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다윈의 동행> 저자 신재식 교수를 만났습니다. 인터뷰는 SFC 출판부 김성민 편집장이 진행했습니다. 분량이 길어 두 번에 나눠 싣습니다. -편집자 주

<종교전쟁>(사이언스북스)이 2009년에 출간되었을 때, 과학과 종교 간의 오래된 대화에 신선한 돌파구가 생기는구나 생각했다. 신재식 교수(호남신대 조직신학)가 종교학자 김윤성 교수(한신대 종교문화학)와 과학철학자 장대익 교수(t서울대 자유전공학부)와 함께 서신을 주고받는 방식의 글을 묶은 것인데, 당시 참신한 기획과 신선한 내용으로 주목을 많이 받았다. 신재식 교수가 이 책의 기획을 제안했고 장대익 교수가 기획을 다듬어 책을 엮었던 것이다. <종교전쟁>에서는 책의 성격상 세 저자의 역할이 배분되어 있지만, 사실 이들은 과학사상연구회에서 함께 만나 토론하면서 관계에서나 학문 차원에서 오랫동안 소통해 온 막역한 사이다. 이 책에서 신학자인 신재식 교수가 과학의 영역을 다루는 재간이 인상적이었다.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시절부터 이미 과학과 종교의 관계에 대해 깊은 관심을 이어 왔으니 당연하다. 이후 미국 유학 시기에도 그는 과학 연구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신재식 교수가 최근에 단독 저서로 <예수와 다윈의 동행>(사이언스북스)을 펴냈다. 부제가 '그리스도교와 진화론의 공존을 모색하다'이다. 제목이 강렬하다. 예수와 다윈의 조합, 그리스도교와 진화론을 함께 만나게 한다니. 일부 비판자들은 제목에서 불온성을 찾을 것이고, 일부 관심자들은 드디어 침묵의 카르텔을 깨고 등장한 적절한 담론을 환영할 것이다. 한국 기독교 내에서 진화론을 '공정하고 냉정하게' 다룰 최적의 인물이 책을 냈으니, 그의 말을 직접 듣지 않을 수 없었다. 8월 28일 호남신학대학교에서 신재식 교수를 만났다. 

▲ 신 교수는 가톨릭교회가 철학을 가져와 신학을 설명했던 것처럼, 진화론이 피조 세계의 창조론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최유진

종교와 과학, 함께할 수 있다

- 종교와 과학의 관계를 다룬 첫 번째 책 <종교전쟁>이 2009년에 출판됐다. 이후 반응은 어땠나.

저자 세 사람 모두 기독교 배경을 가졌다가 한 사람은 무신론자로, 한 사람은 회의론자로, 한 명은 신학에 몸담고 있다. 우리가 한국교회에 구체적으로 자극을 줄 수 있는 작업을 해 보자고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서신을 주고받는 형식으로 한 사람이 글을 쓰면 그 주제를 이어받아 글을 쓰는 방식으로 2008년 4월부터 9월까지 <프레시안>에 연재했다. 연재할 때부터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안다. 책이 나왔을 때 기독교인 중에서 비판적인 이메일을 보낸 분이 한 분 있었지만, 대부분은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현재까지 호응이 꽤 좋다. 기독교가 과학에 이 정도의 입장을 가지고 있으면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겠다는 내용의 이메일도 받았다. 기독교는 원래 과학에 대해 열린 태도를 많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이 듣기 원했던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 <종교전쟁>은 과학사상연구회에서 함께 활동해 온 신재식, 김윤성, 장대익 교수가 과학과 기독교에 관해 주고받은 서신을 엮은 책이다.

- <예수와 다윈의 동행>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종교전쟁> 출판 후 얼마 되지 않아 월간 〈기독교사상〉에서 종교와 과학에 대해 연재해 달라고 연락이 왔다. 12개월 동안 12꼭지로 만들어 연재하기로 했다. 나중에 6개 꼭지가 더 첨가 되어 18개 꼭지가 되었다. 사이언스북스에서 출판하겠다고 제안을 했고 선인세를 받고 책으로 묶게 되었다.

- 이 책의 핵심 주장은 무엇인가.

