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와 여호수아의 탁월한 지휘 아래 치러진 가나안 정복 전쟁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로 정복 모델은 단지 성서 해석의 유물로 남겨지게 됩니다.

평화 정착 모델(Peaceful infiltration Model, 유목민 잠입 모델)

정복 모델이 미국과 이스라엘에서 환영받고 있을 때, 1920년대와 1930년대의 알브레히트 알트(Albrecht Alt)와 마틴 노트(Martin Noth) 같은 독일 학자들은 나중에 '평화 정착 모델'이라고 알려지게 될 이론을 내놓았습니다. 이 모델은 주로 미국학자들이 주장하는 '정복 모델'이 여호수아서를 중심으로 연구되는 것과는 달리 사사기서를 중심으로 근거를 삼았습니다. 이 가설에는 주요한 두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첫째는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이동하며 텐트에 거주하는 목자들이며, 창세기의 이야기들을 생생하게 기억하던 자들이라고 하는 성경의 전승을 중요시 여깁니다. 둘째는 중동 목축 유목민의 정착화에 대한 근대의 민속학적인 연구에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그 연구에 따르면 천 년 동안 부족민들이 멀고 먼 거리를 옮겨 다녔는데, 그들 대부분이 농부나 마을 주민이 되기 위해서 '정착'했다는 것입니다.

평화 정착 모델에 따르면, 기원전 13~12세기에 가나안의 고지대 또는 서부 팔레스타인에 정착했던 사람들은 본래 트랜스요르단의 반 건조지역(semi-arid)에 살던 유목 부족이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일부가 풀과 물을 찾아서 요르단 강을 건너서 모든 계절이 시원하고 물도 많은 비옥한 고원지대에 머무르게 되었다는 견해입니다. 결국 그들이 그곳에 정착하게 되었고 기록된 역사의 관점에서 보자면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 민족'이 되었다는 가설입니다.

알트의 제자 노트(Noth)는, 이스라엘인들은 그들의 땅을 점유하기 전에는 땅을 갈망하던 유목민들이였으며 목초지를 따라 돌아다니다가 시골에서 영구히 정착하여 자신들의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고 봅니다. 그들은 무력을 사용하지 않았으며(수 10~11장), 다양한 반(半) 유목민들이 산지의 여러 지역에 정착하면서 장기간에 걸쳐 지파들이 분화되어 마침내 이들은 지파 동맹을 형성하게 되었고 이 동맹이 확장되어 12지파를 이루게 된다는 주장입니다. 노트는 자신의 이론과 비슷한 그리스의 '인보동맹(Amphictyony)'을 표본으로 삼았습니다. 알트-노트 모델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야웨를 지파 연맹의 신으로 모시고 언약궤를 중심 신전으로 삼은 지파(부족) 연맹이었다는 말이 됩니다.

이스라엘의 기원은 유목을 하던 부족이라는 것,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전에 트랜스요르단에 머물렀고, 점차로 평등주의 이상을 가진 소규모의 목축 농업 사회로 바뀌어 갔다는 것, 발굴된 고고학 자료와 잘 맞아떨어진다는 것이 이 모델의 장점이었습니다. 또한 이 가설을 세우는 데 큰 영향을 끼친 민속학 자료들을 활용해서 초기 이스라엘이 어떤 사람들이었으며, 또 어디에서 왔는지에 대한 오늘날의 비종교적인 설명에도 확신을 주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주요한 약점은 이 가설이 막스 베버의 사회학 이론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베버는 촌락 정착민의 생활 방식과 유목민의 생활 방식 사이에 뚜렷한 경계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최근의 사회학에 따르면 농경과 반유목민 생활이 고대에서는 아마도 그렇게 엄밀하게 분리되지 않았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민속학 측면에서 볼 때, '평화적인 잠입'은 베드윈(유목민)의 삶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19세기 유럽 사람들의 오해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중동 목축 유목 사회와 생활양식 연구자들이 아라비아말을 할 줄 몰랐기에 단지 피상적으로만 관찰했을 뿐, 유목민들의 실제 삶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무엇보다 아마추어 민속학자들은 유목민들의 삶을 '낭만화'했기에 정착화의 실제 역학 관계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가나안 땅에 정착한 초기 철기시대의 중앙 산지 정착민들은 주로 농부들이었고 일부만 목축업자들이었다는 것이 최근 학계의 정설입니다.

