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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떻게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까
성서와 고고학 : 초기 이스라엘(7)
  • 박태순 (ipccomae@empal.com)
  • 승인 2013.04.30 19:56

지난 수십 년 동안 구약 학계에서 가장 뜨거운 논쟁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어떻게 들어가서 마침내 하나의 나라가 되었을까' 하는 문제였습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학자들은 두 가지 가설(모델), 곧 미국 올브라이트 학파의 '정복 모델(Conquest Model)'과 독일 알트-노트 학파의 '평화 정착 모델(Peaceful infiltration Model)' 가운데 하나를 지지했습니다. 그즈음 1962년에 조지 멘덴홀이 그리 유명하지 않은 학회지에 제3의 가설을 발표하지만 당시에는 별로 관심을 받지 못하다가, 1970년대 말에 노만 갓월드가 이것을 수정해서 일종의 '농민 혁명 모델(Peasant revolt Model)'을 발표합니다.

정복 모델(Conquest Model, 정복설)

정복설은 여호수아서 본문을 바탕으로 하는 가장 오래되고 근본적인 학설입니다. 전설적인 근동학자이자 '성서고고학의 아버지'인 윌리엄 F. 올브라이트(W. F. Albright)는 처음에는 가나안 정복이 기원전 15세기에 일어났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글루에크(Nelson Glueck)가 1938-40년에 트랜스요르단 지역을 조사한 뒤에 이들 지역이 기원전 13세기까지는 사람이 살지 않았다고 결론 내리자 정복 연대를 13세기로 수정합니다. 그는 성서와 고고학 발굴을 토대로 1920년대부터 1971년 사망할 때까지 '정복 모델'을 적극적으로 옹호했습니다.

"고고학적인 발굴과 탐사는, 대략 기원전 1200년경으로 보이는 초기 이스라엘 민족의 (가나안에 대한) 점령의 성격에 대해서 점차 밝은 빛을 비춰 주고 있다(From the Stone Age to Christianity, 1940)."

그의 제자 라이트(G. Ernest Wright)가 뒤를 이어서,

"우리는 기원전 13세기에 어쨌든 이후에 이스라엘 민족이 된 일단의 무리들이, 땅이 아니라 본래는 약탈할 목적으로 신중하게 계획된 침투를 통해서 팔레스타인에 들어갔다고 결론 내려도 좋을 것이다(1957)."

이스라엘 고고학자인 이가엘 야딘(Yigael Yadin)은 1955~58년에 행한 중요한 상부 갈릴리에 있는 하솔의 유적에 대한 자신의 발굴을 통해서, 사실상 여호수아 11:10~13에 있는 '본래 모든 나라의 머리였던' 하솔의 멸망에 대한 역사성이 입증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새로운 고고학 발굴이 이루어진 1982년까지도 말이죠.

"후기 청동기 시대의 마지막 시기에(기원전 13세기), 반(半) 유목민인 이스라엘 민족이 수많은 가나안의 도시들을 파괴했다는 것을 고고학이 광범위하게 입증해준다. 따라서 점차적으로 그리고 천천히, 그들은 폐허 위에 자신들이 거주할 정착지를 건설했으며, 땅의 나머지 부분들을 점령했다(1982)."

정복 모델은 고고학의 발굴을 통해서 성경의 역사성을 증명해주는 것처럼 보였기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뜨거운 사랑을 받았습니다. 1960년대 까지 벧엘, 드빌, 라기스, 그리고 하솔 같은 유적들에서 나온 증거가 13~12세기 초에 이르는 시기에 외부의 침입자들(아마도 초기 이스라엘 사람)에 의한 파괴이고, 이는 가나안에서 광범위한 정복 활동을 했다는 여호수아서 이야기를 확증해주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여리고(여호수아 4~5장)

그런데 1960년대 말에 들어서서 정복 모델을 강력하게 뒷받침해주고 있던 고고학 연구가 되레 발목을 잡게 됩니다. 콩팥 모양을 한 고대 여리고의 둔덕은 오늘날 아인 에스-술탄(Ain es-Sultan)이라 알려진 샘 곁에 있는 기원전 9000년경으로 추정되는 그 유적 내의 최초 거주지로부터 시작해서 높은 거주 층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습니다. 1930년대 존 가스탱(John Gastang)은 건물의 폐허 아래에서 무너진 흙벽돌 벽을 발견하고 이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에 의해 기원전 15세기(성서를 기준으로 하는 출애굽 시기인 1446년)에 파괴된 증거라고 확신했고 그리스도인들은 환호했습니다.

