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신의 열심이 위험한 이유> / 래리 오스본 지음 / 장혜영 옮김 / 새물결플러스 펴냄 / 280쪽 / 1만 3000원

<당신의 열심이 위험한 이유>는 뻔뻔하게 읽으면 쉬운 책이다. 몇 십 페이지 안 가서, 나도 모르게 내 주위의 재수 없는 몇몇 인간들을 떠올리고 말았다. 그 인간들과 이 책을 공구를 할까 생각도 해 봤다. 이런 비열한 도서 추천이 또 어디 있을까. 이 정도면 가히 바리새인 뺨치는 기만적 자의식이다.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 물 한잔 들이켜고,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책을 잡았다. 다른 이를 떠올리지 말고 책의 메시지를 오로지 나에게만 집중시켜 보기로 마음먹었다. 비겁한 내겐 고난도의 독서 미션이긴 하지만. 그제야 래리 오스본의 목소리가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몇 장만 넘겨도 내면으로 불편함의 파도가 급하게 밀려왔다. 파도에 휩쓸리며 물 좀 먹어 보니 정신이 혼미해졌다. 이젠 책 자체에 집중을 못 하게 돼 버렸다. 아니, 사실은 집중을 거부했다고 하는 것이 정확하겠다.

나를 제일 불편하게 만든 것은 이 책의 원제, 'accidental pharisees - 우연한 바리새인들' 이다. 쉽게 말하면, 누군 처음부터 지독한 바리새인이었느냐는 것이다. 우리가 어긋난 열심을 가지기 시작하게 된 어느 한 계기 또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을 의도적으로 발생시켜 맞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신앙의 출발선 앞에서 총성이 울릴 때, 대다수 사람들은 순전한 열심을 품고 달리기를 시작한다. 처음에는 달리는 것 자체가 큰 기쁨이었다. 영화 <말아톤>에서 초원이가 바람을 느끼며 황홀한 달리기를 하는 것처럼, 우리도 신앙의 레이스에 감격적으로 임했단 말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양옆 트랙에서 함께 뛰고 있는 이에게 눈이 가기 시작한다. 벌써 숨이 차서 헐떡거리는 옆 사람을 보는 순간, 내 머릿속에는 이런 생각이 스친다. '저럴 거면 뭐 하러 이 트랙에서 뛰는 걸까.' '이건 뭐, 페이스 메이커도 못 해내겠구먼.' 이딴 생각들. 신앙의 레이스가 이런 모습일 리 없다. 우리는 종목 자체를 착각한 것이다. 신앙의 레이스에서 우리가 참가한 종목은 옆 사람을 따돌려야 승리할 수 있는 경주가 아니라, 양옆의 사람들과 함께 가야 이길 수 있는 2인 3각이었다는 사실 말이다.

지금이야 어느 정도 신약성경이 익숙하다 보니 바리새인을 막장 드라마의 악역 정도로 느끼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하지만 1세기 당시 바리새인들은 유대 세계에서 그런 막장 캐릭터가 결코 아니었다. 율법과 규례들을 몸으로 워낙 철저히 지켜 내고, 구약성경에 능통한 바리새인들은 오히려 존경의 대상에 더 가까웠다고 봐야 한다. 이런 바리새인들에게 제대로 돌직구를 날리고, 틈만 나면 그들을 깠던 예수님이 오히려 더 난감한 인간이었다. 21세기를 사는 바리새인들도 비슷하다. 대단한 막장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교회와 기독교 세계 안에서 더 칭송받는 존재들이 더 많다. 우리는 21세기판 바리새인들을 인정하고 산다. 그냥 받아들이고 사는 거다. 그러다 보니 그들이 개인적으로 각자 가지고 있는 자부심과 자기애와 상관없이 교회는 아파하고 있다. 그들이 말하면 다 맞는 말 같긴 한데, 그들과 같이 있고 싶지는 않으니, 슬픈 현실이다. 그리고 나 역시 그들 속에 어김없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 아프다.

