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나는 종북이 되고, 간첩이 되고, 사탄도 돼 보는 희한한 경험을 하고 있다. 나처럼 별 것 아닌 사람도 이렇게 거창한 죄목을 뒤집어쓰고 보니, 전투적 기독교 집단의 광기가 얼마나 무서운지 실감하게 된다. 솔직히 내가 듣는 오해는 웃고 말 일이다. 정작 가슴 아픈 것은 한국 기독교와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가게 되었는지 하는 것이다. 더구나 자신들의 부패함은 아랑곳하지 않으면서 한국 사회의 주요 현안마다에서 집단 이기주의를 부추기는 소위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파렴치함으로 한국교회가 함께 무너지고 있는 모습은 정말 참기 힘들다.

1. 북한이 정말 싫다면, 북한보다 나아야 한다

잠시 주목을 받았던 한 청년의 동영상은 사실 관계의 기본조차 거의 무시한 내용이라 자세히 언급할 필요가 없는 듯하다. 다만 한국 사회와 교회가 정말로 걱정되기에 부르짖는 개혁의 외침들을 우리나라를 뒤흔들고, 교회를 허물려는 공작이라고 진심으로 믿는 그들의 단순 무식함과 무례함에 놀랄 뿐이다. 그들에게 우리 사회에 대한 비판은 곧바로 북한에 대한 찬양처럼 들리나 보다. 나도 남북 관계에 대한 글과 말을 제법 많이 한 사람이다. 그러한 자리에서 북한의 잘못을 말하고 비판하는 경우보다, 남쪽의 그것을 언급하는 경우가 분명히 더 많았다. 그러나 그것은 북이 남보다 더 좋거나 옳기 때문이거나 그들의 말처럼 북을 숭배하기 때문이 아니다.

첫째는, 우리가 북한에 비해 훨씬 더 압도적인 역량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90년대 이후 모든 면에서 남과 북 사이 힘의 균형은 결정적으로 깨졌고, 따라서 민족 발전과 평화, 통일을 위한 역량은 비교할 수 없이 남쪽에 우선해 있음을 우리 스스로 명심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더 잘해야 함께 살 수 있다는 말이다. 더 큰 힘을 가지고 있는 쪽에게 더 많은 주문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둘째는, 우리 자신이 남쪽에 살고 있기 때문에 오직 남쪽의 입장과 시각으로만 바라보기 쉽다는 점이다. 전체적 흐름과 과정도 모른 채 그저 우리끼리만 오직 북쪽에만 모든 책임이 있다고 믿어 봐야 사태 해결에는 아무 도움이 안 된다.

큰 이슈가 되어 있는 개성공단만 해도 올해 북한의 잘못된 행동에 대한 분노는 많지만, 이보다 앞서 이명박 정부가 애초의 남북 정상 간 합의를 어겨 북쪽에 빌미를 주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개성공단에 대해 보수 언론들은 5만 명이 넘는 북한 노동자들에게 매년 1000억 원 가까운 임금을 공짜로 '퍼주기'를 한 것처럼 생색만 냈지만, 사실 국제 경쟁력이 떨어져 가던 100여 개의 우리 중소기업체들이 동남아 주요 국가 임금보다도 싼 월급 14만 원 정도를 지급함으로써 엄청난 혜택을 본 '상생 사업'이었다. 무엇보다 공단 건설로 인해 남침 시 선봉에 설 최정예 북한 2군단 등이 10Km 후방 배치되는 등 '평화 사업'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조차 하지 않고 있다. 또 90년대 이후 지금까지 핵 협상의 중요한 고비마다 북한이 합의를 어기고 사태를 악화시킨 것은 잘 알고 있으면서도, 미국과 한국이 약속을 어기고 합의를 무효화한 사실도 있음을 우리는 거의 모르고 있다.

개방 사회인 우리가 폐쇄 사회인 그들보다 낫다면 최소한 우리는 그걸 이해해야 하고, 지금이라도 바로잡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나는 남쪽의 책임을 더 지적했던 것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최근 북한의 지나친 행동에 대해 나 역시 정말 화가 난다. 그러나 91년 남북 유엔 동시 가입 당시의 약속처럼 공산권이 남한과 수교했듯이 미국 등 서방측이 북한과 수교하고 체제를 인정했다면 오늘날 북핵 문제도 없었을 것이기에 지금이라도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거기서부터 시작하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 아닌가? 또한 북한 인권 문제의 심각성에 대해서도 나는 대체로 동의한다. 그러나 물과 물고기의 관계처럼 지난 60년간 뒤섞여 있는 북한 정권과 주민들을 엄격히 구분하여, 정권은 압박하고 주민들은 사랑한다는 게 어떻게 가능한지 제시해 보라. 오히려 미국을 비롯한 서방 모두와 광범한 수교를 맺어 북한 전역도 외국인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면 인권과 체제 투명성도 한층 높아지지 않겠는가? 근본 문제의 해결 없이 우리끼리만 앉아 "나쁜 놈들!"이라고 분풀이만 해 봐야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지 않는가? 이런 주장이 종북이며 간첩인가? 그렇다 해도 나는 이것이 민족이 함께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 믿는다.

