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마 19:23~24)."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예수님을 좇으라는 예수님의 요구에 부자 청년이 근심하며 돌아간 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이 중심에 있는 언약의 시대에서 복음이 중심에 있는 새 언약의 시대를 가지고 오신 분이십니다. 이전 언약에서는 율법 준수와 물질적인 부요함이 인과관계였습니다. 부자 청년은 율법을 지켰다고 예수님께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대답이 잘못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의 대답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율법을 지켰고 부자가 되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복입니다. 그들은 당연하게 천국에 들어갈 수 있으며 들어가야 하는 언약의 백성입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예수님의 선언에 대해 제자들이 놀랍니다. 자신들의 관점을 완전히 깨뜨리는 선언이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지켰고 그 결과 하나님께 복을 받아 부자가 되었는데도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예수님의 선언이 너무 의외였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중심인 새 언약에서는 말씀 준수와 물질적인 부유함이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습니다. 말씀 준수로 인해 핍박당하고 먹고 살기 어려워지며 순교할 수도 있습니다. 말씀 준수와 인과관계는 하나님과 더 깊이 교제하는 것입니다. 부유하면 부유한 대로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하나님과 더 깊이 교제하게 되는 것이 인과관계입니다.

예수님은 부자 청년에게 예수님을 통한 새 언약 시대에 들어오라고 초청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부자 청년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관념을 저버릴 수 없었습니다. 율법 중심의 이전 언약에서 벗어날 마음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가지고 오시려는 새 언약의 부요함을 인지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새 언약의 새 역사에 참여하기보다는 이전 언약에서 이미 소유하고 있는 기득권으로 만족하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요구는 제자로의 부르심입니다. 예수님을 통한 새 언약의 시대에 모든 신자가 그 부자 청년과 같은 요구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세리장 삭개오는 절반을 내어놓겠다고 했습니다. 일상적인 생활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예수님을 맞고 대접한 마르다와 마리아도 있습니다. 서신서에서 확인하게 되는 바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그 생활을 유지하며 살았습니다. 순회 전도자들이 있었고 그들이 자신의 일상적인 생활을 포기하였던 것입니다. 복음서에서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다는 기록도 다 그와 같은 것입니다. 순회 전도자인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부자 청년에게 요구한 것은 그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요구를 일반화시켜서 예수님을 바르게 믿는다면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예수님을 통한 새 언약의 새 시대에 들어가는 것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부자 청년과 관련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천국은 예수님을 통하여 그 땅에 임하는 하나님의 다스림입니다. 죽고 난 이후에 하나님과 영원토록 하나님과 함께 지내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 구원, 믿음, 죽음은 성경에서 두 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사용되고 있으며 어떤 의미인지는 문맥을 통하여 구분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과 관련하여 말씀하는 바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새 언약의 새 시대가 펼쳐지는 중이다. 옛 언약의 백성인 유대인은 새 언약의 새 시대로 들어와야 한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율법 아래에서 율법 준수와 물질적인 부유함의 인과관계에 사로잡혀 있는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물질적인 부유함을 놓치고 싶지 않아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전 언약의 틀 안에 머물러 있으면 새 시대의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

오늘날은 이전 언약이 없습니다. 새 언약만의 시대입니다. 상황 자체가 부자 청년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언약과 아예 무관하다가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부르심을 받아 신자가 됩니다. 이전에 어떤 원칙을 준수하여 그 대가로 하나님의 역사 안에서 부자가 된다는 개념이 없습니다. 모두 세상 임금의 지배를 받고 살다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믿음의 세계에 발을 딛습니다. 그 과정에서 부자로서의 생활을 포기하라는 요구가 주어지지도 않습니다.

그렇지만 적용의 관점에서 오늘날의 신자와 연관시킬 수는 있습니다. 부자 청년이 비록 옛 언약이지만 하나님을 믿는 신자이기에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믿는 신자와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신자로 살면서 자신의 소유에 대한 애착이 강하여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경우입니다. 신자에게 소유는 둘로 나뉩니다. 씨와 먹을 것입니다. 먹을 것은 생활에 필요한 물질입니다. 씨는 의의 열매를 거두기 위하여 다른 사람을 위하여 사용하여야 하는 물질입니다. 그 정도는 획일적이지 않습니다. 당사자 삶의 자리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씨에 해당하는 물질이 있고 그 물질에 대해서는 필요한 누군가를 위하여 사용하여야 한다는 사실만큼은 명백합니다. 하나님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물론 씨에 해당하는 물질이 아예 없고 다른 누군가의 도움으로 먹을 것을 채움 받는 예도 있습니다.

그런데 내 물질, 내 소유라는 의식으로 꼭 붙잡고서는 자신과 가족의 안녕만을 위하여 사용하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 자리에서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고 살게 될 여지가 많습니다. 그의 삶은 하나님의 다스림과 무관하게 됩니다. 비록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천국에 들어왔지만 삶의 자리에서 천국과 무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의 결국은 무엇인가? 영원한 하나님나라인 영생이 아니라 썩은 것일 수 있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기준을 가지고 그 기준을 지키면서 물질적인 부유함을 즐기고 산 부자는 그 가능성이 큽니다.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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