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진호 연구실장은 민중신학자로서 사람들의 고통의 문제를 고민해 왔다. 사회의 고통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것에서 민중신학이 시작한다고 그는 말한다. ⓒ뉴스앤조이 최유진

이 땅의 민중신학은 세계 교회 역사를 볼 때 매우 소중한 한국교회의 유산이다. 민중신학자들은 고통받는 사회 약자들의 편에서 그들이 목소리를 내고 인권을 존중받을 수 있도록 이론적‧실천적으로 몸부림쳐 왔다. 기독교가 저항과 옹호의 신학, 약자들을 위한 신앙, 이웃을 위하는 종교가 되기 위해 노력해 왔다.

김진호 연구실장(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은 현재 적은 수의 민중신학자들 중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신학자이다.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가 설정하는 의제들이 돋보이는 이유도 김진호 실장의 기여가 크다. 이 연구소가 다루는 주제들은 광범위하면서 학제적이다. 그렇지만 기독교가 이웃의 종교가 되기 위해, 그리고 현사회가 겪고 있는 민중들의 고통의 현주소를 제대로 파헤치기 위해, 예수의 정신에서 떠나 자본주의화된 주류 기독교를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고민하고 연구한다는 점에서 공통분모를 찾을 수 있다. 연구와 활동의 결과물들은 단독 저작이나 공동 저작 등 여러 형태로 엮였다. 그의 저서로는 <시민K, 교회를 나가다>(현암사), <예수의 독설>(삼인), <급진적 자유주의자들-요한복음>(동연), <인물로 보는 성서 뒤집어 읽기>(삼인) 등이 있는데, 성서신학적이고 사회 평론적인 관점을 모두 담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민중신학자들의 연구가 상대적으로 예수 연구에 집중되어 있는 상황에서 <리부팅 바울>(삼인)의 출간 소식은 매우 반갑다. 김진호는 바울을 왜 리부팅해야 한다고 보는 것일까. 바울은 예수 운동의 계승자인가. 바울 서신의 용어들은 어떤 역사와 사회적인 맥락에서 쓰여졌을까. 바울을 민중의 대변자로 읽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최첨단 사회인 서울에서 왜 다시 바울을 불러오려고 하는 것일까. 철학적인 어젠다를 위해 그들 나름대로 바울을 사용하고 있는 알랭 바디우와 슬라보예 지젝, 조르주 아감벤 등의 인기와는 별개로, 한국 사회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어떤 은유를 던져 줄까. 민중신학의 입장도 궁금했고 김진호 개인의 생각도 궁금했다.

다음은 김진호 연구실장과의 인터뷰 내용.

-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곳이 내 활동처다. 지금은 한백교회 담임목사님이 안식년 휴가 중이라 잠시 목회와 설교를 하고 있다. 한백교회는 이전에 내가 담임목사로 섬겼던 곳이다. 우리 교회에서 목사의 역할은 신앙적인 생각과 활동 중심이 아닌, 평신도 주체를 돕는 일이다. 그 외에는 글 쓰는 데에 시간을 쓰고 있다.

- 민중신학 연구를 하면서 가장 많이 관심을 가져 온 주제가 있다면.

가장 오랫동안 공부한 주제는 예수에 대한 역사적 연구다. 최근에는 구약성서 중 제1성서시대 후기, 성서 형성기, 기원전 3세기를 집중적으로 하고 있다. 민중신학 연구자이다 보니 한국 사회 형성, 구체적으로 말하면 근대 한국의 형성과 그리스도교 연구도 오랫동안 해 왔다. 최근 한국 그리스도교와 관련해서는 작은 교회를 연구하고 있다.

그 외에, 최근 북미에서 영성학이라는 신흥 학문이 등장했는데 종교학을 넘어서는 새로운 학문의 범주인 것 같다. 이 영성학은 사회적 영성을 강조하기 때문에 여성신학이나 해방신학 등과 친화적이고 학제적인 편이다. 개인적으로 북미의 이런 흐름을 한국에 적용하고 싶어서 한국 사회와 관련해 영성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영성학은 그리스도교가 제도 종교로서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지 못한다는 입장이다. 사회가 소비사회로 변모해 가면서, 이에 대한 접근 방식도 이성을 통한 해석보다 감성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영성(spirituality)이라는 용어가 등장한 것이다. 이를테면 교회는 나가지 않지만 신앙에 대한 질문을 계속 던지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은 종교를 갖고 있지는 않지만 자신들을 영성적(spiritual)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북미 영성학의 슬로건이다.

민중신학자가 바라본 고통의 문제

- 한국 사회를 바라보면서 지속하고 있는 가장 핵심적인 신학 주제는 무엇인가.

고통이다. 사람들이 고통스러워한다는 것이다. 우리 교회는 설교 후 함께 나눔을 하는데, 사람들이 자신의 고통에 대해 자주 이야기한다. 어떤 이들은 고통이 너무 심해서 병원을 가고 약을 먹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과 갈등을 빚기도 하고, 자기보다 약한 사람들에게 폭언을 하는 현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런 사람으로 인해 고통이, 관계가 더 심하게 비틀어진다. 우리 사회는 고통을 일으키는 문제가 너무 많은 것 같다. 민중신학자로서 이 문제를 고민해 왔다. 선배 민중신학자들도 그렇게 해 왔지만 세계를 보면서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는 것에서 민중신학은 시작된다.

- 고통의 주제에 대해서도 선배 민중신학자들이 처한 상황과 오늘날 민중신학자들이 처한 상황이 다를 것 같다.

