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복음주의자들의 왜곡된 열정

가. 메가처치는 복음주의 교회다

이제 메가처치 현상을 다룰 때 가장 민감한 주제 중 하나인 메가처치와 복음주의와의 관련성에 대해서 다룰 차례다. 우리는 앞에서 메가처치 현상을 추동하는 추진력 중 하나로 하나님나라의 확장 욕망을 다루었다. 이 욕망과 상당히 유사하면서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서로 다른 추진력 하나를 우리는 복음주의 운동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 추진력은 메가처치 현상을 추동하는 가장 강력한 추진력 중 하나이면서, 동시에 메가처치 현상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는 가장 강력한 방어기제다. 이러한 복음주의적 방어기제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메가처치 현상의 본질을 직시하지 못하고 있다.

여기서 먼저 메가처치 현상과 복음주의와의 연관성을 살펴보자. 미국의 경우를 보면, 독립 교단을 포함해서 남침례교, 침례교, 하나님의 성회, 연합 감리교, 그리스도의 교회, 갈보리 채플 등 거의 모든 교단에서 메가처치가 발견되고 있다(Thumma & Travis, 2007: 27).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들 메가처치 중 95%가 복음 전도를 매우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중 58%는 복음 전도를 교회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활동 중 하나라고 강조하고 있다(Thumma, Travis, and Bird, 2005). 교단이나 신학적 전통이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메가처치는 거의 한결같이 복음 전도를 강조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메가처치를 복음주의적(evangelical) 교회라고 부를 수 있다고 본다.

메가처치 교인들에게 그들 교회의 신학적 노선이 어떤 것이냐고 묻는 질문에 대해서도 근본주의(2%), 오순절(8%), 은사주의(8%), 절충주의(7%), 전통주의(5%), 구도자 중심주의(7%), 기타(7%)라고 답한 것에 비해 복음주의라고 응답한 비율은 무려 56%나 되었다(Hartford Ins.). 바로 이러한 이유로 오랫동안 복음주의 신학을 연구해 온 로버트 웨버(Robert Webber)는 메가처치 현상을 '실용적 복음주의'라고 부른다(Webber, 2010: 26).

복음주의는 개신교회의 동의어가 아니다. 복음주의(evangelicalism) 운동은 종교개혁보다 한참 뒤에 생겨난 신앙 운동으로서 전체 개신교회 전통 중 하나(a)일 뿐이다. 그런데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확대되고 있는 메가처치 현상이 개신교회 중에서도 이 복음주의 전통에 속한다고 하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것은 당연한 결과다. 왜냐? 복음주의는 무엇보다 복음 전도를 강조하는 신앙 운동이고 복음 전도를 강조하다 보니 교회가 성장했고 교회가 성장하다 보니 메가처치가 된 것이니 말이다. 다른 무엇보다도 복음 전도를 강조하는 복음주의 전통에서 메가처치 현상이 가장 강력하게 출연하게 된 것은 어찌 보면 역사적 필연이다.

그리고 이것은 통계를 통해서도 확인될 수 있다. 튜마와 트레비스의 연구에 따르면 성장률이 0인 메가처치의 경우 적극적으로 복음 전도를 하는 신도는 전체 교인 중 19.4%에 불과했지만, 성장률이 100% 이상인 메가처치의 경우 적극적 복음 전도층은 전체 교인 중 64.7%에 달했다(2007: 159). 그러니까 복음 전도를 하는 교회는 성장하고, 하지 않는 교회는 성장하지 않거나 성장이 미미하다는 말이다. 당연한 결과 아니겠는가. 하여 메가처치 현상을 추동하는 가장 강력한 추진력은 복음 전도에 대한 최우선적 강조로부터 나온다고 보는 것은 논리적 필연이다. 그래서 메가처치는 복음주의 교회다.

여기서 우리는, 앞에서 필자가 메가처치의 개념을 설명했던 것에 또 다른 하나의 개념이 추가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된다. 즉 앞글에서 필자가 논하는 메가처치란, '1970년대 이후 비교적 최근에, 전 세계적으로 급작스럽게 등장한, 여러 면에서 전체 교회에 광범위한 영향력을 미치는, 개신교회 전통의, 그중에서도 복음주의 성향을 띄고 있는, 지역 교회'이다.

