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소망교회 김지철 목사가 지난 7월 4일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예장통합) 제39회 전국장로수련회에서 특강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김 목사는 이날 강의에서 목회자들의 교회 사유화와 우민정책을 비판하며 예장통합 교단이 이번 총회에서 세습 방지법을 특별법으로 제정하자고 제안했습니다. 목사와 장로의 신임을 묻기 위한 평가 제도도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편집자 주

세 가지 고민

▲ 김지철 목사는 목회자들의 교회 사유화와 우민정책을 비판하며 예장통합 교단이 이번 총회에서 세습 방지법을 특별법으로 제정하자고 제안했다. 목사와 장로의 신임을 묻기 위한 평가 제도도 필요하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제 마음 속에 지금도 고뇌하고 있는 세 가지 고민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 당신이 정말 생명이시며 진리이시며 소망입니까, 제 인생 전체를 드려도 괜찮은 분이십니까"라는 질문입니다. 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했고,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교수로 있을 때도 했습니다. 지금 목회를 하면서도 다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묻고 있습니다.

두 번째 질문은, 제가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면서 주님의 말씀을 바르게 뒤따라가고 있는가입니다. 주님 말씀을 증거하는 데 제 인생 전체를 걸고 있는가, 매일매일 주님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는가, 그렇게 지금도 제 자신에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질문은 우리 교회에 대한 질문입니다. 하나님! 제가 목회하고 있는 이 소망교회가 하나님 보시기에 어떻습니까. 나아가 이런 질문도 던집니다. 제가 몸담고 있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예장통합) 교단이 하나님 마음에 드십니까? 하나님께서는 한국교회를 어떻게 보십니까? 예수님께서 한국교회를 보시며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하실까요. 아니면 바리새인들에게 했던 것처럼 "화 있을진저 바리새인들아!"라고 말씀하실까요.

예수님, 우리를 맡길 수 있는 분

첫 질문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은총이 있었습니다. 제 할아버지와 작은아버지는 목사님이셨지만, 제 아버지는 제가 만 2살 때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어린 저를 안고 제 이름을 부르며 울음을 달랬다고 하는데, 저는 아버지 얼굴이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있는 사람이 참 부러웠습니다. "아버지!" 하며 달려가고 싶은데, 아버지가 왜 내게는 없을까? 이런 고민은 예수님을 통해 해결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게 가르쳐 주신 가장 소중한 하나님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아바, 아버지.'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제게도 그렇게 부르도록 허락해 주셔서, 저는 "아버지!" 하고 맘껏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콤플렉스'가 그때부터 풀렸습니다.

6.25 전쟁 때 제 동생이 죽었습니다. 당시 만삭이셨던 어머니께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자 그 충격으로 동생을 잃었습니다. 여자 동생이었다고 합니다. 저는 오누이가 손잡고 가는 것이 너무나 부러웠습니다. "왜 제게는 형제가 없습니까." 하나님께 물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때 성경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이 형제요, 자매다." 저는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 형제가 많다는 것을 깨닫고, '형제 콤플렉스'에서 벗어났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 형제애를 갖기 시작했습니다. 로마서 8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맏아들로 세우시고 우리를 자녀의 영으로 아들과 딸로 부르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님을 형님으로 부르기도 했습니다. 제 속에 있던 '가장 콤플렉스', '아버지 콤플렉스', '형 콤플렉스', '누이 콤플렉스'가 해결되었습니다.

당시 제 마음에는 이런 고민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정말 내 삶의 해결책일까?" "예수님에게 모든 것을 맡길 만한가?" 철학자이기도 했고 신학자였던 폴 틸리히는, <존재의 용기>(예영커뮤니케이션)라는 책을 쓰면서 인간의 보편적인 세 가지 불안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 불안은 오늘날 우리도 가지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존재론적 불안입니다. 쉽게 말하면 내가 살아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비존재가 된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내 옆에서 사라지는 것을 경험하지 않습니까? 화장장에서 한 줌의 재로 바뀐 것을 보며 "이게 도대체 사랑했던 너인가" 부르짖었던 가슴 아픈 경험을 해 보지 않았습니까? 존재가 비존재가 되는 죽음에 대한 불안을 존재론적 불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다. 나는 생명이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인간이 지닌 가장 큰 불안, 죽음에 대한 불안을 해결하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두 번째 불안은 목적론적 불안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의미를 묻고, 인생이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것일까를 묻고, 인생의 마지막 목표를 묻습니다. 내일을 불확실성 속에 남겨 놓은 우리는, 오늘 하루도 내일을 향해 갈 수 있을까를 물으며 불안해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다. 진리다." 길을 발견한 사람은 길에서 머뭇거릴 수 있습니까? 진리를 발견한 사람이 인생의 목적을 두고 흔들릴 수 있습니까? 저는 예수님께 인생을 드려도 제 인생이 가는 길에 문제가 없다는 것을, 제 인생의 목표가 명백하다는 것을 가슴으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세 번째 불안은 도덕적 불안입니다. 누구나 양심의 가책을 받으면 마음이 흔들립니다. 이제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인생을 걱정하며 올바르게 살지 못하는 자신을 바라보며 죄책감을 가집니다. 성경을 다시 펼쳤더니 놀라운 장면이 펼쳐집니다. 예수님은 죄 많은 사람들,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죄를 용서한다." 가장 악한 죄인까지도 예수님께서 용서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제 인생을 예수님께 맡겨도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더 알아가는 것,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것, 예수님을 위하여 제 인생 전체를 드려도 아깝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인간의 어떤 진리와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진리,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에, 제 전체를 드릴 수 있게 된 것이 제게는 너무 감사한 일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게 된 것, 이것만큼 제 인생에서 잘한 것이 어디 있을까. 제가 믿음을 지니게 된 것,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를 발견한 것에 저는 감사를 드립니다. 그래서 첫 질문은 제가 예수님을 믿기 전과 지금 예수님을 믿고 나서 목사가 된 다음 내용이 조금 다릅니다. 똑같은 질문입니다만, 그때는 저를 예수님께 드릴까 말까 하는 것이었다면, 지금은 제 자신을 주님께 드리면서 제 신앙이 흔들리지 않기를, 주님 안에 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주님, 오늘도 주님은 제게 생명이십니까, 길이십니까, 진리이십니까'를 계속 질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길

