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출애굽은 전혀 근거가 없는, 성서 기록자들은 아무런 역사 자료도 없이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꾸며 낸 것에 불과한 것일까요?

이집트 노예 생활이 허구일수는 없다

어떤 파피루스에는 40명이 넘는 셈어 이름의 여성 노예들이 나오는데, 그 가운데 히브리 산파였던 시프라(십브라, 출 1:15~18)와 같은 이름이 있습니다. 모세라는 이름을 말하자면, 모세는 이집트 이름입니다. 모세는 파라오의 딸에 의해 모세라고 불립니다(출 2:10). 모세는 '아이를 낳다'를 뜻하는 이집트어 동사에서 파생되었으며, 람세스(Ra에서 태어난), 투트모세, 아멘모세, 프타모세와 그 외의 수많은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이집트에서는 흔한 이름입니다. 이런 사실은 그가 이집트에서 자랐으며 나중에 이스라엘 지도자가 되었을 가능성을 보여 줍니다.

또 이스라엘이 거주했던 고센 땅은 동부 나일 삼각주에 있는데, 기원전 약 2040년의 '메리카레를 위한 교훈'이라는 이집트 문서에는 이스라엘을 암시하는 글이 나옵니다.

"동부(나일 삼각주)에는 외국인들이 많이 있다…. 가련한 아시아인들은 사는 곳이 초라하다. 그들의 발은 음식을 찾아 방황한다….나는 그 주민을 약탈하고 그 가축 떼를 사로잡았다. 내가 그들 가운데서 (사람들을)죽였기 때문에 아시아인들은 이집트를 몹시 싫어했다."

이집트 기록에 따르면 여기서 아시아인들은 수백 년이 지난 뒤의 이스라엘 민족처럼 음식을 찾기 위해 방황하다가 동부 삼각주(고센) 땅으로 들어갑니다.

기원전 13세기 작품으로 추정되는 파피루스 아나스타시5(Papyrus Anastasi 5)에는 광야로 달아난 두 명의 노예를 추적하는 이집트 관리가 보낸 보고서가 포함되어 있는데, 한 정찰병이 그들을 믹돌(민 33:7에 나오는 출애굽 경로)근처에서 보았다고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기원전 15세기 무덤 벽화에는 테베(Thebes)에서 셈족 노예들이 흙벽돌을 만드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특히 중요한 점은 가나안에서는 흙벽돌을 만들 때에는 보통 짚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인데요, 출애굽 이야기가 실제로 기록된 시기의 예루살렘에서는 돌을 건축 자재로 썼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 진술은 더욱 그럴듯한 사실을 보여 줍니다.

또한 기원전 15세기의 무덤 벽화 레크미레(Rekhmire)에는 흙벽돌을 만드는 노예들이 그려있습니다. 흙벽돌을 만드는 할당량에 관한 성서의 이야기와 같이(출 5:6~18), 루브르 가죽 두루마리(Louvre Leather Roll; 기원전 1274년)는 지정된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것에 관해 보고하는 장면입니다.

데이르 엘-메디나(Deir el-Medina)의 노동자 마을에서 발견된 한 문서에는 노동자들이 '자기네 신에게 제물을 바치기 위해' 떠났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는 모세가 야웨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광야로 들어가고자 사흘의 휴가를 요청하는 이야기와 매우 비슷합니다(출 3:18, 5:3).

아울러 주목할 말한 것은 열 가지 재앙 가운데 몇 가지는 설명이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계절에 따라 주기적으로 개구리, 모기, 파리, 메뚜기 등(2, 3, 4, 8번째 재앙)의 횡행은 그 지역에서는 일반적인 재앙입니다. 병의 원인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가축의 전염병(5번째 재앙)은 지금도 일어납니다. 홍수, 해일, 폭풍 같은 변덕스런 날씨는 지중해 동부 날씨의 특징입니다. 그리고 '바그다드 종기(Baghdad boil)' 또는 '여리고 장미(Jericho rose)'는 흡혈성 파리인 모래파리가 옮기는 병인 리슈만편모충증(Leischmaniasis)으로 밝혀졌습니다. 하지만 맏아들이 모두 사망하는 마지막 재앙은 쉽게 설명되지 않습니다. 엄청난 재앙이었음에도 이집트 문서에는 전혀 기록이 없습니다.