복음 전도에 대한 최우선적 강조는 가톨릭교회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개신교회만의 독특한 특징이다. 바로 이 점이 개신교회와 가톨릭교회 모두 하나님나라 확장이라는 중세적 선교 신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메가처치 현상이 개신교회에서만 주로 나타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해서 필자는 하나님나라 확장의 욕망과 복음주의자들의 열정을 굳이 구별하여 따로 살펴보려는 것이다.

나. '복음주의'라는 용어에 대한 간단한 설명

필자가 쉽게 복음주의(evangelicalism)라는 용어를 들먹이고 있기는 있지만 사실 이 용어만큼 정의하기 애매한 용어도 드물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너무도 다양한 의미로 복음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복음주의는 지난 300년간 굉장히 다양한 행태로 모습을 변모해 왔다. 18세기 대각성 운동과 함께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고전적 복음주의 운동은 19세기와 20세기 초반에는 근본주의 논쟁과 휘말리면서 양상이 조금 달라졌다. 그러다가 20세기에 들어서면서는 무척 빠르고 역동적이며 다양하게 모습으로 변모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복음주의는 여러 얼굴을 가지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아예 복음주의라는 용어를 폐기하자는 주장이 나올 정도다(Dayton & Johnson).

영어로 복음주의는 이벤절리컬리즘(evangelicalism)이고, 이벤절리즘(evangelism)은 복음 전도를 뜻한다. 이벤절라이제이션(evangelization)은 복음화로 번역되지만 자주 복음 전도(evangelism)와 혼용해서 쓴다. 지금 필자가 문제 삼는 것은 evangelicalism, 즉 복음주의이다. 여기서 복음주의를 사용하는 용례 몇 가지만 살펴보자.

종교개혁자들은 복음주의적(evangelical)이라는 말을 성서적(biblical)이라는 말과 유사하게 사용했다. 그래서 그들은 제도와 제의를 강조하는 가톨릭교회에 맞서 올바른 성서의 가르침을 선포하는 개신교회를 복음주의적 교회(evangelical church)라고 불렀던 것이다(김회권, 2011). 이와 유사하게 로버트 웨버는 복음주의를 역사적으로 봤을 때 올바른 성서의 가르침으로 되돌아가려는 모든 형태의 신앙 부흥 운동이라고 본다(2010). 즉 교회사 속에서 올바르게 성서의 가르침을 깨닫고 선포해 왔던, 그리하여 교회를 개혁하고자 하는 모든 시도를 복음주의적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복음주의적이라는 말은 진리 자체와 거의 동의어다. 이 때문에 복음주의라는 용어는 종종 자신들의 입장을 정당화하려는 이들에 의해 사용되는 괜찮은 수식어가 되곤 한다.

그런가 하면 복음주의는 특정 신학적 노선을 지칭하기 위해서 사용되기도 한다. 특히 복음주의 신학 노선은 다분히 보수적이고 정통적인 것이 특징이다. 예컨대, 회심주의와 행동주의(전도 및 선교 강조), 성경주의, 십자가 중심주의라는 복음주의 4대 특징은 회심과 전도에 대한 강조를 제외하면 근본주의 신학 노선과 겹친다. 그래서 복음주의는 종종 약간 완화된 근본주의적 신학 노선을 지칭할 때 사용되는 용어다. 특히 복음주의가 성서 권위에 대해서 높은 견해를 가진 점 때문에 복음주의는 성서 영감설을 지지하는 보수적 신학 노선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복음 전도에 대한 책임을 강조하기 때문에 가끔은 웨슬리적 신학 노선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혹자는 복음주의를 20세기 초반 미국에서 있었던 근본주의와 자유주의 간의 논쟁에서 중도적 입장을 택한 이들을 일컫기 위해서 사용하기도 한다. 특히 1925년에 있었던 스콥스 재판(Scopes Trial)에서 근본주의가 대패한 후 지성적이고 합리적인 신앙에 대한 요구가 생겨나고, 또 칼 헨리(Karl Henry)가 1947년에 <복음주의자의 불편한 양심>(2009)에서 고백한 사회적 책임에 대한 부담감을 도외시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런 정서를 공유한 일군의 그리스도인들이 출현하게 된다. 이들은 근본주의와 자유주의를 절충한 이들처럼 보였는데, 이러한 형태의 중도적 입장을 한 사람들을 '신복음주의자(new evangelical)'라고 부르게 된다(Webber, 49). 특히 미국 복음주의자 협회(NAE)의 조직, 풀러신학교의 설립, <크리스채너티 투데이>의 창간, 걸출한 복음주의자 빌리 그래함(Billy Graham)의 등장으로 신복음주의는 사실상 복음주의 운동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리고 이 운동은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 자신들의 신앙을 '로잔 언약'이라는 형태로 명문화하기도 했다. 1980년대 이후 한국에 복음주의라는 용어가 유행하게 된 것도 바로 이 신복음주의의 영향이다.

