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11일 <뉴욕 타임즈>가 “나쁜 사람이 좋은 신학자가 될 수 있을까?”(Can a bad person be a good theologian?)라는 기사를 냈고, 미국은 물론이고 우리나라에서도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존 하워드 요더는 <예수의 정치학>을 비롯하여 수많은 저술과 강연을 통해 반제국주의적 성경 읽기와 교회론에 새로운 통찰을 제공했다. 특히 제자도와 공동체, 평화를 강조하는 메노나이트 교단 출신 신학자요 윤리학자였기 때문에 파장은 더 컸다. '실천과 비폭력, 평화의 전도자 요더도 별 수 없는 인간이란 말인가? 그의 신학의 진정성을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가.' 이런 물음들이 들려온다.

<뉴욕타임즈> 보도를 정리하면 이렇다. 모든 사람은 이상적인 사람이 될 수 없다. 전문 종교인들도 사람이다. 하지만 적어도 막돼먹은 놈(lout)이나 얼간이(jerk)가 되어서는 안 된다. 신학적으로 지대한 공헌을 한 요더가 과거에 여러 여성들을 성추행하였고, 그 후 교회와 교단에서 치리를 받아 교수직을 정직당했다. 하지만 4년 후 요더는 '회개의 영웅'으로 복귀하였다. 요더는 치리 기간 동안 피해 여성들에게 충분한 사과를 하지 않았고, 재정적인 보상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메노나이트 교단도 요더의 성추행 문제를 은밀하게 처리함으로써 이 문제를 은폐하려 했던 것은 아닌지 의심된다.

요더의 영향을 받은 일명 요더리안들은 이 기사를 접하고 실망감을 금할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그가 소속된 메노나이트 교단이 과거 이 사건에 대응했던 방식은 우리가 기대했던 높은 윤리적 수준(?)을 지향하던 모습과는 사뭇 거리가 멀어 보인다. 들려오는 소문이 어느 정도가 진실일까. 글을 전개하기에 앞서 이 글이 <뉴욕 타임즈> 기사가 거짓이나 혹은 과장 기사라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님을 말하고 싶다. 과거 이 사건을 다룬 메노나이트 교회 및 교단의 대응 방식에 아무 문제가 없었다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떠도는 소문 그 이면에 우리가 놓칠 수 있는 중요한 가치 하나에 집중하려는 것이다.

사건의 재구성

1992년, 8명의 여성이 자신들이 당한 성추행 사건을 다루어 달라고 교회에 요청하면서 이 사건은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되었다. 피해 여성들의 요청으로 교회는 즉각 리더 그룹을 소집하여 이 사건을 전담할 태스크포스 팀을 구성하였고, 나아가 그 지역 교회가 소속된 미시애나(Michigan-Indiana) 콘퍼런스와 요더가 소속된 아나뱁티스트 메노나이트 신학교(Anabaptist Mennonite Biblical Seminary, 이하 AMBS)에서도 대책을 강구하기 시작하였다. 11개월 동안 조사가 진행되었고, 요더와 피해 여성들의 심리적 치료 및 회복을 위해 '책임 그룹'(Accountability Group)을 구성해 정기적으로 재활 모임을 가졌다. 그 과정에서 요더의 절친한 친구였던 스탠리 하우어워스나 글렌 스타센 등이 그를 설득한 것도 한몫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당시 치리 과정은 가해자였던 요더에게 지나치게 집중되면서 피해 여성들의 치유 및 회복, 보상에는 소홀했던 것으로 보인다. 지난 6월 바브라 그래버(Barbra Graber)라는 여성은 이 사건에서 피해 여성들이 소외되었으므로 그들에게 제대로 된 보상을 해 주어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그로 인해 다시금 메노나이트 교단 내에서 이 문제가 공식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하였다. 지난 7월에는 AMBS 총장인 사라 웽거 쉥크 교수가 요더의 신학적 유산을 재평가하자는 글을 발표하였다. 그녀는 요더에 대한 업적뿐만 아니라 그의 어두운 단면도 말해야 한다며 진실 말하기(truth-telling)과 투명성(transparency)를 강조하였다.

지난 8월에는 미국 메노나이트 교단 대표인 어빈 스투츠만이 피해 여성들의 치유를 돕기 위한 식별 그룹(discernment group)을 만들고, 이 일이 전체 교회의 탄식과 회개, 회복의 과정으로 이어지길 소망한다고 공표하였다. 그 외에도 한나 하인제커, 조안나 쉥크 같은 젊은 메노나이트 여성들은 여성의 입장에서 요더의 신학 및 생애를 재평가하고, 과거 교단의 실수를 인정하며 지금이라도 보상과 치유 작업에 나설 것을 당부하고 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뉴욕 타임즈>가 이 문제를 보도한 것이다.

우리들의 초상

교단을 대표하는 유명한 신학자의 죄를 들추는 것은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일반적으로 이런 문제가 발생하면 은폐하거나 축소하려고 한다. 특히 한국교회는 담임목사나 신학교 내의 교수들이 저지른 범죄 행위를 들추는 것은 은혜가 안 되고, 복음 전도와 교회 재정에 타격을 입히는 행위라며 애써 덮으려고 한다. 그리고 불과 1~2년도 지나지 않아 기억 저편으로 밀어 넣고 망각의 축복을 향유한다. 피해자들의 보상이나 회복은커녕, 오히려 "그들이 꼬리를 쳐서 그런 거 아니냐"는 식으로 죄를 덮어씌우고 교회에 발을 못 붙이게 만든다. 그리고 범죄 당사자는 버젓이 활동을 계속하거나 6개월 정도 설교를 쉬었다가 복귀시키거나, 혹은 막대한 전별금을 주고 다른 교회를 개척할 때 눈감아 준다. 목사직 면직에 대한 소문만 무성할 뿐 실제로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않다가 일반 언론이 그 문제를 다루고 나서야 뒤늦게 나서는 모양새를 취한다. 솔직히 이것이 우리들의 자화상 아니던가.