숙제하는 마음으로 종교와 과학의 관계에 대해 나의 생각을 세 가지로 정리하고 싶었다. △종교와 과학이 함께할 수 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추적해도, 현재 구조적으로도 그렇다 △진화론이 무엇이고 기독교에 어떤 영향을 주었으며, 우리는 진화론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종교가 과학을 보는 관점들을 개괄하는 것도 중요한 작업이었다. 실제 과학혁명 후 종교와 과학이 서구 역사 속에서 어떻게 작동했는가에 대해 과학자들, 철학자들, 신학자들을 동시에 호출해 보려고 했다. 과학과 신학, 철학이 어떻게 함께 묶였는지 먼저 언급을 했다. 그 다음으로 다윈과 다윈의 진화론을 다루고 창조론과 진화론에 대해 언급했다.

- 한국 기독교가 왜 과학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두 가지다. 첫 번째는 현대의 젊은 세대들이 과학기술의 영향 하에서 자랐다는 현실적인 이유다. 신앙생활과 목회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도 과학기술의 본질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현대신학 안에 과학적 사고와 개념, 방법론, 심지어 과학 용어까지 많이 들어와 있다. 학문에서 지식을 습득하고 검증하는 방식은 자연과학에서 차용하고 있는 표준 형식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과학기술에 익숙한 세대들에게 복음을 변증하기 위해서도 과학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이다.

두 번째는 현대에서 신학적이고 목회적인 대답을 해야 하는 질문들 중 과학기술적인 주제들이 많다. 신학적이고 목회적 질문들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계속 변해 왔다. 이에 대한 대답도 질문이 변하는 만큼 변한다. 과거에 유효했던 대답이 현대에 그렇지 않은 것도 있고, 과거에 유효했던 질문이 현대에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예를 들어 '바늘 끝에 천사가 몇 명이 앉아 있는가?'는 중세시대에나 의미 있는 질문이지 지금은 폐기되었다. '여성은 구원받을 수 있는가?'와 같은 질문은 질문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 2000년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많이 새롭게 제기된 질문이 과학기술의 발전과 관련된 것들이다. 과학기술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인식이 부족하면 적절하게 질문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제대로 대답할 수 없는 시대다. 그리고 과학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 새로운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에 신학이 인간에 대해 이야기할 때 과학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 신학적 추론 방식과 과학적 추론 방식이 다를 수 있을 것 같은데.

종교와 과학은 다른 언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나는 두 개의 다른 지도에 비유한다. 생명 세계를 살아갈 때 있는 그대로를 보여 주는 실측 지도가 있고, 필요한 부분만 강조하여 보여주는 문화 지도가 있다. 안나프루나 정상을 정복하려는 사람에게는 실측 지도가 필요하다. 하지만 산을 오르는 목적이 정상 정복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풍경을 감상하기 위해서나 역사유적지나 문화를 경험하기 위한 목적도 있다. 나 같은 사람에게 유용한 건 문화 지도다. 하지만 둘 다 있어야 한다.

과학과 종교도 둘 다 필요하다. 우리 삶 속에서 종교는 종교의 역할이 있고 과학은 과학의 역할이 있다. 현실 삶에서 이것이 날카롭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종교·과학·예술·경제 등 우리의 삶의 일정한 활동의 특정한 공통 요소나 특징을 뽑아서 이름을 붙였다. 과학은 과학이라는 일정한 공통적인 요소와 성격을 규정한 활동이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기독교인들이 이 과학의 영역에 매우 취약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신학생들이나 목회자들이 더욱 이 부분이 약하다. 한국교회 안에서 창조와 진화 논쟁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목사들이 없는 점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반대로 창조과학을 하는 분들 중에 제대로 신학적 훈련을 받은 분들도 없다. 서로의 장점과 한계를 알기 위해서도 두 지도를 함께 보는 훈련이 필요하다.

▲ 신재식 교수는 한국 기독교 내에 제대로 된 이론 이해 없이 가해지는 진화론에 대한 비판을 우려했다. ⓒ뉴스앤조이 최유진
-보수적인 교단의 목사들이나 신학자들이 창조론이나 진화론을 제대로 다룰 수 있을까.