민중신학은 세 단계의 전개 과정이 있다고 본다. 1970년대, 80년대, 90년대 이후 민중신학으로 나눌 수 있다. 각 시대의 고통의 요소에 따라 민중신학적 해석이 조금씩 변화하게 되는데, 그것을 1, 2, 3세대라고 임의로 명명했다. 1970년대에는 한국 사회가 급속도로 산업화하면서 사람들이 성장에 대한 열정에 불타 있었다. 그 과정에서 성공하지 못한 자들, 말하자면 시골에서 서울에 올라온 '이민자들' 중 일부는 성공했지만 대부분은 빈곤층이 되었다. 그들의 인권은 묵살당했고, 누구도 그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다. 이것이 제1세대 민중신학자들의 고민이었다.

제2세대인 80년대 민중신학은 한국 사회의 제국화에 문제를 제기했다.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이 제국의 질서를 만들어 가는 과정 가운데 있다는 문제의식이다. 많은 청년이 중심이 되어 항의를 했다. 이들은 고통의 문제를 제국의 지배 문제와 연관시켜 설명했다. 어떤 사람들은 종북 담론처럼 이야기했고, 일부는 한국 사회의 제국주의 문제와 우리 사회의 반자본주의를 이야기했다. 또 일부는 북한의 주체사상을 공부하고 또 일부는 독점 자본주의 체제에서 한국의 위치에 대해 공부하기도 했는데, 이런 부분들이 민중신학과 결부되어 있었다.

민주주의가 제도화되었다고 할 수 있는 시기가 1987년이다. 민주주의가 시작되고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 민주 개혁 정부가 집권을 하는 등 변화가 있었지만, 우리에게는 민주화 운동이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개선하지 못했다는 절망감이 있었다. 그런 절망감을 가지고 1990년대 민중신학이 출발했다. 우리가 문제 제기한 대상을 권위주의 체제라고 했고 추구했던 걸 민주주의라고 생각했는데, 권위주의와 민주주의가 병행하고 있는 반인간성, 인간과 생명에 대한 예의 없음 등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되었다.

이런 고민을 안고 민중신학 3세대가 시작되었다. 우리에게 충격을 가져온 것 중 하나는 소비사회이다. 과거 권위주의 시대에는 국가가 착취하고 사람들은 착취당한다고만 생각했는데, 소비사회는 소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자와 없는 자로 사람들을 나누었다. 소비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열망과 소비할 수 없어서 좌절하게 되는 사람들의 좌절감 등이 비대칭적으로 얽혀 있는 사회 같은 것이다.

최근의 민중신학은 우리 시대 고민의 정체와 고통의 양상, 그리고 고통의 비대칭성 등에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기계발에 열정을 다한다. 어떤 사람은 '나는 뭘 가지고 있다, 뭘 가져야만 수혜를 입을 수 있다' 등 고통을 표현하는 방식이 다양하다. 이런 문제들은 신학적 문제이기도 하다. 이런 절망감 속에서 사람들은 신을 향해서 묻는다. 민중신학은 이에 대해 사람들과 이야기해야 한다.

▲ 바울은 디아스포라 유대 사회에서 여자나 노예 출신의 사람들이 차별받는 것에 저항했고 그들을 옹호했다. 이런 면에서 김진호 실장은 바울을 민중의 대변자라고 했다. ⓒ뉴스앤조이 최유진

- 민중신학이 과거에는 사회구조를 분석하는 데 집중했다면, 지금은 그 흐름을 유지하면서 보다 실존적인 것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 말도 어느 정도 맞지만, 약간의 편견도 있다고 본다. 민중신학을 개척한 안병무 선생은 처음부터 그래 왔고, 민중신학자의 여정에서도 실존주의와 얽혀 있었다. 그런데 우리의 담론이 좀 더 실존적으로 보이는 것은 우리 시대 사람들이 자기를 더 잘 표현하는 시대이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옛날에는 잘 표현하지 못했기 때문에 실존주의적인 담론을 크게 비평적으로 표현하지 않아도 됐는데, 지금은 사회가 너무 복잡해졌기 때문에 훨씬 더 비평적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우리 시대 지식이 옛날 선배들 시대보다 굉장히 전문화된 것 같다. 지금은 실존의 문제를 표현하는 더 세공화된 언어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이기 때문에 차이가 있다. 한국 사회를 읽는 비판적 지식들의 어떤 표현 양식이라는 관점에서는 맞지만 개개인의 신학적 실천 태도에는 구조에만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니다. 안병무 선생은 자기 경건에 엄격한 분이었다. 마음의 문제와 끊임없이 사투를 했던 분이다. 그 물음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오해다.

- 방금 질문의 맥락에서 <리부팅 바울>을 썼을 것 같다. 최근 인문학 영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도바울에 대한 관심과 개인적인 문제의식과는 어떻게 맞닿아 있는가.

1986년 대학을 졸업하고 신학 공부를 시작했다. 그때 만난 민중신학자가 김창락 교수였다. 당시 김 교수가 한창 바울을 연구했는데, 그 연구를 접하면서 성장했다. 선생의 바울 연구가 교회와 신학계에서 간과되고 저평가되는 데 안타까움이 있었다. 그런데 여력이 없어 연구하지 못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민중신학을 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주변 분들의 비판과 요구는 많지만 적은 수의 사람들이 감당하기에 쉽지 않았다. 우리가 공부할 땐 민중신학에 대한 시선이 따가웠다. 말할 기회의 장도 없었고, 민중신학을 하면서 생계를 책임질 수 있는 여건도 안 되었다. 내 전공 분야인 역사적 예수 연구 외 다른 분야를 생각할 여력이 거의 없었다.