오늘날의 현대 선사학자들과 인류학자들은 더 이상 목축 유목 생활을 사냥 및 채집에서 식물 경작으로 이행하는 진화적인 중간기에 해당한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어떤 유목민이 나중에 농사를 지었다 하더라도 진화적 흐름은 근동의 경작지에서 '스텝지대와 사막으로' 나아간 것이지, '사막에서 경작지로' 나아간 것은 아니었다는 결론입니다. 유목민과 농민은 반 유목민이라는 형태로 공생하였으며 일 년 중 몇 개월은 경제적으로 서로 의존하였는데, 한걸음 더 나아가면 그들은 동일 인물들이었을 확률이 높습니다.

마찬가지로 목축 유목민을 고대 근동의 모든 농촌 사회에 대한 변화의 주역으로서 묘사하는 것도 전반적으로 과장된 것입니다. 또한 구약성서의 매우 많은 본문들에서 나타난 토지에 대한 갈망은 목축 유목민들보다는 농민들의 특성을 훨씬 더 잘 드러낸다는 것이 이 모델의 단점입니다. 결국 유목민 잠입 모델이라는 전제는 이러한 비판 아래 놓임으로써 신뢰성을 잃게 되었습니다.

평화 정착 모델과 정복 모델은 성서의 기록과 같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땅 '밖에서' 온 사람들이라고 보는 것에서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땅 '안에서' 기원했다고 보는 새로운 학설이 등장합니다.

농민 혁명 모델(Peasant revolt Model)

이스라엘 민족의 정복에 관해서 위에서 소개한 두 가지 모델들은 제2차 세계대전 훨씬 이전의 것인데, 1950년대 초반에 이미 그 이론들은 용도 폐기되려는 조짐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던 1962년에 줄곧 비주류에 속해 있던 올브라이트의 제자 중의 한 사람인, 미시간 대학교의 교수 조지 멘덴홀(George Mendenhall)이 'The Hebrew Conquest of Palestine'이라는 짤막한 논문을 출판합니다. 이 논문은 20세기 미국 성경 연구에 있어서 높은 독창적인 기여를 한 논문 가운데 하나입니다. 멘덴홀은 '정복'과 '평화적 잠입' 모델에 호소하던 것이 치명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 모델들이 사실상 초기 이스라엘의 현상에 대해서 설명할 수 없었다고 보고, 대신에 종교적인 동기에 의한 내부 혁명을 제안했습니다. 그는 이 이론을 이후에 출판한 책인, The Tenth Generation: The Origins of the Biblical Tradition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혼란, 갈등 전쟁. 우리가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다. 고대 이스라엘은 군대 무기가 탁월하거나 군대 조직이 탁월해서 승리한 것이 아니다. 이겼다고 해서 모든 주민을 한꺼번에 몰아내거나 학살하지 않았다. 그 땅의 선물이란 단지 옛 정치 세력과 그들이 온 땅을 소유했다고 하는 주장을 하나님 그분께 돌려드린 것을 뜻했다."

멘덴홀은 정복의 개념을 완전히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 '대부분이' 가나안 사람이라고 보았습니다.

"팔레스타인에서 히브리 사람들의 정복이 가능했던 이유는 종교적 운동이 기존의 가나안 사회 구성원들 가운데 일종의 연대 의식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연대는 청동기시대 말기에 시리아-팔레스타인 전체를 주도했던 도시국가 체제에 도전하고 마침내 순기능을 상실한 그 체제를 붕괴시킬 수 있었다."

그에 따르면 농민들은 지나친 세금에 반발해서 도시 군주들에게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 반란의 촉진제 역할은 이집트의 억압적인 노예 생활에서 벗어난 야웨 신앙을 가진 이들이라는 것입니다. 멘덴홀은 기원전 14세기 아마르나 시대에 있었던 하비루(Habiru)라 불리는 이들에게 주목했는데 이들은 당시 이집트에서 임명한 봉건 군주들이 통치하던 가나안 도시국가들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자들로서 이들이 '히브리' 민족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작은 신앙 공동체의 출현은 가나안 땅 전역의 기존 정착민들을 분열시켰다. 어떤 사람들은 이스라엘과 뜻을 같이하고, 다른 사람들(도시국가 왕들과 그 지지자들)은 이스라엘과 대항해 싸웠다. 이 싸움에서 가나안 도시국가 군주들이 패배했고, 이스라엘은 승리하여 각 지역의 지배적인 다수가 되었기 때문에, 모든 가나안인들과 아모리인들이 대규모로 축출되거나 사살되었다는 전통이 생겨나게 되었다."

