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메가처치의 내적 추진력을 좀 더 자세히 분석해 보자. 메가처치는 성장이 이끄는(growth-driven) 교회다. 메가처치는 의식적으로든 아니면 무의식적으로 성장을 환영하고, 축하하며, 지향하고, 매진하는 교회다. 성장을 향한, 그것도 한계를 넘어서 무한히 성장하는 추진력은 메가처치의 가장 중요한 특성 중 하나다. 그리고 이러한 성장을 향한 추진력은 메가처치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곳의 모든 교회들 속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특성이기도 하다. 이러한 점에서 성장을 향한 추진력은 현대 교회의 보편적 특성이기도 하다.

1) 하나님나라 확장의 욕망

현대 교회 안에 장착되어 교회로 하여금 성장하도록 끊임없이 추동하는 엔진을 살펴보면 여기에 끊임없이 공급되는 연료가 있으니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중세적 선교신학이다. 여기서 말하는 중세적 선교신학이란 이교도 왕국의 정복을 통해 하나님나라를 확장하려는 시도와 이것을 선교라고 보는 중세적 관점을 말한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제도적 교회가 곧 하나님나라라는 관점이 있어야 한다.

하워드 스나이더(Howard Sneider)는 그의 책 <하나님나라의 모델>에서 여러 가지 하나님나라의 모델을 유형론적으로 보여 준다. 여기에서 그는 제도적 교회를 하나님나라와 동일시한 중세적 하나님나라 모델을 정리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오거스틴(Augustine) 이후 중세 교회는 제도적 교회를 하나님나라와 동일시하게 되었다고 한다. 중세인들은 하나님께서 가톨릭교회 안에서 그리고 가톨릭교회를 통해서 이 세상을 통치하신다고 믿었으며, 이것을 현재적 하나님나라로 보았던 것이다(1999 : 117~32).

교회를 현재적 하나님나라로 보았던 중세인들은 더 나아가 교회의 지배를 받는 영역을 그리스도의 왕국(Christendom)이라고 간주했다. 중세 유럽은 교회가 세속 왕국을 다스리는 독특한 2층 구조의 사회였는데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교황이 다스리는 모든 영역, 곧 교회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세속적인 영역도 그리스도의 왕국이라고 간주되었다. 반면에 이 그리스도의 왕국에 속하지 않는 이교도들은 '그리스도인의 적들(adversus christianos)'로 간주되었다. 그리스도의 왕국과 이교도 왕국 간의 갈등과 대립, 그리고 전쟁은 필연적이었다. 중세인들은 전쟁을 통해 이교도의 정복을 선교라고 여겼다. 하여 중세의 선교는 왕이 무력을 통해 수행하는 일종의 전쟁이었다(Bosch, 2009 : 350).

이러한 중세의 선교신학은 세계를 기독교 진영과 비기독교 진영으로 나누고, 선교를 비기독교 진영에 대한 정복, 내지는 기독교화(Christianization)로 여기는 호전적 선교신학이었다. 이러한 호전적 선교신학은 중세뿐만 아니라 현대에 이르기까지 아직도 유지되고 있다. 이 선교신학은 샤를마뉴(Charlemagne)가 색슨족을 강제 개종시켰을 때부터 시작하여, 4~11세기의 강제적 유대인 개종, (다소 논란의 소지가 있지만) 십자군 전쟁에 이르기까지 중세의 선교 전쟁의 배경이 되었다(Bosch, 2009 : 350~3). 뿐만 아니라 이러한 선교신학은 가톨릭교회에 의해 먼저 시작된 식민지 정복에도 영감을 주었다. 잉카(Inca), 타이노(Taino), 아즈텍(Aztec) 문명 등의 파괴와 정복은 복음 전파 및 기독교 선교라는 미명하에 자행되었다. 이러한 정복적 선교신학은 개신교회도 그대로 답습했다. 체로키 원주민들에 대한 청교도의 강압적 종교 정책은 그 대표적인 예다(조찬선, 2000 : 86~87).

