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지만 아름다운 교회, 경성교회를 소개합니다." <뉴스앤조이> 제보 게시판에 모처럼 훈훈한 정보가 떴다. 교회 분쟁과 각종 사건사고를 알리거나 억울함을 호소하는 글로 가득한 공간이라 '착한 교회'를 알리는 글은 금세 눈에 띈다.

제보자는 비록 자신은 "일요일에만 교회에 나가는 날라리 같은 집사이지만 목사님과 교회, 교우들만큼은 자랑스럽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집사가 소개한 경성교회(박종걸 목사서울 노원구 상계471-125)는 한동안 건축하지 않는다고 다짐한 뒤 헌금의 50%를 외부로 흘러 보내고, 구제하고 장학금 주는 데도 인색하지 않다고 했다. 지방에서 서울로 유학 온 가난한 대학생들을 위한 학사관도 10년 가까이 운영하고 있다.
 
교계 언론에서는 이따금 경성교회가 운영하는 학사관을 소개하는 기사가 올라오지만, 경성교회를 다룬 글은 없었다. 교회 홈페이지가 따로 없고, 교인들이 소통하는 다음 카페에도 경성교회 전체를 알만한 내용은 그리 많지 않았다. 지역사회를 위해 어떤 공헌을 하는지 드러내는 글은 더더욱 찾아보기 어려웠다.
 
다만 카페에 올라오는 글들로 교회 분위기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다. 교우들의 애경사를 알리는 글이 가끔씩 올라오고, 4개월에 한 번씩은 세세한 재정 보고가 뜬다. 후원하는 학사관이나 교회, 선교지 소식도 있다. 여기에 교우들끼리 봉사하거나 산행하는 이야기, 기도 나눔까지 곁들여졌다.
 
카페에 일상적인 나눔뿐 아니라 묵직한 주제의 대화가 오간 것이 눈길을 끌었다. 최근 한 대형 교회에서 터진 담임목사의 비리를 다룬 <뉴스앤조이> 기사를 놓고 토론하는 제자 교육 안내문이 우선 눈에 들어왔다. 세습과 무리한 건축, 각종 재정 비리 등 심심치 않게 터지는 교회 문제를 어떻게 봐야 하며,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생각해 보자는 제안이 곁들여졌다. 박 목사는 수시로 <뉴스앤조이> 기사를 올리고 있다. 교회 문제를 다룬 <뉴스앤조이> 때문에 선교와 전도의 문이 막힌다고 말하는 목사와 신자들이 많은데, 우리 기사를 놓고 적극적으로 토론하고 기도하는 교회가 있다는 사실이 무척 반가웠다.
 
▲박종걸 목사는 휴대폰을 쓰지 않는다. 그 돈까지 아껴야 이웃을 돕는다고 말했다. 그래도 소통하며 사는 데 지장은 없단다. ⓒ마르투스 주재일
 
휴대폰 안 쓰는 별종 목사
 
관련 정보도 어느 정도 살펴보았고, 카페도 둘러보며 교회 분위기도 파악했다. 이제 박종걸 목사를 만나 볼 차례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록 통화를 할 수가 없었다. 제보자가 남긴 전화번호는 몇 번을 걸어도 받지 않는다. 교단에서 발간하는 주소록 번호로 연락해도 소용이 없다. 어디를 뒤져도 박 목사 핸드폰 번호를 알 길이 없다. 무작정 교회로 찾아갔더라면 낭패를 볼 뻔했다. 주 중 제자 교육 모임을 비롯한 다양한 모임이 있지만, 교회에 상주하는 사무원이나 사찰집사가 없다고 했다.
 
연락처를 확보하기 위해 카페 글을 뒤지기 시작했다. 박 목사가 사모 휴대폰이 안 터진다는 글은 올렸지만 비상 연락망을 남겨 놓지 않았다. 나중에 개통했다고 했지만 번호가 없다. 수십 개의 글을 검색하고 몇 다리를 건너 사모와 통화하고 박 목사를 만났다. 만나자마자 휴대폰이 없느냐고 물었다. '당신을 만나기 위해 무척 고생했다는 것을 알아달라'는 마음이 앞서 처음부터 따지는 질문이 되었다.
 
