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돌산교회는 미아 뉴타운 아파트 숲 안에 있는 작은 상가 지하에 자리 잡고 있다. 간판들에 묻혀 잘 보이지 않지만, 돌산교회는 마을에 생기를 불어 넣는 사랑방으로 자라고 있다. ⓒ뉴스앤조이 주재일

마을. 길을 오가며 쉽게 친구와 이웃을 만날 수 있는 곳, 굽은 골목길 어귀부터 아이들 재잘거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 곳이 마을이다. 갓난아이가 있는 가정이나 나이 많은 어르신도 교제에서 소외되지 않는 곳, 아이들의 짓궂은 장난도 넉넉히 받아 주고 이웃 어른의 훈계가 통하는 곳이 마을이다.

마을은 그렇게 정겨운 곳이지만 쉽게 포기해 버린 가치이기도 하다. 수십 년을 함께 산 이웃도 개발 바람이 불면 뿔뿔이 흩어진다. 서울 뉴타운마다 정주율은 10%가 채 안 된다고 한다. 이웃끼리 애면글면 만들어 온 마을 문화도 개발과 발전이라는 이름의 변화 앞에 쉽게 증발해 버린다. 마을이 사라진 곳에서 '마을'이라는 말은 무지개마을이니 달빛마을이 하는 아파트 단지 이름에서나 찾아 볼 수 있다.

마을에 대한 갈증 때문일까. 최근 도시에서도 마을 공동체를 이뤄 보자는 운동이 바람을 타고 있다. 풀뿌리 지역 운동이야 1990년대에도 있었고, 그 이전에도 마을과 주민 속으로 들어가 더 좋은 마을을 만들기 위한 운동에 헌신한 이들의 드러나지 않는 수고가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처럼 마을 운동에 관심을 가진 것은 근래 찾기 힘든 현상이다. 풀뿌리 운동에 관심이 많은 시민운동가 출신이 서울의 수장이 된 덕분일 것이다.

서울 강북구 삼각산동 마을 만들기 운동도 이러한 흐름을 타고 2012년부터 펼쳐지고 있다. 마을에서 작은 잔치나 장터를 열고 주민들이 모여 아기자기한 문화 활동도 펼친다. 그렇지만 관이나 관 주변 인물들이 아니라 마을 주민들이 스스로 만들어 펼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리고 그 속에 돌산교회(서울 강북구 삼각산동 1357-3 삼각산 아이원A상가 402동)와 김성훈 담임목사가 있다.

▲ 돌산교회는 예배당을 주민들의 다양한 교육 공간, 회의실, 쉼터, 사랑방으로 내놓고 있다. (사진 제공 돌산교회)

마을 만들기 앞장서는 작은 교회

마을 주민 10여 명이 2012년 삼각산동 마을 만들기 추진위원회를 결성했다. 주민들이 참여하고 재능도 기부해 마을을 풍요롭게 만들고 서로 배우고 성장하자는 취지였다. 우선은 마을 만들기에 관심이 있는 주민들을 찾는다는 방을 붙이고, 한자리에 모인 15명가량의 주민들과 함께 우리가 원하는 삼각산동은 어떤 곳인지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냥 둘러앉아 이야기하는 것보다 이미 마을 만들기를 잘 하고 있는 곳을 찾아 나서기도 하고, 삼각산동이 자리 잡은 강북구의 역사와 환경도 공부했다. 올해에는 지역 주민들과 함께 성미산마을과 삼각산재미난마을, 북촌마을 등을 방문할 계획이다. 서울 안에 자기 지역만의 특색에 맞게 마을 문화를 만들어 가는 곳을 찾아가 보고, 삼각산동에 적용 가능한 것들을 토론해 가는 것이다. 청소년이나 가족들과는 우이동 북한산 둘레길을 걸으며 우리 지역의 역사 속 인물을 만나는 역사 탐방도 기획했다.