2. 차별이나 해서 겨우 지켜지는 진리는 없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차별금지법이 보수 기독교계의 반발로 이번에도 무산될 기로에 서 있다. 그들은 말한다. "우리는 차별 금지의 취지 자체를 반대하는 게 아니다. 다만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 사상, 종교 등 독소 조항을 함께 끼워 넣으려 하니 반대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게 왜 독소 조항인가? 이 법이 시행되면 동성애는 장려되고, 그것을 죄라고 가르치는 기독교는 처벌받게 된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얼마나 근거 없는 과장인가?

우리가 신앙인의 입장에서 어떤 사상, 체제, 종교를 신념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과 그런 사람도 사회의 한 일원으로서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보장하는 것은 전혀 다른 내용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한 사람의 신앙인으로서 동성애, 이단 등을 반대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다원화된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동성애자나 이단, 다른 종교인을 정당한 이유 없이 차별해도 좋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동성애가 죄냐고 내게 묻는다면 나 역시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그 후 "그런데 왜 유독 동성애만 문제 삼느냐?"고 반드시 따져 물을 것이다. 부동산 대박에 눈이 멀어 같은 교회 성도들이 억울하게 쫓겨나는 것을 알면서도 용산 개발을 추진했던 재개발 조합장 장로의 탐욕(사 5:8)에는 한마디 하지 않으면서, 회사 재산을 빼돌려 자식에게 물려주고 임금을 체불하는 집사(신 24:14, 15)의 십일조는 축복 얹어 환대하면서, "왜 유독 동성애만 하나님께 용서받지 못할 죄악이라고 그토록 소리를 높이느냐?"고 물을 것이다. 건강한 성을 유지하고 가정을 지킨다는 한국교회는 전병욱을 비롯한 목회자 성범죄에는 왜 그토록 관대한가? 대체 누가 동성애가 이들의 죄보다 더 큰 죄라고 했던가? 누가 동성애는 유황불에 떨어질 용서받지 못할 죄이며(2003년 한기총 성명), 자신들의 치부인 "에어장 사건은 눈감아 주어도 된다"고 가르쳤던가? 이들이 본받기 원하는 미국 우파 기독교의 모습이 꼭 이와 같다. 그들 역시 낙태를 반대한다면서 낙태의 모든 책임은 약자인 여성들에게만 모두 떠넘기고, 성경적 가치로 가정의 소중함을 그토록 부르짖으면서도 국민의 무차별적 총기 소유는 찬성하고 이라크 전쟁에 환호하였다. 참으로 "보잘것없는 하루살이는 걸러 내면서, 막상 엄청나게 큰 낙타는 꿀떡 삼켜 버리는(마 23:24)" 위선이 아닐 수 없다.

모든 사회에 차별이 존재하지만, 잘못된 편견이 만들어 내는 종교적 차별만큼 무서운 건 없다. 나치 독일은 당시 사회적 차별을 받고 있던 집시, 동성애자, 장애인들을 먼저 격리, 학살했고, 그 후 유대인들을 인종 쓰레기로 몰아 대학살을 자행했는데, 그때도 기독교의 적을 말살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독일 국민들의 환호를 받았다. 예수님 시대에도 세리, 창녀, 각종 장애인들은 사람 이하의 취급을 받았지만 예수님만은 끌어안으셨다. 그리고 당신은 의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죄인을 위해서 오셨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눅 5:30~32). 그러나 지금 우리는 예수 시대의 바리새인들과 똑같이 몇몇 규정들만 맘대로 꼭 집어 천지가 변해도 결코 용서받지 못할 대죄로 낙인찍고서, 교회는 물론 세상에서도 발붙일 자리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차별금지법은 상대방의 종교적 신념을 존중하는 만큼 당연히 '정당한' 기독교인들의 신념도 존중한다. 다만 어떤 종교를 믿고 어떤 성적 성향을 갖느냐에 따라 사회적 차별을 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뿐이다. 복음이 정말 하나님의 유일한 생명이라면, 기독교가 정말 그 복음을 담은 종교라면 그럴수록 우리가 바로 가르치고 그렇게 살아 냄으로써 입증해야지, 차별하고 따돌리고 불이익을 줌으로써 강제로 없애려 하면 안 된다. 조선말, 일제 때 우리 선배들도 사회적 소수자로 똑같은 탄압과 고통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어느덧 우리 사회의 강자가 되고 주류가 되었다고 해서 권력과 강제력으로 신념과 태도가 다른 사람들을 함부로 탄압해도 좋다는 사고방식은 정말이지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그가 이단이든, 동성애자든, 종북이든 먼저 그가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다시 배워야 한다. 그것은 사람으로서의 최소한의 존엄성과 인격을 존중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단이든, 동성애든, 종북이든 그 후에 따지자. 그게 예수님의 제자다. 우리는 주일학교 학생의 심정으로 예수님의 교훈을 다시 배워야 한다(마 5:43~47). 우리 스스로도 감동시키지 못하는 주장은 진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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