"휴대폰은 쓴 적이 없습니다. 이웃을 돕기 위해 아낄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아끼자는 마음에 사용하지 않은 겁니다. 목사가 교회에서 통신비까지 가져가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연락이야 유선전화가 있고, 급한 일이면 아내 휴대폰에 문자를 남기면 됩니다. 설령 전화를 안 받아도 집 전화에 녹음해 놓으면 제가 나중에 듣습니다. 줄곧 쓰지 않으니 지금은 굳이 쓸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변에서 불편하다고 아우성이지 않았을까. 역시나 박 목사도 시달렸다. 휴대폰이 나온 초기에는 워낙 고가였기에 그러려니 했지만, 이제는 누구나 쓰니까 박 목사에게도 권하는 이가 많아졌다. 노회 서기를 맡았을 때는 권유가 은근한 압박이 되기도 했다. 수시로 서류를 받고 각종 증명서도 발급해 주는 일을 하는 서기 특성 때문에, 이웃 교회 목사들이 일 처리가 늦다고 볼멘소리를 했다. 한 목회자는 하나 사 줄 터이니 제발 쓰라고 했다. 아예 핸드폰을 가져다주면서 개통하라고 으르는 이도 있었다. 그래도 박 목사는 사양했다.
 
휴대폰은 안 쓰는 사람보다 쓰는 사람이 더 불편해하지만, 조금만 지나면 그런 게 없어도 소통에 전혀 문제가 없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게 된다고 박 목사는 말했다. 휴대폰 없이 사는 삶에 대해서 이야기할수록 단순히 아끼려는 차원을 넘어 이 시대를 살아가는 박 목사의 철학이 드러났다.
 
"처음 지킨 약속을 깨고 싶지 않았어요. 휴대폰 없어도 충분히 소통하고 살 수 있습니다. 조금 지나면 저와 연락하는 방법에 익숙해집니다. 그러면 불편하다는 생각도 안 들지요. 그리고 휴대폰이라는 게 문명의 이기이지만 아직 우리 몸에 어떤 영향을 줄지도 모르고. 나 같은 사람 몇은 있어도 되지 않나요. 저의 작은 철학이라고 생각하고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 경성교회 헌금 봉투는 누런 재생지다. 연필로 이름과 금액을 쓰고 또 쓴다. ⓒ마르투스 주재일
누런 헌금 봉투 몇 년째 재사용
 
박 목사와 경성교회의 절약 정신은 휴대폰 하나로 그치지 않는다. 경성교회는 누런 재생 봉투를 사용한다. 재생 봉투에는 고무인으로 찍은 헌금란이 있다. '십일조, 감사, 선교, 구제, 장학, ( )'. 교인들은 연필로 이름과 금액을 적는다. 봉투가 찢어지지 않는 이상 몇 번이고 재사용한다. 1988년 경성교회가 가정 교회로 출범할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헌금 봉투는 오직 재생 봉투였다.
 
"예배 시간에는 헌금한 사람을 안내하는 순서가 없습니다. 재정 통계를 낸 뒤 제가 이름과 헌금을 지우개로 지우면서 기도합니다. 물론 처음 출석하는 이들이나 외부 사람들이 헌금을 하면서 볼펜을 쓰는 경우가 있습니다만, 그렇지 않으면 봉투 하나도 몇 년을 쓸 수 있습니다."
 
<뉴스앤조이>에 제보했던 집사도 헌금을 강요하지 않는 교회라고 자랑했다. 한 교인이 제작한 경성교회 홍보지에도 '우리 교회 좋은 이유' 첫 번째로 크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헌금과 교인 수를 늘리려 하지 않고, 교회의 에너지를 자기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웃을 위해서 쓰니까 좋다고 했다.
 
지독하게 아끼고 또 아낀다
 
봉투뿐이 아니다. 경성교회의 절약 정신은 지독하다 싶을 만큼 철저하다. 경성교회에는 교회에 있을 법한 것들이 없는 게 많다. 우선 주보를 따로 만들지 않는다. 예배 순서는 카페에 미리 올리고, 사회자만 복사해 사용한다. 다른 이들은 빔 프로젝터로 보면 그만이다. 종이 아끼자는 차원에서 만들지 않았다.
 
예배당에는 그 흔한 꽃 장식 하나 없다. 사찰 집사가 없으니 교인들이 돌아가며 교회 청소를 맡는다. 또 교회 차량이 없다. 멀리 있는 교인들이나 교회 내 크고 작은 모임에서 이동할 때마다 불편하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굳이 차를 살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박 목사 주 교통수단은 자전거다. 기자를 만난 날도 세월의 때가 잔뜩 묻은 낡은 자전거를 타고 인터뷰 장소에 나왔다.
 