최근에는 책이나 교육을 통해 과학적 지식에 많이 노출되고 있기 때문에 목회자들 중에도 진화론에 열린 태도를 가진 분들이 많다. 그런데 과학교육에 상대적으로 약했던 목회자들은 진화론 자체에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젊은 목회자들이 침묵의 카르텔을 형성하게 된다. '이건 아닌데' 생각하면서도 침묵하는 것이다. 신학 현장에서 교수들과 이야기를 해 보면 과학에 대해 개방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 분들이 많다. 교단의 여러 상황들이나 한국교회의 보수적인 현실 때문에 공론화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고민과 불만은 내재되어 있고 과학적인 여러 주제들에 대해 토론하고 싶은 열망은 쌓여 있기 때문에, 언젠가는 이런 부분들이 해소되어야 한다.

생명 세계 창조 이해 돕는 진화론

- 책에서도 다루었지만 종교와 과학의 관계를 갈등과 조화의 이미지로 보려는 경향이 강하다. 기독교의 통합적인 진리 추구 방식이 과학을 보는 시각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

사실 모든 종교가 논리적 완결성이 있는 체계화된 방식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만들어 간다.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면서 서구 사회의 지반 역할을 해서 서구 사회 안의 모든 것을 기독교라는 핵심 가치로 통합해서 설명하려고 했다. 과거 중세 시대에는 자연철학이라는 이름으로 그것을 설명했다. 하나님이라는 하나의 지식 속에 그것을 포함시켰다. 그 관성이 굉장히 강했다.

오늘날에도 신앙의 일관성을 가져야 한다. 신학 작업을 하고 신앙의 내용을 설명할 때 우리 시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지식을 수용해서 설명하는 태도는 매우 중요하다. 자연과학에 대한 지식이 신학과 신앙의 주제를 설명할 때 도움이 된다면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다. 진화론이 생명 세계가 궁극적 창조까지 나아가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역사나 활동을 잘 설명할 수 있다고 본다. 특히 피조 세계의 자율성이나 자기 성취 과정에서 성령이 어떻게 역사하는가에 대한 설명은 진화 개념이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과거 가톨릭교회는 이런 작업을 활발하게 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의 틀과 개념을,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틀과 개념을 신학에 바로 가져오기도 했다. 현대에서도 피조 세계의 창조론에 대해 설명할 때, 특히 계속 창조를 이야기할 때 현대과학 용어를 빌어 설명한다면 진화론으로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고 본다. 과학 자체는 중립적이다.

- 과학은 신학적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서도 유용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인가.

유용하다고도 생각한다. 우리가 유신론적 진화론이나 무신론적 진화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이것은 굉장히 적절하지 못한 용어 사용이다. 과학 용어에 '유신론'이나 '무신론'을 첨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예를 들어 중력이론에 대해 말할 때 '유신론적 중력이론'이라든지 '무신론적 중력이론'이라고 하지 않는다. 어떤 과학 이론도 '유신론적'이기만 한 것도 없고 '무신론적'이기만 한 것도 없다.

과학 이론은 중립적인데 리처드 도킨스 같은 무신론자들이 자신들의 무신론적 신념을 정당화하기 위해 과학 이론을 끌어들이고, 나 같은 기독교 신학자는 중립적인 과학 이론을 신학적인 설명을 하는 데 유용한 도구로 사용한다. 과학이 신학적 개념들을 설명할 때 굉장히 유용하게 쓰인다. 신학적 작업에서 다윈의 진화론은 경쟁과 협력의 개념을 잘 설명해 주는 이론으로 사용할 수 있다. 진화론을 경쟁에만 초점을 두는 경우가 많은데 다윈의 또 다른 중요한 이론인 성 선택 즉 짝짓기는 협력 없이는 불가능하다. 다윈의 진화론이 말하는 생명 세계는 기본적으로 한 생명체가 어떻게 다른 생명체와 협력해 나가느냐가 핵심적이다.

- 해석학적 입장에서는 과학도 완전히 객관적이거나 중립적일 수 없을 것 같은데, 과학을 어떤 점에서 다른 학문과 달리 중립적이라고 보는가.