이상의 용법 외에도 복음주의는 사람마다 다양한 의미로, 어떤 이는 심각하게, 어떤 이는 별 의미 없이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이 글에서 필자는 복음주의라는 용어를 '복음 전도(evangelism)를 대단히 강조하는 입장', 경우에 따라서는 '복음 전도를 다른 모든 것들보다 최우선적인 과제라고 보는 입장'을 지칭하기 위해서 사용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마태복음 28장 18~20절을 가장 위대하고 긴급한 그리스도의 지상명령(the great commission)이라고 부르는 전통과 연관이 있다. 이 전통은 땅 끝까지 이르러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교회와 신자의 '가장 중대하고 긴급한' 사명이라고 믿어 왔다. 필자는 이 전통을 통째로 복음주의 전통이라고 묶어서 보고자 한다.

메가처치 현상은 바로 이러한 복음주의의 전통을 잇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즉 메가처치 현상은 복음 전도의 강렬한 열망에 의해 추동되고 있는 교회다. 메가처치 현상을 단순히 성공주의나 자본주의의 결과물로 보는 것은 메가처치 현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만들고, 정확한 비판도 할 수 없으며, 그 비판이 제대로 작동하지도 못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메가처치 옹호론자들은 메가처치를 비판하는 이들에게 늘 '복음 전파라는 위대한 지상명령을 수행하는 교회'를 함부로 비판하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기 때문이다. 즉 그들의 복음주의적 이데올로기는 모든 비판자들의 입을 틀어막는 강력한 방어기제다.

그 때문에 메가처치 현상을 분석할 때 바로 이 복음주의와의 연관성을 살펴보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메가처치 현상을 더욱 객관적으로 고찰하고 비판할 수 있기 위해서는 메가처치 현상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복음주의 전통에 대해 정확히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다. 복음주의자들의 왜곡된 열정

복음주의자들은 교회 역사상 가장 뜨거운 열정을 소유한 그룹 중 하나일 것이다. 우리는 요한 웨슬리가 비행기나 자동차, 철도도 없는 시대에 자그마치 40만 km를 여행하며 복음을 전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조지 휫필드도 영국과 신대륙의 뉴잉글랜드를 오가며 수 만 명씩 운집하는 집회를 인도하고 다녔다. 윌리엄 캐리는 비기독교 지역이던 인도에 온 가족을 끌고 들어가 아내와 자녀들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평생을 인도 선교를 위해 헌신했다. D. L. 무디는 낮은 학력에도 불구하고 1871년 시카고 대화재를 겪은 뒤 영혼에 대한 무한한 부채 의식 때문에 두려운 마음으로 평생 복음 전파를 위해 헌신했다. 학생자원운동(SVM)에 참여했던 수많은 전도유망한 학생들은 전 세계에 복음 전하는 일을 위해서 자신들의 창창한 미래를 기꺼이 포기했다.

이들 고전적 복음주의자들의 열정은 20세기 위대한 복음주의자 빌리 그래함(Billy Graham)으로 이어져 내려오는데, 빌리 그래함 전도협회(BGEA)의 창설, 잡지, 라디오, TV, 영화, 위성방송 등을 통한 복음 전도,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한 번에 100만 명이 넘는 초대형 전도 집회 개최 등 초인적 역사를 이루게 했다. 이들 복음주의자들의 숭고한 열정은 놀라운 것이어서 절로 고개를 숙이게 한다.