그러나 정복 모델에 대한 결정적인 충격은 영국 고고학자인 댐 캐슬린 케년(Dame Kathleen Kenyon)이 1955년과 1958년 사이에 여리고에서 행한 발굴을 통해서 왔습니다. 탁월한 방법론으로 무장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는 어떠한 '성경적 부담(biblical baggage)'에도 구애를 받지 않는다고 선언한 케년은 이 파괴가 실제로 기원전 15세기의 것이기는 하지만, 이것은 제18왕조를 시작한 이집트 파라오 아모세가 아시아계인 '힉소스족'을 몰아내는 과정에 있었던 이집트의 군사원정의 일부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게다가 그녀는 기원전 13세기 중후반 시기(고고학을 기준으로 하는 출애굽 추정 시기)에는 여리고가 완전히 버려진 채로 방치되어 있었다는 것을 명백하게 증명해버립니다. 유적지 전체에 걸쳐서 그 시기에 해당하는 후기 청동기(기원전 13세기)의 질그릇 한조각조차도 찾아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 장군은 폐허가 된 여리고성을 다시 한 번 정복한 것일까요?

물론 이러한 결과에 대해 존 빔슨(John Bimson), 브라이언트 우드(Bryant Wood)와 같은 학자들은 반론을 펼칩니다. 우드는 "여리고의 성벽(The walls of Jericho)"이라는 글에서, 증거물들을 더 심층 분석해 본 결과 성벽의 파괴는 성경의 정복 연대와 같은 기원전 1400년경에 발생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고대는 물론이었고 현재에도 여리고 성내에는 충분한 물을 공급할 수 있는 샘이 성벽 안쪽에 있는데, 공격 시점은 수확이 막 끝난 시기였으므로(수 3:15) 그들은 충분한 식량도 준비하고 있었다고 봅니다. 존 가스탱과 캐슬린 케년의 발굴에서 곡식이 가득 찬 항아리들이 발견된 것을 그 증거로 듭니다. 보통 정복자들은 이런 곡물들을 약탈하지만 모든 것을 야웨께 바쳐야 했던 이스라엘은(수 6:17) 이것을 그냥 두었다는 주장입니다. 또한 7일째에 성 주위를 일곱 번 돌고 성벽이 무너져 내렸는데(수 6:20) 그 흔적이 외벽의 아래 부분에 쌓여졌다는 충분한 증거들이 있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도시와 그 안의 모든 것들을 불태웠다는 이야기(수 6:24)와 같이 발굴이 일정 깊이에 도달하면 1m정도 두께의 재와 불에 탄 잔해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겁니다.

그렇지만 백발 양보해서 만약 우드의 주장대로 여리고 성이 이스라엘에 의해 무너졌다고 해도 그 외 대다수의 증거들이 15세기 군사 정복설을 압도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아이(Ai; 여호수아 7장)

이스라엘 민족이 요단강을 손쉽게 건넌 다음에(수 3:16, 진흙더미나 지진의 여파로 쌓인 물질들에 의해 강이 멈출 수도 있다. 실제로 요단 강물은 1906년, 1927년, 1834년, 그리고 그 이전 세 번에 걸쳐서 짧게는 16시간, 길게는 이틀에 이르기까지 흐름이 멈춘 적이 있었다) 중앙 산지로 올라간 두 번째 유적지가 아이 성(오늘날의 et-Tell)인데, 예루살렘에서 북동쪽으로 16km 쯤 떨어진 곳입니다. 그곳은 프랑스계 유대인 고고학자인 유딧 마켓-크라우스(Judith Marquet-Kraus)가 1933-35년에 광범위하게 발굴했습니다. 그녀는 거대한 요새화된 초기 청동기 시대의 도시-국가를 별견했는데 기원전 2200년경에 모두 파괴된 것으로 보이는 엄청난 사원들과 궁전들이 있었습니다. 기원전 2000년기 초기에 아주 잠깐 재점령되었던 이후로, 아이 성은 기원전 1500년 무렵부터 기원전 12세기 초까지 완전히 버려진 채로 있었습니다. 따라서 기원전 13세기 말(이스라엘이 정복했다고 주장되는 때)에 그곳은 폐허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이 밝혀집니다.