야웨 하나님은 광야에서 낮에는 구름기둥과 밤에는 불기둥(민 14:14)으로 지켜 주고 갖가지 새들과 빵과 같은 '만나'를 먹거리로 줍니다. 메추라기가 장막을 덮을 정도로 많았는데(출 16:13) 오늘날도 베두인들(유목민들)은 모래언덕에 그물을 쳐서 새를 쉽게 잡습니다. 만나는 사막에 있는 위성류의 작은 나무들(tamarisk shrubs)에서 분비되는 달콤하고 끈끈한 물질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물론 수백만 명을 먹일 만큼 충분하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힉소스의 이집트 침입

힉소스(Hyksos, 이집트 말로 '외국의 통치자들')는 기원전 1720년 무렵에 이집트를 침략했습니다. 이들은 대략 1670년부터 1570년까지 이집트를 다스렸으며 제15대, 16대의 통치자들은 모두 힉소스 족이었는데 이들은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강력한 제국을 세웠습니다.

이집트를 침략한 힉소스 족과 이집트로 이주한 히브리인의 이야기는 당시 이집트의 상황과 잘 부합됩니다. 기근 때문에 야곱의 가족이 나일 강 동부 비옥한 땅 '고센'에 정착하게 된 것도 타당합니다. 우기에만 비를 내리는 지역인 팔레스타인의 반유목민들이 가뭄 기간에 나일 강의 주기적인 범람으로 땅에 물을 댈 수 있었던 이집트로 눈을 돌리게 된 것이지요. 1350년경에 이지트 국경 지대의 한 관리는 파라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는 어느 유목민들이 오래전부터 그들의 조상들이 하던 대로 파라오의 영토에 살 곳을 구하러 왔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힉소스 족이 이집트를 침략하기 전 이집트의 수도는 테베였으나, 힉소스 족은 델타 또는 고센지방(창 46:28, 야곱이 머무르게 된 지역)에 있는 아바리스(나중에는 라암셋으로 이름이 바뀜)로 옮겼습니다. 15대 왕조는 거대한 도시로 발전했던 아바리스 문화의 주류는 압도적으로 가나안 문화였습니다. 텔 에드-다바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삼각주의 힉소스 거주 지역에 가나안 사람들이 오랜 기간에 걸쳐서 점진적으로 정착하여 평화적으로 그 지역의 지배권을 장악한 것을 입증합니다. 힉소스 족의 역사는 겉으로 보기에 이스라엘 족장들의 이집트 이주 및 정착 이야기와 섬뜩하리만치 비슷합니다.

그러다가 1550년 무렵에 아모세 1세(Ahmose Ⅰ)는 이 외국인 통치를 무너뜨립니다. 힉소스 족은 이집트에서 추방되고 다시 이집트 민족이 팔레스타인과 시리아까지 세력을 떨칩니다. 권력을 다시 잡은 아모세 1세(Ahmose Ⅰ)가 힉소스를 추방할 대 아바리스는 파괴되고 수도는 다시 테베로 옮겨집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인들의 이집트 정착은 힉소스 족 시기에 이루어졌다는 가능성을 보여 줍니다.

요셉에게 호의를 보였던 파라오는 셈족 계통의 힉소스 족 출신 왕일 수 있으며 나중에 이집트 민족이 다시 권력을 잡게 되자 이스라엘 사람들을 미워했다고(출 1:8~10) 하는 추정이 가능해집니다.

여기에서 다시 한 번 출애굽 이야기는 글자 그대로의 역사가 아닌, 편집되고 가공된 역사의 부스러기를 담고 있는 드라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15세기 출애굽?

출애굽이 언제 일어났는지에 관해서 대표적으로 15세기와 13세기 학설이 있습니다.

