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선명 통일교 총재가 떠났습니다. 9월 3일 새벽 6시쯤, 미국에 있는 기자가 사망 소식을 전해 준 문자를 보고 잠에서 깨기 무섭게 편집장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청심국제병원으로 가라." 기자 중에서 가장 남쪽에 사는지라 좀 더 북쪽에 사는 기자가 가면 안 되겠느냐 물었지만, 답은 "네가 가라, 가평."

택시 타고 통일교 성지인 경기도 가평 청심타운으로 내달렸습니다. 두 시간 더 걸려 차를 타고 마침내 청심타운에 도착. 입구에 들어서자 정면에 보이는 산 중턱에 하얀 궁이 선명했습니다. 천정궁이라는 건 나중에 알았지만, 가장 중요한 장소임은 한눈에 알 수 있었죠. 다른 건물들도 높고 컸습니다. 도로도 제대로 닦이지 않은, 버스도 몇 시간에 한 대 오는 산속 깊은 곳에 이런 으리으리한 시설들이 있으리라고는 예상치 못했습니다.

일단 청심국제병원으로 갔습니다. 벌써 주요 언론사 카메라와 차량이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북적댈 거라는 예상과 달리 여기저기 눈에 띄는 기자들 말고는 병원이 조용했습니다. VIP 병실로 갔습니다. 한학자 통일교 공동총재의 사진과 함께 일어로 된 병원 광고가 곳곳에 있었지만, 병실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이미 문 총재의 시신이 천정궁으로 옮겨진 뒤였습니다. 문 총재는 병원 8층에 지어진 특별 병동에 있었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았습니다. 병원 엘리베이터도 7층까지만 있어 8층은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천정궁으로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걸어서 갈 수 없는 거리였는데, 택시도 없었습니다. 통일교 직원들은 어차피 궁에 들어가지 못한다며 말렸습니다. 취재도 취재지만 그래도 묘하게 가고 싶었습니다. 아침에 천정궁에서 창밖을 바라보면 구름 위에 떠 있는 것 같다는 직원의 말과 터의 기운이 세서 1년에 세 번은 문 총재가 직접 방문해 기를 눌렀다는 지관의 글, 흰색 대리석으로 지은 바로크양식 건물이 저를 궁으로 이끌었습니다.

무조건 걸었습니다. 나름 예의를 갖추려고 위아래로 맞춰 입은 검은 옷이 원망스러울 정도로 햇볕은 뜨거웠습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가던 길에 서서 차를 태워 달라고 손을 흔들었습니다. 생애 첫 히치하이크. 저를 태워 준 사람들은 일본인 통일교 신도 두 명이었습니다. "아버지가 계신 곳에 간다." 두 사람은 물기 어린 눈으로 저를 바라봤습니다. 문 총재를 자연스레 "아버지"라 부르는 그들의 대화가 어색했습니다.

궁에 도착하니 관계자가 막았습니다. 일본인 신도 두 명은 기도하고 먼저 내려갔습니다. 저는 양해를 구하고 의자를 얻어 입구 근처에 앉았습니다. 궁은 훨씬 크게 보였지만, 여전히 멀었습니다. 궁으로 휙휙 들어가는 검은 세단과 공사 차량을 부러워하며 몇십 분을 망연히 궁을 보다 내려왔습니다. 내려올 때도 통일교 신도 차를 얻어 탔습니다. 개신교계 언론사 기자임을 밝히자, "잘 써 달라"는 부탁이 돌아왔습니다.

호들갑스러웠던 저와 달리 청심타운은 조용했습니다. 장례를 치르는 청심평화월드센터에서만 장례 준비로 바쁜 직원들이 눈에 띄었을 뿐입니다. 공식 일정은 3일 뒤에나 시작된다기에 청심타운을 나섰습니다. 갈 때는 비포장이었던 길이 임시 포장도로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장례식을 앞두고 급히 길을 냈다는 택시 운전기사의 말을 들으며 가평을 떠나니 잠시 다른 세상에 있다 나온 기분이었습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요. 저는 통일교 성지 겉면만을 보고 왔습니다. 신도 몇몇과 대화했지만, 깊은 대화는 아니었습니다. 이단 심장부에 와 있다는 묘한 기분과 조용한 산속에 현대식 건물이 즐비한 부자연스러운 청심타운의 분위기만 느끼고 왔을 뿐입니다. 이단이라 외면했던 통일교가 어떻게 성장하고 어디서 그들의 세상을 만들고 있는지 너무도 몰랐습니다. "기독교 언론 <뉴스앤조이>가 통일교를 다루는 이유가 뭐냐"고 따져 묻는 독자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그냥 어색하고 불편하다는 생각만으로 그들을 내버려 두었을 때, 저들은 산속에서 전 세계 1만 명이 찾아오는 왕국을 건설했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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