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기사는 6월 5일부터 7월 24일까지 매주 화요일 진행하는 김진호 목사의 책 <시민 K, 교회를 나가다> 출판기념 강좌 중 세 번째 강의 원고를 요약·정리한 것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강좌를 통해 만나 볼 수 있습니다. - 편집자 주

1960년에서 1990년 사이 한국교회는 세계적으로 전례 없는 대성장을 이룩했다. 지난 강의에서는 그 대성장의 양상을 두 가지로 논하였다. 하나는 이른바 '순복음 현상'이고, 다른 하나는 '빌리 그레이엄 현상'이다. 전자는 한국식 부흥회 운동이라고 할 수 있고, 후자는 미국식 부흥회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전자는 주로 이농하여 도시 빈민으로 편입된 기층 대중의 신자화 현상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빠른 산업화 과정에서 부상한 도시 중산층의 신자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 성장을 살펴볼 때 기억해야 하는 또 하나의 양상이 있다.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교회의 분열'이 성장을 촉진했다. 이미 1950년대부터 교회의 분열은 시작되었다. 지난 두 번의 강의에서 살펴보았듯이 누군가를 증오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배타성과 파괴적 욕망이 식민지 시대와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시기에 한국기독교의 심성을 사로잡아 버린 결과다. 전쟁 직전부터 견해가 다른 이들을 용공이니 친일이니 이단이니 하면서 타협할 수 없는 적으로 간주하며 갈등하다, 1951년 장로교에서 첫 번째 분열이 있었고, 1953년 두 번째 분열이 있었다. 이런 분열은 점점 고조되어 1959년과 그 후 몇 년간 장로교만이 아니라 개신교 전체를 망라하는 분열들이 잇따랐다. 세계교회협의회(WCC) 가입을 둘러싸고 교단마다 둘로 나뉜 것이다. 여기서도 이단이니 용공이니 하는 협상불가의 적대적 언술이 끼어들었다. 그리고 1970년대에는 무수한 군소교단의 분열이 계속되었다. 여기서도 상대를 향한 독한 비난과 증오의 표현이 난무했음은 물론이다.

이렇게 한국교회의 대성장의 역사는 동시에 교회분열의 역사이기도 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교회의 분열은 성장을 촉진했다. 분열된 교단 간에 사생결단의 교세 경쟁이 벌어진 것이다. 이것은 한국교회의 파행적 성장의 한 측면을 보여준다. 서로 간의 증오와 갈등, 그리고 분열이 성장을 촉진했다. 그것은 한국 개신교가 사랑의 종교로서 성숙할 수 없었던 주된 이유의 하나가 된다.

그런데 분열은 의도하지 않은 데서 한국교회의 성숙에도 기여했다. 그것은 신학과 사회선교가 이 시기에 눈부시게 성장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교단 간의 분열이 경쟁을 촉진하는 과정에서, 교단별로 신학에 대한 투자를 크게 확대했다. 그것은 상대를 신학에서도 압도하여 제압하려는 욕구가 반영된 결과다. 하지만 그 시기는 교회들이 성장을 위해 전력하느라 신학의 내용에 주목하지는 못한 시기였다. 즉 투자는 확대했으나 신학의 내용에 간섭하지는 않는, 학문으로서는 최적의 상황을 만난 것이다.

많은 젊은 신학도가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교수가 되었다. 신학교들에 갑자기 현대적 신학들이 소개되고 독창적인 해석들이 시도되기 시작했다. 이른바 한국 신학의 황금기가 도래한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학문과 사회선교의 발전에 또 다른 청신호가 있었다. 7년마다 개최되는 세계교회협의회 총회는 회기마다 거의 1만 편에 달하는 논문과 보고서들이 제출된다. 신학자들과 사회운동가들이 제출하는 문서다. 그 중 일부는 세계 신학자와 선교사, 목회자의 주목을 받아 7년간 세계 여기저기서 주목할 만한 것으로 소개되고 토론된다. 이른바 거대한 세계적 학문 시장이 만들어진 것이다. 더욱이 그 시장은 세계의 빈곤문제, 정치․경제적 갈등 문제 등이 고도로 활성화된 담론의 장이었다.

군부독재 아래서 인권과 시민권의 유린이 심각하던 한국사회는 그 자체로 주목의 대상이었다. 다종교가 공존하는 종교 다원성 사회라는 점도 한국 사회가 세계의 관심을 받는 또 다른 이유였다. 그런 점에서 한국 신학자들과 기독교 사회운동가들은 비교적 손쉽게 세계 신학계의 주목을 받을 수 있었다. 그것은 한국교회와 신학 그리고 기독교 사회선교 등이 서구 교회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일부 신학자들에게 세계 신학 무대에서 연구하고 활동할 기회를 선사했다. 이런 이유로 한국의 신학과 기독교 사회운동은 황금기를 맞이했고, 그 중심에 세계화에 성공한 한국의 진보적 신학과 신학자들, 그리고 사회선교 지도자들이 있었다.

급속한 성장기를 맞은 한국교회의 절대다수는 정치적으로나 신학적으로 보수주의에 깊게 경도되어 있었다. 더구나 그 기조는 대단히 공격적이었다. 적이 발견되면 결단코 철저히 파괴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정도의 공격적 파괴성으로 무장한 보수주의자들이 교회의 지도자였던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시기에 한국의 진보적 신학과 진보적 기독교 사회운동가들은 이렇다 할 교회의 통제 없이 연구와 활동에 매진할 수 있었다.

다수의 보수주의자와 소수의 진보주의자, 그들은 그다지 성숙하게 공존할 수 있는 논리를 갖추고 있지 못했고, 그러한 협상의 기술이나 품성을 가질 기회를 누리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 시기는 좌와 우가 공존했고, 서로 어느 정도 인정했다.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조건들이 이 시기를 규정짓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공존은 당시 한국개신교의 성장과 성숙의 기반이 되었다.

김진호 /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시민 K, 교회를 나가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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