메가처치는 바로 이 열정을 이어받은 교회다. 실제로 메가처치 목사들 중에는 영혼을 향한 순수한 사랑이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수 없는 뜨거운 열정의 소유자들이 적지 않다. 그들은 여러모로 고전적 복음주의자들의 후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이 복음주의자의 후예라는 사실을 숨기려 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영혼을 향한 뜨거운 열정이 있다는 것, 복음에 대한 무한한 사랑, 그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불타는 열심 등을 기꺼이 드러낸다. 메가처치 목사들을 비롯해서 현대 복음주의자들이 교회 성장을 '부흥'이라고 곧잘 부르는 것도 18~19세기 고전적 복음주의 운동에 대한 일종의 향수를 드러내는 것이다.

특히 복음주의자들이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내세우는 '지상명령' 이데올로기는 그들에게는 금과옥조와도 같은 것이다. 사실 그들이 복음을 전하는 데 쏟아 왔던, 나아가 메가처치를 만들기 위해서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왔던 그 모든 열심과 열정은 바로 이 지상명령 이데올로기로 정당화된다. 마태복음 28장 18~20절,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명령과 사도행전 1장 8절,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주님의 유언은 결국 복음주의자들의 열정을 끊임없이 불러일으키는 원천이며, 또한 그들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방어기제다.

특히 여기서 도날드 맥가브란의 교회성장학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나라의 확장이라는 중세적 선교신학과 지상명령이라는 고전적 복음주의자들의 이데올로기를 교회의 성장으로 재해석해 낸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나라를 확장하는 것, 그리고 주님의 지상명령을 온전히 수행하는 것은 곧 교회를 성장시키는 것과 동의어다. 맥가브란의 영향은 대단히 광범위한 것이어서 오늘날 교회 성장을 그리스도의 지상명령과 분리시킬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교회성장학자들은 말한다. 이 땅에 있는 모든 교회들이 성장을 위해 매진한다면 세계 복음화는 가장 효율적으로 달성될 수 있을 것이라고. 이것은 일종의 각개전투 전략이다. "이 땅의 모든 교회와 신자들이여! 그대들의 교회나 성장시키라! 이것이 지상명령에 순종하는 최상의 길이요, 세계 복음화의 가장 효과적인 길이다." 이러한 전략은 결국 교회와 신자들로 하여금 자기네 교회를 무한히 성장시켜도 되는, 아니 그래야만 하는 명분을 제공했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성장을 통해 여러 가지 부대 이익을 얻고자 하는 목회자와 교인들의 은밀한 탐욕과 야망을 정당화시켜 주었다.

교회 성장은 이중의 선(善)이다. 교회 성장을 통해 돈과 명예와 힘을 얻어 큰일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선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회 성장이 주님께 순종하는 최상의 길이기 때문에 진짜 선이다. 자, 그렇다면 누가 성장을 마다할 것인가? 교회성장학과 만난 실용적 복음주의 운동은 이제 교회와 신자로 하여금 무한 성장을 향해 질주하도록 독려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 바로 메가처치 현상이다.

라. 복음주의의 역사적 한계

그렇다면 이러한 복음주의자들의 열정이 왜 문제인가? 그들이 숭고하고 뜨거운 열심으로 메가처치를 만든 것이 도대체 왜 문제라는 것인가? 문제는 이것이다. 복음주의자들의 숭고하고 뜨거운 열정이 지성적 진지함을 결여한 채 거의 맹목적으로 추구되다 보니 여러 왜곡된 결실을 맺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왜곡된 결과 중의 하나가 바로 메가처치 현상이라는 것이다. 해서 메가처치 현상을 제대로 관찰하고 비평할 수 있기 위해서는 복음주의자들의 지성적 태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지성적 태만은 어떤 것들이 있으며, 어떤 왜곡된 결과를 낳았단 말인가?

먼저 복음주의자들의 금과옥조, '지상명령'이라는 것에 대해서 살펴보자. 윌리엄 캐리 이후 복음주의자들은 마태복음 28장 18~20절을 교회와 신자가 그리스도께로부터 위임받은 가장 크고 중대한 명령(the great commission)이라고 믿어 왔다. 더 나아가 복음주의자들은 이 본문, 즉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를 읽을 때 온 세상으로 나아가서 선교하라는 해외 선교 명령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본문이 의미하는 바가 정말 그러한가? 데이빗 보쉬는 이에 대해서 꽤 상세하게 논증했는데, 그에 의하면 기존의 복음주의자들은 마태복음 종결부를 마태복음 전체의 맥락에서 떼어낸 채 해외 선교를 촉구하는 슬로건으로 왜곡시켰다고 한다. 마태복음 종결부는 마태복음 전체의 내용이 압축되어 나타난 핵심 본문이기 때문에 마태복음 전체의 맥락에서 분리할 수 없다. 마태복음 전체의 맥락에서 본문을 읽으면 몇 가지 중요한 해석의 수정이 생긴다.