특히 19세기 개신교 선교는 종종 선교지의 토착 문화를 파괴하고, 서구 문화와 문명을 이식하는 문화 제국주의로 타락하곤 했다. 적지 않은 개신교 선교사들은 탐험가나 무역 상인의 뒤를 쫓아다니며 선교지를 찾아가서는 그곳 토착민을 기독교로 개종시키고, 유럽 문화를 전수하는 것을 선교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행위를 과거 중세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나라의 확장으로 이해했다(임희국, 1998).

전 세계를 기독교화하는 것은 세계를 복음화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지상에 하나님나라가 임하게 하는 종말론적 목표다. 그리고 이것은 정확히 중세적 선교신학의 반영이다. 서구의 팽창주의와 구속사관이 기묘하게 결합된 존 모트(John Mott)의 유명한 선교 구호, '우리 세대에 세계 복음화를'은 이같은 정복적 선교신학의 현대적 형태라고 할 수 있다.

현대 개신교 선교 전략의 상당 부분은 이러한 중세적 선교신학의 토대 위에 수립되고 있다. 예컨대, 세계를 복음화 지역과 비복음화 지역으로 구분하는 도식이라든지, 위도 10도와 40도 사이의 아시아 및 아프리카 지역에 초점을 맞추어 그려진 10/40창(ten-forty window), 세계인을 부족 단위로 분류하고, 이를 다시 전도 종족과 미전도 종족으로 분류하여 수립한 미전도 종족 선교 등은 중세적 선교신학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기억해야 할 것은 오늘날 문화 제국주의로 비판을 받고 있는 전통적인 선교 행위들은 당시에는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충성이요, 하나님나라의 확장을 위한 헌신적인 희생으로 여겨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나름의 순수한 종교적 열정 때문에 서구인들은 극악한 살상과 파괴 행위를 아무런 죄책감과 거리낌도 없이 자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러한 살상과 파괴를 통해 사탄이 다스리는 이교 세계를 하나님나라로 바꾸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중세적 혼돈이 자리 잡고 있음은 물론이다. 여기서 혼돈이라 함은 제도적 교회와 하나님나라를 혼돈하고, 개종과 하나님나라의 복음 전파를 혼돈하고, 종교의 확대와 하나님나라의 확장을 혼돈한 것들을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혼돈은 20세기 교회성장학자들에게서도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하워드 스나이더는 교회의 성공, 성장, 능력을 하나님나라의 실재에 대한 가시적 증거라고 여겼던 중세적 착각이 현대 교회성장학자들에게서도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비판한다. 예컨대, 피터 와그너(Peter Wagner)는 교회와 하나님나라를 완전히는 아니어도 부분적으로 일치시킴으로써 교회의 성장을 하나님나라의 확장과 연결시킬 수 있었다고 지적한다. 결국 이러한 관점으로 인해 회심자의 증가는 하나님나라의 확장에 크게 기여할 수 있는 길이라는 믿음이 정당화될 수 있게 되는 것이다(1999 : 127).

물론 피터 와그너와 같은 교회성장학자들은 나름대로 교회 성장과 하나님나라의 확장을 완전히 일치시키지 않기 위해서 애를 쓴다. 하지만 하워드 스나이더가 잘 지적한 대로 "교회 성장 옹호자들은 사실 교회의 양적인 성장을 하나님나라 확장의 최전선으로 보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하나님나라의 핵심적인 표징이라고 보고 있다(1999 : 128). 이러한 혼돈은 대단히 광범위하게 나타나는데 예컨대 도날드 맥가브란(Donald A. McGavran)도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것'과 '교회를 세우는 것'을 '하나님나라를 확장하는 것'과 병행해서 사용하고 있다(1993: 67). 이러한 혼돈은 일반적이고 통속적 차원에서는 대단히 심각하게 나타나는데, 일반 신도와 비전문적 목회자들의 경우, 교회의 확장을 하나님나라의 확장과 거의 완전히 동일시하는 일들이 나타나게 된다.