웬만한 교회당 관리는 자신과 교인들이 직접 하기에 사찰집사나 사무원이 따로 필요하지 않다. 여기에 부교역자도 없다. 박 목사가 목회할 수 있는 역량을 넘어서면 분가를 하거나 교인들을 내보내면 된다고 생각한다. 경성교회는 분가한 경험이 이미 있다. 20년 전 장로 한 분이 뒤늦게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자가 되자 한 달간 함께 개척할 이들을 모아 떠나보냈다.
 
일요일 점심 식사를 함께 하지만 설거지는 교인들이 직접 한다. 1년에 한 번 이상은 누구나 150명분의 설거지를 해야 한다. 식단은 언제나 국밥이다. 밥과 국, 그리고 간단한 밑반찬 한두 개가 전부다. 박 목사가 교인들에게 초대를 받았을 때는 더욱 엄격하다. 밖에서 식사를 하면 5000~6000원을 넘기지 않는다. 집에서는 국과 함께 반찬을 세 개 이상 놓지 않는다. 어기면 박 목사가 설거지한다. 목사 설거지시키고 싶지 않으면 알아서 검소한 밥상을 차리라는 요구다. 처음에는 교인들이 미안해서 박 목사 팔을 붙들었지만, 지금은 알아서 소박하게 내놓는다.
 
"명확한 원칙을 세우지 않으면 쉽게 무너집니다. 제가 교인들과 거나한 식사를 하고 나면, 된장국을 대접하려는 교인들이 상처를 받습니다. 먹는 즐거움이 크다는 것은 알지만, 조금만 더 아끼면 더 많은 이웃과 나눌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남는 것으로 이웃을 돕겠다고 생각하면 실제로 도울 수 없습니다."
 
▲ 박종걸 목사 주요 교통 수단은 자전거다. 추운 겨울에도 자전거를 타고 손님을 만나러 나왔다. ⓒ마르투스 주재일
헌금 절반은 이웃을 위해
 
이렇게 아끼면 얼마를 절약할 수 있을까, 이렇게 아껴서 어디에 쓸까. '교회 재정의 50%는 교회 밖 이웃을 위해 쓰자'. 경성교회가 내건 목표를 이룰 때도, 그렇지 못할 때도 있다. 하지만 최소한 30%를 이웃을 위해 쓴다.
 
십일조를 하면 구제와 선교를 위해 각각 10%를 먼저 뗀다. 5%는 장학 사업에 쓴다. 성탄절, 맥추절 등 절기 헌금은 전액 장학금으로 쓰기 때문에 전체 재정의 10% 정도는 장학 사업에 쓰는 셈이다. 이렇게 헌금의 30%는 기본적으로 선교, 구제, 장학 등에 사용한다. 어느 해에는 56.8%를 이웃을 위해 쓰기도 했다.
 
장학금도 경성교회에 출석하는 학생들에게만 지급하지 않는다. 노원중, 서라벌중, 포천중, 청원고 등 이런저런 인연으로 알게 된 가깝고 먼 곳 학교 학생들을 선발한다. 또 수업료를 내지 못해 제적 위기에 놓인 학생들도 돕는다. 20년 가까이 돕다보니 이제는 교회에서 연락하기 전에 먼저 도움을 요청하는 학생이나 학교도 늘었다.
 
특히 농어촌 미자립 교회 지원과 서울에서 유학하는 농촌 청년 장학 활동은 경성교회가 개척 초기부터 해 오는 활동이다. 박 목사가 학교 교사로 일하면서 목회했던 초기 5년은 사례비를 받지 않았다. 교회 건물을 따로 두지 않고 가정집에서 모였기 때문에 헌금은 고스란히 구제와 선교와 장학을 위해 쓸 수 있었다. 그때부터 농촌의 미자립 교회를 지원했다. 돈만 보내는 게 아니라 가끔씩 초대하거나 방문해 안부도 묻고 기도 제목도 나누었다. 미자립 교회의 목회자와 교인들의 자녀가 서울에 올라와서 고생하는 이야기도 듣게 되고 자연스럽게 농촌 유학생 장학 사업으로 이어졌다.
 
장학금을 전달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도울 수 없다고 판단해 2000년부터는 학사관을 운영했다. 노원역 근처 아파트 두 곳을 마련해 '경성학사'를 세우고 남녀 학생들을 모집했다. 학생들은 관리비로 한 달에 2~3만 원만 내면 학사를 이용할 수 있다. 최근에는 개발 예정인 달동네로 교회가 이전하면서 학사관도 교회 근처로 옮기고 두 곳에서 한 곳으로 줄었고, 당분간 더 늘릴 수 없는 형편이다. 하지만 경성학사는 계속 된다.
 