바울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게 된 것은 한 교인이 민중신학은 왜 바울에 소홀하느냐고 물은 것에서 비롯되었다. 그걸 설명하기 위해 김창락 선생의 바울을 해설하는 네 편의 글을 썼고, 교회에서 네 번의 강연을 했다. 2000년 안팎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후 김창락 선생이 고희가 되었을 때, 제자로서 선생의 문집을 만들어 보고 싶었다. 내가 주도해서 책을 기획했고, 주제를 '김창락 선생의 바울의 의인론'으로 잡았다. 이전 강연 원고를 가지고 첫 글을 썼다. 그 결과물이 '다마스쿠스에서 예수의 길을 묻다'였다. 그러면서 우리가 민중신학의 후학도로서 바울을 이야기해 보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하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이후에 고민을 이어가는 사람이 없었고 결국 성서학을 하는 나의 숙제로 남았다.

그러면서 바울에 대한 최근의 연구를 틈틈이 보는 중에 북미에서 일어나는 급진주의적 바울 연구를 접하게 되었다. 그때 미국에서 급진주의적 바울 연구자들과 보조하며 바울 연구를 해 온 이재원 교수(매코믹신학대학)와 논쟁을 하게 됐다. 민중신학자로서 당장 답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도 급진적 바울 연구를 비판했고, 그것이 본격적으로 민중신학의 바울 연구를 시작한 계기다. 또한 그 무렵 가톨릭은 바울의 해를 선언했는데, 그때 바울을 다루는 강좌를 열었다. 당시 강좌를 기획하던 젊은 친구들이 아감벤과 바디우를 이야기했었다. 나는 그것을 읽으면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주목하지 않았는데, 강의에서 계속 질문이 나왔다. 그래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디우와 아감벤 같은 현대 좌파 철학자들의 바울 논점과, 국내 급진주의적인 바울 연구와 민중신학을 강좌의 두 축으로 구성했다. 나는 이 두 가지를 극복하려고 하는 지점에 김창락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후 그런 강의를 기독교 안과 밖을 아우르면서 시작했고, 그러면서 생각을 발전시키면서 책이 나왔다.

약자 옹호하는 바울의 의인론

▲ 김창락 교수가 바울의 의인론 논쟁이 벌어진 장을 바울이 선교한 교회로 봤다면, 김진호 실장은 지중해 대도시 지역에 있는 이스라엘 교포 사회를 바울의 활동 무대로 옮겨 왔다. ⓒ뉴스앤조이 최유진

- 왜 바울이 다시 주목을 받는 건가.

내가 현대 철학자들에게 질문했던 게 그거다. '왜 당신들은 바울을 이야기하는가. 왜 북미의 급진주의 신학자들은 바울을 이야기하는가.' 급진주의 신학자들은 미국이 일종의 부시의 제국이라는 관점에서 고대 로마제국이 현대 미국과 유사성이 있다고 봤다. 신학적인 물음이기도 하지만 역사학적이고 정치적인 물음이기도 하다. 역사상에 존재했던 많은 제국들 가운데 미국과 로마는 매우 유사하다. 그런 관점에서 북미의 급진주의 바울 연구자들은 바울을 로마에 대항한 사도로 봤고, 또 그걸 통해 오늘날 제국으로 실제하고 있는 미국과 미국 기독교에 대한 저항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것은 북미 신학자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관점이었던 것 같다. 자기 사회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니까.

유럽의 좌파 철학자들이 바울을 연구한 주된 배경은 지구화 시대 유럽 사회에 대한 고민이었다. 유럽에는 굉장히 많은 이민자들이 있다. 높은 복지 수준을 자랑하는 유럽이지만, 많은 이민자들이 몰리면서 복지에 공백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도 유럽을 여행한 적이 있는데, 가장 많이 머물러 있던 곳이 프랑스 남부의 항구도시 마르세유이다. 프랑스 제국 시대에 북아프리카에서 착취한 것을 가져오던 항구였는데, 지금은 프랑스에서 가장 가난한 도시이기도 하다. 현재 마르세유에는 도시의 복지 시스템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이민자들이 거대한 빈민들의 공간을 만들어 내고 있다.

빈민 지역 몇 군데를 여행했는데 처참했다. 특히 마르세유에서 나는 쓰레기통을 뒤지는 사람들을 무수히 보았다. 그리고 그들 주위에는 쓰레기 마켓이 만들어져 있었다. 동유럽 출신들이 많다고 하더라. 사람들은 그들을 혐오스러워하고 범죄자처럼 생각한다. 여기서 나는 폴란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 쓴 책 <쓰레기가 되는 삶들>을 떠올렸다. 어쩌면 이 책도 내가 보았던 그런 광경에서 출발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계급이나 과거의 진보 담론으로 설명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도시에 넘쳐나는 풍경을 보면서, 바디우는 1세기 지중해 시대의 대도시 내의 풍경을 봤고 그곳에서 바울을 읽어냈다. 지중해 대도시 풍경과 유럽의 풍경 사이의 유사성에서 바울을 보았던 것이다.