이렇게 실망스런 결과가 나오자 올브라이트는 마켓-크라우스의 발굴에 대해서 성경 기록의 많은 부분을 구해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는 여호수아 7~8장에 나오는 아이 성에서 있었던 일련의 사건들이 실제는 벧엘에서 일어났었다고 주장했습니다. 벧엘은 아이 성에서 1.6km 떨어져있었는데, 그곳에는 기원전 13세기의 파괴 흔적이 있었기 때문이죠. 히브리어로 아이(Ai)라는 명칭이 "폐허 더미"를 뜻하고 그곳의 폐허가 눈에 잘 띄는 지역표시였을 것이기 때문에, 그곳이 결과적으로 벧엘이 아니라 아이(Ai)가 이스라엘 민족에 의해서 무너졌다는 구전 전승의 일부가 되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올브라이트의 해법은 신선하지만 궁극적으로 만족스럽지는 못합니다.

1965년과 1972년 사이에 보수적인 신학교인 미국 남침례신학교의 조셉 캘러웨이(Joseph Callaway)가 다시 탐사를 해서 마켓-크라우스의 결론이 옳다는 것을 거듭 확인합니다. 아이(Ai)의 발굴이 정복 이론에 대한 중대한 오류라는 것을 인정하고 신학교에서 스스로 일찍 은퇴해 버리는데요, 신앙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초기 이스라엘의 정착을 이해하기 위한 일차자료는 히브리 성경이었다. 그러나 성경 전승에 근거한 모든 재구성은 고고학 유적들 앞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이제) 일차자료는 (성경이 아니라) 고고학 유적들이 되어야만 한다(1985)."

기브온(Gibeon, 여호수아 9장)

다음 장소는 기브온인데 이곳은 유적지의 위치가 분명합니다. 미국의 셈족 학자(Semitist)이자 지형학자인 에드워드 로빈슨(Edward Robinson)이 1838년에 지적한 바와 같이, 아라비아 명칭인 엘-집(el-Jib)은 히브리어 ‘기브온’입니다. 여호수아 9장에 따르면 기브온 족속은 자신들의 마을을 구하기 위해서 계략을 짜내다가 비록 들켜서 강제로 노예가 되기는 했지만 어쨌든 그들은 살아남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기브온에는 기원전 13세기 말이나 12세기 초에는 사람이 전혀 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1960년대에 기브온을 발굴한 제임스 프리챠드(James Pritchard)는 깊은 하천에서 히브리어로 '기브온'이라고 새겨진 기원전 8~7세기의 깨진 항아리 손잡이 56개를 발견했을 뿐, 기원전 8세기 이전 시기의 유물은 아무 것도 찾지 못했습니다.

또한 이 하천이 사무엘하 2:13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과 십중팔구 같은 하천이라는 사실은 여호수아서의 기록시기가 기원전 8~7세기의 것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하솔(여호수아 11장)

하지만 다행이도 여호수아 장군이 정복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곳도 있습니다. 두 차례에 걸쳐(1955-58년, 1968년) 하솔(Hazor)을 발굴한 이스라엘 고고학자 야딘(Yigael Yadin)과 1987년부터 하솔을 발굴하고 있는 그의 제자인 히브리대학의 벤-토르(Ben-Tor)는 이 도시의 파괴가 이스라엘에 의한 것이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후기 청동기 도시인 이곳을 파괴한 가장 유력한 후보입니다. 하버드 대학의 스테이거(L. Stager)와 탁월한 고고학자 데버(Dever)도 여기에 동의합니다. 성서에 따르면 하솔은 가장 늦게 정복된 주요 도시입니다. 하솔 왕 야빈은 이스라엘에 대항하여 마돈(아마도 Merom) 왕 요밥과 시므론 왕과 악삽 왕과 및 북쪽 산지와 긴네롯 남쪽 아라바와 평지와 서쪽 돌의 높은 곳에 있는 왕들과 힘을 합쳐 이스라엘과 싸웠지만, 이스라엘은 하솔을 쳐서 호흡이 있는 자는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성읍을 불사릅니다(수 11:11).

