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교회의 한 청년이 신학대학원 입학을 위한 당회장 추천서를 받으러 왔다. 그래서 그 청년을 앉혀 놓고 이야기를 했다. 목회자의 길로 들어서기 위해는 하나님께서 나를 목회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내적인 소명에 대한 확신도 필요하지만, 정말 내가 그런 길로 가도 좋은지 공동체적인 평가를 통해서 외적인 소명에 대한 확인도 필요한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진지하게 정말 내가 그 길을 가야하는 것인지 다시 한 번 고민해 보라고 했다.

장로나 집사가 되기 위해서는 교인들이 투표를 통해 그 사람의 자격 여부를 심사하는 제도가 있는 반면, 목사의 길로 들어서는 길에는 그런 확인 장치가 없다는 것이 모순처럼 보인다. 누구든지 목사가 되고 싶다면, 성적에 의해 신학교에 들어가 목사가 되는 과정을 밟아 목사가 되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정말 어떤 사람이 목회자가 되려면 그런 은사가 있는지 평가를 받는 일은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지난 주 수요일에 설교를 하면서 나는 앞으로 신학교 입학을 위한 추천서를 함부로 써 주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추천서를 쓰기 전에, 과연 지원자가 목사가 될 은사를 가지고 있는지 이런 저런 방법으로 확인한 후에 추천서를 써 줄 예정이니 많은 협조를 바란다고 공언했던 것이다.

이제 갓 부임한 담임목사로서 그 청년이 우리 교회 청년인 것을 알지만, 과연 그 청년이 목회자로서 적합한 것인지는 알 기회조차 없었다. 그래서 교회에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이 지원자에 대해서 내가 아는 것이 전무하다고 쓸 수밖에 없었고, 짧은 기간이지만 내가 느낀 바에 대해서 그런대로 긍정적인 표현을 섞어 가며 나름대로 최선의 추천서를 써 주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청년에게 심각하게 도전했다. 정말 이 길을 가는 것이 옳은 것인지 진지하게 또 한 번 고민해 보라고. 종교개혁 직전의 타락한 중세 시대처럼, 오늘날은 성직자로 넘쳐나고 있다. 또 한 사람이 진지한 고민 없이, 넘쳐나는 성직자의 대열에 들어가는 것을 막고 싶었다. 진지하게 고민한 후에, 비록 부족하지만 목회자로서의 은사를 가졌다 생각한다면 힘들더라도 그 길을 가야 하는 것이고, 만일 그런 은사가 없다면 아무리 성적이 좋아서 합격 통지서가 오더라도 가지 말아야 한다고 말해 주었다.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은 목사가 되지 않고서라도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이라는 교훈과 함께….

간단히 추천서만 받을 줄 알고 왔다가 내 방에서 오랫동안 훈계를 듣고 고민과 함께 내 방문을 나서는 그 청년의 뒷모습을 보면서, 한편으로 걱정스러운 생각이 스친다. 내가 이렇게 권면한 결과는 무엇일까? 그런대로 괜찮은 인재들은 내 말을 듣고 목회자의 길로 들어서기를 중단할 가능성이 많은 반면, 정말 목회자가 되어서는 안 될 사람들은 이런 진지한 충고도 듣지 못한 채 목사의 길로 들어서는 결과를 빚어 버리는 것은 아닐까?

내가 그 청년에게 바라는 것은 목회자의 길로 가는 것을 중단하는 것이 아니다. 은사가 있다면, 힘들더라도 굶더라도 그 길을 가야 한다.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서라도 가야 한다. 다만 정말 그런 은사가 조금이라도 있는지 진지하게 확인해 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런 외적 소명에 한 확인 없이 주관적인 내적 소명만 따라 목사가 된다면, 자신에게도 불행할 것이지만 교회도 큰 손해를 입을 것이 분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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