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일 동안 금식하셨던 예수님 앞에 나타난 사탄은 세 가지 시험을 통해 예수님을 넘어뜨리려고 했다. 그 가운데 하나는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성전 꼭대기 위에서 뛰어내려 보라는 것이었다(눅 4:9). 성경에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는 말씀이 있으니(시 91:11~12), 뛰어내려도 전혀 해를 입지 않을 것이 아니냐? 예수님에게 충동질하였다. 그때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됨을 증명하기 위하여 사탄의 말대로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지 않으셨다. 대신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음을 상기시켜 주셨다(신 6:16).

그런데 성경에 보면, 하나님을 시험하라는 말씀도 등장한다. 그것은 말라기 3:10인데,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십일조를 드려서 정말로 하나님께서 복을 내리시는지 내리시지 않는지 시험해 보라는 말씀이다.

한편에서는 절대로 하나님을 시험하면 안 된다고 되어 있는데, 또 한편에서는 하나님을 시험해 보라고 말씀하시는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각각 그 의미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말씀은 '하나님을 불신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을 금하는 말씀이다. 출애굽 당시의 이스라엘 민족이 그랬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광야로 인도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다. 그래서 물이 없다고 모세를 원망하였다.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을 불신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시험하는 행위였다. 인자가 많으신 하나님께서는 반석에서 물을 내심으로 물을 제공해 주셨지만, 다시는 '불신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이다(신 6:16).

기드온은 미디안과 싸우러 가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하나님께서 과연 자신과 함께 하실지 확신이 서지 않았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하신다는 확증을 원했었다. 그래서 양털에만 이슬이 내리게 하는 기적을 통해서, 또한 양털에만 이슬이 내리지 않는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확인하고 싶어 했다(삿 6:36~40). 이러한 기드온의 시험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가운데 하는 시험이었을 것이다.

반면 십일조를 드려서 하나님께서 복을 내리시는지 시험해 보라는 말씀(말 3:10)은 '하나님을 철저히 신뢰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복을 내리시는지 확인해 보라는 의미이다. 이런 '긍정적인 의미에서는' 우리는 하나님을 시험할 수 있다. 기도하면 응답하시겠다고 했는데, 우리가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응답하심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복이라 했는데, 우리는 말씀대로 살면서 복된 삶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행동들은 긍정적인 의미에서이든 부정적인 의미에서이든 하나님을 시험하는 셈이다.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의 반응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의인의 길에 선다면, 복된 자가 될 것이다(시 1).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죄악의 길로 달려간다면 우리는 파멸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산성을 만나면 빨강색으로 변하고 알칼리를 만나면 보라색으로 변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순종하느냐 불순종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반응은 달라질 것이다.

성경의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을 불순종하면서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는 그런 시험을 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시험을 하라는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복된 삶을 누리는 시험을 하라는 것이다. 지금 나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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