마을 안에서 열리는 다양한 배움터도 눈에 띈다. 마을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무언가를 함께 배우며 친해지는 자리로 안성맞춤인 강의들을 마련했다. 도자기 핸드 페인팅, 노리개 공예, 이엠(EM)효소 만들기, 좋은 영화 보기 등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을 개설했다. 여기에 집단 미술 치료, 영어 회화, 집단 진로 상담까지 보탰다.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다양한 강좌와 놀이가 한데 묶여 있어서 마구잡이로 일을 벌인다고 보면 오해다. 다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추진위원회는 마을 배움터의 기본은 배우는 사람도 가르치는 사람도 마을 주민으로 하자는 것을 중요한 원칙으로 삼았다. 아무리 좋은 프로그램이어도 마을 밖에서 누군가 와서 가르치고 마을 사람은 늘 배우는 자리에만 있으면 건강한 마을을 만들어 가는 데 유익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을 대상으로 재능 기부자를 자천·추천받았다. 마을에 사는 도자기 공예가가 참여하고, 정신분석 심리상담센터 소장도 기꺼이 자기 시간을 내주었다. 노리개 공예에 재능이 있는 분도 마을 사람들과 함께하기로 했다.

그래도 다양한 프로그램을 할 수 있었던 데는 마을 주민들과 더불어 돌산교회 교인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윤병희 전도사가 이엠효소 만들기와 영화 보기를 진행한다. 윤 전도사는 다른 마을 주민과 함께 성인 영어 회화를 담당하고 있다. 청소년 상담사인 손영익 집사는 집단 진로 상담 프로그램을 준비 중이다. 그리고 돌산교회는 예배당을 다양한 활동 장소로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활동을 꾸준히 펼치고 더 다양한 내용의 마을 배움터를 열어 가기 위해, 김 목사와 마을 주민들은 마을 만들기 소통 센터를 만들 예정이다. 버리기 아까운 물건을 마을 사람들과 물물 교환하는 마을 이동 장터를 열고, 상설 재활용 가게를 사회적 기업 형태로 만들어 이웃들과 나눠 쓰는 일도 추진 중이다. 또 이웃들이 정보도 나누고 수다도 떨 수 있는 작은 북 카페도 만들 계획이다.

이제 막 분양이 끝난 뉴타운 지역인 삼각산동. 아파트나 상가, 새로 들어선 교회들은 모두 새 것이지만, 그만큼 사람 사이의 관계는 낯설다. 집을 보고 왔지만 마을까지 살피는 사람은 아직 드물다. 게다가 자녀들이 가는 학교 배정 문제나 주차 문제, 아파트 내 도로 이용 문제 등으로 예민하기도 하다. 이들의 마음을 열고 마을 이웃으로 살갑게 관계는 트는 건 쉽지 않다. 특히 이합집산한 뒤 이제 다시 우리 마을로 정 붙여 가는 과정은 참 멀고 먼 길이다. 누군가 앞에서 이끈다고 금방 풀릴 일도 아니다. 돌산교회와 김 목사도 이러한 현실을 잘 알고 있다. 일단 마을 만들기 활동을 시작했는데 이웃들 호응도 나쁘지 않다. 그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다.

▲ 마을 만들기의 일환으로 열린 강좌. 주민들과 함께 이엠 효소를 함께 만들었다. 돌산교회 윤병희 전도사가 강사로 나섰다. (사진 제공 돌산교회)

돌산교회는 투쟁하는 집단?

김 목사는 이곳에서 20년 넘게 꾸준히 펼쳐온 활동 덕분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돌산교회가 걸어온 길을 들여다보면 이웃이 더 부담스럽지 않을까 생각했다. 돌산교회는 1989년 문을 연 뒤 빈민 운동을 벌여왔다. 지자체들과 부딪히기도 부지기수였다. 철거 당시에는 이른바 '철거민 투쟁'을 주도했다. 도움을 받는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라면 곱게 보는 이들이 드물 수밖에. 하지만 지금 김 목사도, 돌산교회도 이웃들과 사이가 좋단다. 혹시 이제 갓 이사온 이들이 돌산교회의 '정체'를 잘 몰라서 그런 것 아닐까 싶었다.

"그렇지 않아요. 다들 저희 잘 알아요. 구청에서 주최한 지역 단체 활동가 모임 때 참여했습니다. 그 행사를 주도한 구청 간부는 예전부터 저를 잘 알고 있다고 먼저 다가와 인사를 건넸습니다. 서로 지향하는 바가 다르지만 존중하고 협력하려는 자세로 만났고, 저도 편하게 대했습니다."

그러면, 돌산교회가 변할 걸까. 김 목사는 고개를 저었다. 지난 20년 동안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살아왔던 길을 부정하거나 포기하지 않는다고 했다. 다만 마을이 아파트촌으로 바뀌고 중산층이라는 자의식을 갖고 있는 마을 주민이 많아졌기에, 이들과도 이웃으로 어울리는 길을 모색하고 있다는 것이다.