그 다음 두 번째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 주인이 되시고 참된 길이시라면, 예수님의 길이 대체 무슨 길인가 하는 것입니다. 신학 안에도 많은 분과가 있습니다. 조직신학, 성서학, 역사학, 기독교와 문화, 실천신학이 있습니다. 제가 이 중에서 성서학, 특히 신약학을 전공한 것도 예수님을 공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다 공부하려고 하니까, 제대로 못 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잘 아는 사람이 누구일까 물으며 성경을 봤더니 사도바울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도바울을 연구했습니다. 사도바울을 볼 때마다 참 놀랐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예수님을 가슴으로 받아, 인생 전체를 예수님을 위해 살 수 있을까. 때로 그렇지 못한 제 자신을 보며 자괴감이 들기도 했습니다. 저는 복음서를 통해, 사도바울을 통해, 신약 전체를 통해 예수님의 길을 보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곁에 있던 사람들

예수님의 길을 보면 예수님을 따랐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예수님과 끊임없이 논쟁하고 부딪친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 주위로 많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중심에 계셨습니다. 예수님 곁에는 진보(좌파)도 있었습니다. 보수(우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진보와 보수를 곁에 두고 중심에 계셨습니다. 당시 보수와 우파는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과 논쟁을 많이 한 사람들이 누구일까요. 바리새인들입니다. 놀랍게도 이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좌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지닌 삶의 기득권이 있었고 그들이 바라는 바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나라를 선포하시면서 이 모든 것을 뒤집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나라'는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개념이었습니다. 국가의 주인이 바뀌는 것이 혁명입니다. 세습 왕정 시대를 극복하기 위해 혁명이 필요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하는 것도 혁명입니다. 주님이라고 할 때 주(主)는 '주인 주'입니다. 그동안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었지만 이제는 "예수님이 내 인생의 주인입니다"고 고백하는 것이 신앙의 출발입니다.

이것은 혁명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매일매일 내 안의 혁명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주인이었던 내가 물러나고 예수님이 주인으로 내 앞에 좌정하고 계시다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로마 시대에는 황제를 주님이라 불렀습니다만,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렇게 선언한 것이 기독교 공동체입니다. 아주 혁명적인 변화이자 개혁의 출발이었습니다.

우선 크게 설명드리고 그 다음에 자세하게 설명하겠습니다. 오른쪽에 바리새파와 사두개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왼쪽에 쿰란파가 있었습니다. 쿰란파는 당시 시대적 흐름에 반기를 든 사람들입니다. 인간은 너무 타락해 있고 하나님께서 역사로 다가오시지 않자, 이들은 금욕을 하고 금식을 하며 하나님께서 오실 것을 바랐습니다. 세례요한도 이 공동체의 일원으로 보기도 합니다. 금식을 하며 하나님의 심판과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서 자신을 정결하게 했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사고를 통해 당시 역사인식이 상당히 달라졌습니다.

열심당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지금은 로마가 다스린다. 아직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다. 열심당은 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무력, 창과 검으로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되리라는 군사적인 열정을 지녔습니다. 쿰란파도 열심당도 모두 당시 현실 역사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습니다. 쿰란파는 수동적인 의미에서 쿰란 공동체를 꾸렸고, 열심당은 역사에서 끊임없이 저항운동을 이어 갔습니다. 좌파적인 특성을 명백하게 가지고 있던 그룹들입니다.

