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다윈의 동행> 저자 신재식 교수 인터뷰 두 번째 기사입니다. 인터뷰는 SFC 출판부 김성민 편집장이 진행했습니다(첫 번째 기사 바로 보기). -편집자 주

지적설계론, 이론이냐 운동이냐

- 종교와 과학의 제 역할을 강조하면서 환원주의를 상당히 경계하는 것 같은데.

생명 세계를 어느 하나로 환원해 설명하려고 하는 생각 자체가 잘못되었다. 모든 생명 세계는 어느 수준에서 설명하느냐에 따라 일리가 있는 법이지만 그렇다고 그 수준에서 설명한 것을 전부 진리라고 이야기하면 큰 오류에 빠진다.

두 종류의 환원주의를 조심해야 한다. 하나는 과학적 환원주의다. 유전자 수준에서만 생명 현상을 설명하면서 그것이 완벽하고 충분한 설명이라고 한다면 논쟁이 불가피하다. 과학자들도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유전자 수준의 설명도 가능하지만, 세포 기관의 수준이나 개체 수준의 설명 등이 가능하며, 전체 생태계 수준에서도 설명이 가능하다. 인간의 정신 현상이나 마음의 현상을 두뇌의 시냅스 차원에서만 설명한다면 환원론이다. 과학적 환원론이 삶의 다양한 측면을 폐기한다면 경계해야 한다.

다른 하나는 종교적 환원주의다. 기독교의 경우 성경에 대한 문자주의적 해석으로 생명 세계를 판단하는 것은 굉장한 오류를 낳는다. 종교적 경험도 마찬가지다. 무한한 존재인 하나님에 대한 특정한 경험이 다른 사람의 경험과 해석들을 배제한다면 문제다. 유한한 인간이 해석하는 특정 경험이나 기준과 논의를 하나님에 대해 논하는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에 신성모독이자 우상숭배이다. 다양한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이런 열린 태도를 가질수록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경험을 이해하고 설명해 낼 가능성이 높다.

- 다시 다윈 이야기를 해 보자. 자연신학적 태도에서 다윈으로 넘어왔을 때, 다윈의 어떤 점이 근대과학을 대변하는가.

오래전부터 자연신학이 있었지만 가장 활발했던 게 18세기 후반~19세기 초다. 사람들이 과학혁명 이후 새롭게 발견된 생물학적 현상, 자연에 대한 기계적 현상을 보고 나서 현상의 근원에 하나님이 있다고 믿었다. 우리가 눈으로 보고 관찰할 수 있는 사례들이 우연히 생긴 게 아니고 지적인 존재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걸 증명하려고 했다. 당시 사람들은 생물학적이고 기계론적 지식을 받아들여서 설명을 했다. 자연신학 자체는 새로 변화하는 과학이나 기술에 의한 지식들을 신학에 수용해서 신학적으로 응답하려는 시도 중 하나였다. 다윈은 그것을 지적인 존재자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진 게 아니라 순수하게 자연적으로, 우연적으로 나온 결과물이라고 논리적으로 증명했다. 굉장히 많은 실증적인 데이터를 모았다. 다윈은 자연선택의 결과물과 메커니즘을 이야기했다.

창조과학이나 지적설계론도 어떤 점에서는 자연신학 전통에 서 있는 것이다. 과학적 증거를 통해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시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의 이와 같은 종류의 자연신학은 19세기 자연신학보다 퇴보된 자연신학이다. 19세기에 나온 자연신학은 자연 사물이 우연히 생기지 않았다는 것을 쭉 설명하고, 이 지적설계자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한다. 지적설계자가 한 명인지 여러 명인지 어떻게 아느냐, 하나라는 것에 동의한다면 그 지적설계자가 알라신인지 힌두교의 비슈누인지 기독교의 하나님인지 어떻게 알 수 있으며, 그 지적설계자가 전능한지 약간 무능한지 등에 대해 증명하는 문제들이 다 나와 있었다. 그런데 오늘날 지적설계론에는 이런 게 없다. 종교가 아니고 과학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지적설계론자들의 주장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그 설계자가 어느 신인지 증명할 길이 없다. 이 점에서 퇴행된 자연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지적설계론은 일종의 종교운동이다.

