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출애굽 이야기의 난제들

출애굽 사건은 가나안 정복 이야기와 더불어 구약성서에서 가장 뜨겁고 혼란스런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부분입니다. 고고학 발굴이 더해지면서 수많은 학자가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에 관해 엄청난 분량의 다양한 학설을 발표했으며 이는 구약성서 전체를(어쩌면 신약성서까지도 포함해서)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그러나 출애굽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는 과정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출애굽의 여정을 고고학자와 함께 걸어가지 않으면 앞으로 구약성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불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40년을 헤매었던 것 같이 광야에서 길을 잃는 것이죠.

출애굽 이야기의 난제들

출애굽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에 몇 가지 문제점이 생깁니다.

성서의 숫자를 그대로 적용하면, 출애굽은 창조 후 2666년에 일어납니다. 이것은 출애굽이 창조 후 제27세대에 있었다고 보는 족보 자료와 일치합니다(평균 100년을 한 세대로 보면 26 2/3세대는 2666년이 됨). 더욱이 2666년은 4000년의 2/3에 해당합니다. 4, 40과 40의 배수는 창세기-열왕기하 전체에 걸쳐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광야 유랑은 40년이었고, 사사들이 통치하는 것도 대부분 40이라는 숫자와 관련됩니다. 출애굽부터 솔로몬 성전이 세워질 때까지의 기간은 480년(왕상 6:1)이고, 이때부터 바벨론 포로의 귀환까지의 기간도 480년입니다. 이렇게 주요한 사건을 기술하는 성서의 기록은 도식적이고 인위적입니다.

열 가지 재앙 가운데 특히 맏아들이 모두 죽는 마지막 재앙은 이집트의 근간을 흔드는 엄청난 사건이었음에도 이집트 기록에 전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출애굽기 12:37~39에서 이집트를 떠난 히브리인들은 성인 남자만 해도 60만 명이었다고 하는데(성서의 몇몇 구절에서 '수천(數千)'으로 번역된 낱말은 '씨족'을 뜻할 수도 있다. 이런 근거로 보면 민수기 1:46의 표현은 60만 명이 아니라 600가족 혹은 씨족을 뜻한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출애굽을 했던 이스라엘 장자들의 수는 민수기 3:43에서는 2만 2273명으로 나온다. 숫자가 정확히 주어져 있으므로 수천을 가족이나 씨족으로 번역할 수는 없다.) 여자와 아이들과 노인들, 그리고 중다한 잡족들(출 12:37~38)을 더하면 300만 명은 되었을 것입니다. 이 수면 10열 종대로 행진한다고 해도 그 길이가 240km가 넘게 이어질 것이고 어느 특정한 지점까지 모두 도착하려면 8~9일이 걸립니다. 또한 시내 광야는 천 명 이상의 사람이 생활할 만한 여건을 갖추고 있지 못한 것도 문제입니다.

히브리인들은 파라오 모르게 아무런 준비도 없이 황급하게 나온 것일까요(출 12:39~14:5)? 아니면 무장한 군대로 조직하고 이집트인들로부터 상당량의 재물을 훔친 뒤에 아주 치밀하게 출발한 것일까요(출 11:1~2, 12:35~36, 13:18~19)?

십계명(출 34:28), 계약의 책(출 24:7), 오경의 율법 전체 중에서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주어진 율법은 무엇일까요?

또한 출애굽과 관련된 재앙들과 그 밖의 기적들이 우주적인 자연재해라는 가설이 제기되었습니다. 이를테면, 여러 재앙과 바다가 갈라진 현상은 청동기시대에 혜성 또는 혜성들이 지구 가까이 통과하면서 생겨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에게 해에서 일어난 후기 청동기시대(아마도 기원전 1450년)의 화산 폭발로 인해서 어두움, 이상 강우 등이 발생했을 것이며, 이때 데라 섬의 일부가 가라앉으면서 생겨난 엄청난 조류의 일부가 남동 지중해 해안선을 강타해서 이집트 군대를 수장시켰다는 가설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출애굽과 관련된 기사를 자연 현상과 기묘하게 결합시키는 것은 성서 속 이야기를 온통 기적 이야기로 채우는 것으로 그것이 해결하고자 하는 것보다 더 큰 문제들을 만들어 냅니다.

홍해

홍해(Red Sea)의 히브리어 이름은 '얌 수프'입니다. 그런데 '얌'은 바다이고 '수푸'는 갈대이므로 '갈대 바다(Reed Sea)'로 번역이 되어야 알맞습니다. 홍해의 히브리어는 '얌 아담'이 되어야 합니다. 실제 지리상의 홍해에는 갈대가 자라지 않으며 갈대는 바닷물이 아닌 민물가에서만 자라며 수에즈만 북쪽의 습지에서만 발견됩니다. 따라서 얌 수프와 실제 지리상의 홍해를 같은 것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몇몇 구절(민 21:4, 왕상 9:26, 렘 49:21)에 따르면 얌 수프라 언급된 바다는 오늘날의 홍해 또는 홍해와 연결된 그 북부에 손가락 모양으로 들어간 두 곳, 수에즈 만이나 아카바 만(에일라트 만) 가운데 하나가 분명합니다. 처음에 얌 수프는 칠십인역(LXX)에서 홍해로 번역되고 라틴어, 영어를 거쳐 우리말 홍해로 번역됩니다. 이와 달리 루터는 히브리 성서에 의거하여 얌 수프를 정확히 '쉴프메르' 곧 '갈대 바다'로 번역했습니다.

때로 얌 수프가 실제 홍해를 가리킨 적도 있지만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발을 적시지 않고 건넜다는(출 15:4) 물이 실제 홍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실제 홍해는 매우 넓은 바다이고 거기에는 갈대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이스라엘이 건넌 홍해는 지리상의 홍해일 수 없습니다.