과학이 완전히 객관적이고 완전히 중립적이라는 데에는 유보적인 입장이다. 특정한 프레임 안에서 있을 때만 그것이 반복 가능하고 객관적으로 검증이 가능하다. 틀을 넘어가면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태양계 안에 벌어진 사건은 태양계 안에 있기 때문에 중립 이론이 되는 것이다. 과학이 중립적이라고 할 때는 특정한 약속된 경계선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 안에서는 실험과 관찰하는 사람과 관계없이 똑같은 검증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의미에서 인식론적으로 중립적인 논의가 가능하다.

하지만 종교 같은 경우는 과학과 다르다. 철저하게 고백 언어다. 고백 언어는 대상에 대한 승인이 있어야 하고 전제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고려하지 않고 객관적인 인식의 언어라고 말하면 문제가 있다. 과학은 제한된 한계 내에서 중립적이고 객관적이기 때문에 현재까지 그 중립성이 유효하다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본질적으로 실험의 결과를 예측할 수 있고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을 수 있기 때문에 유효하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과학은 현재까지 유효하기 때문에 잠정적인 유효성을 갖는다. 과학은 반증 사례가 나타나면 기본 논의는 폐기한다. 끊임없는 검증과 비판을 통해 이론이 유지된다는 점에서 중립적이다.

▲ 신재식 교수는 현재 창조과학자들이나 지적설계론자들이 주장하는 창조론이 지난 2000년간 기독교가 가르쳐 왔던 정통 창조론을 왜곡하고 있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최유진
- 이런 점에서 진화론에 대한 오해도 과학 언어와 고백 언어 사이의 개념 혼돈과 관련이 깊을 것 같은데.

창조과학자나 지적설계론자들이 진화론의 오류 찾기를 많이 한다. 진화론 안에 다양한 의견이 있고 진화론자들 간에도 논쟁의 역사가 길다. 하지만 진화론자들은 진화 자체가 역사적으로 발생했다는 기본 전제에는 모두 동의한다. 진화론자들 간의 논쟁은 진화의 발생 메커니즘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쟁이다. 또한 진화의 과정에서 유전자와 환경 사이의 관계가 어떠한가에 대한 논쟁이다. 그리고 진화 발생의 주체가 어디냐에 대한 논쟁이다. 즉 자연선택에서의 경쟁이 DNA 수준에서 발생하느냐 아니면 개체 수준이냐 집단 수준이냐에 대한 문제이지 진화 발생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간혹 창조과학자들이 이런 진화 논쟁의 역사를 두고 어느 학자가 진화론을 부정했다는 듯이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잘못 본 것이다.

다윈으로부터 체계화된 진화론이 나온 지 150년이 됐지만 진화론의 과학적 사실성에 대해 과학자들 사이에서는 확립된 이론으로 인정받고 있다. 진화론 내부의 논쟁 역사는 다양한 분야의 학문들이 과학적 사실로 드러난 진화론에 대해 그것을 더욱 분명하게 증명해 나가는 방향으로 수렴되고 있다. 과학 사회에서 진화론은 이미 중력이론이나 상대성이론처럼 확립된 사실이다. 그렇지만 끊임없이 보완되고 수정된 이론들이 나올 것이다. 지금의 상태가 완결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과학은 지속적인 검증과 비판을 통해 발전한다.

충분한 이해 없이 무조건 진화론 비판이 문제

- 한국 기독교 내부에서 특히 진화론에 대한 오해가 심각한 것 같다.

진화론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 소문을 듣고 '카더라' 통신에 근거해 진화론을 미리 규정하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과학자 사이에 이미 상식화된 것이나 중고등학교 과정에서 배웠던 지식과 다른 잘못된 지식을 일방적인 확신에서 선포하듯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런 지식을 확신에 차 공공연하게 선포하는 교회와 목사들에 대한 객관적인 신뢰도는 약할 수밖에 없다. 최소한 기본적인 내용과 상식을 알고 이야기했으면 좋겠다. 다윈의 <종의 기원>이나 현대 진화생물학에 대한 기본적인 책을 읽고 진화론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를 이야기해야 한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흔히 "우리가 원숭이로부터 진화했다면 지금 원숭이는 뭐냐"는 말을 한다. 이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 과거 어느 시점에 공동 조상이 있어서 그게 분기되어서 진화된 결과가 현재 인류고 오랑우탄, 원숭이다. 현재의 종들은 공동 조상으로부터 나뉜 결과물이다. 정확하지 않은 이해를 바탕으로 진화론을 다루니까 굉장히 당혹스러울 때가 많다.