15세기 출애굽 학설은 성서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 경우입니다. 출애굽하고 480년이 지난 해, 솔로몬 통치 4년째에 예루살렘 성전 건축을 시작합니다(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지 사백팔십 년이요 솔로몬이 이스라엘 왕이 된 지 사 년 시브월 곧 둘째 달에 솔로몬이 여호와를 위하여 성전 건축하기를 시작하였더라, 왕상 6:1). 솔로몬이 930년에 죽었고 40년을 통치했으니 그는 기원전 970년에 왕위에 올랐으며, 성전 건축은 4년이 지난 966년에 시작됩니다. 966년에 480년을 더하면 1446년이 되므로 성서에 따르면 출애굽은 정확히 기원전 1446년이라는 가정이 나옵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기원전 15세기에는 강력한 권력을 지닌 파라오 투트모세 3세(기원전 1479~1425)와 그의 아들 아멘호텝 2세(기원전 1425~1401)가 가나안에서 대규모의 전쟁을 벌이는 시기였습니다. 이집트에게 있어서 팔레스타인은 고대 근동과 지중해 동부를 잇는 군사-경제 요충지였기 때문에 투트모세 3세를 시작으로(1482년 므깃도 점령) 여러 수비대가 전략적으로 배치되었으며(가자, 욥바, 벧스안, 예노암) 향후 100년 가까이 이집트의 지배권이 강화되는 계기가 됩니다.

아마르나 서신은 팔레스타인에서의 이집트의 영향력을 보여 주는데, 도시간의 분쟁과 농촌의 불안 속에서도 패권은 이집트가 쥐고 있었습니다. 이집트는 작은 도시들을 정복하고 그들로부터 충성과 조공을 받을 정도로 강력한 군사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출애굽이 이처럼 강력한 왕들의 통치기에 일어났을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시대착오적인 기록도 있습니다. 파라오가(출 2:23에 따르면 처음 이스라엘을 억압하던 파라오는 죽었다. 그러므로 출애굽의 파라오는 그 후임자이다) 말이 끄는 수레들로 이스라엘 사람들을 추적합니다(출 14:6~9, 15:1~4). 그러나 말과 수레는 기원전 15세기에는 무척 희귀했고 기원전 13세기에 가서야 상당수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또 하나의 문제점은 만약 출애굽이 15세기에 일어났고 가나안 정복을 위한 대규모의 군사작전과 정착이 있었다면 기원전 15~14세기에 가나안 중부 산지에서 대규모의 정착 흔적이 나와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거주 흔적은 기원전 1200년경 가나안 중부 산지에서 처음 나타납니다. 아울러 출애굽 과정에서 만나는 에돔, 모압 민족은(민 20~21장) 역사적으로 보면 13세기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민족들입니다.

13세기 출애굽?

1200년경 중부 가나안 산지에서 이스라엘이 출현한 것을 근거로 대부분의 학자들이 13세기 출애굽을 지지합니다. 후기 청동기시대가 끝나고 철기시대가 열리면서 기원전 1200년경 가나안 지역에서는 광범위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짧은 시간에 중부 고지대에는 수많은 새로운 정착민들이 나타납니다. 마을들이 언덕 꼭대기에 세워졌고 대규모의 삼림 벌채가 이뤄졌습니다. 증가된 인구의 먹거리를 위해 경사지 땅을 개간해서 계단식 경작지로 만듭니다.

아울러 중부 고지대 전역에 물을 저장하기 위해 석회 반죽을 바른 방수 내벽을 갖춘 저수지들이 건설되었습니다. 물론 이런 변화의 주역이 성서 속의 이스라엘 지파였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지만 그러나 이는 아주 타당한 가정입니다. 이곳은 성서가 이스라엘의 정착지라고 말하는 바로 그곳이기 때문입니다(수 17:14~18, 20:17, 21:11, 20). 이집트는 람세스 2세 때에 그 세력이 절정에 달하지만 말년에는 급속도록 약화되는데 정복 이야기들에 가나안에 있는 이집트 군사력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 역시 이집트의 패권이 약화된 기원전 13세기에서는 이해가 됩니다.

출애굽기 1:11에 나오는 국고성 비돔(Pithom), 라암셋(피-람세스)과 관련해서 보면 13세기 학설이 더 힘을 얻습니다. 비돔은 텔 엘-마스쿠타(Tell el-Maskhuta) 또는 텔 엘-레타베(Tell el-Retabeh)가 유력하지만 문제는 텔 엘-마스쿠타는 기원전 16세기에서 7세기 사이에는 사람들의 정착이 없던 곳임이 밝혀졌습니다. 텔 엘-레타베 또한 기원전 12세기가 되어서야 다시 사람들이 정착했습니다. 비돔은 사이스 왕조 기간(Saite, 기원전 664~525년)에 있었던 도시의 이름으로 사용되었던 것이 전부로 비돔이라는 도시는 7세기 이후에 존재한 도시입니다.