▲ 한해가 지나면 재정을 0원으로 만들지만 경성교회는 번듯한 건물을 갖게 되었다. 이게 어찌된 일인지 물으니, 박 목사는 우리도 잘 모르겠다고 했다. 하나님의 선물일 수도 있고, 하나님의 시험일 수도 있다고. (사진 제공 경성교회)
 
해를 넘기면 재정은 0
 
구제와 선교, 장학에 재정 30%를 쓰고도 경성교회는 늘 돈이 남는다. 출석 교인 150여 명, 1년 재정 2억 원 규모의 작은 교회이지만 매년 적게는 500만 원에서 많게는 수천만 원까지 여윳돈이 생겼다. 아낄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아끼고, 무리하게 건축하려고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목사 사례비가 차지하는 비율도 다른 교회에 비해 낮은 편이다.
 
자신의 덩치를 키우려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한해가 지나면 재정 0원을 만드는 것을 중요한 원칙 가운데 하나로 설정했다. 경성교회 교인들은 어떻게 돈을 모으고 저금할까를 궁리하는 대신 남는 돈을 어디에 쓸까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8년 전 경성교회는 특별한 설문조사를 벌였다. 이 가욋돈으로 어떤 이들을 도와주면 좋을지 각자 의견을 모아 본 것이다.
 
150여 명의 교인들이 써낸 80여 가지 의견 가운데 10가지를 추렸다. 그리고 해마다 한 가지씩 실천해 오고 있다. 이름 하여 '5O 프로젝트'. '5'5의 배수다. 500만 원, 1000만 원, 2000만 원식으로 어려운 이웃에게 나눠 주자는 뜻이 담겨 있다. 그리고 알파벳 'O''Our nothing'. 베풀지만 관심과 영광은 우리의 몫이 아니라는 고백이다. 그래서 5O 프로젝트를 실천한 지 일곱 해가 지났지만 외부에 전혀 알리지 않았다.
 
매해 늦가을이면 경성교회는 흥겨운 제비뽑기가 열린다. 이듬해 펼칠 5O 프로젝트를 선정하는 것이다. 첫 해에는 홀로된 사모를 돕는 활동이 결정되었다. 목사인 남편이 암으로 돌아가고 식당에서 일하는 사모에게 1000만 원을 드렸다.
 
"제가 말하지 않았는데도 교인들이 홀로된 사모의 처지를 주목한 게 기특했습니다. 그런데 당사자는 더 놀라더라고요. 남편이 목회한 교회도 아니고, 연고가 있는 교회도 아닌데 어떻게 알고 도와주었는지 영문을 몰라 했습니다."
 
또 제주도에서 목회하던 목회자 한 분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그 가족을 위해 경성교회가 대신 적금을 들었다. 올해 1월 만기가 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자녀는 이제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다. 이 자녀의 학자금으로 620만 원을 전달했다.
 
해마다 수리가 필요한 농어촌 교회 리모델링 지원, 새터민 정착 지원, 미혼모 돕기 등을 펼쳤다. 몇 년 전에는 집에서 쫓겨나 고아원에도 가지 못하는 가출 청소년들이 살 집을 마련해주었고, 지난해에는 난치병 환자 수술비를 내주었다. 올해는 다문화 가정을 돕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남은 돈을 다 쓸까 고민합니다. 저나 교우들조차 모르게 이웃을 후원하고, 미자립 교회 빚도 갚아 주고. 어려운 처지의 이웃들을 돕는 즐거움, 돈 쓰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경성교회 같이 작은 교회가 이웃을 위해 써 봐야 얼마나 되겠느냐고 말할지 모릅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후원하는 500만 원, 1000만 원이 큰 교회에서 보면 별것 아니겠지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처지에서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일 수도 있다는 것을 저나 교인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하지 못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다른 곳과 비교하지 말고 우리에게 주어진 몫만큼만 최선을 다하자고 합니다."
 
경성교회가 이웃과 나누면서 붙든 말씀은 전도서 111절이다.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물 위에 떡을 던지는 심정으로 기부하고 돕는다. 나중에 도로 찾는 것은 하나님이 계획하실 일이고 우리가 기대할 바가 아니라고.
 