먼저 본문은 해외로 '가는 것(going)'에 방점을 두고 읽어서는 안 된다. 마태는 산상설교로 대표되는 예수의 교훈을 '가르치는 것(teaching)'에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또 복음주의자들은 본문을 불신자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는 전도명령으로 이해하고 있지만 마태는 이 명령을 제자 공동체 내 신자들을 가르치고 훈련하라는 뜻으로 명령하고 있다. 또 복음주의자들은 본문을 근거로 소위 '지상명령'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새 계명'이 분리된 것처럼 얘기하지만 본문에 나타난 마태의 사상은 이 둘이 하나라는 것이다(2009: 101~140).

그렇다면 본문은 선교에 대한 내용이 아닌가? 그렇지는 않다. 마태복음 종결부를 선교 본문으로 읽는 것은 타당하다. 아니 마태복음 전체가 선교 문서다. 그 때문에 본문을 '지상명령'으로 별칭하는 것도 유효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의미하는 내용은 기존의 복음주의자들이 의미하는 것과는 크게 다른 것이다. 여기서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마태복음 종결부가 복음주의자들이 이해하는 방식의 선교 본문이 아니며, 그래서 메가처치를 이루라는 식으로 이 본문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까지 본문은 메가처치가 교회 성장을 독려하기 위해 가장 즐겨 사용하는 선교 본문 중 하나다. 바로 이것이 복음주의자들의 지성적 태만 중 하나다.

우리는 또한 복음주의자들의 소위 복음 전도 방법에 대해서도 고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복음주의를 비판적으로 고찰하기 앞서 우리는 먼저 복음주의자들의 공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대릴 구더(Darrel Guder)의 말대로 근대 복음주의자들이 '복음 전도(evangelism)'라는 용어를 다시 살려 내기까지 신약성서에서 자주 발견할 수 있는 이 용어는 거의 1700년 동안이나 잊혀 있었다(2005: 42).

하지만 복음주의자들은 용어를 회복한 만큼 신약시대의 전도 방법까지 온전히 회복하지는 못했다. 보쉬가 말한 대로 복음주의자들의 복음 전도는 신약성서에서 영향을 받았다기보다는 계몽주의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복음주의자들에게 있어서 대단히 익숙한 전도 방법, 곧 개인 전도, 영혼 구원, 내세에 대한 소망 등은 신약성서의 것과는 차이가 크다.

먼저 개인 전도를 살펴보자. 복음주의자들에게 있어서 구원은 개인적인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늘 이렇게 묻는다. "당신은 구원받으셨습니까?" 구원받지 못한 개인이 있다면 복음주의자들은 그에게 다가가서 그에게 복음을 들려주고, 그의 개종을 설득한다. 종종 복음주의자들이 대규모 전도 집회를 개최하기도 하지만 그런 경우에도 복음은 개인에게 들려져 개인적인 구원을 얻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러한 복음주의자들의 개인 전도는 개인이 자기 운명과 신앙의 결정권자라는 계몽주의적 인간관을 반영하고 있다(2009: 411).