나는 지구화 시대 주변부 메트로폴리탄 주민이다. 서울이 바로 그렇다. 한데 내가 보는 서울은 서울특별시가 아니라 도시국가 서울이다. 남한 사회 전체가 서울과 그 주변의 부속 도시와 시골로 이루어진, 서울 중심의 사회 아닌가. 주변부 메트로폴리탄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사람들의 당황스런 현실, 그 속에 존재하는 쓰레기가 된 사람들을 보면서, 김창락의 바울의 의인론이 그런 쓰레기 같은 사람을 두둔하는 것이라고 읽었다. 이것이 내가 주목한 바울이다.

- 이 책의 아이디어가 되는 김창락 교수의 의인론의 핵심은 무엇인가.

지금까지 바울 연구에서 핵심은 바울의 의인론이라고 많이 이야기해 왔다. 현대 신학의 거목들도 그렇게 보았다. 김창락은 바울의 의인론이 진리 담론이 아니라 논쟁 담론이라고 했다. 구체적인 논쟁 현장이 있다는 것이다. 바울의 의인론이 나오는 텍스트를 보니 그 전후 맥락에 갈등이 있다. 유대인과 헬라인,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표상이 되어 있다. 문맥상 강자는 유대인이고 약자는 헬라인으로 전제된다. 그 약자를 옹호하기 위해 바울이 의인론을 이야기했다는 게 김창락의 바울신학의 논점이다. 의인론을 하나의 논쟁 담론으로 보고 그 현장을 유대인과 이방인의 갈등의 맥락에서 읽었다.

- 김창락의 바울신학과 김진호의 바울신학은 어떤 관점의 차이가 있는가.

나는 김창락의 의인론을 일부는 보완하고 일부는 수정했다. 김창락은 바울의 의인론 투쟁 맥락을 역사적으로 충분히 설명하지 않았다. 세부적인 설명을 하는 점에서 논점을 보완했다.

김창락 선생은 의인론 논쟁이 벌어지는 장을 바울이 선교한 교회로 봤다. 하지만 바울이 활동하던 시대에 그리스도교라는 종교는 존재하지 않았다. 독자적 종교로서 그리스도교가 등장한 시기는 대략 80~90년대 사이다. 바울이 활동하던 50년대에는 그리스도교라는 독자적인 커뮤니티나 운동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김창락 선생의 주장과는 달리, 바울이 말하는 에클레시아는 독자적인 종교 커뮤니티로 보면 안 되고 이스라엘 종교의 한 분파로 해석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논쟁이 벌어지는 현장은 지중해 대도시 지역에 있는 이스라엘 커뮤니티 내부, 즉 이스라엘 교포 사회로 봐야 된다고 재해석했다.

거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이스라엘 교포 사회를 어떻게 봐야 하는가에 관심을 가졌다. 이스라엘 교포 사회를 유대교 사회라고 명명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나는 그것을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사회라고 불렀다. 팔레스티나에서 유대교와 사마리아교가 갈등을 빚고 있었는데 지중해 지역에 있었던 이스라엘계의 디아스포라 커뮤니티는 두 종교 모두를 존중했기 때문이다. 유대교라 명명하는 것은 현대 이스라엘의 자기 정체성 확립 과정에서 역사가 날조된 결과다. 이는 마치 일본에 있는 한국계 사람들을 재일 동포나 재일 한국인이라고 지칭하는 것과 똑같다. 일본에 있는 한국인/조선인 대다수는 스스로를 재일 한국인이나 재일 조선인에 귀속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 이념 편향적 표현 대신 '자이니치(재일)'라는 표현이 쓰이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고대 지중해 사회의 이스라엘 사람들을 표현할 때도 중립적인 표현을 쓰는 게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유대교라고 하지 않고 이스라엘 교포 사회로 봤다. 그런 점에서 김창락 선생의 논점과 약간 대립되는 부분이 있다.

- 그렇지만 로마도 당시 이들을 유대인이라고 부르지 않았나.

그렇다. 바울 당시 이스라엘 교포 사회를 로마 당국도 유대 사회(유대인)라고 불렀다. 한데 바울보다 9세기 정도 전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 그 당시 팔레스티나에는 이스라엘국이, 그리고 그 남쪽에는 유다, 블레셋, 암몬, 모압 등이 있었는데, 오늘날 이라크 지역에서 등장한 제국 앗시리아가 시리아-팔레스티나를 공격해 왔다. 시리아와 팔레스티나를 정복하고 이집트까지 지배하고자 함이었다. 하지만 시리아-팔레스티나의 국가들이 연합군을 형성하여 앗시리아 제국의 군대를 물리쳤다. 이때 이 연합군의 지도자가 이스라엘국의 아합 왕이었다. 이후 앗시리아는 팔레스티나 전체를 '아합의 집안'이라고 불렀다. 마찬가지로 로마제국도 유대인이 가장 시끄럽고 저항의 진원이 되었기에 이스라엘 사람 전체를 유대인이라고 불렀다.

- 그렇다면 우리는 왜 유대인이라고 부르면 안 되는가.

우리가 이스라엘인을 유대인이라고 부르는 순간, 유대인으로 흡수되지 않았던 사마리아계 사람들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 버린다. 또 유대인이 아닌 팔레스티나인들은 비존재가 되어 버린다. 오늘날 그 땅에 살고 있는 비유대인을 비존재화하는 배타적 시오니즘의 논리가 정당화되는 것이다.