라암셋(피-람세스)은 오늘날의 칸티르(Qantir) 지역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곳에 정착하고(창 47:11), 그곳에 도시를 건설하고(출 1:11), 나중에 그들이 이집트를 떠날 때 이곳에서 모입니다(출 12:37; 민 33:3,5). 이런 사실은 이집트의 행정 중심지를 삼각주 북동부로 옮기고 그곳에 자신이 건설한 수도를 자기 이름을 따서 명명한 파라오 람세스 2세(기원전 1279~1213)와의 관계를 강하게 암시합니다.

람세스 2세 치하 이집트 왕실이 부역 노동력을 동원하여 사막 도로를 보호하기 위해 세운 요새들을 포함해 80곳이 넘는 신왕국의 유적지들이 수에즈와 가자 사이에서 발견되었습니다. 40톤을 저장할 수 있는 곡물 창고, 40개의 정거장은 10일간의 행군로에 분산되어 세워졌습니다. 그는 외국인들을 징집하여 시행한 광범위한 토목 사업으로 유명하며 그가 세운 도시는 피-람세스(람세스의 집)라 불립니다. 이는 최근 텔 엣-다바(Tell ed-Daba)라 불리는 유적을 발굴하던 중에 밝혀졌으며 힉소스 시대에는 아바리스(Avaris)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기원전 1530년 무렵에 큰 파괴가 있었으며 람세스 2세 때 라암셋은 재건됩니다.

피-람세스에서 진행된 건축 공사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람세스 2세의 한 관리가 아피루('Apiru)에게 양식을 나눠 주라고 현장 주임에게 지시합니다. 어떤 학자들은 이 '아피루'를 성서의 '히브리'와 연결시키기도 합니다(아피루와 이스라엘의 관계는 나중에 자세히 살펴볼 것입니다). 아피루 또는 하비루는 일반적으로 일종의 변절한 외국인들로서 학자들은 그들을 '뿌리 잃은 떠돌이들'이라고 불렀으며 때때로 그들은 용병들과 동일시되기도 합니다. 만약 아피루가 히브리인들과 직접 관련이 있다면 그들은 람세스 2세 시기의 수도를 건설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일부였을 것입니다.

람세스 2세의 말기에 이집트의 세력은 축소되고 그의 후계자인 메르넵타가 벌인 가나안 공격을 빼고는 이집트의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지배력은 눈에 띄게 약해졌습니다. 기원전 1200년 무렵 제19왕조는 무질서와 혼란 가운데 막을 내렸는데, 13세기의 정치 역학 관계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억압에서 벗어나 정치적인 해방을 시도할 만한 가장 적합한 환경이 됩니다.

요단 동편 상황 역시 13세기 출애굽을 뒷받침합니다. 민수기 20:14~21과 21:21~35에서 모세는 에돔, 모압, 암몬 왕국들과 접촉합니다. 고고학 조사에 따르면, 이 정착 왕국들은 아무리 일러도 기원전 13세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결론적으로 이스라엘을 압제한(출 1:8) 파라오는 세티 1세(Seti Ⅰ), 출애굽 당시는(출 2:23) 람세스 2세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합니다.

야웨 신앙의 전환점으로서의 출애굽

출애굽을 한 사람들의 수가 실제로 수백만 명이 되지는 않았지만, 요셉을 따라 들어간 사람들 가운데 얼마는 '분명히' 가나안을 향해 이집트에서 나왔습니다. 그들은 나중에 가나안 땅에서 만난 사람들과 함께 자신들의 출애굽 경험을 공유하게 됩니다(이스라엘 사람들의 기원에 대해서는 뒤에 자세히 다룰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출애굽(그리고 가나안 땅 정복)의 이야기를 신학적으로 각색하고 편집해서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 서사시로 탄생시킨 것입니다. 역사의 실재로 출애굽이 없었다면 어떤 민족도 그런 치욕적이고 불쾌한 전승을 스스로 만들어 내어 수백 년, 수천 년 동안 충실하게 전수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최고 지도자인 모세가 신(神) 야웨를 만났을 때 야웨는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원해 줄 것을 약속하며(출 3:7~10), 나중에 시내 산에서 모든 백성들 앞에서 나타났을 때도 자신을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한 야웨(출 20:2)라고 소개합니다. 어째서 하나님은 자신을 소개할 때 "나는 천지를 창조하고 너를 만든 네 하나님 야웨니라"고 하지 않고 "나는 너를 이집트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해낸 네 하나님 야웨니라"고 하였을까요?

