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CC 부산 총회 개막식에서 설교한 아르메니안정교회 총대주교 카레킨 2세. (사진 제공 WCC)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마음이 그렇게도 무디니 말입니다. 그리스도가 마땅히 이런 고난을 겪고서,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눅 24:25~26)

존경하는 대한민국의 지도자 여러분,
존경하는 세계교회협의회 지도자 여러분,
존경하는 남녀 성직자 여러분,
이 총회에 오신 사랑하는 참석자 여러분.

세계교회협의회 제10차 총회에 참석하신 여러분께 저희는 한없는 영적 기쁨을 가지고 환영의 인사를 드립니다. 저희는 성경에 나오는 아라랏산 둔덕에 자리 잡고 있는, 유서 깊은 아르메니아에서 왔습니다. 우리 고장 사람들은 역사상 최초로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여서 기독교 국가를 건설했던 사람들입니다. 옛날 모교회 성 엣츠미아진(Etchmiadzin) 관구로부터 1700년이 넘는 긴 세월을 지내 온 강복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온 세상 방방곡곡 비추기 위해 선교 활동에 매진하시다가, 여기 모이신 우리 형제자매, 친구 들과 동역자 여러분 모두에게 전해 올립니다.

이번에 저희들을 초청해 주신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특별히 복을 내려 주시기를 빕니다. 아르메니아 사람들은 한국 사람에 대해서 한 가족 같은 느낌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희들처럼 한국 국민들은 아픔을 아는 민족입니다. 오랜 세월 식민지 지배를 받았고, 분단의 역사를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 어려움 속에서도 한국인들은 그들의 창의력과 자유를 향한 열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복음의 열정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빛을 찬란하게 비추고 있으며, 한국 기독교 공동체가 지닌 점증하는 힘을 모두 자랑스럽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세계교회협의회에 깊은 감사를 드리고, 그 임원들 그리고 WCC 총무이신 울라프 픽세 트베이트 박사에게 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아르메니안 교회는 지난 50년을 넘는 세월 동안 이 협의회 회원으로 지내 올 수 있게 해 주셨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특히 근년에는 트베이트 박사님이 성 엣츠미아진 관구를 예방해 주신 데 대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에큐메니컬 정신은 아르메니안 문명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봅니다. 특별히 아르메니안 사도 교회의 복 되신 선조들에게서 그 내력을 찾습니다. 가령 자애로우신 성 네르세스, 람브론의 성 네르세스, 그리고 그들이 남긴 신앙적인 훈계들에서 그 증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중세기에 로마 가톨릭교회와 비잔틴 교회 사이에 과감한 대화들이 오갔는데, 그들은 표어로 "일치는 교회의 본질적 요소, 자유는 비본질적 요소, 사랑은 만물 속에"라는 말을 했습니다. 오늘날도 아르메니안 교회는 그리스도의 성 교회의 영광을 위하고 세계 평화를 위하고 인류의 복지를 위하여 공동의 광장을 마련하고, 상호 협력적인 지원 활동을 이룩하려고 넓게 대화를 펼치는 가운데 있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주님께 영광을 드립니다. 주님의 임재하심이 우리 인간들의 심령에 빛을 주십니다.

방금 우리들은 복음서에 나오는 엠마오 도상에서 일어났던 기적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몇 시간이 안 되어 두 제자에게 나타나셔서 그들과 함께 무슨 이야기를 나누셨는지에 대해 전해 주고 있습니다. 이 제자들은 너무도 의기소침해서 그들의 스승도 몰라 볼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주님의 말씀과 임재를 통해서 그들의 마음에서 의심을 제거하여 주시고, 소망과 믿음, 구원의 하나님을 깨닫도록 깊은 인상을 남겨 주셨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그리스도를 따르던 이들을 만나 그들의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모인 무리들이 지녔던 불신과 실망은 어느새 사라지고 그들은 곧 교회가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의 그 방 안에는, 그리고 그 방에 있던 제자들 가운데는 완벽하고 영광스러운 일치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부활하신 주님의 말씀이 성취된 것이었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운 것이다. 그것은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것은 이것이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여라." (요 15:16~17)