이런 식의 시오니즘적 논리는 아이러니하게도 '아우슈비츠 이후의 신학'과 만난다. 아우슈비츠 이후의 신학은 유대인을 핍박했던 유럽 사회에 대한 유럽인들의 속죄를 반영하는 신학이고, 유대인을 타자화한 그리스도교를 청산하고 타자에 대해 열린 종교로 만들려는 신학 운동을 지칭한다. 신학계에서는 이러한 문제 제기를 포스트 아우슈비츠 이후의 신학이라고 부른다. 나는 이것이 절대화되면서 유대인에 의해 타자화된 존재를 배척하는 신앙 운동이 탄생한 것에 유감을 갖는다.

- 포스트 아우슈비츠 신학적 접근이 당시 지중해 대도시의 이스라엘 디아스포라 사회를 명명하는 문제와 관련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 책에도 언급되어 있는데, 2008년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공격해 10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낸 사건이 있다. 홀로코스트 담론은 오늘날 현대 이스라엘의 자기 마케팅 결과로, 일종의 희생자론으로 전락했음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사건이다. 자기들의 역사적 희생은 과장하고 타인의 역사적 희생은 최소화시켜 가해자 이스라엘을 은폐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논점이다. 그런 맥락에서 유대인과 이스라엘의 문제를 다시 명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유대인을 둘러싼 논의는 현대 학계에서는 굉장히 일반화되어 있다. 마치 남자들이 여성에게 폭력적이거나 비하하는 말을 쓰면 유럽이나 북미에서 몰상식한 사람으로 평가되는 것처럼, 유대인에게 그런 비판적인 말을 쓰면 매장되는 정도의 담론이다. 그리고 굉장히 많은 학자들이 새로운 연구를 많이 했다. 그것에 문제 제기하는 취지에는 동감한다. 그런데 그것이 학문적으로 충분히 정당한지는 의문이었다. 물론 나도 나의 모든 논리에 대한 반론에 대답할 준비가 안 되어 있다. 서둘러서 바꿔 명명하게 된 이유는 일종의 나의 파워테스트이다. 현대 이스라엘과 서양 중심으로 의제가 설정되는 것에 대한 나의 저항이다.

용어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다. 이스라엘 교포 사회가 어떤 도시 안에 있다고 치면, 그 교포 사회는 도시 안에서 서로 충분히 통합된 형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일반적인 관점이다. 이걸 일반적으로 유대 사회라고 하는데 나는 이스라엘 교포 사회로 본다. 그리고 이 교포 사회는 충분히 통합되어 있었다기보다는 다양한 분파들 간의 느슨한 연계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분파들 중 하나가 유대주의자들이었고, 또 하나로 소수파인 그리스도파가 있었다. 그리스도파도 안으로 들어가면 여러 소분파들이 있었을 것 같다. 그중 하나가 바울이 주도했었던 바울계 그리스도파다.

▲ <리부팅 바울> / 김진호 지음 / 삼인 펴냄 / 240면 / 1만 4000원

- 바울 시대의 이스라엘 디아스포라 사회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당시 지중해의 역사적인 정황을 제대로 파악해야 할 것 같다.

지중해 시대 대도시는 인구 혼합 현상이 굉장히 심했다. 기원전 3세기 이후 지중해에 거대한 제국이 연이어 등장했다. 이들이 전쟁을 치르면서 지중해가 통합된 형태가 되었고, 전쟁에서 진 제국이 이긴 제국의 노예로 강제 이주되는 일이 벌어졌다. 그래서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전 1세기까지 엄청난 노예들의 이동이 있었고, 지중해 인근 도시와 농촌 지역은 노동력의 30% 이상이 노예였다는 추산이 있다. 적어도 고대 지중해 연변 지역은 노예제 사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후 아우구스투스가 로마의 패권을 잡고 팍스로마나를 선언하면서 정복 전쟁이 중단되었다. 전쟁이 중단되면서 노예경제의 붕괴 현상이 나타났다. 값싼 노예 공급을 통해 노예경제가 이루어졌는데, 노예경제가 무너지면서 소작농이 오히려 인기가 많게 된다. 노예를 유지하는 것이 부담이 되자 불법으로 노예를 방출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방출된 노예들이 노동의 기회가 많은 지중해 지역의 대도시로 몰려들면서 하급 노동 시장이 교란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노예들에 적대감을 갖게 되었고, 증오의 대상으로 여겼다. 이런 상황에서 노예들은 자기들을 보호할 장치가 필요했다.

한편 지중해 지역 대도시들은 인구 이동이 너무 많은, 이른바 이민자 사회였다. 전통적인 치안 시스템이 효과적으로 작동되기 어려웠다. 그래서 각 이민자 집단들이나 직업 집단들은 자발적 결사체를 조직하여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했는데, '콜레기아'는 바로 이것을 지칭하는 용어다. 대표적인 콜레기아는 종교와 연결된 종족적 콜레기아다. 이 중에서 지중해 도시 사회에서 비교적 잘 안착된, 유력한 콜레기아 중 하나가 이스라엘 사회였다.

유력한 콜레기아들은 도시 당국으로부터 여러 특혜들을 부여받았는데, 이스라엘인들의 콜레기아가 많은 특혜를 받았다. 그래서 이스라엘 혈통의 사람들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이스라엘인들의 콜레기아에 속하고자 개종자가 되었다. 1세기 지중해 지역에서 이스라엘 교포 사회의 인구가 갑자기 늘어났는데 이는 개종자가 늘었다는 말이다. 나는 개종자 상당수가 방출 노예였다고 본다.