이 문제를 다룰 때 교회성장학의 창시자 도날드 맥가브란은 특별히 주목해야 할 인물이다. 왜냐하면 그는 현대 목회자와 선교사들로 하여금 무엇보다 교회 성장을 추구하라고 설득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교회 성장을 복음 전파의 결과 내지는 부산물로 보는 관점을 비판하고 이를 뒤집는 데 성공한다. 그는 교회 성장을 복음 전파의 결과요, 이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지 않는 태도를 '탐색의 신학'이라고 명명하고, 이를 부분적인 진리요, 불건전하며, 비효과적이고, 하나님의 뜻과 배치된다고 주장한다(1993: 67~69).

탐색의 신학에 반대하여 그는 '추수의 신학'을 제시한다. 그의 일관된 주장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무엇보다 최우선적으로 교회 성장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 성장은 단순히 복음 전파의 결과나 부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적극적으로 지향되고 추구되어야 하는 우선 목표다. 왜 교회 성장이 이루어지지 않는가? 교회 성장을 고려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 성장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결국 복음 전파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교회의 성장을 위해서, 그리고 복음 전파를 위해서 교회 성장은 먼저 추구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탐색의 신학이 말하는 복음 전파와 교회 성장의 선후 관계를 뒤바꾸어 놓았다. 탐색의 신학이 교회 성장은 복음 전파의 결과라고 믿는다면 맥가브란은 교회 성장을 먼저 고려할 때 비로소 복음 전파도 제대로 이루어진다고 말했던 것이다(1993 : 130~31).

이러한 맥가브란의 주장은 메가처치 현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를 제공한다. 현대 메가처치 현상의 근저에는 교회를 성장시키고자 하는 강력한 열망이 자리 잡고 있으며, 이 열망은 성공을 향한 세속적 열망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나라의 확장을 위한 경건한(?) 열망도 함께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곧 개종자의 수를 증가시키고, 교회를 성장시키는 것이 하나님나라를 확장하는 것이며,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는 것이라는 인식은 현대 교회를 성장이 이끄는(growth-driven) 교회로 만든 주원인이다. 교회 성장은 선택하거나 선호하는 옵션이 아니라 반드시 순종해야 하는 의무이기에 교회는 성장을 향해 매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경건한 열망이 메가처치 현상을 추동하는 강력한 동력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추동력은 도덕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메가처치뿐만 아니라 소위 건강한 메가처치라고 할 만한 곳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될 수 있는 것이다. 나아가 비메가처치에서도 교회를 성장시켜서 하나님나라를 확장하겠다는 열망은 동일하게 존재함을 알 수 있다. 크거나 작거나, 교단 불문하고 각 교회마다 걸려 있는 세계지도는 교회 성장을 통해 하나님나라를 확장시키려는 열망의 투사다. 또한 세계 복음화라든지, 세계를 품는 세계 비전이라든지 혹은 월드 크리스천과 같은 수사들 역시 하나님나라의 확장에 대한 뜨거운 열정의 표현이다.

이 뜨거운 열정들이 모여 교회 성장이라고 하는 대단히 실제적인 과업으로 분출되고 있다. 교회성장은 하나님나라의 확장이다. 하나님나라의 확장을 누가 반대할 것인가? 하나님나라의 확장의 당위성은 그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형태의 선교와 교회 성장을 정당화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정당화가 메가처치 현상을 추동하고 있다. 그 때문에 메가처치 현상은 단순히 도덕적 판단의 문제나 지엽적인 실천신학의 문제가 아니다. 메가처치 현상은 성서신학적이고, 조직신학적이며, 역사신학적, 선교신학적인, 대단히 복합적이고 심오한 문제인 것이다.

참고 목록

임희국. (1998). '블룸하르트(아들)의 선교 이해' <선교와 신학>. 107-30.
조찬선. (2000). <기독교죄악사 (상)>. 서울 : 평단문화사.
Bosch, David. (2009). <변화하는 선교>. 김병길 & 장훈태 역. 서울 : 기독교문서선교회.
McGavran, A. Donald. (1993). <교회성장의 이해>. 전재옥, 김종일, 이요한 역. 서울 : 한국장로교출판사.
Sneider, Howard. (1999). <하나님나라의 모델>. 이철민 & 이승학 역. 서울 : 두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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