▲ 신재식 교수는 <예수와 다윈의 동행>에서 종교와 과학이 어떻게 함께할 수 있는지 이야기한다.

- 진화론 자체의 다양성도 있지만, 창조론에도 다양한 견해가 있지 않은가.

기독교 밖 사람들은 창조론과 창조과학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창조과학을 창조론이라고 생각한다. 창조론은 기독교 신학 주제다. 하나님이 세상을 어떻게 만들었고, 이 세상이 어떻게 운행되어 가고 있으며, 새 하늘과 새 땅이 될 때까지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다루는 신학적 주제다. 창조과학이나 지적설계론은 '창조주의'라는 이념으로 표현하는 게 옳다고 본다. 기독교 신학에서 창조론은 굉장히 다양한 논의들을 사용한다. 하나님이 어떻게 세상을 만들었고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신학적 논의이기 때문에 2000년 기독교 역사에서 굉장히 다양한 창조론 주장들이 등장했다.

하지만 창조론을 신학자들이 논의할 때 꼭 필요한 세 가지 창조 개념이 있다. 하나님이 시초에 우주를 시작하신 '태초의 창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시기까지 끊임없이 피조 세계가 새롭게 되는 '계속 창조', 종말이 되었을 때 모든 게 새로워지는 새 하늘과 새 땅이 될 것이라는 '궁극적 창조' 이 세 가지를 반드시 함께 다루어야 한다. 이 세 가지 중에서 하나만 가지고 창조론의 전부라고 하면 기독교의 가르침을 왜곡하는 것이다. 창조과학자들이나 지적설계론자들이 말하는 식의 창조는 기독교가 2000년간 가르쳐 왔던 정통 창조론의 주장인 태초의 창조, 계속 창조, 궁극적 창조를 왜곡한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전문적인 신학 훈련을 받은 사람이나 신학자가 보기엔 말이 안 되는 왜곡된 창조론을 그리고 왜곡된 신론을 가르치는 것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신학적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비판을 많이 하는 것이다. 왜곡된 가르침은 교회, 목회, 기독교계를 잘못 이끌 수 있다. 이런 잘못된 가르침의 결과는 한국교회에 문제로 나타난 사안들과 상당 부분 깊은 관계가 있다.

- 그런 면에서 진화론에 대한 공정한 이해는 창조론에 대해 제대로 알고 기독교가 진화론을 수용하는 문제와 관련이 깊을 것 같다.

역사적으로 보면 피조 세계가 창조 이후 끊임없이 변화해 가서 새로운 모습으로 나간다는 주장을 초대교회 때에 이미 한 사람들이 있었다. 한국 기독교에 들어온 창조-진화 논쟁의 주류는 안타깝게도 미국의 근본주의적 창조과학이었다. 창조과학은 20세기 초반 미국에서 있었던 근본주의 운동에 기반을 두고 1960년대 나온 창조과학 운동이다. 말하자면 기독교 역사 2000년 중 그것도 최근 몇 십 년에 새로 등장한 운동의 결과들을 그대로 가지고 들어와서 과거 오리지널한 정통 교리들을 비판하는 이상한 모양새가 되었다. 사실 진화론 없이, 진화론과 무관하게 얼마든지 창조론을 설명할 수 있다. 창조를 굳이 과학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과학자들이 진화생물학의 관점에서 창조론의 다양한 국면들을 진화라는 용어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굳이 진화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면 이 정도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나도 굳이 신학 작업과 신학 담론에 있어서 중요한 과학적 개념이라고 해서 꼭 집어넣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진화론이 보여 준 세계상과 기독교 신학에서 말하는 창조론이 얼마든지 모순되지 않고 부합할 수 있는가를 이야기하고 싶다. 진화론은 그냥 중립적인 과학 이론이고 얼마든지 우리는 대화해 나갈 수 있는 여지가 기독교의 창조론 안에 이미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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