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다니던 교회가 건축을 한 적이 있다. 누리끼리했지만 귀엽고 아담했던 예배당을 헐고, 그동안 교인들은 다른 곳에 임시로 큰 천막을 짓고 예배를 드렸다. 한 번은 전 교인이 건축 현장에 가서 함께 일한 적도 있었다. 나 같은 '초딩'들도 노가다(?)에 투입됐는데, 몇 장 안 되는 벽돌을 나르면서 나름 뿌듯함을 느꼈다. 내 교회를 내가 세운다는 것이 뿌듯하고 스스로 기특하게 느껴졌다. 그땐 교회라 하면 당연히 100% 건물을 두고 하는 말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교회를 세우는 일과 건물을 짓는 일이 상관없다는 것은 한참 후에 깨닫게 되었다.

'교회=예배당'이란 상식은 애석하게도 잘못된 것이었다. 예수를 믿는 이들이 모인다면 그 자체가 바로 교회라고 대학생 때 처음 배웠는데 충격이었다. 내가 믿고 있던 상식은 진짜 상식이 아니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의 전통과 관습, 문화가 대부분 잘못된 상식이며, 성서적 근거가 거의 없는 이교적 부산물임을 충격적으로 밝혀 주는 책이 있었으니, 바로 <다시 그려 보는 교회>의 전편이라고 할 수 있는 <이교에 물든 기독교>이다. 웬만한 기독교의 관습은 죄다 그리스 철학이나, 이교, 중세 가톨릭에서 비롯된 역사적 재활용 쓰레기에 가깝다. 이 모든 것이 이제는 확고부동한 전통으로 변모하여 사람들을 옥죄고 있다.

▲ <다시 그려 보는 교회> / 프랭크 바이올라 지음 / 이남하 옮김 / 대장간 펴냄 / 368면 / 1만 4000원
<이교에 물든 기독교>가 전방위적 고발이라면, <다시 그려보는 교회>는 새로운 교회를 궁금해하고 꿈꾸는 이들을 위한 변호인이다. 새롭게 그려야 할 교회의 모습을 주제별로 하나하나 다루는 프랭크 바이올라의 글은 거침없는 성실함으로 단단히 무장했다. 오랫동안 유기적 선교 교회 운동에 몸담아 왔던 저자의 교회론은 한때 큰 주목을 받았던 '이머징 처치' 같은 현란함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 이름처럼(유기적 교회 organic church) 신선하고 건강한 교회론을 제공해 준다.

프랭크 바이올라가 가장 경계하는 것은 건물 중심의 패러다임에 속박되어 영적으로 마비된 현대 교회의 공적 예배에서 비롯된다. 현대의 교회는 공연식 예배당에서 성도들이 강단을 향해 한 방향으로만 배치되어 설교자만을 응시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1세기의 교회는 가정집에서 서로 마주 볼 수 있었다. 성직자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이 공동체는, 어느 한 사람에게만 설교를 맡기지 않았다. 고정된 예배 순서도 없어서, 삼삼오오 둘러앉은 모임 속에는 사랑과 자유의 나눔이 풍성했다.

또 한 가지는 성직자 중심의 패러다임이다. 저자는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목사나 장로는 직분이 아닌 기능과 역할로서의 명칭이었음을 이야기하면서 계급화된 현대 교회의 전문 사역자와 직분이 불러일으키는 부작용에 가슴 아파한다. 교회의 과업과 공동체의 섬김이 소수 사역자에게만 집중되면서 대다수의 성도는 '평신도'라는 단어로 싸잡아 불리게 되며 영적 무기력증에 빠져 버렸다. 종교개혁의 가장 큰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전 교인 제사장주의는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져 있다. 이러한 현대의 교회는 기업에 가까우며 유기적 교회로서의 모습은 상실됐다.

저자가 밝히는 대안은 간단하다. 그렇지만 절대 만만치 않다. 성서적인 교회에 근접하기 위해서는 건물 중심의 기업형 제도권 교회를 버리고, 1세기 교회가 보여 줬던 가정집 형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또한, 성직자 중심에서 탈피하여 전 교인 제사장주의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런데 건물과 성직자 없는 교회, 상상하는 것조차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야말로 '너무 멀리 왔나요'다. 선교 단체 간사로, 전도사로 살고 있는 나에겐 더더욱 어렵기만 하다.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그들을 알기 전까지는 모든 사람이 정상적이다." 이것은 유기적 교회 생활에 뛰어든 사람들에게 꼭 들어맞는 말이다. 문제는 끝도 없다. 제도권 교회에서 주일 아침에 두 시간 동안 "회중석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게 훨씬 쉽다. 거기서는 누구나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 그렇지만 유기적 교회 생활은 영광과 피로 얼룩진 상처의 결합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작품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분의 형상으로 바꾸시려고 정하신 방법이다. 왜냐하면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기 때문이다(316~317쪽).

지금 당장 우리 교회와 삶에 적용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한국교회도 유기적 교회로의 전환과 시도를 더 진지하게 고민하고, 결국 받아들이게 되는 경우가 많이 생길 것이다. 지금도 상당한 수로 파악되는 한국교회 가나안 성도들이 다시 제도권 교회로 유턴하겠는가. 그런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가정집에서의 유기적 교회가 풀뿌리처럼 되살아날 때에야, 비로소 한국교회도 잃어버린 생명력을 되찾지 않을까. 그렇게 되기까지 우리는 숱한 고난과 진통의 시간을 통과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긴 터널의 끝에, 이 땅의 교회를 두 팔 벌려 반기며 안아 주실 주님의 긍휼과 사랑을, 우리는 결국 만나고 말 것이다. 그리고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의심과 회의가 더 많은 내게도 유기적 교회의 희망이 찾아오기를 소망한다. 여전히 조심스럽지만.

하지만 미개척 분야로 향한 사람들에게 따라오는 고통과 관계없이 몸의 생활 속에서 사는 삶의 영광스런 유익은 대가를 훨씬 능가한다. 하나님은 깨어진 사람들 위에 세우신다; 하나님의 집은 싸움에서 얻은 것들로 지어진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라고 했다. 왜냐하면, 우리가 구세주의 심장 박동을 느낄 수 있는 곳이 거기이기 때문이다(317쪽).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