갈릴리 호수 바로 북서쪽에 자리 잡고 있는 하솔(Hazor)은 늦어도 기원전 1230년에 파괴되었습니다. 파괴된 뒤에 튼튼한 성벽이 없는 빈약한 거주지가 성체 상부 지역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하솔을 불사른 그 불길은 맹렬해서 진흙 벽돌까지 유리로 만들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정착은 매우 제한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더 최근에(2008년) 하솔 발굴의 공동 감독인 샤론 주커만(Sharon Zuckerman)은 이스라엘의 침입에 의해 하솔이 파괴된 것이 아니라, 마을의 농부들(peasants)과 서민들에 의해 파괴된 것이라는 주장을 내놓기도 합니다.

또 다른 문제는 하솔에 관한 이야기가 서로 다른 모습으로 두 번 나온다는 것입니다. 하솔은 여호수아 11:1~5에 따르면 여러 민족들과 연합해서 이스라엘과 맞서 싸우다가 전멸합니다. 그런데 사사기 이야기는 드보라가 바락을 부추겨서 이스라엘을 이끌고 하솔 왕 야빈에 대항해 싸웠다고 기록합니다(삿 4:3). 정복 모델을 지지하는 이가엘 야딘은 두 개의 전승을 인정하면서도 여호수아가 하솔을 정복한 것이 옳다고 봅니다. 사사기 4장은 '기본적으로 참된 역사적 문헌(여호수아 11장)에 더해진…. 후대의 편집 해설(삿 4장)'이라는 것이죠.

드빌(Debir)과 라기스(Lachish)

올브라이트는 기원전 13세기 말에 파괴된 흔적이 있는 텔 베이트 미르심(Tell Beit Mirsim)을 1926-32년에 발굴하였고 이것이 성서의 드빌(Debir)이라고 주장했지만, 드빌이 아닐 확률이 훨씬 높습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텔 베이트 미르심에서 남동쪽으로 11km 떨어진 키르벳 라부드(Khirbet Rabûd)가 드빌이라고 봅니다. 아쉽게도 키르벳 라부드의 기원전 13-12세기 지층에는 파괴된 흔적이 전혀 없습니다.

라기스는 1932년과 1938년 사이에 스타키(John L. Starkey)의 지휘 아래 광범위하게 발굴된 결과, 기원전 1230년 무렵에 크게 파괴되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학자 우시슈킨(David Ussishkin)이 1973-1987년까지 엄청난 규모로 다시 발굴 작업을 한 결과 람세스 3세(기원전 1198-1166년)의 카르토쉬(옛 이집트의 국왕, 신의 이름을 둘러싼 선, 긴 타원형의 윤곽)를 담고 있는 문자가 새겨진 청동이 보여주듯이, 그보다 50년 늦은 1170년 무렵에 일어났다는 것을 밝혀냅니다. 더군다나 이 파괴는 초기 이스라엘이 아닌 파라오 람세스 3세나 블레셋 사람들을 포함한 해양 민족들에 의한 것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정복 모델을 지지하는 이가엘 야딘과 아브라함 말라마트는 정복과 정착의 실제 사건들이 여호수아서에 나오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군사 정복설에 여전히 핵심이 남아있다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결국 말라마트 역시 정복 모델의 역사적 기초가 부실하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성서의 정복 전승은 후 세대의 복잡한 작업을 통해 구체화되었다…. 어떤 것은 후대의 편집자와 교정자들의 개념들이 반영되어있는 것이 확실하다…. 성서의 역사편찬은 신학적으로 설명되었다. 이런 경향 속에서 이스라엘의 주님(Lord)의 역할은 두드러지고 인간적인 요소는 물속에 잠겨들었다."

출애굽 시기를 15세기로 보건 13세기로 보건, 여호수아 장군의 탁월한 정복 활동에 의한 ‘대규모’의 가나안 정복 전쟁은 없었다는 것이 고고학 발굴의 결과입니다. 군사 활동에 의해 파괴된 것으로 볼 수 있는 몇 개의 지역은 나중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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