▲ 경성교회가 이웃을 돕는 교회로 성장한 배경에는 교인들이 든든하게 성장하였기 때문이다. (사진제공 경성교회)
 
팍팍 쓰고도 수십억대 건물 갖게 된 사연
 
2억 원이 조금 넘는 연 예산의 30% 이상을 늘 교회 밖을 위해 쓰고, 50%를 넘길 때도 여러 해 있었다. 그럼에도 지금 경성교회는 277평 규모의 2층 건물을 가지고 있다. 비록 재개발을 기다리는 '희망촌'이기는 하지만, 이후 뉴타운으로 재개발되면 종교 부지로 173평을 배정받는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경성교회는 25년 전 교회 건물이 없는 가정 교회로 시작했다. 5년간은 목회자 사례비도 책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서울 상계동의 한 상가에서 예배를 드렸다. 앞서 말한 대로 재정은 남김없이 다 쓰고 새해를 시작했고, 따로 건축 헌금을 작정하지도 않는다. 그래도 지금 수십억대 부동산을 소유한 교회로 커졌다.
 
부동산 투기를 하지 않고 가능한 일일까. 박 목사는 "우리는 그저 물 위에 떡을 던졌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여러 날 후 되찾게 하신 것"이라고 말했다. 마냥 자랑만은 아니었고, 수십억대 땅과 건물을 갖게 된 것에 대한 긴장과 두려움도 함께 배어 있었다.
 
경성교회가 경쟁률 높은 뉴타운 종교 부지를 선점(?)한 사연은 수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회에서 박 목사와 장로들은 건축과 관련한 토론을 벌인 적 있다. 교인은 물론 박 목사도 교회 건축에는 부정적이었다. 이러한 사정을 잘 아는 한 장로가 "경매로 넘어가는 어려운 처지의 교회가 있다면 선교하는 차원에서 우리가 사자"고 제안했다. 몇몇 예배당이 이단에 넘어간다는 뉴스가 나오던 터라, 이단에 넘겨주는 것보다는 낫다는 말에 교인들이 동의했다.
 
그래서 교회 이전을 준비하면서 상가는 내놓고 임시로 한국성서대학교(강우정 총장)의 강의실을 빌려 썼다. 마침 한국성서대와는 1999년부터 장학금과 학교 발전 기금 등을 기탁하며 협력 관계를 유지해 왔다. 경성교회는 지금까지 5000만 원이 넘는 돈을 한국성서대에 후원했고 박 목사는 한국성서대 대학평의회 부위원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한때 기숙사가 완비되지 않았던 성서대학의 학생 상당수도 경성학사에서 생활하면서 공부하는 혜택을 누렸다. 이러한 나눔이 새 터전을 찾는 경성교회에 임시 처소를 제공하는 베품으로 이어졌다.
 
경성교회는 성서대학에서 예배를 드리며 수년째 인근 교회당 중에서 경매 등으로 나온 물건이 있는지 살폈다. 일산이나 분당 등 신도시에는 많았지만 정작 서울 노원구 지역 교회는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다가 우연한 계기로 지금 경성교회가 들어선 예배당을 알게 되었다. 10여 년 전부터 상계동 달동네 10가정을 달마다 10만 원씩 후원해 왔는데, 이 가정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근처 교회의 처지를 듣고 소개받은 것이다.
 
그 교회는 이곳에 터 잡은 지 40년이 넘었고 한때는 70여 명이 모이던 교회였지만 주변이 재개발되면서 교인이 썰물처럼 빠져나가 10명도 채 모이지 않게 되었다. 갈수록 부채가 늘면서 부도 직전까지 내몰렸다. 경성교회가 이 교회의 부채를 청산하고 다른 곳에 예배드릴 공간도 마련해 주고, 이 교회 건물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투기나 합병과 같은 차원에서 접근하지 않았습니다. 무리한 건축도 원하지 않았습니다. 제 모 교회에서 교육관 건축 때문에 건축위원장의 기업이 부도난 걸 보았습니다. 저는 그런 전철을 밟고 싶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건축마저 어려운 교회를 구제하는 길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마침 도움을 원하는 교회를 만난 것은 하나님이 우리 길을 열어 주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빚지지 않고 후원 줄이지 않고 십일조만으로 건축하기
 
예배당을 인수하는 과정에서도 특별 헌금을 작정하는 일은 없었다. 건축 헌금을 하겠다는 사람을 막지는 않았지만, 기본적으로 십일조로 모든 건축 기금을 충당했다. 물론 이때도 교회 밖으로 최소한 30%를 지원하고, 5O 프로젝트가 우선이었다. 무엇보다 건축과 같은 일로 부채를 지지 않는다는 원칙도 고수했다.
 