강북 뉴타운 지역인 삼각산동 재개발 당시, 돌산교회는 새로운 재개발 사례를 남겼다. 보통은 재개발이 시행되면 살던 사람은 마을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주하기 마련이다. 재력이 넉넉한 가정이 아니면 다시 살던 곳으로 돌아올 수 있는 확률은 떨어진다. 그래서 일명 신축 아파트를 살 수 있는 '딱지'를 팔고 떠나는 이들이 흔하다. 김 목사는 살던 사람들이 주체가 된 건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들의 권익을 위해 뛰었다.

우선 마을 곳곳을 돌아다니며 재개발 대책 회의를 할 사람을 소집했다. 장소는 당연히 돌산교회. 200여 명이 모였다. 이렇게 모인 이들을 규합해 임시 이주 단지를 아파트 단지 내에 만들어 달라고 재개발조합에 요구했다. 그러니까 재개발을 하는 동안 이곳 주민들이 다른 곳으로 떠나는 게 아니라 기존 아파트 단지 안에 임시 주거지를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단지 내 가장 늦게 공사하는 곳에 임시 주거 단지를 확보했다. 이곳에 지을 건축 비용 6억 원도 지원받았다. 지원받은 돈으로는 임시 주거지를 지을 수 없어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1억 5000만 원을 더 모았다. 글로 표현하면 두세 문장 밖에 되지 않지만, 이를 위해 김 목사와 주민들은 3년을 싸워야 했다. 매주 1번 이상은 모여 대응을 논의하고, 참여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재산 보호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마을 공동체의 건강한 건설을 위해 고민하고 참여할 수 있도록 교육도 꾸준히 펼쳤다.

남은 건 이 공간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지에 관한 논의. 사공이 많아 혼란한 상황에서 김 목사는 몇 가지 원칙을 세워 나갔다. 마을 회관, 노인 사랑방, 공부방 등 공동 공간을 우선 지었다. 가정집은 형편에 따라 5, 7, 9평으로 조촐하게 만들고 대신 함께 쓰는 공간은 크게 세웠다. 교회는 건물을 따로 짓지 않고 공부방을 일요일에 사용하는 것으로 대체했다. 돌산교회는 교회가 요구해도 되는 이권을 포기했고, 주민들도 흔쾌히 불편하게 지내야 하는 상황을 받아들였다. 나중에 들어갈 임대 아파트가 13~15평인 것을 감안하면 너무 좁은 집이었지만, 다들 동의해 주었다.

▲ 1991년도 철거민들과 함께 시름을 잊고 벌였던 마을 노래 잔치. (사진 제공 돌산교회)

새로운 마을 공동체 실험들

이다음부터는 새로운 마을 공동체를 실험했다. 비록 임시 주거 단지였지만, 협동적이고 친환경적인 삶을 살자는 모토를 내걸었다. 가정집은 좁게, 공동 시설은 비교적 넉넉하게 지은 것도 모두가 동의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마을 일들도 마을 회관에 모여 민주적인 회의를 통해 풀어 나갔다. 특히 돈이 없어 나중에 임대 아파트에 들어가기 어려운 이들을 위해 신용협동조합을 만들고, 생활협동조합까지 꾸렸다.

신협은 가난한 이들이 힘을 합치면 우리 삶을 주체적으로 풀어 갈 수 있다는 신념으로 시작했다. 처음 주민 55가구 220여 명으로 시작했다. 여기에 이웃 마을 사람 40가구가 참여해 300명으로 불었고, 모은 금액도 2억 원으로 늘었다. 매일 조합원들을 찾아다니고, 이웃을 설득하고, 신협이 필요한 이유를 꾸준히 교육한 결과였다. 김 목사는 "날마다 돌며 1000원이라도, 그것도 없으면 500원이라도 출자하도록 독려하고 다녔다"고 했다. 임대주택에 들어갈 때 보증금과 전세금이 없어 떠나야 하는 사람들에게 신협은 희망이라고 줄기차게 강조했다. 신협중앙회에서 허가를 내주지 않았을 때는 이웃 동내 신협의 지소로 등록해 2000년까지 활동을 펼쳤다. 하지만 독자 신협 건설이라는 꿈은 끝내 실현되지 못했다.