▲ 신재식 교수는 종교와 과학이 우리를 객관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두 개의 거울이라며, 이 두 개가 적절하게 작동할 때 두 날개로 적절하게 비상할 수 있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최유진

보수화될수록 진화론 수용 어려워

- 다윈의 진화론을 당시 사회적 정황과 관련하여 설명한 부분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한국의 상황에 적용해 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영국 사회에서 산업혁명 이후 새로 등장한 중산층, 귀족 계층, 고위 종교 사제들이 다른 계층을 형성하고 있었을 때 다윈의 진화론이 등장했다. 더불어 영국 사회는 산업혁명 이후 '경쟁'이 중요한 이슈였다. 영국 성공회를 중심으로 귀족 계층은 사회 변화를 바라지 않았다. 이들의 입장에서 진화론을 수용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반면 새롭게 등장한 중산층 즉 산업혁명의 주역들은 영국을 변화시키는 데 진화론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신학적 입장 차이도 있었지만 정치적으로 보수냐 진보냐에 따라 진화론에 대한 수용 여부도 조금 달랐다.

한국적 상황도 유사하다고 본다. 변화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가진 게 많아서 그것을 지키고 싶어서 보수화되는 경향이 많다. 진화는 바뀐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메커니즘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이론이다. 세상이 바뀌고 있으며 변혁되고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믿는 진보적인 계층에서는 진화를 받아들이기가 상대적으로 쉽다. 하지만 진리는 불변하는 것이고 이 진리를 자신들이 담지하고 있다고 믿는 보수적 기득권자들은 진화론을 수용하기가 불편할 수 있다. 지금 한국교회는 기득권을 지키려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교회가 보수화될수록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목사들의 사회적 위치에 따라 진화론에 대한 태도도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 진화에 대한 기독교적 수용 여부가 기독교의 생명 평화 사상을 확장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을까.

신학과 과학의 주제, 기독교와 과학의 주제가 조직신학자들에게 핵심적인 이슈가 된 게 1990년대 후반이다. 최근 서구 신학 전통 속에 신학과 과학이 굉장히 뜨거운 주제다. 생태계 문제가 일어나면서 생태신학이 나왔다. 생태신학을 제대로 전개하기 위해서는 생태학 전문가나 생명현상에 대한 전문가의 이야기를 듣지 않을 수 없다. 신학자들이 생명 평화 문제에 기독교적인 응답을 하려면 기본적으로 고려해야 할 게 이 생명 현상과 환경에 대해 뭐라고 이야기해야 하는가이다. 생태신학을 하면서 생물학자들과 대화하고 천체물리학자와 대화하면서, 정말 기독교가 과학을 받아들이는 신학 작업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논의가 나오게 된 것이다. 생명, 정의, 평화, 생태 문제에서 그 분야의 전문가의 입장을 당연히 들어야 하고 그것들을 가지고 우리 안에서 신학화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1990년대 2000년대 초반, 신학과 과학의 주제가 현대신학의 이슈였다가 지금은 생태경제신학이 이슈가 되고 있다. 생태와 경제 문제가 처음부터 나뉜 게 아니라는 인식들이 때문이다. 나도 생태경제신학을 하면서 다시 생태학 전공하는 분들이 팀을 만들어 공부하고 있다. 우리가 환경 이야기하면서 환경 전문가의 이야기를 안 듣고 신학적으로 이야기 할 수 없다. 우리의 현실을 인식하고, 신학 전통에 기반을 두고 대응하는 데에 가장 기본적으로 고려해야 할 자원 중 하나가 그 분야 전문가들의 이야기다.

창조론·진화론, 제대로 된 용어 이해 필요

▲ 진화가 바뀐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메커니즘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이론이라고 한 신재식 교수는, 교회가 보수화될수록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최유진

- 지적설계와 관련해서 이야기를 좀 더 듣고 싶은데, 창조론, 창조과학, 지적설계론, 유신론적 진화론 등 용어를 정리한다면. 일반적으로 기독교인들이 창조론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잘 모르는 것 같다.