지금은 재개발이 되면 대지 170여 평 안에 교회 건물을 지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몇 년 뒤에는 적지 않은 돈이 들어갈 테고, 지금부터 미리 비용을 마련해 놓아야 한다. 경성교회도 준비하고 있다. 그렇다고 선교와 구제 활동을 줄이거나 건축 헌금을 종용하는 일 따위는 없다. 더 적극적으로 외부 후원 활동을 펼친다.
 
기존에 30여 미자립 교회와 선교지 후원 외에도 매년 네 교회를 특별 선정해 후원하고 있다. 이 교회들에는 한 교회에 150만 원씩 600만 원을 지원한다. 그리고 해당 교회 목회자를 주일 예배(오후 예배가 아님) 설교자로 초빙한다. 올해 2월에는 의정부에 있는 한 교회 목사가 와서 설교했고, 3월 첫 주에는 서산의 한 교회 목사가 설교했다. 그냥 돈만 오가는 사이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서로의 소망을 나누는 사이가 되기를 바랐다고 박 목사는 말했다. 교구별로 후원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데, 이렇게 하면 훨씬 자세하고 꼼꼼하게 기도할 수 있어 좋다는 말도 곁들였다. 박 목사는 후원을 받는 교회에서도 '아 이렇게 작은 교회인데도 우리를 기억하고 돕는구나' 하는 교감이 일기를 기도한다고 했다.
 
사정이 이러하니 새로 지을 교회 규모는 클 수가 없다. 2층 규모의 아담한 교회당을 짓겠다고 박 목사는 밝혔다. 교인 300명이 넘지 않는 교회가 되도록 하겠다고 선언한 마당이니 건물은 이 규모에 맞추어 지으면 된다. 교인 수가 300명을 넘어가면 자신이 제대로 목회하기 힘들다고 판단했다. 그러자면 자꾸 교인이 늘어나면 안 되기 때문에 더 힘들고 불편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게 박 목사의 지론.
 
한국교회 85%의 희망이고 싶다
 
경성교회 교인이면 주일 오후 성경 공부는 거쳐야 할 필수 과정이다. 예배 시간이 한 시간을 넘지 않는 것에 비하면 성경 공부가 오히려 비중이 큰 편이다. 이후 다락방 모임과 플록 모임에서 제자 훈련과 사역 훈련을 거친다. 이후 박 목사와 일대일 교육과정이 기다리고 있다.
 
경성교회 교인들은 봉사만 하는 게 아니라 때가 되면 설교자로도 나서야 한다. 특히 새벽예배는 제자 훈련과 사역 훈련을 마친 교인이면 누구나 서야 하는 자리다. 화요일과 목요일만 박 목사가 설교하고 나머지는 모두 교인들이 설교한다. 설교자와 설교 본문은 예배부에서 4개월 전 미리 발표한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새벽 예배 설교자로 강단에 선 교인은 이후 수요일 밤 예배 때도 설교하고, 다섯째 일요일에는 아예 주일 낮 예배 강단에서 설교해야 한다.
 
박 목사는 교인들을 강하게 훈련했다고 자부했다. 일요일 낮 예배 때 설교까지 할 정도면 다른 무슨 일이든 못 하겠느냐고 했다. 또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교인들이 목사가 교회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몸으로 알아 가기를 원했다. 목사가 시키는 대로만 움직이는 교회가 아니라 주체적으로 나서는 교인이 되어 달라는 것이다. 이것이 힘들고 불편하면 다른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 된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교인들은 자신들을 불편하게 하는 교회가 좋다고 고백한다.
 
실제로 박 목사는 한동안 교회를 떠난 적 있다. 교인들이 24개월 동안 안식년을 주어 미국에서 공부하고 오도록 보냈다. 박 목사 가족 전체가 24개월 동안 미국에서 생활했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 돌아왔을 때 교인들은 더 성숙해져 박 목사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다.
 
"제가 원했던 교회는 큰 교회가 아니라 건강하고 튼튼한 교회였습니다. 한국교회의 85%가 작은 교회입니다. 85%의 희망이 되고 싶었습니다. '저렇게도 목회할 수 있구나, 저렇게 십일조 헌금만으로도 건축할 수 있구나, 건물이 아니라 교인이 성숙한 교회로 성장할 수 있구나'. 생각에만 있는 교회가 아니라 현실에서도 가능한 교회이고 싶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한 발씩 더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재일 / <마르투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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