개종자들은 사회적 약자, 특히 방출 노예 출신이 많았다. 해서 이스라엘 교포 사회는 개종자들로 인해 주위의 여론이 나빠졌고, 이스라엘 교포 사회 안에서도 그들을 불편해하는 이들이 현저히 많아졌다. 동네에 혐오 시설이 들어올 때 주민들이 반대하는 것처럼, 도덕적으로나 건강에 있어서나 불결해 보이는 이들이 들어오니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이다. 점점 순혈주의 담론이 넓게 번져갔다. 바울에 의하면 이런 담론을 주도한 이들이 유대주의자 그룹이었다. 순혈주의 담론이 이스라엘 교포 사회에 퍼져 나갈 때, 바울은 유대주의를 비판하고 약자를 옹호하는 담론을 펼쳤다.

혁명가 바울? 민중의 대변자

- 바울은 어떤 점에서 예수 운동의 계승자인가. 바울은 누구이며 왜 이스라엘 디아스포라 사회의 약자들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일했는가.

바울의 전향 시기를 37년 정도로 본다. 그 시기 예루살렘에는 헬라어를 쓰는 사람에 의해 헬라파 그리스도인들을 추방‧처형하는 일들이 벌어졌다. 헬라계 이스라엘인들의 일부가 예수에게 동화된 것은 예수의 급진주의에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중 빌립이라는 사람의 활동을 보면, 그는 유대주의자들이 싫어하는 사마리아 선교와 성소수자 선교를 했다. 또 빌립의 딸들은 예언자였다.

또 하나는 스데반의 설교에서 나타난 것처럼 성전에 대한 비판적 태도였다. 가난하고 사회에서 배제된 자 이런 사람들에 대한 예수의 태도가 그들에게 끌렸던 것 같다. 예수 주변에는 매춘 여성, 세리, 세관원, 목동, 질병이나 악령 들린 사람들 같이 공공적 혐오의 대상인 사람들이 많았다. 예수는 이런 죄인들과 친구가 되었고 보다 의롭다는 이들과는 대적했다. 또 죄인과 의인의 이분법적 질서를 만들어 내는 중심적 기구인 성전의 혁신을 도모했다. 이런 예수의 급진적인 담론과 실천은 헬라파 급진주의자들에게 예수를 받아들이게 하는 실마리가 된 것 같다. 그것이 예루살렘에 있는 헬라계 회당(리버디논 회당) 안에서 문제가 되었다. 주모자에 대한 회당의 즉결 처형 행위가 있었고, 살아남은 그리스도파들은 도주했다.

그들 중 상당수가 집결한 곳은 다마스쿠스와 안디옥이었다. 그곳이 그리스도 운동의 거점이 되었다. 바울이 포착되는 첫 번째 지점이 다마스쿠스다. 바울은 다마스쿠스에서 예수 운동 박해자에서 예수 운동가로 전향한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은 예루살렘에서 추방당했던 헬라계 인사들의 활동에서 유래한 예수 운동의 한 양상을 지칭했던 용어였다. 지금은 예수님을 받아들인 사람 모두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바울의 변신은 일종의 전향이다. 이스라엘 종교권 내에서 서로 극단적으로 갈등하는 두 분파 사이에서 전선이 바뀐 것이기 때문이다. 이후 그는 예수를 계승하여 작은 자들과 함께했고, 그들을 억압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체제에 대항하는 삶을 살았다.

- 보통 현대 성서학자들은 바울의 서신들 중 친서와 위서를 구분하는데, 친서들 중에서도 바울의 관점의 일관성에 균열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지점들이 있다. 특히 로마서의 담론을 인권 논쟁으로 볼 때 13장과 같은 권위 친화적으로 보이는 부분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나는 네로에 대한 현대 연구들을 바울 해석에 가미했다. 바울이 활동한 시기는 네로가 황제가 된 시기고 바울의 주요 동역자의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네로의 선왕이었던 클라우디우스 황제 때 로마에서 추방당했던 헬라계 그리스도파의 일원이었다. 바울은 그들로부터 네로가 즉위한 이후 로마의 이스라엘 사회와 그리스도파에 관해 전해 들었을 것이다. 바울이 로마로 갔을 때가 네로 황제가 있을 때고, 네로 황제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전제해야 바울을 볼 수 있다.

현대 네로 연구는 영화나 소설 등에 나오는 네로에 관한 통상적인 이해와는 상당히 다르다. 네로는 로마의 원로원을 중심으로 하는 귀족과 갈등 관계에 있었다. 네로는 선대 어떤 통치자보다 원로원 의원을 많이 갈아 치웠고, 그 자리에 속주 출신들의 신흥 귀족들을 집어넣었다. 그러면서 원로원 귀족들과 헤게모니 갈등을 했다. 네로가 갈등 과정에서 자신의 지지 세력으로 끌어들이고자 했던 대상들 중 하나가 로마의 시민과 평민들이다. 당시 로마 인구 100만 명 중 시민들은 20만 명 정도였다. 로마는 전통적으로 시민들에게 식량을 무상으로 공급했다. 황제마다 그 수가 다른데, 로마 시민을 어디까지로 잡느냐에 따라 황제의 정치적 성향이 갈린다. 네로는 선대 왕인 옥타비아누스와 비견될 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식량 공급을 했다. 귀족보다는 서민적인 정치를 했던 것이다. 그는 식량 공급을 원활히 하고 서민들의 행복을 위해 여러 가지 제도를 정비하고 시스템을 만들어 간 통치자였다.