노인 사랑방에서는 노인과 실업자들의 일감과 일터를 만드는 일도 함께 추진했다. 그저 수다만 떠는 곳이 아니라 함께 모여 소일로 생활비를 버는 활동으로 키워 갔다. 실업자를 위해서는 자활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도 만들고 실업자사업단도 결성했다. 사랑방은 지역에서 나오는 일자리를 알리는 역할도 했다. 이러한 활동은 나중에 삼양주민연대, 강북지역자활센터 등으로 독립해 나났다.

생산협동조합도 일자리를 잃고 불안한 삶을 사는 마을 사람들을 구제하는 방향에 초점을 맞추었다. 기술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공동 출자를 하고, 함께 생산해서 판매하고, 수익금을 공동으로 분배하는 원칙을 가지고 공동작업장을 마련했다. 이곳에서 생활한복을 만들어 판매했다. 하청을 받지 않아 더 많은 수익을 얻을 수 있었고, 서로 봉급 차이가 없었기에 일할 맛도 났다. 그렇지만 2년을 갓 넘긴 90년대 후반 문을 닫았다. 시장에서 판로를 충분히 개척하지 못하는 한계를 넘을 수 없었다.

마을 회관에서는 소비자협동조합 활동도 펼쳤다. 농촌과 직거래로 저렴하면서도 건강한 먹을거리를 확보했다. 주민들과 함께 농촌을 방문해 어떻게 농사하는지도 살피고 생산자들과 신뢰도 쌓았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 큰 규모의 생협들이 펼치는 활동을 이미 작은 마을 단위에서, 그것도 임시 주거지 주민들이 펼친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꾸준히 유지하지 못하고 몇 년 만에 문을 닫아야 했다. 어렵고 수익이 많지 않더라도 누군가 애정을 가지고 유지했다면 좋았겠지만 그러지 못했다.

돌산교회가 중심이 되어 임시 주거 단지에서 펼친 대부분의 활동은 실패했다. 결과만 보면 그렇다. 주민들은 임대 아파트가 지어지자 들어갔고, 돌산교회도 다른 공간으로 이주했다. 이후 셋방살이를 전전하다 지금은 우연한 기회로 경매로 나온 아파트 단지 내 상가 지하를 얻어 들어왔다. 하는 일마다 문을 닫았고 함께 했던 마을 주민들도 흩어졌기에, 성공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김 목사는 자평했다. 하지만 천천히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는 않다.

김 목사는 아직도 임대 아파트에 들어간 주민들과 친목 모임을 하고 있다. 임시 이주 단지에서 함께 꿈꾸었던 마을을 지금 이루고 있지는 않지만, 함께 공부하고 건강한 마을 공동체를 이뤄 가기 위해 뛰었던 열정은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마을 사람들에게 김 목사와 돌산교회에 대한 신뢰는 여전했다. 14가정이 참여해 10년째 모여서 서로 어려운 일이 있는지 살피고 도우며 좋은 이웃으로 지내고 있다.

▲ 돌산교회 김성훈 목사는 교회뿐 아니라 마을을 목회하는 목사라는 자긍심을 갖고 있다. ⓒ뉴스앤조이 주재일

"왜 한몫 챙기지 않았어요?"

당시부터 사람들은 왜 돌산교회가 철거민에게 그렇게 깊은 관심을 품었는지, 김 목사가 왜 그리도 열심히 뛰었는지 궁금했다. 혹시나 뭔가 큰 이권을 노리는 것은 아닐까 의심을 품은 이들도 없지 않았다. "왜 그렇게 열심히 하느냐", "이런 일을 해서 원하는 게 뭐냐"는 질문이 늘 따라다녔다. 실제로 김 목사가 마음만 먹었다면 돌산교회도 한몫 챙길 수 있었다. 아파트 단지 안에 종교 부지를 불하받을 수 있는 기회도 있었다. 굳이 마다할 필요가 없었는데, 돌산교회는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아마 돌산교회가 종교 부지를 불하 받았다면, 우리가 펼치는 철거민을 위한 활동의 진정성을 믿어 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설마 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우리는 가이주 단지에서도 교회 건물을 따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이후에도 어떤 이권을 챙겨 나오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걸어온 길을 당시 마을 사람들은 다 보았습니다."