이후에도 이스라엘은 야웨 하나님이 그들을 이집트에서 구출해 내었음을 거듭해서 고백하며(사무엘기상 10:18, 열왕기상 8:51, 시편 106:21, 아모스 3:1, 미가 6:4), 이런 고백은 신약성서에서도 되풀이 됩니다(사도행전 7:36, 13:17, 히브리서 8:9). 그만큼 출애굽 이야기 속에는 그 당시의 기적을 직접 체험한 사람들의 증언이 녹아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 철학자 마틴 부버의 말대로, 이것은 '거룩한 사건'으로서 이 사건에 참여했던 사람들에게는 명백하고, 다른 어느 세력에 의해서도 제한을 받지 않는 유일한 힘이 작용하는 영역을 일별할 수 있게 한 사건이었습니다.

자연 현상이든, 역사적인 사건이든 아니면 양쪽 모두에 해당하는 일이든, 개인이나 집단에 되풀이해서 경이로움을 불러일으킬 때 이것은 종교사에서 위대한 전환점을 이루게 된다. -마틴 부버

또 한 가지, '하나님'에 대한 호칭에서 출애굽 사건의 진위를 엿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만나기 이전에는 자신을 소개할 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등으로 등장합니다. 그러다가 모세와의 만남 이후에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바뀝니다. 출 4:5이후에,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더 이상 나오지 않고(그것은 시편 47:9에 단 한 번 나온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호칭합니다. 출애굽은 '한 가족'의 신(神)이 '한 민족'의 신으로 확장되는 경이로운 사건이었습니다.

시대적으로 보면, 출애굽 이야기는 기원전 7세기 요시야 왕의 시대 상황을 반영합니다. 아시리아 제국이 무너지고 이집트가 다시 패권을 잡게 될 때, 남유다 왕국의 요시야 왕 또한 강력한 개혁 정책을 펴서 유일신 야웨를 경배하고 다윗 가문의 유일한 왕이 통치하는 강대한 국가를 건설하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집트의 야심과 아시리아의 간섭에서 온전히 벗어나 북이스라엘 왕국의 영토까지 병합하려는 요시야 왕의 열정은 정면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온 이스라엘 민족의 다양한 이미지와 기억이, 이제 파라오의 전차 부대와 맞선 이스라엘 민족의 독립 의지를 분출시킨 기폭제가 되어 자신들의 고난을 상기시켜 주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심어 준 것입니다.

출애굽의 최종 형태는 바벨론 포로기 시대(기원전 587~539년)에 제사장 집단에 의해 편집되고 확정되었습니다. 다시 한 번, 이집트의 노예 생활로부터 기적적으로 해방된 이야기는 외국 땅에서 속박된 바벨론 포로 상황에서 읽혀집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기원전 13세기(출애굽 시기)의 조상들에게만 적용되는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속박, 구원, 언약 공동체,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 된 모든 세대들(요시야 왕 시대, 바벨론 포로들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교회에서도)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 영광의 현존에 대한 경험을 나타냅니다.

고고학자 윌리엄 데버의 말을 빌리면, 출애굽 이야기의 다양한 전승 층과 여러 겹의 껍질을 벗겨내면 '자유를 위한 은유(a metaphor of liberation)'라는 알맹이가 들어있습니다.

출애굽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축하하는 유월절의 가장 생동감 넘치는 부분은 학가다(Haggadah)를 낭송하는 것이다. 이것은 전통적이며 세기를 이어 오래 동안 편집된 이야기이며, 애굽으로부터의 구원에 관한 다양한 주석이다.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역사이며, 부분적으로는 공상이며, 심지어 유머러스하고 각 새로운 세대들을 위한 출애굽의 재진술이다…. 유대인들은 말한다. "우리는 애굽에 있었다. 그리고 바로 오늘 전능하신 분에 의해 구원되었다."- 데버

유월절(출애굽)은 단 한 차례의 행사가 아니라 다양한 정치·경제·신앙적인 위협에 맞서는 이스라엘 민족의 계속된 저항이고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고백이라는 것이 역사를 통해 입증되었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출애굽 이후에 벌어지는 가나안 정복 전쟁 이야기를 읽어 보겠습니다.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