한 후 미국 루이지애나 주에 위치한 New Orleans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약성서 사본학으로 박사 학위(Ph.D.)를 받았다. 유학 중에는 뉴올리언스침례신학대학원 강사와 신약본문연구소 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귀국 후에는 오랫동안 침례신학대학교 학부와 신학대학원에서 헬라어와 성서강해 과목을 가르쳐 왔다. 새누리교회 대표목사를 거쳐 현재는 새누리2교회 대표목사로서 바른 해석학에 근거한 복음적인 성경 강해로 한국교회 강단을 성경적으로 회복하는 일에 헌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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