약 2000년이 지난 지금, 우리 각자가 자기 나름의 선교 활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성 요한의 말씀은 진실로 여기 모인 우리들에게도 들려오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그들과 똑같이 한 장소에 한 마음으로, 한 포도나무에 달린 가지들처럼 모여 있습니다. 우리 각자는 서로가 다르고 모두 독특하지만 같은 뿌리에서 돋아난 가지들입니다. 우리들의 공통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주님을 향한 우리들의 사랑은 우리를 하나로 엮어 줍니다. 이렇게 일치를 이루는 일이 에큐메니컬 운동에 참가하는 모든 사람들이 실천해야 할 일들 가운데 가장 첫째요 우선적인 일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힘쓸 것은 영적인 일치입니다. 믿음과 봉사에서 하나 됨, 예수 그리스도와 거룩한 교회의 이름으로 온 세상에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서 하나 됨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하고 그리스도의 임재 안에서 주저하지 않고 과감하게 행동하며 사는 것이 복음 증거 활동에 동반되어야 할 내용입니다. 과연 우리들의 말과 행동은 사려가 깊고 침착하고 세심한 배려가 수반된, 즉 책임성이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일치를 이루어 가시는 주님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 그 일을 흐지부지해 버린다면, 이것은 "언덕 위에서 비추고 있는 빛"을 가리는 일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세상의 어둠을 몰아내고 인류에게 비전을 분명히 보여 주려는 단 하나밖에 없는 작업을 그 근본에서부터 저지하려는 행동입니다.

***

성서 시대가 시작되기 전 이교도들의 문화는 세상에서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일에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현대사회에서도 우리 곁에 살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 그 가난이 물질적인 가난이건 정신적인 가난이건 간에, 그들을 무시하고 무관심하게 대하는 것은 역시 분명합니다.

정반대로,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을 베푸신 분이셨습니다. 자신의 짧은 생애와 사역의 기간을 심령이 가난한 이들에게 위로를 전하고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가난을 면치 못하는 이들을 구제하는 일로 보내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히브리 옛 예언자들의 말씀을 부연하여 가르치시면서, 인간 가족 속에서 추구해야 할 중심되는 가치관이 바로 이런 것이라고 일러 주시고, 참된 인간이 되려면 이런 관심을 가지고 살아야 할 것을 가르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같은 비중으로, 우리의 가난 문제 또는 인간의 질병 등 모든 문제의 '해결책'을 그리스도이신 당신 자신에게 연결 지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정함으로써, 주님께서 희생 제물로 돌아가신 후에 부활하셨던 사실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인정함으로써, 또 "나를 따르라"고 하시며 사랑의 손길로 초대해 주시는 주님 앞에 우리가 전심으로 응답하는 것이, 모든 문제의 해결책인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에 토대해서, 우리 주님께서는 교회를 설립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세상에 "다가서 있는" 그리스도의 그릇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가지는 이번 총회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한 표어를 내세우게 되었습니다.

"생명의 하나님이시여, 무엇보다도 먼저, 그리스도의 성교회가 추진하는 선교 활동을 강건케 하셔서 저희로 하여금 정의와 평화의 길로 가게 해 주시옵소서."

오늘날 이 세계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하나는, 인류가 하나님을 떠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인류는 자만심에 부풀어 자비롭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며 산다는 말은, 자기 이웃의 권리를 무시하고 다른 사람들의 인내심이 허락하는 한 무슨 방법으로든 자기 뜻을 관철하며 사는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기독교는 우리에게 전혀 새로운 삶의 자세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엠마오로 잘못 가고 있을 때에, 주님은 따라오시며 우리를 바로 인도해 주십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비록 우리가 참패를 당한 순간에도 그리스도는 우리들과 함께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주님이신 줄을 알아보지 못하는 때에도. 주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 곁에 계셔서, 우리의 영혼을 양육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열어 주십니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의 심령을 감화하셔서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후덕함과 형제애와 소망을 함께 나누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깨닫는 것은 우리 이웃을 향해서 우리가 인격적인 접근을 해야 할 것과, 어느 누구에게든지 예외 없이 그들의 인격을 존중해 주며 인격적 성결을 이루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성교회가 지닌 고유한 사명이며, 어느 행정기관이나 과학기술에 위임하거나 위탁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우리들이 내세운 주제의 한 가지가, 선교에 우선적인 중점을 두어서 이 세상을 정의와 평화가 차고 넘치게 하자는 것입니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우리는 겸손한 자세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늘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다차원(many dimensions)의 세계로 인도하십니다. 물론 이 말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곳에는 저택(many mansions)도 많다는 말도 되겠지만, 여러 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는 말도 되고, 생활 방식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한데 모여서 진정한 가정을 이루었다는 말도 됩니다. 하지만 그 가정의 기초를 어디에 두었는가는 분명합니다.