그러면 당시 예수님이 만났던 우파는 누구였을까요?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나라가 자신들을 통해 이뤄질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율법을 통해 이뤄질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이들의 문제는 어디에 있었을까요. 2000년 전의 교회나 오늘날 교회나 비슷합니다. 이 바리새인들은 신앙적으로 신학적으로나 예수님의 생각과 가장 가까이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천사도 믿었고 앞으로 다가올 하나님의 심판도 믿었습니다. 율법의 소중함도 믿었고, 하나님의 뜻을 수용하려는, 정말 뼈를 깎는 노력을 했던, 오늘 표현으로 하면 '보수 중의 보수'라 할 수 있습니다. 매우 경건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 예수님이 등장했을 때 가장 격렬하게 부딪쳤던 인물들이 바리새파 사람들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나라에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 예수님의 운동을 방해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바리새파 사람들을 존중하면서도 이들과 부딪히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님을 공격했습니다. 이들은 이분법적으로 사고했습니다. 자기들만이 율법을 독점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또한 사두개파도 있습니다. 이들은 현실을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들은 모세오경만 받아들였습니다. 이들은 하나님도 믿었지만, 이 땅의 축복도 받고자 했습니다. 돈과 권력을 추구했습니다. 당대 정치적 지도자들, 유대의 정치적 지도자들이었던 산헤드린의 상당수가 바로 사두개파와 바리새파로 묶여져 있었습니다. 체제 순응적인 인물들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예수님은 이 네 그룹 중 바리새파에 제일 관심을 많이 보이십니다. 제일 관심 없어 하던 그룹이 사두개파입니다. 예수님은 사두개파에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우선권은 돈과 권력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바리새파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의 제자들 안에는 바리새파도 있었고 열심당도 있었으며 쿰란적인 인물도 있었습니다. 사두개파 계열의 인물은 들어가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참 놀랍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이들을 끌어안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놀랍게도 예수님은 세리와 함께 식사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세리를 제일 싫어하던 사람들이 누구였을까요. 바로 열심당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열심당과 세리들을 한자리로 부르셨습니다.

우리 안의 진보와 보수

이 부분을 좀 더 말씀드리려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금 보수냐 진보냐 하며 서로를 가르기 시작하면 미움의 영과 저주하는 영이 우리를 지배하게 됩니다. 극우와 극좌는 만나면 분노합니다. '나는 오른쪽으로 클릭하고 있다, 나는 왼쪽으로 클릭하고 있다' 그러면 문제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처럼 중심에 서서 상대편을 끌어안으려는 노력이 결여되어 있다는 데 있습니다. 바리새파든, 사두개파든, 쿰란이든, 열심당이든 될 수 있습니다. 아니 우리 속에 이 네 가지가 다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신문을 폈습니다. 그랬더니 정부 관료가 못된 짓을 했습니다. 기업가들이 자기 이익을 채우며 기업을 사유화합니다. 이걸 보면 우리 마음속에 무슨 생각이 일어납니까. 열심당의 분노가 일어납니다. '말도 안 돼! 이런 공무원이 있다니, 이런 기업가가 있다니.' 우리 마음속에 열심당의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그러고 직장에 갑니다. 다른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인생 그렇게 복잡하게 사는 것 아니야! 좋은 게 좋은 거야, 그냥 편하게 살아! 네가 무슨 세상을 개혁하겠다고.' 열심당의 열심이 사두개파의 안주욕으로 바뀝니다.

그렇게 내 인생 즐길 것 즐기고 취할 것 취하다가도, 우리가 믿음의 사람이기 때문에 마음에 가책이 생깁니다. '야, 너 그렇게 사두개파처럼 살아도 되냐. 돈만 탐하고 쾌락만 탐해도 되는 거냐' 그런 질문이 생깁니다. 그러고 나면 오늘은 집에 가다가 교회에 들러서 기도 한 번 하고 가야겠단 생각이 듭니다. '내 마음 속이 컬컬하니 다음 주일에는 기도원에 가서 하나님을 묵상해야겠구나. 이 세속을 좀 탈출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쿰란 종파처럼 이 세상과 단절하고, 하나님과 나만의 세계 속에 뛰어들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그러고 나서 집에 돌아오니 마음이 뿌듯합니다.