진화론이 나왔을 때 진화론에 대응하는 기독교 창조론 입장이 여러 개가 있고, 진화론을 수용하는 입장인 진화론적 유신론이 있고, 진화론 자체를 극단적으로 배격하는 입장이 있다. 창조과학도 이 중 하나다. 가장 비판적인 입장이 과학적 창조론인데 좀 더 세분화 해 보면, 젊은 지구 창조론(한국창조과학회 거의100%) – 오랜 지구 창조론 – 지적설계론 – 진화론적 유신론으로 볼 수 있다. 이 네 가지는 기독교 신학 전통에서 진화론과 현대 과학에 대해 볼 수 있는 다양한 대응을 범주화시킨 것이다.

젊은 지구 창조론은 지구와 우주의 역사가 6000년에서 1만 년 사이라고 본다. 창세기의 기사를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날'을 현대 시간의 하루라고 생각한다. 6일 창조를 받아들이며 핵심적인 내용 중 하나는 하나님이 처음 만든 종류 그대로 지금도 동일한 종들이 존재한다고 본다는 점이다. 한국교회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 이에 비해 오랜 지구 창조론은 현대 천체물리학이 말하는 지구와 태양계가 빅뱅 등 오랜 우주적 과정을 통해 형성되었다고 본다. 우주는 137억 년, 지구와 태양계는 45억 년 되었다고 본다. 창세기 1장 해석이 젊은 지구 창조론에 비해 다양하다. 1장 1절과 2절 사이에 지질학적으로 오랜 시간이 이었다는 해석, '날'이 오랜 지질학적 시간이라는 해석, 하루를 24시간으로 보나 하루와 하루 사이에 긴 지질학적 시간이 존재한다는 해석 등으로 나뉜다.

지적설계론은 비교적 최근에 등장했다(1980~90년대 후반). 미국의 창조과학회 진영 안에서 젊은 지구 창조론과 오랜 지구 창조론의 오랜 논쟁의 결과 결론이 나지 않았고, 내부 논쟁을 진화론과의 외부 논쟁에서 전열을 가다듬는 방향으로 바뀐 것이 지적설계론의 등장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지적설계론은 대부분 오랜 지구 창조론자들이 주류를 이룬다. 지적설계론자들은 지적설계론을 과학 연구 프로그램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우주 생명체와 사물들이 지적으로 설계되었다는 것을 검증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고 주장하여 공립학교에서 진화론과 함께 가르칠 수 있다고 한다. 지적설계론자 내에는 진화론에서 새로운 종이 나왔다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도 있고, 종의 진화까지 찬성하는 사람도 일부 있다.

진화론적 유신론은 진화론이나 진화 개념을 수용하고 신학 작업을 하는 입장이다. 진화라는 입장 자체가 신학적 설명을 하는 데 통찰력을 주고 때에 따라서 굉장히 긴요한 역할을 한다고 판단한다. 현대과학을 다 수용하는 입장이다.

한국교회 안에는 네 가지 주장 중 창조과학회의 주장만 일방적으로 소개되고 전달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나머지 주장들도 많이 알려져 있다.

- 진화론적 유신론과 진화론적 창조론이 같은 의미인가.

기독교 신학 전통에서 이야기하면 진화론적 창조론이라고 이야기해도 관계없다. 하지만 무신론자들과 종종 논쟁을 하는 입장에서 오해의 소지는 피하고 싶어 나는 진화론적 유신론을 선호한다. 유신론적 진화론은 자칫하면 창조과학으로 오해할 수도 있다. 당신들은 무신론자이지만 나는 진화론을 수용한 유신론자라고 이야기하는 게 중요하다. 유신론적 진화론은 다윈 이후에도 나왔는데 현재 창조과학자들이 진화론을 수용한 기독교 입장을 비판할 때 사용하고 있다. 과학에다가 유신론, 무신론을 붙이는 건 적절치 않다고 본다. 제 입장을 신학적으로 하면 '진화론적 창조론'이다. 진화론을 수용한 창조론. 이게 기독교 신앙 전통에 가장 적절한 설명의 틀이라고 생각한다.