그 기초 가운데 첫째로 중요한 분야는 도덕성입니다. 도덕성이라고 하면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습니다마는, 무엇보다도 선한 모본을 보이며 사는 일을 말합니다. 이것은 교회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 지도자로서 우리들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향해 교회가 전하고 싶은 도덕적 가치를 한눈에 보여 주는 좋은 본을 보여야 합니다.

교회로서는 우리의 도덕적 가르침의 기초가 분명히 그리스도에게 있고, 우리의 생각은 그분의 사랑과 연민에서부터 펼쳐져야 합니다. 차별적이거나 조건적인 윤리가 아니고, 자비의 정신에 입각해서 모든 사람을 관용해야 할 것입니다. 아무 상처를 입지 않고도 사회 속에서 이 꿈이 실현된다고는 장담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영적인 도구들로 우리의 그 모든 상처들을 치유할 수 있게 될 것은 분명합니다.

두 번째로 필수적인 요소는 교육입니다. 교육을 통해서 자기 이웃을 존중하는 마음이 배양됩니다. 서로 용납하고 서로 협력하는 힘입니다. 이로써 전에는 얻을 수 없었던 기회들이 생기게 되고, 계급사회의 벽, 인종적·종교적·사회적 분파를 넘어설 수가 있게 됩니다. 전제가 없는 순수한 교육은 우리들에게 인류 번영의 영원한 방해자인 미신, 폭력, 미움, 편견의 동굴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줍니다.

한때 교육은 몇몇 행운아들에게만 혜택을 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20세기에는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 교육의 새 바람이 불어 만인에게 교육이 부여되었습니다. 이것은 중대한 역사 전환이었는데, 그 동인은 기독교가 말하는 만인평등이라는 도덕적 통찰과 모든 인간에게 진리를 터득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기독교적 이해가 깊이 토대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교회가 현대 교육제도권 밖으로 밀려나게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인류 역사 속에서 위대한 교육기관의 하나였던 교회의 정체성에 대해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고등 학문을 탐구하는 마당에서 떠나지 말아야 하며, 인류가 질문을 제기하는 곳에서 정통한 전문가로 계속 남아 있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학문 연구의 결실들, 특별히 과학기술이 인류의 삶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풍성하게 만드는 데 쓰이도록 이를 고상한 방향으로 인도해 나가야 합니다.

셋째로 중요시해야 할 내용은 인간의 근본적 제도인 가정입니다. 이것은 도덕성이나 교육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사회가 가정을 지켜 줄 만한 기반을 제공하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지금껏 가정을 지켜 오던 정신적인 기반도 더 이상 가정을 지탱해 주지 못하는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지난 2000년 동안 가정을 지켜 온 성서적 가르침의 유산과 기독교 문명이 훌륭했음을 봅니다. 남녀가 엄숙하게 하나로 연합하며, 자녀들과 부모와 조부모님들이 한데 어울려 세대 간의 주고받음이 있는 가정, 이것이 인류 속에서 이루어지는 진정한 다채로움입니다. 깊은 의미에서 가정은 인간이 품은 소망을 나타내는 곳이며, 그 다채로움으로 서로 한데 어울려 자녀를 낳고 사랑으로 연합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바는 가정이 우리 인간을 성숙시키는 '학교'의 구실을 해 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문명권의 지혜들이나, 오랜 전통을 지닌 다른 종교의 견해와도 부합하는 내용이라고 봅니다.