보쉬가 힘주어 강조하듯 신약교회 교인들에게 있어서 구원이란 결코 분리된 개인들에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었다(2009: 232). 신약교회는 어떤 식으로 전도했는가? 초대교회 역시 개인에게 다가가 그의 실존적 결단을 요청하기는 했다. 하지만 신약교회는 그 개인으로 하여금 궁극적으로 종말적 공동체로 들어오라고 초청했다. 종말적 공동체란 뭔가? 그건 하나님나라의 완성이 지금 교회 공동체 가운데 맛보기로 주어졌다는 뜻이다. 즉 교회는 하나님나라의 표지며, 먼 미래에 있을 하나님나라가 현재 속에 선취(先取)된 것이다. 하여 구원은 세상 질서를 떠나 지금 이 땅에 존재하는 하나님나라 공동체로 들어가는 것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을 바울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말로 구원을 설명했던 바울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두 번째로 영혼 구원이라는 말을 살펴보자. 영혼 구원이란 구원이 일어나는 장소가 영혼이라는 뜻(영혼에서의 구원)이기도 하고 구원받는 대상이 육체가 아니라 영혼이라는 뜻(영혼의 구원)이기도 하다. 그중 첫 번째 의미인 영혼에서의 구원이라는 말은 종교개혁의 제1명제 '이신칭의(以信稱義)'를 지나치게 협소하게 적용한 결과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데, 믿음이란 결국 개인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어떤 작용이라고 본 것이다. 물론 믿음에 대한 견해는 조금씩 다를 수 있다. 정통주의자들은 정통 교리에 대한 바른 지식을, 신비주의나 경건주의자들은 초월적인 종교적 경험을, 웨슬리안들은 개종의 결단을 믿음이라고 본다. 하지만 결국 이들 모두는 믿음을 내면에서 일어나는 내면적인/심리적인 어떤 것(something psychological)으로 본다.

하지만 신약교회에서 믿음은 내면적인 것을 포함하지만,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측면 역시 포함하는 것이었다. 존 요더(John Yoder)는 예수라는 존재가 신약교회 신자들에게 얼마나 정치적인 인물이었는지를 훌륭하게 논증하고 있다(2007). 예수를 따르는 믿음은 예수를 정치적 주군(Lord)으로 믿고 충성하는 것을 포함한다. 따라서 게르하르트 로핑크(Gehard Lohfink)의 말대로 신자들의 모임인 교회(ecclesia)는 '공개적인 모임'이면서 '정치적 민중 집회'일 수밖에 없었다(1985: 128). 로핑크는 다른 책에서 그는 초대교회 신자들이 스스로를 기존 질서와 대조를 이루는 시민들의 사회, 곧 societas civilis로 인식했다고 말했다. 교회를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했을 때에도 이는 교회가 그 자체로 특정 국가의 국민이라는 정치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1990: 162~164).

하지만 복음주의자들이 기독교 신앙을 순수하게 개인적인 것이고, 또한 그의 내면에 일어나는 심리적인 어떤 것으로 제한시켜 버림으로써 사회적, 정치적 차원은 거세되고 말았다. 이것은 대릴 구더가 반복적으로 지적한 축소주의(minimalism)의 폐해다. 이러한 축소주의적 구원관 덕분에 복음주의자들은 나중에 개인 구원과 사회참여를 조화시켜야만 하는 과제를 떠안게 되었다. 로잔 언약(The Lausanne Covenant)이 둘 모두를 강조하기는 했으나 그러한 식의 종합은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으며, 복음주의는 여전히 사회참여 없는 영혼 구원만을 주장하는 비실제적 종교 그룹의 모습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또 한 가지는 복음주의자들의 구원관이 대체로 죽어서 들어가는 천당이라는 개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복음주의자들이 전해 왔고 지금도 전하고 있는 복음은 현세와의 관련성을 거의 상실한 내세에 대한 약속이 주요 내용이다. 그 때문에 구원이란 육체가 아니라 죽은 뒤 영혼이 받는 것이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간결한 구호가 잘 보여 주듯 복음이란 내세 천국, 지옥 면피가 주요 내용을 이룬다. 특히 고전적 복음주의자들이 전했던 복음 메시지의 많은 부분은 내세의 지옥에 대한 공포스러운 묘사로 할애되었다.

우리는 그 대표적인 모델을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의 유명한 설교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진노한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죄인들'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면서 무시무시한 지옥의 광경을 실로 박진감 넘치게 묘사했다(2004). 인간은 무시무시한 유황불 아래로 떨어지기 직전에 간신히 하나님의 은총의 밧줄에 매달려 있는 것과 다름없는 운명이다. 하지만 마침내 하나님의 인내가 다 해서 하나님의 보호가 철회되면 죄인은 무서운 화염 속으로 곤두박질칠 것이라는 설교는 수많은 사람들을 공포에 떨고 회개하게 만들었다.