어찌 보면 미련하게 보일 정도로 챙기지 않았다. 수백 명이 모이는 공간에서도 전도의 열정을 품지 않았다. 김 목사는 목사로서 욕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교회 활동을 보고 스스로 신앙을 선택한 경우가 아니면 억지로 교회당에 오게 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철거 지역에서 함께 지낸 이웃 가운데 "임시 주거 시설이 다 지어질 때까지도 사심 없이 활동하면 교회에 나가겠다"는 사람이 둘 있었다. 이들만이 나중에 돌산교회 교인이 되었다. 그래서 교회는 그때도 30명이었고, 나중에도 더 늘지 않고 그만한 수를 유지했다.

오히려 최근에는 교인 수가 더 줄었다. 이사해 멀리 떠난 사람도 있고, 돌산교회와 김 목사의 활동에 함께하면서 지친 이들도 있다. 또 과거에는 교회가 가난한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고 했는데, 지금은 무엇을 존재 이유로 삼는 건지 방향을 잡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 김 목사조차도 고민 중이다.

마을은 예전의 산동네가 아니다. 임대 아파트가 있고, 여전히 가난한 이들이 살고, 그래서 그들과 함께하는 일이 많다. 하지만 '가난'이 돌산교회의 화두인지 교인들은 묻는다고 했다. 김 목사는 그래 우리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이것이다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때문에 김 목사는 수차례 인터뷰 요청에도 선뜻 응하지 않았다. 그럴수록 기자는 더 달라 붙여 만나자고 오기를 부렸다. 끝내 돌산교회가 걸어온 역사와 김 목사의 인생길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만나길 잘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돌산교회는 작은 교회다. 아주 작은 교회다. 돌산교회가 앞으로 대형 교회가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 김 목사도 교인들도 그러한 일에 크게 욕심을 내지 않는다. 그렇지만 교회의 존재 이유를 이웃, 마을에 두고 20년 넘게 변함없이 살아왔다. 지금은 이웃이 바뀌어 어찌해야 하는지 기도하고 있다. 예전에는 마을 곳곳에 가난한 사람들은 많이 살았지만 지금은 중산층이 사는 마을로 변모했다. 이들 사이에서 돌산교회는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떠한 길을 가야 하나 살피고 있다. 전환기이고 과도기이다.

▲ 1994년 철거민들과 함께 드렸던 성탄 예배. 그때도 지금도 돌산교회는 가난한 이들의 벗이고 좋은 이웃이다. (사진 제공 돌산교회)

돌산교회는 고민 중

김 목사는 고민 중이라고 누누이 강조했지만, 돌산교회는 이미 보여 주고 있다. 마을, 공동체 따위의 말과는 쉽게 어울리지 않는 아파트 숲에서 돌산교회는 이웃끼리 어울려 사는 본을 보이려 애쓰고 있다. 마을 만들기가 정부나 지자체의 정책에 따라 유행 타는 사업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이 주인이 되어 다양한 마을 문화를 만들어 가는 자생적인 활동이 되도록 힘쓰고 있다. 아름다운 마을의 미래를 그려 가는 데, 돌산교회가 쌓아 온 경험이 좋은 밑거름이 되고 있다.

'운동권' 목사가 이웃들을 이끌고 마을 만들기 활동을 추진할 수 있는 이유는 신뢰 때문이다. 철거와 입주 과정에서 돌산교회가 보여 준 태도, 자기 이득을 챙기지 않고 가난한 이웃을 위해 끝까지 뛰었던 모습을 마을 사람들을 알고 있다. 비록 마을에 남은 이들이 소수이지만, 이들이 김 목사라면, 돌산교회라면 믿을 수 있다고 신뢰하기에 마을 만들기를 주도할 수 있었다. 이웃이 믿음을 보여 주었기에 김 목사도 자신을 마을을 목회하는 목사로 소개할 수 있는 것이다.

또 하나. 실패가 밑거름이 되었다. 다양한 조합 활동을 계속 이어 오지는 못하지만, 그때의 실패가 지금은 어떻게 마을을 만들어 가야 하는지 방향을 잡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지금 조합이 유행하고 있지만, 돌산교회는 이미 10여 년 전부터 실험해 왔던 것이다. 쓰라린 경험은 어차피 안 되는 일이라고 포기하게 하는 체념을 낳을 수 있다. 하지만 돌산교회는 고민 중이다. 체념하는 신앙 공동체였다면 할 필요가 없는 고민이다. 그래서 그들의 고뇌에 힘이 담겨 있고, 이후 활동을 주목해서 보게 만든다.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