- 책에서는 유물론적 진화론과 방법론적 진화론을 구분해서 다루는 것 같은데.

반드시 구별해야 한다. 과학 작업을 수행할 때 초자연적인 실체나 초월적인 존재를 고려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주류 자연과학계의 방법이다. 실험하고 그 결과를 관찰할 때, 초차연적인 힘이나 신의 힘을 배제하고 순수하게 자연주의적이고 물리적으로 해석하려고 한다. 이런 방법이 방법론적 자연주의이다. 실험하는 당사자가 무신론 과학자건, 유신론 과학자건 상관없이 실험에서는 중립적인 위치에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과학 작업을 하면서 초월적 존재나 실체는 없다고 규정하는 것을 형이상학적 자연주의라고 하는데, 방법론적 자연주의와는 다르다. 진화론을 수용하는 신학적 입장에서는 이런 자연과학을 구분한다. 방법론적 자연주의는 과학 작업 시 초자연적인 실체를 배제하고 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이고, 무신론자(형이상학적 유물론자)가 초월적인 존재는 원래 없다고 생각하고 실험을 할 때, 이는 유물론적, 형이상학적 자연주의가 되는 것이다.

교회, 과학기술 사회에 맞게 진화해야

▲ 신재식 교수는 진화론적 관점에서 볼 때 지금 한국교회는 산업사회에 최적화된 상태라고 했다. 따라서 교회의 메시지도 과학기술 시대에 맞게 변해야 한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최유진

- 생물학과는 또 다른 측면에서 과학기술 사회라는 새로운 환경이 만들어지는 것 같다. 현대 과학기술의 새로운 진보를 진화와 관련해서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 인류는 오랜 생명의 역사 속에서 종속변수였다. 자연적 환경에 우리가 맞추어 살아야 했다. 지금은 인간이 독립변수가 되어 자연에 영향을 주게 됐다. 이게 100년도 되지 않는다. 역사 속에서 과학기술이 우리를 편하게 해 주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생명 역사를 진화론적으로 설명했을 때 진화의 방향을 우리가 결정한 게 아니고 자연이 결정했다. 이제는 인간이 그 진화의 방향을 결정할 단계다. 이것은 질적으로 다른 단계다. 문화적인 변인 요인이 주된 요인이 되어 버렸다. 진화론적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인류 생명 역사의 과정에서 굉장히 질적으로 다른 단계로 들어선 것이다.

과학기술이 우리를 편하게 했지만 우리를 종말로 이끌 수 있는 굉장히 위험한 작업들을 지금 하고 있다. 과학기술이 우리가 제어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갔다. 시한폭탄을 안고 있는 것과 같은 상태다. 과학기술의 본질에 대해 좀 더 정확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여기에 대해 비판적으로 이야기하고 논의할 수 있는 인류문화 현상 중에서 뭐가 있겠는가. 전통적으로 해 온 게 사실 종교다. 예술이나 경제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과학기술이 경제적 정치적으로 굉장히 밀접하게 묶여서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 또는 윤리나 사상 분야들이 일종의 비판적인 성찰을 할 수 있다.

- 예수와 다윈의 동행 즉 종교와 과학이 동행한다는 것은 교수님에게 있어서 어떤 의미인가.

종교와 과학은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인류 자체를 객관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두 개의 거울이라고 생각한다. 종교는 자신의 종교 신앙 전통에서 가장 큰 가르침을 기준으로 내 삶의 표준 잣대 역할을 한다. 과학은 일반적인 법칙에서 나라는 존재는 특수한 한 사례로 다룬다. 그래서 내 삶의 방향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고 판단할 수 있다. 중력 법칙이 작용하는 세계 안에서 나 자신도 중력의 영향을 받는 특수한 사례이기 때문에 중력 법칙을 거스르는 방식으로 행동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예측가능하다. 이처럼 종교와 과학은 우리를 객관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두 개의 거울인 것이다.