때로 이런 생각이 듭니다. '세상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나만큼 기도할까. 나만큼 새벽 기도 해? 나만큼 금식 기도 해?' 바로 바리새파 같은 사고가 있습니다. 목사든 장로든 권사든 집사든 성도든 다르지 않습니다. 저는 한국교회의 40%가 바리새적인 사고를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동시에 40%는 사두개적인 사고를 합니다. 쿰란과 열심당도 각각 10%씩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 삶 전체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의 정도의 길에 들어섰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대표적인 인물 몇을 들 수 있습니다. 하나는 세례요한입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을 환영하셨습니다. "여인이 낳은 사람 중에 세례요한보다 더 큰 사람이 없다." 그렇지만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갈 수 없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세례요한은 분명 하나님나라를 선포했고 회개의 말씀을 외쳤습니다. 그렇지만 세례요한은 하나님나라를 이분법적으로 생각했습니다. 광야에 가서 회개하는 것이 하나님나라가 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어디서 하나님나라를 증거하셨습니까. 광야가 아니었습니다. 수도원도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매일매일 먹고 살고 고뇌하고 탄식하고, 죄짓고 우리의 연약함을 고백하는 삶 속에서,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은 하나님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이것은 너무나 다른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하나님의 심판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과 용서를 강조하셨습니다. 하나님나라의 새로운 영역을 예수님께서 보여 주셨습니다. 세례요한도 예수님을 따라가려고 했지만 제대로 따라갈 수 없었습니다.

고난이라는 시금석

한편 예수님을 뒤따른 무리와 제자들도 있습니다. 언젠가 제가 민중신학을 하는 분들과 논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제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동의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매우 민중적입니다. 거기에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민중신학과 해방신학은 예수님이 민중적이라고 말하고 나서 민중이 곧 예수님이고 그리스도라고 말하는데, 저는 그것만큼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민중은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죄인에 불과합니다. 그것을 모르면 우리가 예수님의 길에 바로 설 수 없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을 뒤따라갑니다. 제자들은 3년 동안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마지막 걸림돌에서 무너집니다. 그 걸림돌이 뭘까요.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목사로서 이 부분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제가 이 길을 바르게 가고 있는지 자문하곤 합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바로 고난입니다. 바로 십자가의 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라다니면서 밥도 먹고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예수님과 가장 밀접한 사람들이었지만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갑니다. 제자들이 기대했던 것은 영광의 길이었습니다. 축복의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예수님은 그 길을 막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고난의 길로 가십니다. 모든 제자들은 황망하게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자리에서 떠나갑니다.

여러분,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의 길을 갈 수 있는가 아닌가 하는 마지막 시험대가 무엇입니까. 다른 것이 아닙니다. 고난입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 중에 손양원 목사님과 주기철 목사님이 계시다는 것을 우리는 자랑스러워합니다. 여러분, 누가 예수님을 위해 죽을 수 있겠습니까. 저도 주기철 목사님께서 마지막에 하신 말씀을 보면서 '저게 가능할까, 내가 저 자리에 들어서면 예수님을 끝까지 믿을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몇 년간의 감옥 생활을 마다하지 않고 그 길을 가셨습니다.

마지막에 나타난 고난의 길을 가는가, 못 가는가가 시금석입니다. 사두개인으로 빠질지, 바리새인으로 빠질지, 열심당이나 쿰란 종파로 빠질 것인지, 아니면 예수님의 길을 걸을지 마지막 시금석은 십자가의 고난입니다. 이를 마다하지 않고 "제가 오직 하나님께 영광 돌리겠습니다"라고 하면 예수님의 길입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 : 사랑과 긍휼, 하나님께만 영광을

저는 성경을 다시 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길을 가고 계실까. 성경을 보면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사랑과 긍휼의 길입니다. 연약한 자와 죄인들, 작은 자들에게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누가복음 4장을 보면,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설교를 하십니다. 구약의 이사야서를 인용하시면서 뭐라고 하십니까. "주님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눈 먼 자에게 눈을 떠 다시 보게 함을, 눌린 자에게 자유함을." 이것이 전부 다 무엇입니까. 이 땅에서 고통받는 자, 아파하는 자, 슬퍼하는 자, 외로운 자, 탄식하는 자에게 예수님은 생명을 주시고 그들을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억눌렸던 세계에서 해방의 역사를 갖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입니다.

저는 복음을 지금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복음이란 매인 것을 풀게 해 주는 것입니다. 질병으로부터 치유를, 죄의 억압으로부터 용서를 주는 것이 복음입니다. 남녀, 인종에 따른 차별을 끊어 버립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있는 자나 없는 자나, 그리스도 안에서 다 하나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구약에서는 출애굽이 있다고 하면, 신약에서는 예수님을 통한 자유의 역사가 있습니다. 교회는 다른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누리며, 죄 속에서 고통받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용서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사람들을 적대하고 미워하는 이들에게 사랑의 영으로 그 영을 자유하게 하며, 병든 자를 치유하고, 이 땅의 역사를 치유와 생명의 역사로 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생명의 길과 자유의 길이 예수님의 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영광을 취하지 않으시고,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단이 교회 모습을 취해도 이단인 이유는 교주를 높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목사님을 존경하는 것과 목사님을 높여서 교주처럼 위하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저는 목사가 근본적으로 권위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권위 없는 목사처럼 외롭고 힘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제가 한국교회 장로님들에게 존경과 감사를 표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목사님들을 존경하고 소중하게 생각해서 이들을 위해 준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목사 자신에게 있습니다. 자기를 얼마만큼 높이려고 하는지에 따라 교주 같은 목사와 교회를 섬기는 목사로 갈립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끊임없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을 높이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죽기까지 복종하십니다. 십자가를 지십니다.