신앙에 열심인 것 자체가 무엇이 나쁠까. 하지만 그 열심은 하나님과 나 자신 사이에서만 통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무엇이 모자라서, 나의 열심을 다른 사람에게까지 강요해야 직성이 풀리는 것인지 모르겠다. 언젠가부터 어긋난 열심에 매이게 된 '우연한 바리새인(1부)'은 남들과의 비교를 통해 자신의 신앙을 높이려는 '교만(2부)'한 시도에 적응해 간다. 고고한 영적 리더들은 자신들을 잘 따라오지 못하는 사람들을 은근히 무시하고 귀찮아한다. 이 배타성(3부)은 영적 리더들의 마음에 전염병처럼 번져 간다. 공동체가 품고 함께 가야 할 사람들은 이제 걸러져야 할 사람들로 여겨지고 만다. 헌신(됐다고 스스로 더 생각하는)된 영적 엘리트들은 '율법주의(4부)'적인 담장을 더 높게 세운다. 담장이 터무니없이 높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이 담장을 넘는 것이 다른 그리스도인 동료들의 당연한 책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자신들의 뜻대로만 잘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과거의 숭배(5부)'를 한다.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라는 식으로 시작하는 말이 점점 늘어 가는 것이 증상이다. 결국, 그들의 기준은 더욱 높고 좁아지면서, 자신들이 믿는 바와 조금이라도 다른 것에 경기를 일으키며 남을 쉽게 배제하는 '획일성의 추구(6부)'로 치닫게 된다. 그중 전임사역자나 가르치는 역할을 하는 이들은 자신들의 소명이 최고의 경지인 마냥 스스로 착각하게 된다. 그래서 자신의 소명을 다른 모든 사람의 소명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은사의 투영(7부)'에 힘쓰고 만다.

진짜 최악은 무엇인지 아는가. 직접적인 대학 사역은 5년 정도밖에 경험하지 않은, 이제 겨우 30대 중반의 대학 선교 단체 간사인 내가 위의 여섯 가지 바리새인들의 특징을 모두 경험해 봤다는 것이다. 성장이 느린 학생들이 공동체에서 도태되는 것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였다. 면담까지 하면서 그들을 걸러내는 일에 열심을 냈다. 그래 봤자 수준 차이가 백지장 한 장 차이인 20대 초반의 학생들에게 시답지 않은 영적 기준을 들이대고 압박했다. 희미한 기억을 부풀리며 나의 학생 시절의 헌신을 무용담처럼 떠벌려서 학생들을 주눅이 들게 만들었다. 학생들의 다양한 질문들을 쓸모없고 부질없는 것으로 치부했다. 그리스도인의 인생에 있어 최고의 소명은 전임 사역에 있는 것처럼 행세하고 다녔다. 졸업반 학생들에게 이론적으로는 어쩔 수 없이 하나님 앞에 모든 직업의 가치는 동등하다고 강의하긴 했지만, 내 우월 의식은 실제 행동으로 불거져 꼴값을 떨었다. 고작 30대 초반에 현대의 바리새인들의 특징을 모두 마스터했다. 어긋난 열심은 이렇게 나와 밀착돼 있다. <당신의 열심이 위험한 이유>은 내게 거울과 같은 책이다.

내 안의 바리새인은 남이 지적한다고 쉽게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지적당하는 순간, 스스로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우리의 죄 된 본성이 어김없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래리 오스본은 이 어려운 주제를 부드럽고 온화하게 전달해 준다. 깨달아야 한다고 고압적으로 짓누르지 않고 독자 스스로 거울을 통해 바리새인의 잔상을 발견하고 걷어 내길 응원해 준다. <당신의 열심이 위험한 이유>는 그 어떤 신념과 신앙의 기준, 목적, 본질보다 위에 있는 것이 사랑과 인애임을 잊지 않는 목회적 마음씨로 독자와 함께 테이블에 앉아 주는 따뜻한 책이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누가 가장 철저하거나, 희생적이거나, 지식이 많거나 혹은 가장 빨리 소진되는지를 알아내기 위한 경주가 아니다. 누가 가장 어려운 길을 기꺼이 선택하려는지를 알아내기 위한 대회도 아니다. 그것은 금욕주의지 제자도가 아니다.

복음이 복음으로 남기 위해서는 은혜와 긍휼이 가장 중요한 위치에 남아 있어야 한다. 내 헌신의 철저함이나 내 열성의 강렬함 혹은 내 희생의 정도가 하나님의 용납과 인정을 받고 유지하는 수단이 될 때 복음의 좋은 소식은 더 이상 탁월한 일부를 제외한 누구에게도 좋은 소식이 될 수 없다.

오해하지 마라. 열성적 믿음의 위험에 대한 나의 경고는 편안하고 쉬운 기독교에 대한 옹호가 아니다. 다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에게 쉼과 도움, 소망, 구원을 제공하는 복음의 중심에 충실하자는 간청이다(본서, 267쪽)."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