출애굽기 14:2에는 얌 수프의 위치가 꽤 상세하게 나오지만 관련된 지명들(비하히롯, 믹돌, 바알스본)을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민수기 33:10~11의 홍해는 수에즈 만을 가리키는 분명한 예이지만, 그러나 엘림의 위치가 명확하지 않아 달라질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16:1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엘림을 떠난 뒤 홍해에서 천막 칠 곳이 없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건넌 얌 수프는 지리적으로 어디일까요? 세 가지 이론이 있습니다. 첫째는 전통적인 남쪽 통로로, 수에즈만을 쓴 호수(비터 호수, Bitter)와 연결시키는 부분을 건넜다는 가설입니다. 비록 이곳이 바다는 아니지만, 히브리인들은 바다와 호수를 혼동해서 바다로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신약성서에서 갈릴리 호수를 바다라고 부른 것과 같습니다. 둘째는 중앙부의 횡단 지역으로 보면, 멘잘레 호의 남쪽 연장부에 위치해 있었을 '얌 수프'를 건넜을 것입니다. 셋째는 북쪽으로 간 것인데, 얌 수프를 펠루시움과 라피아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지금은 바르다윌 호로 불리는 시르보니스 호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이 지역에는 넓은 갈대 지역이 있습니다. 몇 가지 가능성에도 이스라엘이 건넌 '얌 수프'가 어디인지는 정확히 알기가 어렵습니다.

시내 산

출애굽의 핵심 지역인 시내 산은 출애굽기와 레위기 및 민수기 등에서 토라를 받은 곳으로 15회 언급되지만 얌 수프(홍해)와 같이 찾기가 어렵습니다. 시내산은 '호렙'이라는 이름으로 여러 번 사용되는 것으로 보아 두 곳은 같은 산입니다. 다양한 장소들-전통적으로 시내 산으로 예상되는 예벨 무사(기원전 4세기까지 로만 거슬러 올라가는 전승)로부터 남부 시내(Sinai)에 있는 다른 산들, 북서부 사우디아라비아의 어떤 산 등 무려 10곳이 넘는 지역이 후보에 올랐지만 결정적인 증거를 보여 주는 곳은 없습니다. 시내 광야의 북쪽 지역의 어느 지점일 것이라는 추측이 이스라엘이 그 부근에서 아말렉과 전투를 했다는 전승(출 17:8-16)을 통해 나왔습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몇몇 구절에서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가데스로 곧장 갔음을 암시하는데(출 15:22, 삿 11:16) 그렇다 해도 결정적인 확증을 주지는 못합니다.
또한 출애굽기와 레위기에서 묘사되는 시내 산을 중심으로, 광야에서 주어진 복잡하고 다양한 제사 의식은 오직 군주제 사회의 도시 생활 속에서나 가능한 것으로 삭막한 광야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시내 산의 정확한 위치와 그곳에서 일어난 사건의 진위는 안개 속에 가려져 있습니다.

가데스-바네아

가장 난감한 것은 가데스-바네아(Kadesh-Barnea)입니다. 성서 기록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은 뒤 38년 동안 가네스-바네아에서 진을 치고 생활했습니다.(민수기 13, 14, 20장) 학자들 대부분은 그 장소를 시내 광야 북동부의 엘-쿠데이라트(Ein el-Kudeirat)와 동일시합니다. 물의 이용 가능성과 다른 환경 조건들을 고려해 볼 때 그곳이 가데스 바네아일 수 있는 가장 유력한 곳입니다. 이스라엘 고고학자들은 몇 차례에 걸쳐 그곳을 발굴하여 기원전 10~7세기의 글귀들과 함께 작은 요새를 하나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는 출애굽 당시의( 15세기 또는 13세기) 유물 조각 하나 찾지 못했습니다. 200~30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40년간이나 생활했는데 왜 그 흔적을 찾지 못할까요? 아니면 아직 찾지 못한 것일까요?

에시온게벨은 이스라엘 백성이 야영한 곳으로 전해지는 또 하나의 장소입니다(민 33:35). 후대에 아카바 만 북쪽 끝의 항구도시가 되었다는 성서의 여러 차례 언급을 토대로 고고학자들은 에일라트와 아카바 두 도시 중간에 위치한 오늘날의 이스라엘 및 요르단 국경 지역에 있는 작은 언덕을 에시온게벨로 지목했습니다. 1938년부터 1940년까지 몇 차례 발굴한 결과 후기 철기시대 유적은 발견되었지만 후기 청동기시대의 거주지 유적은 없었습니다. 광야의 수많은 야영지 명단 가운데에서 가데스바네아와 에시온게벨은 실제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곳이지만 두 지역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방랑 생활을 했던 자취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동쪽 건너편에 있는 요르단도 비슷합니다. 이 지역에서 유랑했던 이스라엘은 가나안으로 가는 길에 자신의 영토를 통과하는 것을 막으려했던 아모리족의 시혼 왕과 헤스본에서 전투를 벌입니다(민 21:21~25, 신 2:24~35, 삿 11:19~21). 고대 헤스본이 위치했던 암만 남쪽의 텔 헤브반을 몇 차례 발굴했는데, 후기 청동기시대의 도시는 물론이고 작은 마을의 흔적조차 없었습니다. 또한 에돔인들과 암몬인들의 저항을 받았다고 기록하는 성서의 이야기(민 20~21장)와는 달리 요르단 고원은 후기 청동기시대에 인구가 매우 희박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왕국이 아니라 농경 인구조차 정착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출애굽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민족들과 전쟁을 벌였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출애굽 이야기를 전면적으로 부정해야 할까요? 다음 글에서는 출애굽의 가능성을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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