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 문학의 아버지

사람들은 J. R. R. 톨킨을 '판타지 문학'의 아버지라고 말한다. 3부작 <반지의 제왕>, <실마릴리온>, <호빗> 이전에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판타지 작품이 없기 때문이다. 톨킨에게 '당신이 판타지 문학의 아버지입니까?'라고 물으면 '조지 맥도널드'라고 말할 것이다. 조지 맥도널드야말로 판타지 문학의 아버지이다.

조지 맥도널드는 <판타스테스>를 시작으로 <북풍의 등에서>, <공주와 난쟁이 공주와 커디>, <공주와 고블린>, <가벼운 공주>, <황금 열쇠>와 같은 작품을 썼다. 은유와 암시가 가득한 <북풍의 등에서>, 줄거리로 요약하기 어려운 여정을 다룬 <황금 열쇠>, 저주를 받아 몸무게를 잃어버린 공주에 관한 기발한 이야기 <가벼운 공주>는 조지 맥도널드가 왜 판타지 문학의 아버지인지 보여 준다. 톨킨도 <공주와 난쟁이 공주와 커디>, <공주와 고블린>을 참고해서 고블린의 지하 세계를 만들었을 것이다.

조지 맥도널드는 루이스 캐럴(<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저자), 톨킨, C. S. 루이스, G. K. 체스터튼에게 영향을 준다. C. S. 루이스는 "그에게 오류가 없다는 말은 감히 하지 않겠다. 하지만 나는 그리스도의 영에 그보다 더 가까이 다가간 작가, 더 지속적으로 그 곁에 머문 작가를 알지 못한다(조지 맥도널드 선집-홍성사)"고 말할 정도로 조지 맥도널드를 존경했다. 조지 맥도널드 선집을 읽으면 루이스가 조지 맥도널드에게서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았는지 확인할 수 있다. 조앤 롤링의 <해리포터> 시리즈와 알리스터 맥그라스의 <에이딘 연대기>가 이들 작품의 뒤를 잇는다.

▲ (왼쪽부터) 존 로날드 로웰 톨킨의 판타지 대표작 <실마릴리온>·<반지의 제왕>·<호빗>(이상 씨앗을뿌리는사람 펴냄).

루이스와 톨킨

톨킨, 루이스, 찰스 윌리엄스, 오웬 바필드는 Inklings라는 모임을 만들어 작품을 읽고 서로 의견을 나누었다. 루이스는 호빗을 읽고 극찬했다. 하지만 톨킨은 루이스가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나니아 연대기>를 쓰는 것을 "퇴보"라고 불렀다. 루이스는 톨킨에 비해 굉장히 빠른 속도로 <나니아 연대기>를 썼는데, 톨킨이 볼 때 그건 경박한 처사였다(<루이스와 톨킨>(콜린 듀리에즈, 홍성사)). 톨킨은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역시 "너무 성급하게 쓰인 진부한 작품"이라고 평했다(<톨킨-판타지의 제왕>(마이클 화이트, 작가정신). 가톨릭 신자로서 악마의 존재를 믿은 톨킨으로서는 악마를 너무 가볍게 취급하는 루이스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더구나 톨킨은 알레고리와 기독교 교리에 대한 직접 상징이 많은 글쓰기 방식을 싫어했다. 아슬란이 예수님이라는 걸 누구나 다 알 텐데 이런 방식으로 이야기를 쓰지 말라고 했다. 동화나 쓰면서 재능을 낭비하지 말라는 톨킨의 말에 루이스는 '만약 나니아와 같은 나라가 있다면', '그럼 그 나라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생각하며 써 본 거라고 가볍게 받아들였다.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둘의 관계가 멀어졌고, 루이스는 프로도와 샘이 모르도르에 간 이야기까지 들은 뒤에는 Inklings에서 톨킨을 만나기 어려웠다.

순수 판타지 문학으로만 보면 톨킨이 글을 더 잘 쓴다. <나니아 연대기>는 뚜렷하지만 단순하다. 기독교 세계관을 확실하게 드러내지만 이야깃거리를 많이 만들어 내지는 않는다. 반지의 제왕은 광대하면서 모호하다. 온갖 이야기를 하게 만든다. <실마릴리온>은 '사람이 한 나라의 신화를 뛰어넘는 작품을 어떻게 쓸 수 있을까?' 하는 놀라움을 줄 정도이다. 톨킨은 조국 영국의 신화적 빈곤이 싫어서 <실마릴리온>을 썼다고 한다. 톨킨은 광대하며 깊이 있는 글, 대놓고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울림이 있는 글을 좋아했다. 톨킨의 작품은 이야기가 지닌 매력을 담뿍 담고 있다. <나니아 연대기>는 너무 대놓고 이야기를 한다. 내가 이렇게 느낄 정도이니 톨킨이 실망한 게 당연하겠지. <나니아 연대기>가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 <나니아 연대기> / C. S. 루이스 지음 / 폴린 베인즈 그림 / 햇살과나무꾼 옮김 / 시공주니어 펴냄 / 1080면 / 3만 2000원
독자가 아니라 초등학교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의 눈으로 보면 <나니아 연대기>가 더 좋다. 반지의 제왕은 어른을 위한 판타지이다. 읽는 기쁨은 크지만 하나님에 대해 알려주지는 않는다. 기독교 세계가 담겨 있지만 깊이 이해해야 한다. <나니아 연대기>는 '두려우면서도 사랑스러운 존재 곧 하나님'을 보여 준다. '십자가 희생, 각자의 마음에 있는 죄를 다루는 모습', '공동체', '하나님나라에 대한 소망'까지 담아냈다.

