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천국에 대하여 설명할 때 비유를 즐겨 사용하셨다. 비유가 아니면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고 표현할 정도였다(막 4:34). 예수님께서 비유를 즐겨 사용하신 이유는 예수님께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주제 자체의 특성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아직 경험하지 못한 영적인 실재인 천국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이미 우리가 경험해 본 것에 빗대어 설명하는 방법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비유를 통해서만 겨우 영적인 실재인 천국을 조금 빗대어 알 수 있을 것이다.

비유에 있는 그 자체의 특성 때문에 비유는 종종 이해보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때가 많다.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마 24~30)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비유 속에서 주인이 말한다. "가만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마 13:29)." 이 말씀에 따라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에서는 교회 내에 존재하는 가라지(거짓 신도)를 뽑아내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망설이곤 한다. 가라지를 뽑다가 알곡(참신도)마저도 뽑히게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하지만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를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성경 다른 곳에서는 영들을 다 믿지 말고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고 권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요일 4:1),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거짓 신도들을 분별하여 출교시키라고 권고하고 있기 때문이다(고전 5:13). 성경은 교회 내에서 범죄를 저지르는 자들이 있을 때 권고하여 회개하는 것을 도울 것이지만, 만일 회개하지 않는다면 출교시켜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마 18:15~20).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는 추수 때가 되기 전까지 밭에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것처럼, 이 세상도 종말 심판 때가 되기 전까지 천국의 아들들과 악한 자들이 공존하는 것이라는 점을 비유로 전하고 있다. 우선 천국의 아들들과 악한 자들이 공존하는 곳은 교회라는 곳이 아니라, 이 세상이다(마 13:38 밭은 세상이다). 그러니까 이 비유는 교회 안에 악한 자와 신도가 함께 공존해도 손을 쓸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비유가 아니라, 세상 끝 날이 되어 심판의 때가 되기 전까지 하나님께서 악한 자들을 심판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시는 것을 설명하는 비유이다. 만일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를 예로 들면서, 교회 안에서 죄악을 악의적으로 저지르는 사람들을 출교시키거나 치리하지 말고 그냥 놔두어야 한다는 의미로 사용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교회에는 끊임없이 가라지와 같은 자들이 안으로 들어오게 되어 있다. 때로는 양의 옷을 입었지만 속은 노략질하는 이리들과 같은 거짓 선지자들도 생긴다(마 7:15). 심지어 그 거짓 선지자들은 귀신을 내어 쫓기도 하고 말씀도 아주 파워풀한 메시지를 선포하기도 한다(마 7:22~23). 우리는 갈라디아 교회가 그랬던 것처럼 거짓 사도들의 가르침에 쉽게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된다(갈 3:1).

물론 교회 내에서 징계를 남발하고 치리를 남발하는 것은 성경적인 정신이 아니다. 성경적인 정신은 어떻게 해서라도 잘못을 행한 한 영혼이 주님께 돌아오고 회개하도록 도와서 영적으로 회복되게 하는 데 있다. 우리는 모두 죄악에 쉽게 넘어지는 성품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실수하게 되어 있고, 죄를 저지르게 되어 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는 그날이 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죄를 저지르는데도 그냥 내버려두면, 결국 그 영혼은 멸망하고야 말 것이다. 하지만 권고와 징계를 통해서 한 영혼이 회개하게 하여 주는 것이 교회의 책임이다. 교회의 존재 목적은 그렇게 우리가 거룩하게 성화하도록 돕는 것이다. 그런 성화를 돕지 못하는 교회라면 교회의 기능을 상실한 이름뿐인 교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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