요약하면 예수님의 길의 특성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연약하고 작은 자들, 죄인을 향한 사랑과 긍휼, 자유와 해방의 길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길입니다. 주기도문의 첫 번째 항목처럼,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만 있으면 그 교회는 충성된 교회입니다. 그 교회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의 길을 따라갈 것인가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면서 오늘 우리 한국교회를 봅니다. 거기에는 제 자신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국교회에 수많은 문제들이 있지만, 우리 장로님들과 세 가지만 함께 나누며, 어떻게 우리가 예수님의 길을 따라갈 것인가를 말하려고 합니다.

한국교회는 첫째 문제는 해석학적 문제입니다. 조금 더 다르게 표현하면 성경 독해에 문제가 있습니다. 좋아하는 구절만 너무 좋아합니다. 좋아하는 성구가 있다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을 편의적으로 읽어 가고 내가 좋아하는 구절만 읽으면, 살아 계신 하나님을 죽은 문자로 바꾸게 됩니다. 바리새적인 기독교가 됩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보면서 야단을 치셨습니다. "너희들만큼은 깨달아야 하는데, 너희마저 이럴 수가 있는가." 예수님은 민중에 대해 야단을 치시지 않았습니다.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적 지도자들에게 아주 엄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여기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안식일 아닙니까.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읽고 묵상하면서도 안식을 법 조항에 묶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저는 이 시대의 보수가 사람에게 관심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시대의 진정한 진보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에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에 병든 자를 고치셨습니다. 죄 있는 자를 안식일에 용서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역사를 보여 주셨습니다.

한국교회, 본질을 잃어버림

우리 교단이 한기총을 탈퇴했습니다만, 저는 한기총을 보고 있노라면 보수가 아닌 것 같습니다. 보수의 이름만 만들어 놓고 한두 사람이 자기 욕심을 차리는 자리, 일관성도 없고 신앙의 내용도 없고 자기 이득을 위해 안주하는 저런 자리는 보수도 아닙니다.

진보라고 하는 사람들은 대한민국에서 일어나는 인권에 열심입니다. 참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북한 인권 문제가 나오면 입을 딱 다물고 나 몰라라 합니다. 그것은 거짓입니다. 악한 것입니다. 일관성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신앙에 일관성을 잃어버리면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역사를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뭘까요? 예수님은 인간이셨습니다. 인문학이란 말이 요즘 유행이지만, 저는 늘 그렇게 생각합니다. 성경이 인문학 중에 인문학이라고! 성경만큼 인간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 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소크라테스가 그랬습니까.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랬습니까. 예수님께서 인간을 살리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는 것이 성경의 내용입니다.

종교개혁 때 루터와 에라스무스가 있었습니다. 루터는 종교개혁자이고 에라스무스는 인문학자였습니다. 둘이 부딪힙니다. 그런데 두 사람에게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둘 다 교황이 지배하고 인간을 억압하는 것을 극복하는 데 관심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같은 라틴어 구절을 내겁니다. '아드폰테스(Ad Fontes).' '아드'는 '~을 향해서'이고 '폰테스'는 '샘물, 원천'입니다. 즉 '원천을 향하여'입니다. 그러나 둘은 입장이 달랐습니다. 에라스무스는 인문학을 살리기 위해 플라톤과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의 헬라 철학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성경으로 돌아갑니다. 진정한 인간을 살리고 하나님의 뜻을 좇는 원천인 성경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솔라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라는 '오직 성경으로만'을 기치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며 로마 가톨릭이 가지고 있던 억압적인 질서를 극복해 나갔습니다.

여러분, 여기에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종교개혁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가톨릭 사람들이 뭐라고 부를까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프로테스탄트'라고 불렀습니다. '저항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저는 제가 목사로서, 오랫동안 신학교 교수를 했던 사람으로서,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 통합 측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단으로 가기 위해서 해야 할 것은, 바로 비판적이고 저항적인, 이 개혁 정신을 다시 회복하는 것입니다. 좋은 게 좋은 것이 아닙니다. 한국교회가 여기까지 오게 된 많은 부분을 그냥 좋은 것이라 여기며 침묵하게 되면 우리는 알게 모르게 위기를 자초하게 됩니다.