멘덴홀에게 있어 '이스라엘'을 하나로 만들었던 접착제는 인종이나 혈연이 아니라 야웨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었습니다. 이러한 멘덴홀의 혁신적인 모델은 대부분의 학자들에게는 지나치게 급진적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다가 1979년에 버클리대학교의 노만 갓월드(Norman Gottwald)가 아마도 20세기 미국 성서학 분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연구로 꼽히는, <야웨의 지파들>(The Tribes of Yahweh: A Sociology of the religion of A Sociology of Liberated Israel, 1250~1050 B. C. E.)이라는 책을 내놓습니다. 갓월드는 오랫동안 기독교 신학을 해방시키는 일과 사회 활동에 종사해 온 경력을 가진 헌신적인 마르크스주의자인데, 당시의 실험적인 사회학적 접근 방법을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와 종교에 처음으로 적용시킵니다. 그리고 새로운 고고학 자료들도 활용합니다.

갓월드의 공헌은 그가 제기한 두 가지 근본적인 제안들과 관련된 것입니다. 첫째로, '초기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같은 타지에서 온 사람들에 의한 군사 정복의 결과물이 아니라, 오랜 기간 이어진 사회-문화적이며 종교적인 '혁명'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이 혁명은 후기 청동기/초기 철기 I 시대의 지방의 가나안 농민들에 의해서 촉발된 것인데, 그들은 자신들의 부패한 권력자들을 대상으로 혁명을 일으킨 것이며, 점차적으로 새로운 민족적 실체와 사회를 구성해 나갔다는 주장입니다. 둘째로, 이러한 혁명 배후에 있는 추진력은 대부분 종교적인 것이었는데, 이스라엘의 고유의 민족적 신인 야웨 하나님의 '해방하는 능력'에 대한 믿음이 그것이었다는 결론입니다.

갓월드의 책은 그 당시에 대단한 논란거리였으며 지금도 여전히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는데 그 신선한 대담함 때문에 1980년대에 대단한 존경을 받았었으나 많은 동조자를 얻지는 못했습니다. 몇몇 성서학자들은 이러한 학문 분야에 친숙하지를 못했고 그 과중한 인류학적인 토론을 쓸데없는 말이라고 치부해 버리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갓월드의 명백한 마르크스주의적 경향이 걸림돌이었습니다. 아주 일부의 사람들만이 그가 토착적 기원을 강조한 것이나 또는 오랜 기간의 문화 변화에 있어서의 이데올로기적이며 사회적인 요소들에 대해서 그가 강조한 것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멘덴홀이 반란의 원동력을 야웨 신앙에 두었다면 갓월드는 그것보다 물질문화에 더 중점을 둔 것이 차이점입니다. 갓월드는 야웨 종교가 초기 이스라엘의 사회적 이상을 지지하기 위해 만들어져서 혁명의 한 기능으로 부상하게 되었다고 보았습니다.

이 가설의 결정적인 문제는 고고학 증거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회혁명이라는 것이 대개 이데올로기적 동기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에 잔존하는 실체적인 물질적 문화를 발견하기가 극도로 어렵습니다. 자유농민들, 농업 잉여물, 부족 간 협력 등은 초기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민족의 문화에도 해당됩니다. 또한 갓월드는 도시 군주제가 되기 전의 초기 이스라엘을 자유와 평등의 시대라고 가정했으나 이에 대한 명확한 근거를 찾을 수 없습니다.

나중에 갓월드는 1985년 이후에 '농민 봉기설(농민 혁명)'이나 '평등 사회'같은 낱말들을 버렸습니다. 그는 이 낱말을 '농경 사회혁명'과 '공동 생산양식'이라는 낱말로 바꾸었는데, 갓월드는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생산물을 맘껏 사용할 수 있었던 자유민으로서의 농민이 되었다고 보았습니다. 그 반면에 가나안 농민들은 끊임없이 세금과 빚에 시달려야 했다는 것이죠. 도시국가들에서는 시민의 보호와 정의의 집행 같은 공공 서비스가 약속되긴 했지만 별로 올바르게 제공되진 못했습니다. 이와는 달리 초기 이스라엘에서는 이러한 공공 서비스가 부족 간의 협력으로 이루어졌으며 야웨 신앙도 공동체 운동에 가치와 관심을 두는 종교 개념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지난 20세기를 주도했던 정복 모델, 평화 정착 모델, 농민 혁명 모델은 더 이상 동일한 가치를 지니지 못합니다. 올브라이트의 정복 모델은 이제는 몇몇 보수적인 학자들에 의해서만 주장될 뿐, 주류 성서학계에서는 거의 폐기되었습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성서 본문 자체의 모순(여호수아서와 사사기서)과 고고학 증거들과의 충돌 때문입니다.

지난 수십 년은 알트-노트의 가설이나 멘덴홀-갓월드의 가설을 중심으로 논의가 이루어졌고 고고학과 사회-과학적 방법론에 관심을 기울여 왔습니다. 최근에 학자들은 이 둘의 가설을 뼈대로(그러면서도 정복설에 여전히 미련의 눈길을 보내면서) 새로운 학설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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