톨킨이 <에이딘 연대기>를 읽는다면

톨킨에게 <에이딘 연대기>를 보여 준다면 <나니아 연대기>보다 더 혹독하게 비평할 것 같다. 알리스터 맥그라스는 루이스의 후계자로 불린다. <에이딘 연대기>를 "기독교 세계관의 핵심을 전하는 소설"이라고 대놓고 말한다. 기독교 세계관의 핵심을 담은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작정하고 썼다. 톨킨은 이런 방식을 싫어했다. 물론, 루이스는 다르게 평가하겠지만.

1부를 서울 가는 버스 안에서 읽었다. 1박 2일 회의를 하고 집으로 오는 버스 안에서 2, 3부를 마저 읽었다. 함께한 동료들에게 <에이딘 연대기> 1부를 읽은 소감을 말했다. "아무나 소설을 쓰는 게 아닌가 봐. 1부까지 읽었는데 단순해. <반지의 제왕>은 말할 필요도 없는 작품이고, <나니아 연대기>도 읽고 나면 생각나는 문장, 기억나는 이미지, 하고픈 이야기가 많아. 그러나 <에이딘 연대기>는 그런 게 없어. 알리스터 맥그라스가 과학자, 기독교 변증가로 남는 게 더 좋았을 거야!"라고 떠들었다. 자기가 쓴 판타지 소설을 보여 준 후배에게 "네가 쓰고 있는 작품이 더 재미있다"고 말해서 기운을 북돋워 주기까지 했다.

1부는 <나니아 연대기>와 비슷한 방식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영국에 사는 두 아이 '피터'와 '줄리아'가 할아버지·할머니 집에 와서 연못을 통해 '에이딘'으로 간다. 에이딘은 아름답고 멋진 곳이었지만 죄에 물든 통치자에 의해 폭정이 계속되고 있다. 옛 왕을 기억하며 구원자를 기다리는 무리가 아이들과 함께 통치자를 몰아낸다. 그리고 영국으로 다시 돌아온다. <나니아 연대기>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읽으니 이야기 구조도 느슨한 것 같고 이어지는 내용도 단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알리스터 맥그라스

2부에서 아이들은 이복동생과 함께 에이딘에 돌아온다. <새벽 출정호의 항해>에서 버릇없고 제멋대로인 유스터스와 함께 나니아로 돌아오는 이야기와 비슷하다. '역시' 하고 읽는데 이야기가 완전히 다르다. 에이딘에는 사람이 거의 없다. 1부에서 두 아이가 해방시킨 주민들은 케미아라는 섬에 노예로 끌려간다. 알지 못하는 무언가를 찾기 위해 광산에서 강제 노동에 시달린다. 두 아이도 허무하게 잡혀 강제 노동을 함께 한다. 일이 잘 풀리다가도 막다른 골목에 갇힌다. 희망이 보이지만 또 절망이다. 적이 찾으려는 물건을 먼저 찾고 승리를 외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3부가 걸작이다. 적들이 원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를 찾아오지만 승리는 보이지 않는다. 화산이 터지고 남은 자들은 작은 동굴에 숨어 목숨을 연명한다. 용기를 내어 적진에 들어가 강력한 무기를 되찾아 오지만 상황은 더 나빠진다. 메시아가 돌아와 고통과 슬픔에서 단번에 해방시켜 주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스스로를 '왕의 왕이 보낸 대리자'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오지만 가장 힘이 센 어른들만 골라서 배를 만들고는 자기들끼리 떠나보낸다. 구원의 증표를 차지했지만 세상은 변하지 않고 고통은 계속된다. 해방되었으나, 누가 자기들을 구원할지 모르면서 죽는 사람도 생긴다.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고 하나님 자녀로 살아가지만 여전히 우리를 둘러싼 죄악과 싸워야 한다. 기도 한 마디에 하늘이 갈라지지도 않고 고통이 멈추지도 않는다. 심지어 왕의 왕을 기다리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의혹과 혼란과 분열이 일어난다. 무리를 이끌 지도자로 보인 사람들은 자기를 따르는 추종자들과 함께 배를 만들고는 자기들끼리 떠나 버린다. '왕의 왕이 원하신다'는 말에 넘어가 배를 만드는 사람들이 꼭 우리들처럼 보인다. 하나님을 위해 사업을 하고 건물을 올리고 이름을 내려고 하지만 분열과 다툼을 남겨두고 떠나 버린다.