교회의 사유화와 우민정책

두 번째 한국교회가 갖고 있는 문제는 교회 공동체가 어느덧 기업처럼 바뀌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사유화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목사의 아들이 목사가 되는 것은 축복입니다. 장로의 아들이 장로가 되는 것은 축복입니다. 기업 경영의 경우처럼, 내 아버지가 하던 일을 아들에게 물려 줄 수 있느냐는 다른 일입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사유화가 나타나고 있는 가장 전형적인 예가 세습입니다. 이것이 한국교회를 위기로 몰아가는 것 중에 하나입니다. 저는 이것을 목사로서, 아니 제 아들을 목사로 키운 사람으로서, 아니 제 할아버님도 목사이셨고, 작은 아버님도 목사이셨던 사람으로서, 다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다음 세대가 선교사의 뒤를 이어 어려운 자리에 들어가는 것에는 박수를 쳐야 합니다. 정말 힘들고 어려운 농어촌 교회에서 아들이 아버지 뒤를 이어 사역을 하겠다고 하는 것을 보면 정말 박수를 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 대형 교회에서 자녀들이 아버지를 잇는다면, 이것은 아닙니다. 우리 교단뿐 아니라 한국교회에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건 아닙니다. 이건 하나님께서 결코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속에 이런 생각도 있습니다. '이런 저항적이고 비판적인 소리를 하면 교회가 시끄러워진다. 교회가 소란해진다. 교회가 잘 가는 것 같았는데 흔들리게 된다. 그냥 조용히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우리 속에 알게 모르게 있습니다. 우리가 과거 독재 시대를 거쳐 민주화 시대까지 왔습니다. 독재자들이 지녔던 문제가 뭘까요. 그 구조를 시스템으로 만들어 놓습니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고, 내 당이 아니면 안 된다고. 저는 이것을 참 아프게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어렵게 만들고 그렇게 부정적인 시스템을 만들고 그곳에서 독재를 하고, 그렇게 가야만 안정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이 이제 21세기 들어오면서 무너지고 있습니다.

저는 목사로서 우리 장로님들에게 부탁을 드립니다. 여러분, 한 교회가 무너져도 우리 통합 측 교회가 무너져서는 안 됩니다. 통합이 다 깨져도 한국교회가 깨져서는 안 됩니다. 이 마음을 우리가 함께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9월 총회에 각 노회별로 세습 방지를 위해 법을 만들자는 이야기가 오간다는 소식이 참 반갑습니다. 특별법으로 만들 것인가, 총회 헌법을 변경하는 방법을 취할 것인가, 두 방법이 있습니다. 특별법은 그 자리에서 결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총회 헌법을 개정하는 절차를 취하게 되면 몇 년이 걸릴지도 모릅니다. 이번 총회가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인 것을, 개인의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인 것을 함께 선언해야 합니다.

누구를 정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를 미워해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한국교회가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될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목사도 무릎 꿇고 하나님 앞에 서고, 우리 장로님들도 무릎 꿇고 하나님 앞에 설까.' 우리가 영광을 올려드릴 분이 하나님뿐이시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목사도 자기 자리가 끝나면 조용히 그 자리에서 물러나야 합니다. 정말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마음으로 도와주셔야 합니다.

여러분, 저는 몇 가지 말씀을 더 드리려고 합니다. 한국교회가 한 가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목사님들이 교회를 이끌어 가기 위해 때로 무슨 정책을 썼습니까. 우민정책을 썼습니다. 성경을 몰라야 목사가 말씀 전하기 좋고 목회하기가 편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안일한 우민정책을 사용했습니다. 제 자신도 회개하는 마음으로 이 말씀을 드립니다.

여러분은 우리 목회자와 장로님들의 협력자입니다. 파트너입니다. 정말 좋은 파트너입니다. 그러면서도 선한 의미에서 견제자입니다. 목사님이 잘못하면 장로님들이 말씀하셔야 합니다. 혼자 말씀하시기 어려우면 장로님들 두세 사람이 함께 가셔서 말씀하셔야 됩니다. "목사님, 이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건 하나님의 교회 모습이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 교회가 한국교회의 모범이 되기를 원하는 마음이 우리들에게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같이 해야 됩니다. 아무도 혼자 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5000명 가까운 분들이 여기 모였습니다. 우리 교단에 정말 하나님의 사람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이 자리가 그런 자리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한국교회, 거룩함을 상실함

세 번째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거룩함을 상실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제일 두려워하는 분이 어떤 분인지 아십니까? 평신도들입니다. 그 다음에 두려워하는 분들이 집사님, 그 다음이 권사님, 그 다음이 장로님입니다. 제일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목사님들입니다.

여러분 거룩함이란 뭘까요. 루돌프 오토라는 분이 거룩함을 여러 가지로 정의하면서 인간의 마음속에 생기는 이 두 가지를 경험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첫 번째가 두려움입니다. '아, 나는 죽게 되었구나.' 모세를 비롯한 성경의 인물들이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생각하고 예수님을 생각해도 내 가슴에 두려움이 없으면 문제가 생깁니다. 그런데 이 두려움은 놀랍게도 사람을 도망치게 합니다. 이것이 보통 두려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함에서 나타나는 두려움은 다른 두려움입니다. 신비가 그 안에 담겨 있는 두려움입니다. 그래서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날 때 "나 못 하겠습니다"라고 거절하다가도 그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께 이끌립니다. 이를 매력이라고 말합니다. 끌어당김입니다.

