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 독립운동에는 개신교의 적극적인 참여와 많은 희생이 있었다. 동시에 이 운동의 진상을 해외에 알리는 일에는 국내 개신교 선교사,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뉴욕과 필라델피아의 한인과 한국친우회, 그리고 샌프란시스코의 국민회가 긴밀하게 협조하였다. 1919년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 한국의 독립운동을 홍보하고 일본의 만행을 알리는 데는 선교사들의 현장 보고서와 편지, 특히 스코필드와 언더우드와 만주에서 서울을 경유하여 미국으로 돌아가던 미군 YMCA 총무 조지 글리슨이 촬영한 사진이 큰 역할을 했다. 상해임시정부는 선교사들을 통해 비밀리에 입수한 사진들을 편집하여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라는 사진 소책자를 출판하여 전 세계에 알렸다. 그 한 부가 뉴욕유니언신학교에 보관되어 있는데 다음 웹사이트에서 그 사진들의 일부를 볼 수 있다.

http://www.columbia.edu/cu/lweb/digital/collections/cul/texts/ldpd_7705012_000/

▲ 상해임시정부 발행 소책자 표지, 1919. (사진 제공 옥성득)

▲ 첫 페이지. (사진 제공 옥성득)

▲ 미국영사관 건물에서 거리로 나오면 만세를 부르는 서울 시민과 학생들, 1919년 3월 1일. (사진 제공 옥성득)

▲ 덕수궁 앞 만세 시위 군중. (사진 제공 옥성득)

▲ 일본 헌병의 칼에 왼팔을 잃고 세브란스병원 간호원의 간호를 받는 시위 참여자. (사진 제공 옥성득)

 

다음은 제암리 학살 사건 이후 제암리 마을의 사진으로서, 비슷한 5~6장의 사진이 1919년 북장로회 선교부 연례 보고서, 세계선교평론 등의 잡지에 실려 세계 여론을 환기시켰다. 일제는 교회와 여러 채의 가옥을 불태웠고 피해 주민들은 한동안 쌀 배급으로 연명했다.

▲ 제암리에서 집과 남편을 잃은 과부. (사진 제공 옥성득)

1919년 5월 Literary Digest에 실린 글을 소책자로 재출판한 'More Light from Korea'에 실린 사진은 1919년 당시 기독교인을 처형한 사진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그 사진은 1908년 전라도 지역 의병 처형 장면이다. 올해 독립기념관에서 이 자료를 공개하면서 이 사진을 1919년 사진으로 소개한 것은 수정해야 한다.

▲ 미국에서 발간된 삼일운동 소개 소책자, 1919년 6월. (사진 제공 옥성득)

선교사들은 평화적인 독립 시위운동을 무력으로 탄압한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고, 10년간의 무단 통치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새 총독 사이토가 부임하자 선교회공의회(회장 밀러)는 시정 전반에 걸쳐 개선책을 건의하고 기독교 전도, 의료, 교육, 문서 전반에 걸친 정책의 수정을 요구했다. 한편 밀러는 파리위원부의 서기 황기환에게 건의문 원본 전문을 몰래 보내어 프랑스와 영국 등에 배포하도록 했다. 국내에서 발간된 공의회 건의문보다 40%가 더 긴 이 원본에는 무단 정치에 대한 강한 비판이 담겨 있다. (그 원본과 번역문은 옥성득 편역, <밀러 총무 서신>, 대한성서공회, 2012에 실려 있다.) 선교사들은 1910년대의 정교분리와 친정부 노선을 크게 수정하지는 않았지만, 삼일운동을 계기로 비인도주의적 탄압과 종교적 자유 억압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목소리를 높이게 되었다.

옥성득 / UCLA 한국기독교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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