또 네로는 파격적인 서민 지향적 행보를 많이 했다. 귀족들은 그의 이러한 행보를 '빵과 서커스'를 통한 '대중 추수주의'에 지나지 않다고 비난했다. 그리고 로마 귀족들은 연극배우를 천시했는데, 네로는 친히 연극배우로 나서기도 했다. 이는 대중들에게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훗날 네로를 축출한 이후 차례로 잠시 집권했던 군벌 귀족들은 대중을 끌어들이기 위해 네로 묘소를 참배하기도 했다. 네로가 죽은 후 일부 지역에서는 '네로가 우리를 구원해 줄 것'이라는 네로 부활설이 떠돌 만큼, 그는 '민중의 통치자'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원로원 중심의 귀족들은 네로와 갈등 관계에 있었고 결국은 그를 축출하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그들은 네로에 대한 부정적인 문헌들을 남겼다. 현대의 네로에 대한 평가들은 이런 문헌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결과다. 반면 현대의 네로 연구가들은 이 문헌들을 비판적으로 읽으면서 네로를 새롭게 조명했다. 이런 관점에서 바울을 보자. 바울은 하층 시민과 서민을 위한 정책을 펴고 귀족들의 횡포로부터 그들을 보호했던 네로에 대해 우호적이지만, 대중의 그리스도로 부상한 네로와는 다른 그리스도를 주장하면서 참메시아와 거짓 메시아에 관해 이야기한다.

로마 안의 이스라엘 사회에는 소수의 시민과 다수의 비시민이 있었다. 물론 시민인 이스라엘인들이 교포 사회의 중심이었고, 이들의 콜레기아인 이스라엘 교포 사회는 로마시에서도 비교적 많은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 주변의 다른 사람들이 질시할 정도였다. 그런데 클라우디우스 황제 때 이스라엘 그룹 내에서 일부가 로마에 저항하는 소요를 일으켰다. 로마 문서에 의하면 소요를 일으킨 이들을 크레스투스(그리스도)라고 지목한다. 즉 이스라엘 교포 사회의 급진주의 그리스도인 그룹이 시위를 일으키자 황제가 진압‧추방했고, 이스라엘 사회에 주어졌던 특혜들이 회수되었다. 이는 이스라엘 교포 사회를 질시했던 사람들에게는 그들을 공격해도 좋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졌고, 귀족들은 그런 대중 정서를 이용해서 이스라엘계 사람들을 착취하고, 성적 농락의 대상으로 삼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네로가 즉위했다.

네로는 빈민 지역에서 일어나는 특정 종족에 대한 집단 공격을 중지시키기 위해 공권력을 투입했다. 이스라엘을 보호하려는 것이 아니라 로마시의 소요를 막아서 자신의 세력을 안정시키려는 전략이었던 것 같다. 안정된 서민 사회가 권력의 한 기반이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네로가 그들을 보호하는 것처럼 생각했을 것이다. 로마 사회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 안에서 혁명적 그리스도파는 억압자인 클라우디우스가 죽은 것을 기회로 삼아 혁명적인 활동을 재개하고자 했는데(아마도 바울은 브리스가 부부로부터 정보를 들은 듯하다), 바울은 그들을 제지시키면서 권력에 복종하라고 한다. 그것은 많은 이들을 무의미한 죽음으로 내모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세금을 내라고 한다. 당시 로마에서 세금을 거부하는 이들은 그리스도 분파였다. 바울은 이런 무모한 행동이 수많은 대중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고 본 것 같다. 바울이 권력에 복종하고 세금을 내라고 한 것의 내막은 이렇다.

- 바울은 혁명가인가. 그의 리더십은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네트워크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가.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바울이 혁명가였다는 말도 설명이 필요하다. 많은 이스라엘 급진주의자들은 예수를 포함해 때가 찼을 때 하나님의 변혁이 일어난다고 믿었다. 바울도 그랬던 것 같다. 바울은 현존하는 예루살렘과 도래할 예루살렘을 이분화시켰다. 현존하는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을 비판하고 도래할 예루살렘을 새 하늘 새 땅으로 여겼다. 자신도 그리스도파였지만 로마의 급진주의 그리스도파를 비판했다. 때가 차지 않았을 때 분별없이 일으키는 폭력적인 저항은 바울이 그동안 대변한 약자를 위험에 빠뜨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변혁이 일어나길 꿈꾸고 살았다는 점에서 혁명가이지만, 그가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혁명 이념이 아니라 억압당하는 사람들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그런 것들을 주의해야만 혁명가 바울을 제대로 해석할 수 있다.

▲ "바울의 서신들이 이웃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을 이웃으로 못 만든 종교에 대한 신학적 저항의 기록들이라면, 바울을 존경하는 우리도 잃어버린 이웃을 되찾는 종교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김진호 실장은 교회가 이웃을 찾는 노력을 하길 바랐다. ⓒ뉴스앤조이 최유진

- 바울에게 혁명가, 투사, 저항자 등의 수식어를 붙일 수 있을 것 같은데, 선호하는 수식어는 무엇인가.

민중의 대변자 바울이다.

- 민중의 대변자 바울은 무엇을 옹호했으며 무엇에 저항했는가. 그가 꿈꿨던 대안 사회는 어떤 것인가.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의인론을 이야기하면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차별이 없다고 말한다. 그는 디아스포라 유대 사회에서 여자나 노예 출신의 사람들이 차별받는 것에 저항했고 그들을 옹호했다. 물론 바울도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고린도서에서 보면 방언하는 사람들, 특히 여성들, 남편과 성관계를 거부하는 여성들에게 폭언을 한다. 노예와 주인이 차이가 없다고 말하면서도 빌레몬서에서 보면 노예의 자유 문제를 주인에게 상의했다. 그러나 바울이 가진 꿈을 위해 나갔던 영적 전쟁은 우리가 바울을 지금 기억해야 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된다.