아나뱁티스트의 교회관

이 문제를 보다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메노나이트 교회 및 교단의 특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철저히 지역교회가 우선이다. 종교개혁 당시 로마 가톨릭이나 주류 종교개혁 세력이 국가 교회라는 중앙집권적 폐해를 안고 있음을 간파한 그들은 교회의 신앙이 외부 세력에 의해 강제화하는 것을 경계하였다. 기독교 국가에서 태어났다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유아세례를 거부하였다. 교회는 '산 위의 동네'(마5:14)로서 세상보다 훨씬 높은 윤리적 기준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의 산상수훈에 기초한 교회론을 고집하였다. 산상수훈의 핵심 가치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하며,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용서하는 공동체를 세우자는 것이 아니던가. 그들은 교회에서 발생한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그보다 수준 낮은 세상 법정에 서는 것을 수치로 여기며 살아왔다.

높은 윤리적 수준을 강조하였다고 해서 그들이 인간의 유한성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약화시킨 것은 아니다. 그들도 인간의 연약함을 알고 있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필수적임을 알고 있었다. 다만 그러한 논리가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것을 경계하였을 뿐이다. 교회가 교회다워지기 위한 가장 중요한 가치를 '투명성'과 '진실 말하기'로 여겼던 그들은 교회 안의 문제를 최선을 다해 스스로 해결하려고 노력하였다. 대개 중요한 사안을 처리할 때 전체 교인들이 참여하며, 사안이 해결되기까지는 수개월에서 수년이 걸리는 경우도 있다. 그들의 이러한 노력은 고통을 회피하기보다는 직시하려는 태도에서 기인한다. 그들은 교회 안의 고통스런 현안일지라도 대충 덮어 버리려 하지 않는다. 이 대목에서 신광은 목사의 표현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아나뱁티스트들은) 끊임없이 주시하고, 함께 나누고, 토론하고, 논쟁하며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이것이 주님께서 가셨던 길이고, 제자들이 걸어가야 하는 길이라는 것이 아나뱁티스트의 생각이다."

회복적 정의

요더의 성추행 사건에 대해 메노나이트 교단이 미온적으로 혹은 축소, 은폐한 것으로 보이게 만든 또 다른 요인은 그들의 고집스런 '제3의 길' 찾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제3의 길이란 찬반 토론을 통해 다수결로 어떤 사안을 결정하려는 것을 자제하고, 양측이 윈윈(win-win)하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다. 그러한 노력은 최근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라는 개념으로 부각되고 있다. 우리 사회는 죄를 범한 사람에게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가해야 이 사회가 안전하게 유지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이를 '응보적 정의'(retributive justice)라고 한다. 메노나이트 교회 및 교단과 신학교는 응보적 정의 차원이 아니라, 가해자-피해자 양측 모두 회복의 길을 찾고자 오랜 시간 고민을 거듭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적어도 메노나이트 교단이 이 문제를 축소·은폐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독특한 교회관 때문에 생긴 오해로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번 <뉴욕 타임즈> 기사가 보도되기 훨씬 이전부터 메노나이트 교단 및 교회, AMBS에서 이 문제를 심도 있게 거론해 왔고, 한참 후에야 일반 언론이 이 문제를 거론했음에 주목해야 한다.

이제 메노나이트 교단은 본격적으로 요더의 성추행 사건 치리 과정에서 충분히 보상을 받지 못한 피해 여성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수십 년 전 그들이 요더의 잘못에 대해 집중하다가 상대적으로 피해 여성들의 상처 회복을 소홀히 한 점을 회개한다고 고백하였다. 이러한 용기는 진실 말하기와 투명성이 교회의 생명임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부끄럽고 아픈 상처일지라도 고통에 직면하기를 선택하고, '회복적 정의' 차원에서 피해 여성들의 치유와 회복을 위해 교단 전체가 발 벗고 나서는 그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나가며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일 년만 지나도 쉬쉬하고, 은폐하고, 축소하고, 망각하려는 것이 우리의 모습 아니던가. 전병욱 목사의 성추행 사건을 비롯해 한국교회의 비윤리적 사건들은 연일 터진다. 성추행을 비롯해 교회 재정 유용, 교회 세습 및 논문 표절 등의 뉴스를 접한다. 이 문제를 고통스럽지만 집요하게 매달리며 끝까지 해결하려는 모습을 한국교회에서 찾아볼 수 없음을 안타까워하자. 나아가 세상을 옳은 길로 인도하고, 하나님나라의 삶을 보이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이 교회를 염려하는 시대를 살고 있음에 책임을 통탄하며 우리의 부끄러운 현실에 가슴 아파하자. 비록 교회나 교단의 명예가 실추된다 할지라도, 설령 수십 년이 지나 대다수의 기억 속에서 지워진 일이라 할지라도, 한 사건에서 여전히 고통받고 있는 소수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올 때, 그 문제를 '미결 사항'(unfinished business)으로 여기고 재론하는 용기를 발휘하는 그날이 속히 오길 간절히 소망한다.

전남식 / 대전 꿈이있는교회 목사·한국아나뱁티스트펠로우십(KAF)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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