물론 기독교인인 우리들은 가정생활을 보존해 나가기 위한 우리 나름의 울타리를 쳐 놓고 있습니다. 이로써 하나님과 인간 간의 관계가 어떤 것인가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전통적인 가정을 실현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성가정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출산이 소망을 지닌 축복이 아니고 무거운 짐으로 여겨진다면, 어떻게 그리스도 아기가 탄생하신 신비를 이해할 수가 있을까요? 부권이 많이 평가절하된 사회 속에서, "우리 아버지"(아르메니아어로, Hayr Mer)라고 하는 기도 문구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그 무엇보다도 가정생활에서 흔히 경험할 수 있는 자기희생은, 어떤 사람을 대신하여 죽는다든지 약자를 돌본다든지 하는 기독교가 말하는 개념과 전적으로 일치하는 것입니다. 가정이 몰락하면 교회도 같은 운명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정을 이루고, 또 가정을 튼튼하고 친절하고 사랑이 가득한 곳으로 지탱해 나가는 일이야말로 교회의 사활이 걸린 문제입니다.

마지막으로 평화가 지닌 가치가 무엇일까요? 우리 세계는 평화를 원하지만 실현되지가 않습니다. 21세기에 평화가 실현된다면, 그것은 우리를 까무러칠 정도로 사기 저하시키는 일이 될 것입니다. 기독교 제3천 년으로 들어서면서, 우리들은 지금까지 꿈꾸던 그 어떤 것보다도 더 희망차고 적극적인 자세로 세계 평화를 꿈꾸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고통스러운 것은, 끊임없이 견딜 수 없는 폭력과 끝없이 지속되는 전쟁을 동반하고 있는 중동지방, 특히 시리아와 이집트 등지의 내전입니다. 참으로 우리는, 무법자들과 폭력 아래 고통당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한없는 동정을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인종, 종교, 신앙 전통, 국적과는 상관없이 그들의 모든 가정을 위해 기도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그 모든 갈등이 어서 속히 끝나고 이성과 대화가 있는 사회가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교회의 일원으로서 우리는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 된 사람들이 참혹하게 당하고 있는 고통에 대해서 아픔을 느낍니다. 근년에 이르러 자주 빈발하고 있는 사건들은, 이것이 과격분자들에 의해 일어나는 박해인 것으로 판명되고 있습니다마는, 때로는 신분을 가릴 것 없이 무차별하게 죽어 가거나 때로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죽어 가고 있습니다. 사도 시대 이래로, 아르메니아 주변에서 보면, 기독교인 사회 공동체들은 그들이 거주하는 곳에서 생산적으로 기여하면서 살았고, 중동 지방 전체적으로 평화롭게 살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역사적으로 그들이 사는 곳에서 평화를 이루는 역할을 담당해 왔습니다. 그들이 해당국들을 위해 대처한 내용들은, 그 사회가 정의를 사랑하는 사회냐, 그리고 그들 대다수 국민 또는 정부가 인권을 존중하느냐를 중요시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중동 지방에서 폭력 아래 압도당하고 있는 기독교인들은 그저 순교를 당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번 협의회와 우리나라에서 우리 입과 행동을 모아서, 이런 폭압적인 일이 더 이상 지속되지 않도록, 해당 지역에 평화가 성취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저희 아르메니안인들을 괴롭힌 특별한 세력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 형제들이 당한 이 격통을 아시는 분들은 다 잘 알고 계십니다. 오는 2015년이면 아르메니아에 살고 있는 아르메니안인들과 나고르노-카라바와 세계 모든 나라들이, 이 역사의 분기점이 되었던 최대의 비극적 참화 100주년을 맞이하여 그 기념행사를 가질 것입니다 이것은 오토만 터키에 의해 자행된 대량 인종 학살 사건이었습니다. 1915년 이후 4세대에 걸친 세월이 흐르도록 그날의 공포가 아직 우리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모종의 공식적인 조치가 취해지는 것으로, 또는 온 세계가 달려들어 가해자를 저주한들, 정의를 향한 우리의 간구가 성취된 것으로 볼 수가 없습니다.