요컨대, 거룩함이 있는 곳에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두려움이고 하나는 매력입니다. 한국교회가 위기에 부딪혔다는 것은 뭘까요. 두려움도 없고 매력도 사라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가장 어려운 것이 이런 부분입니다. '기독교가 정말 매력이 있는가. 예수 믿는다는 것이 정말 매력적인가.' 이것을 잘 깨닫지 못합니다.

이것은 영적 지도자인 우리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바로 두려움을 잃어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비한 하나님의 계시적인 매력이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두려움과 매력을 동시에 잃어버리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두려움이 없으면 신앙은 오만 방자해집니다. 매력을 잃어버리면 신앙은 지루하고 싫증 납니다. 모든 게 따분합니다. 여러분 영적인 회복이 일어나려면 이 두려움과 매력이 동시에 나타나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과 직면해야 나타나는 것인데, 하나님의 말씀과 직면할 때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이 그랬고, 모세가 그랬습니다. 바울이 그랬고, 이사야가 그랬고, 예레미야가 그랬습니다. 우리가 다시 기독교의 매력을 찾아야 합니다.

우스개 같지만, 예수 믿고 방자하면 예수님도 못 고치십니다. 예수 믿는데 교만하면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영적 지도자인 우리가 두렵고 떨림으로 겸손한 마음을 가지게 될 때, 매력적인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매력적인 장로님이 되고, 매력적이 목사님이 됩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이것을 가르치는데, 바로 이 시대에 꼭 필요한 것입니다.

좌와 우를 품는 중심

여러분들에게 몇 가지 제안을 말씀하려 합니다. 제가 남의 교단을 비난하려는 생각으로 하는 말이 아니니 오해는 없으시길 바랍니다. 장로교 합동과 통합이 나눠진 1959년, 1960년의 과거 역사를 보면 합동은 보수였습니다. 그리고 에큐메니컬을 지지하는 통합은 진보에 가까웠습니다. 합동 측은 통합을 진보주의자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뭐가 그래요. 우리가 중심이지!"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장 측을 보면, "너희들은 진보고 합동은 보수, 우리가 중심이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그런 자부심이 없으십니까. 그런데 여기에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본래 좌파와 우파를 좌익, 우익이라고 해서 날개 익(翼)을 썼습니다. 그런데 이 날개가 맘에 안 듭니다. 좌도 마음에 안 들고 우도 마음에 안 듭니다. 좌파는 우파를 '꼴통'이라고 부르고, 우파는 좌파를 개념도 없이 지 맘대로 하는 '선동주의자'라고 부릅니다. 이 흐름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날개를 쫙 잘라버리면 날 수가 없습니다. 한쪽 날개만 잘라버리면 빙빙 돌고 맙니다. 양쪽 날개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양쪽 날개가 아무 때나 활개 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땅에 내렸을 때는, "야, 몸통에 딱 달라붙어!" 그 다음에 하늘을 날려고 하면 "몸통인 내가 네게 힘을 줄 거야. 내가 힘을 주는 대로 움직여! 오른쪽 날개를 좀 더 움직이면 이제 왼쪽으로 돌 거야, 왼쪽 날개를 움직이면 오른쪽으로 돌 거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러면 어디에 근본적인 힘이 있어야 합니까. 이 중심에 힘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통합 측 신학은 중간 신학이 아닙니다. 중간 신학은 좌우가 커질수록 좁아집니다. 이것은 말도 안 됩니다. 그런 신학은 안 됩니다. 오히려 중심에 있는 신학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생각을 통해 영적이고 지성적인 무장을 하는 신학입니다. 이 중심이 바로 서야 한국교회가 바로 설 수 있습니다. 통합 측 장로님들이 이 신학을 가지고 바로 서서, 다른 사람들을 때로 야단 치고, 다른 사람을 끌어안아야, 하나님이 주신 이 복음의 역사, 하나님나라를 이루어가는 역사를 이룰 수가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기대합니다. 저는 신학교에서 20년 가까운 세월을 가르치면서 신학생들한테 끊임없이 우리 통합 측의 신학을 치열하게 고민하라고, 신학교에 들어오면 고뇌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고뇌가 시작된다고 가르쳤습니다. 한국교회를 위해서 고민하고 어떻게 하면 이 땅에 하나님나라를 세울 것인가 고민하는 사람이 제대로 목회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고뇌를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몇 가지 제안

마지막으로 세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 총회 때 통합 총회가 세습 방지법을 특별법으로 정해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더 이상 괜한 시비에 걸리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저는 개척 교회 하시는 분들을 참 존중합니다. 얼마나 소중한 분인지 모릅니다. 그분들을 격려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분의 교회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그 일을 우리가 함께 감당했으면 좋겠습니다.