구원받고 승리한 줄 알았으나 여전히 고통당하고 불확실한 미래, 고통당하는 현실에서 갈피를 못 잡아 우왕좌왕하는 이 무리를 누가 건져낼 것인가?

기독교 세계관의 핵심을 전달하는 소설

▲ <에이딘 연대기> / 알리스터 맥그라스 지음 / 최종훈 옮김 / 포이에마 펴냄 / 560면 / 1만 4800원
반지의 제왕에는 영웅이 없다. 간달프가 대단한 마법사이지만 사루만, 사우론을 이기지는 못한다. 요정왕 엘론드, 황금 숲의 여왕 갈라드리엘도 악의 세력을 결단내지 못한다. 전투(헬름 협곡 전투, 펠렌노르 평원 전투)에는 이기지만 전쟁을 끝내지 못한다. 용사가 아니라 평범한 호빗이 반지를 던져야 전쟁이 끝난다. 주인공인 프로도는 반지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오랜 여행을 욕심으로 끝낸다. 죄는 우리 스스로 던져 버릴 수 없다는 걸 보여 주지만 예수님을 보여 주지는 않는다. 톨킨은 그런 이야기를 싫어한다.

<나니아 연대기>에서 아슬란은 에드먼드를 위해 죽는다. 아슬란은 두려우면서도 사랑스러운 분, 곧 하나님을 보여 준다. 나니아는 멋진 세계이지만 그림자이며, 진짜 나라가 기다리고 있다. 거긴 하나님나라이다. 마지막 전투가 끝나면 나니아는 사라지고 아슬란의 나라로 간다. 기독교 대안학교와 홈 스쿨에서 ><나니아 연대기>로 수업을 하는 이유다.

<에이딘 연대기>는 <나니아 연대기>보다 한 걸음 더 나간다. 흠모할 만한 것이 없는 아이가 왕의 왕이 보낸 대리자이다. 결정적인 순간이 되기 전에는 누가 무리를 구할지 아무도 모른다. 추리소설은 아니지만 누가 하나님이 보낸 자인지 찾을 수가 없었다. 세상을 구하는 영웅, 무리를 이끄는 지도자를 찾았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죽는 예수님이 아니라 빌라도를 찾은 셈이었는데 이걸 몰랐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영웅을 원했고, 대단한 지도자를 따랐으며, 내 뜻을 따르는 사람들만 좋아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이지만 잘못된 눈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에이딘 연대기>는 예상도 못한 결론으로 끝난다. 죄는 우리가 결정적 무기를 손에 쥐었다고 끝나지 않는다. 하나님이 보내신 자와 함께 화산 안에 뛰어들어 맞서 싸워야 한다. 치료자(예상치 못한 대리자를 책에서는 '치료자'로 부른다.)와 함께 연합해서 용기를 내야 한다. 무모하고, 승리할 만한 요건을 하나도 갖고 있지 않지만 왕의 왕을 믿기에 뛰어든다. 무엇을 말하는지는 읽어 봐야 한다. 대놓고 기독교 세계관을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싶다면 이 책이 도움을 줄 것이다.

그리고 현실에서

세 아이는 에이딘에서 돌아온다. 위험했지만 이겨 냈다. 아이들은 더 성숙했고 굳건해졌다. 현실은 어떨까? 팥쥐 엄마 같은 새엄마, 새엄마와 결혼하면서 눈이 멀어 버린 아빠가 분노를 휘두르며 기다린다. 피터는 아빠에게 허리띠로 맞고, 줄리아도 맞아서 얼굴에 상처가 난다. 에이딘에서 거둔 승리가 현실로 이어질까? 교회에서 은혜받고 '주님 여기가 좋사오니'라고 말하지만 집은 어떨까? 학교는? 직장은? 알리스터 맥그라스는 '에이든에서 돌아오니 모든 것이 잘 되었어요. 행복하게 살았대요'라고 끝내지 않는다. 현실에서 여전히 죄악과 맞서 싸워야 한다. 에이딘에서 한 것처럼 화산 중앙 어둠 속으로 들어가 싸워야 한다.

버스에서 책을 덮으며 '1부가 유치하다고 한 말이 얼마나 성급했는지 부끄럽다'는 생각을 했다. 기독교 세계관의 핵심을 대놓고 전하는 소설이기 때문에 기독교인 아닌 사람들에겐 인기가 없을 것 같다. 그러나 기독교인에게는 많은 이야깃거리와 고민을 안겨 줄 책이다. 꼭 읽어 보기 바란다. 더불어 공동체에서 이야기 나누기를….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