이 사건을 보면, 장차 올 22세기와 그 이후에도 지구상에서 이런 폭력과 비극적인 일들이 사라질 것이라고 꿈꾸기는 어렵다는 것을 알게 해 줍니다. 대단히 감사한 것은 근년에 WCC가 우리 형제교회들과 20개국 이상의 나라들과 더불어 아르메니아 대량 학살 사건을 탄핵하는 성명서를 발표해 주신 일입니다. 그러나 세계가 지금부터 100여 년 전에 이러한 1925년의 잔학, 학살, 인종 청소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예방책을 세웠다면, 그 고통과 참상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후일에 유럽·캄보디아·아프리카에서 겪은 동류의 희생자들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교회로서는, 오늘날 세계가 주목하고 있는 동안에도 발생하는 죄악들에 대하여 강하게 반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또한 우리는 인권을 지키기 위하여 온 세계가 준수해야 할 지침을 세우도록 강력하게 요구해야 합니다. 시리아와 이집트의 내전을 가라앉히기 위해 싸울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문제가 포함될는지는 차치하고서라도 말입니다. 이 기본 인권 조항을 범하게 되면, 이 세상 어떤 나라든 이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목소리로 주장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정의와 인권의 기반이 되어 있지 않는 한, 우리가 추구하는 평화는 잠정적일 수밖에 없고 표류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상에서 언급한 항구적인 가치들은 지난 2000년 동안 기독교 역사에서 얻은 결실들입니다. 그것들은 우리 교회가 유산으로 상속해 오는 내용들입니다. 이 가치들을 우리 사회 속에서 가꾸는 일이, 우리들이 부르심을 받은 바 선교적 사명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최대한 겸손한 자세로 선교를 수행해야 합니다. 하지만 앞서 말씀드린 인간의 가치들을 찾아보려면 예수 그리스도 속에서 그분이 창설하신 운동 속에서 찾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우리가 확신 있게 말해야 합니다.

참으로 우리가 이 세상을 둘러보면, 혼동과 슬픔뿐인 것을 봅니다. 우리 자신이 살고 있는 무시무시한 시간들 속에서 세계는 진정 그리스도를 찾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우리는 다시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일어났던 기적을 통해 가르침을 받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 있었던 여행자들은 우리와 똑같이 혼동 속에 있었고 의기소침해 있었습니다. 그들도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주님께서 그들에게 다가오셨고, 그들과 함께 걸어 주시며, 그들의 관심사에 대답해 주셨습니다. 주님의 말씀과 임재는 그들이 살고 있던 세상에 의미를 부여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몸으로 존재하고 있는 교회가 반드시 붙들고 있어야 할 메시지입니다. 우리가 정의와 평화를 성취하기 위해, 인간의 복지를 이루기 위해 먼저 해야 할 일은 엠마오 도상에서 사람들을 만나는 일입니다. 연민의 정을 가지고 그들에게 다가서며 함께 동행해 주고 그들의 짐을 덜어 줘야 합니다. 가장 높은 목표에 도달하려면 우리가 밞은 땅에 확실하게 뿌리박고, 사람들과 더불어 서로 눈과 눈을 마주보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들과 대화를 나누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 안에서 그들과 함께 행동해야 합니다.

오늘 이 총회 기도회에 동참하여 여러분과 함께 하나님께 성교회의 선교를 위해 기도할 수 있게 된 것은 저에게 무한한 기쁨이요, 제 마음에 큰 위안이 됩니다. 간절히 빌기는, 성령님께서 항상 여러분의 마음에 용기를 주시고, 진실로 세상을 구원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여러분을 참된 평화와 참된 정의의 길로 인도하시기를 간구합니다.

이 총회에 강연자로 초청해 주셔서 그리스도 안의 형제 된 사랑의 친교를 나누게 해 주신 데 대해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주님의 은혜와 사랑과 평화가 여러분 모두와 그리고 모든 인류 위에 함께 있기를 빕니다. 아멘.

카레킨 Ⅱ세 / 아르메니안정교회 총대주교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