하기야 이러한 유의 지옥 설교가 어디 에드워드뿐이랴. 조지 휫필드, 찰스 피니, D. L. 무디 등 수많은 복음 전도자들은 그들의 복음 전도의 내용의 상당 부분을 더욱 현실감 있고, 보다 공포스럽게 지옥의 광경을 묘사함으로써 회개를 촉구하고, 복음을 믿도록 요구했다. 하지만 이것은 일종의 공포 마케팅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복음주의자들의 공포 마케팅이 실은 중세 교회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는 사실이다.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 나오는 아놀(Arnall) 신부의 지옥 설교는 고전적 복음주의자들의 지옥 설교와 차이가 거의 없다(2004: 161~226). 이는 복음주의자들의 구원관이 중세 1000년간 유지되어 왔던 내세관에서 연옥만을 제거한 것 위에 기초해서 세워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복음주의자들의 역사적 한계는 교회론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복음주의자들에게 있어서 교회란 무엇인가? 그것은 개인들의 총회일 뿐이다. 여기서 개인이란 개인적으로 구원받은 신자들을 말하는데, 개혁주의 전통에서는 완전한 신자들의 총회는 천상에 존재하는 비가시적 교회다. 따라서 지상의 교회는 알곡과 가라지가 섞여 있는 상태다. 그러니 교회는 말 그대로 군중이다. 군중과 교회는 딱 하나만 다르다. 설교와 성례전이 있으면 군중이 교회가 된다. 교회의 공동체적 특성이나 자질은 교회를 위한 필연적 조건이 아니다. 설교와 성례전만이, 아니 사실상 설교만이 교회를 이루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따라서 교회에서 설교와 성례전(사실상 설교만)이 없다면 교회와 군중에는 하등의 차이가 없다.

교회를 개인의 집합으로 보는 개인주의적 교회관은 교회가 개인의 구원과 필연적 연관성이 없기 때문이다. 교회는 다만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구원을 준비시키는 정도만 할 뿐이다. 어차피 구원은 믿음으로 말미암고,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 구원을 개인적으로 받는다는 복음주의자들의 구원관에서 교회는 중요하지 않다. 물론 복음주의자들은 교회가 신자가 구원을 잃지 않도록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고 항변할지 모른다. 하지만 복음주의자들은 교회가 종말적 하나님나라 공동체라는 신약시대의 교회관을 알지 못한다.

여기서 우리는 메가처치를 위한 신학적 초석을 보게 된다. 메가처치를 용납하는 많은 이들은 '크기는 중요하지 않다'는 말을 앵무새처럼 되뇐다. 교회가 클 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다. 메가처치는 교회의 여러 크기 중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이 가능한 이유는 교회를 단순히 군중으로 보기 때문이다. 교회가 군중이라면 교회의 크기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만일 교회의 크기가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면, 그리고 맥가브란의 말대로 자기 교회를 성장시키는 것이 지상명령의 수행을 가장 효율적으로 수행하는 길이라면, 그리고 또 만일 불신자를 전도해서 개종시키는 것이 교회와 신자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지상명령이라면, 교회가 메가처치를 추구하는 것을 도대체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설혹 메가처치의 크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 하더라도 복음주의 프레임 내에서 교회 성장의 한계를 어디까지 설정할 수 있겠으며, 메가처치를 분산시켜야 한다고 말할 때 그 정당한 근거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만일 교회 성장이 하나님나라 확장의 가장 직접적이고 단순한 표현이라면 메가처치 목사가 돈과 권력과 성(性)적으로 좀 모범이 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또 메가처치 목사가 필요 이상의 명예와 존경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메가처치를 이루기 위해서 혼신의 노력을 다해 온 그들의 공로를 대체 누가 무슨 수로 폄훼한단 말인가?

바로 이것이 필자가 메가처치 현상을 강력하게 추동하는 두 번째 내적 추진력이라고 부르는 것의 대략이다. 메가처치 현상은 복음주의자들이 지성적 태만으로 자신들의 역사적 한계를 올바로 통찰하지 못한 채 무작정 주님을 위해 열심을 낸다고 노력해서 생겨난 결과다. 따라서 복음주의자들의 열정이 아무리 선하고 희생적이고 숭고하다고 해도 지식을 결핍한 열정 탓에 필연적으로 왜곡된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었다.

참고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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