이 두 개가 적절하게 작동할 때 두 날개로 적절하게 비상할 수 있다. 인류는 지금까지 온 것은 이 두 개의 영역이 적절한 균형을 이루어 왔기 때문이다. 한쪽이 지나치게 커지면 추락하고 말 것이다. 지금은 지나치게 비대해진 과학기술의 날개가 점점 축소되는 종교의 날개 때문에 균형을 잃어 가고 있다. 인식론적으로 알고 있는 세계 경험과 고백 언어를 통해 이해한 세계의 경험이 함께 가야 한다.

▲ <예수와 다윈의 동행> / 신재식 지음 / 사이언스북스 펴냄 / 464면 / 1만 8000원

- 과학이 발달할수록 종교에 대한 갈증이 강해져야 하는데 왜 그렇게 안 되고 있는가.

종교의 문제와 영성의 문제는 다르다. 전통 종교를 이야기하는 것과 영성을 추구하는 것은 다르다. 우리는 제도화된 종교에 대해 말할 때가 많다. 하지만 제도화된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에게 영적 갈증은 남아 있다. 우리가 속해 있는 교회가 가장 표준인 것처럼 보이지만, 2,000년 동안 다양한 교회와 예배, 가르침이 존재했다. 오히려 기독교의 오랜 유산들 중에 낯선 것이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것이 현실이다. 기존의 교회들은 줄어들고 있고, 전통적인 교회 교세가 약해지고 있는 것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영적인 것을 찾는 이와 그 열정이 약화되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현재 교회 모습은 진화론적 관점에서 보면 잘 보인다. 조직화된 교회 모습은 산업사회에 가장 잘 적응된 모습이다. 교회 조직과 메시지도 근대 사회에 최적화된 상태다. 하지만 주변 환경이 바뀌었다. 시대가 포스트모던으로 넘어오면서 기존에 최적화된 메시지가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다. 전통적인 교단이 쇠퇴하는 건 환경 변화에 자연스럽게 변화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 새롭게 전달하고 가르칠 수 있는 교회는 새롭게 살아날 것이다. 우리는 그 단계에 있다. 한국교회는 산업사회 50년 동안 사회에 맞춰서 왔다. 지금은 한계 상황에 왔다. 새롭게 바뀐 상황에서 새롭게 고민하는 목회자들과 교회가 주류가 될 것이다. 환경과 상호작용을 하는 새로운 교회가 나오는 반면 쇠퇴하는 교회가 나올 것이다.

지금 우리가 위기 상황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과학기술이 발달하고 다종교 사회인 한국 사회, 포스트모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교회가 근대 이전의 중세 때 만들어진 메시지를 가르치고 있다. 지금 힘든 상황이다. 이 상황에서 기독교 메시지를 어떻게 할 것인지 한 번도 신학적으로 제대로 고려하지 않았다. 서구에서 만들어진 메시지 그대로 집어넣었고 그 결과가 지금 모습이다. 결국 과학기술을 제대로 소화시키지 못하고 한국의 전통 문화 사상을 소화하지 못한다면 미래는 그다지 밝지 않다. 진화론은 과학을 상징하는 현대 과학기술 문명을 상징한다. 이것을 우리 것으로 소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 이 책의 후속 작업도 진행하고 있을 것 같은데.

지금은 진화 과학의 종교 보기 작업에 있다. 종교에 대해 책에서 언급했지만, 현대 지성 사회에서 내로라하는 학자들이 저마다 자연주의 입장에서 종교를 보려고 한마디씩 한다. 진화생물학자 같은 경우는 에드워드 윌슨, 리처드 도킨스, 스티븐 제이 굴드 이런 사람들부터 시작해서 철학자, 언어학자, 인류학자들이 종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들은 모두 진화론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런 사람들 9명을 뽑고 이들이 종교에 대해 뭐라고 이야기하는지 과학의 틀로 보는 다양한 종교에 대한 견해를 나 자신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설명해 보려고 한다. 진화심리학에는 종교의 기원, 확산 과정, 기능 등이 다 나온다. 과학 내에서의 종교 담론들을 정리하고, 전체적인 종교 담론 내에서 과학이 차지하는 종교 담론 지형을 그려 보려고 한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신학적인 작업을 한다면 현대 신학자들이 다루는 종교와 과학 또는 신학과 과학의 관계에 대한 글을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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