둘째는 조금 더 어려운 일입니다. 한국교회에서 장로님들과 목사님들이 정말 애를 쓰셨습니다. 그럼에도 한국교회를 어렵게 한 책임도 우리 목사님과 장로님들에게 있습니다. 저는 지금도 목사의 책임이 90%라고 생각합니다. 장로님들이 10%의 책임이 있습니다. 이제 함께 동참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무엇이냐면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이나 장로님들이 성도님들의 지지를 통해 목회자와 장로님이 되었으니, 또한 장로님들은 공동의회에서 2/3 득표를 얻었으니, 이제 새로운 결단을 하자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제 담임목사도 신임을 받으면 어떨까. 장로님들도 신임을 받으면 어떨까?' 그런데 총회 헌법은 이것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저는 금지 조항을 보는 순간, 이 조항이 '목사와 장로는 서로 간섭하지 말자, 그냥 잘 가자, 서로 싸움하지 말자'는 타협책처럼 보였습니다. 이것은 암묵적으로 합의된 나쁜 법 같습니다. 저는 이런 부분들이 변화되기를 바랍니다. 작은 교회들은 이를 할 수 없습니다.

제 제안입니다. 먼저 장로님들이 그것이 우리에게 불가하다고 하면 6년을 사역하시고 1년을 안식하시면 어떻겠습니까? 그래서 그때 다른 교회도 둘러보시고, 필요하면 성지순례도 해 보십시오. 별도의 예산을 드리고, 6개월이면 6개월 시한을 정해서 농어촌 교회를 섬기면 어떨까요. 물론 이런 기간에도 노회와 총회는 가실 수 있습니다. 이건 제 생각입니다.

그 다음에 6년을 더 하시고, 13년째 되는 해부터는 노회와 총회를 가시되, 당회 정책들은 새로운 신임 장로님들께 맡겨 보십시오. 제가 참 어렵게 느끼는 것이 무엇이냐면, 젊은 사람들이 당회에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 정책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도 젊은 장로님들은 젊은이들을 어떻게 다음 세대로 이끌까, 고민을 하십니다. 이 부분은 우리 총회 헌법이 가능한 범위 안에서 추진하면 어떨까 하는 것이 제 제안입니다.

그렇다면 목사님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가 저희 당회에서 이런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제가 신임투표를 받을 테니까, 장로님들도 받아 보시겠습니까?" 그랬더니 어떤 장로님께서 "그건 헌법 위반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 마음은 그렇습니다. 교인수가 1000명 이상 되는 큰 교회부터 목사님들이 6년이 되면 당회에서 무기명으로 재신임투표를 받으시면 어떨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반수면 목사님이 다시 6년을 하시면 됩니다. 과반수가 되지 않고 장로님들이 보시게 우리 목회자가 문제가 있다 여겨지면, 공동의회에 내놓아 교인들이 최종적인 판단을 하도록 하게 하는 것입니다.

요즘 목회자들 중에는 위임목사가 되면 교인 눈치는 안 보고 장로님 눈치만 보는 분들이 있습니다. 장로님들도 집사님일 때는 교인들에게 관심을 갖는데, 한 번 안수를 받고 임직을 받게 되면 다 결정된 것처럼 생각합니다. 우리 마음속에 평가 시스템이 없습니다. 이 평가 시스템을 회복시킬 수가 있을까요. 여러분, 사람은 참 쉽지 않은 존재입니다. 목사는 재신임을 받지 못하면 갈 데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긍정적일 수 있습니다. 생명 걸고 목회하고, 내 삶 전체를 걸고 목회하고, 교회 정치는 하지 않는 것이지요. 이것이 우리 스스로를 경계하도록 합니다.

종교 개혁의 주체는 바로 우리들입니다. 장로님과 목사님입니다. 그런데 개혁의 대상도 목사님과 장로님입니다. 우리가 동시에 개혁의 주체이면서 개혁의 대상입니다. 그래서 어렵습니다. 고양이 목에 방울을 못 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해야 합니다. 한국교회를 위해서, 우리 다음 세대를 위해서 하셔야 합니다. 여기 계신 장로님들이 하셔야 합니다. 저희 교회에서 이번에 9명의 장로님이 임직되셨습니다. 이번 당회에서 허락도 해 주셨고 공동의회에서 허락해 주신 것이 한 가지가 있습니다. 장로님들이 6년을 사역하시면 1년을 안식하시되, 1년 동안은 노회나 총회에는 참여하시고, 교회 당회에는 참여하시지 않기로 했습니다. 대신 다른 교회를 방문하고 여러 어려운 교회를 도우며 재충전하시기로 했습니다.

한국교회를 사랑하는 장로님! 우리가 중심입니다. 그 중심에 우리가 서 있어야 한국 교회가 바로 섭니다. 진보적인 그룹도, 보수적인 그룹도 통합 측을 기대합니다. 통합 교단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한국교회가 바로 서게 됩니다. 그래야 다시금 영적인 회복과 축복의 역사가 이어질 것입니다.

김지철 / 소망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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