- 바울이 사용하는 핵심 단어들은 민중의 대변자 바울을 어떻게 보여 주는가. 그의 죄론, 율법관, 의인론 등의 논쟁과 관련해 바울이 민중의 대변자라는 점을 잘 보여 주는 대표적인 용어들을 설명해 달라.

이스라엘 유대주의자 논리는 이스라엘인들이 더 의로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연히 율법에 더 친숙해져야 한다. 이들은 할례를 받고 안식일과 여러 명절 등을 지킬 때 의인이 될 수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죄인으로 보았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죄인이라는 자괴감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바리새인은 한 주에 이틀을 단식하는 삶을 모범으로 삼았다. 이는 일주일에 이틀을 노동하지 않아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고 영양실조에도 빠지지 않는 사람들의 신앙이다. 절기를 지키는 문제도 한 해의 절기 때마다 보름 동안 경건해야 하고 십일조도 바칠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한다. 더 순전한 사람은 순례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그럴 수 없는 사람들은 신앙의 결격사유를 가진 자들이 된다. 할례 또한 남자들의 영역이라는 데서 종교와 성별의 사회적 통념이 그 안에 들어가 있다.

바울은 이러한 유대주의 담론을 무력화시키려고 했다. 의롭게 되는 것은 할례를 받거나 절기를 지키고 율법을 충실히 지켰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선언한다. 율법 자체가 성별 시스템이 아니고 특권계급 시스템이 아니라고 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가치 없다고 하는 사람들을 가치 있다고 평가해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바울의 메시지는 복음적이지만, 동시에 사회와 분리되어 있지 않고, 사람들의 삶과 경험 등과 결합되어 있었다.

한국교회 예수 운동, 잃어버린 이웃 찾는 것

- 책의 장마다 메트로폴리탄 서울의 정황과 관련된 설명이 나온다. 바울이 한국의 주류적인 그리스도인에게 던지는 비판은 무엇이며, 민중 대변자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희망의 메시지는 무엇인가.

고린도, 빌립보, 데살로니가, 로마, 갈라디아 등 지역마다 특정한 정황들이 있었다. 그 지역을 하나의 은유로 읽을 수 있지 않겠는가 생각했다. 그 은유로 서울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예를 들어 빌립보 같은 경우는 병든 이가 있었고, 병든 이는 그 지역이 겪었던 사회 역사적 재앙과 얽혀 있었고, 질병은 사회 역사적인 환경과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 오늘날 서울도 질병이 넘쳐나는데 의학이나 심리학은 그 질병을 성격 같은 개인적인 문제로 환치시킨다. 자기 계발 담론도 마찬가지다. '당신이 이런 전략을 못 취해서 실패했다'고 말한다. 좌절과 고통과 절망을 개인화시킨다.

빌립보라는 도시에서 발생하는 질병의 문제를 그 도시가 겪었던 사회 역사적 상황과 관련해 읽을 수 있는 것처럼 서울에서의 질병의 문제도 오늘 우리의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 구체적으로 IMF 이후 한국 사회에서 신체와 정신적 문제, 우울증 등의 스트레스 질환들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쳐 질병에 빠지게 한다. 심한 자들은 일상에서 만나기 어려운 사람으로 변하는 상황이 연출된다. 이런 현상을 바울의 빌립보에서 활동과 연관해서 읽으면 우리 시대와 사회에 대한 신앙적인 문제 제기가 되지 않을까 하는 고민에서 각 장마다 포스트 역사주의적 상상력을 담아 보았다. 포스트 역사주의는 역사가가 처한 상황에서 역사를 다시 읽어 보자는 것인데 우리가 처한 자리에서 바울의 텍스트를 다시 읽어 보자는 제안이다.

- <리부팅 바울>에서 예수 운동의 계승자로서 바울에 대한 역사적인 상황들을 재구성하려는 노력들을 인상적으로 읽었다. 한국교회가 바울을 예수 운동의 정신과 관련해 어떻게 읽었으면 좋겠는가.

작은 교회를 목회하면서 사람들을 만나 보면 에큐메니컬 그룹이나 복음주의나 별로 차이가 없다. 너무 유사한데 신앙적인 언어와 설교, 성경에 대한 대화에서 진영에 빠져 버린다. 진영의 문제로 갈라지는 신학적 해석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성숙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 같다.

또 하나는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간 독서 방식과 표현 방식의 차이가 있다.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표현이 점점 편집증적으로 되어 버렸다. 이웃 없는 종교가 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 실제로 서로 행동하거나 나누는 일상적 대화를 보면 접점이 많고 협력도 많이 하고 있는데, 신앙적인 언표의 상황으로 들어가면 벽을 쌓아 버린다.

고린도서에서도 나타나지만 바울은 자기 언어를 주장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이야기한다. 내가 말하고 있는 사람들의 관심과 상황 속으로 들어가서 말하고 있다. 기독교인이거나 비기독교인, 에큐메니컬이나 복음주의 등에 상관없이 자기 주변 사람들의 입장에서 이야기하고 서로 이웃이 되는 관계를 맺으면 좋겠다. 바울의 서신들이 이웃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을 이웃으로 못 만든 종교에 대한 신학적 저항의 기록들이라면, 바울을 존경하는 우리도 잃어버린 이웃을 되찾는 종교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교회가 예수와 바울을 통해 이웃을 찾는 노력을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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