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환경에서 비롯된 질병들

대도시 중심의 생활구조로부터 모든 사회적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중에 질병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대도시는 인간이 건설한 생활주거공간입니다. 과학과 건축공학의 공로로 각종 구조물, 건축물과 아파트, 빌딩들이 지어졌습니다. 이런 인위적인 공간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살도록 의도하신 설계와는 다른 주거공간입니다. 따라서 우리 몸은 거기에 따라 부분적인 적응적 진화를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만든 설계는 요지부동입니다. 따라서 각종질병은 필수적으로 수반되기 마련입니다. 즉 제품을 용도와 다르게 사용하다 망가지는 것과 같은 이치인 것입니다. 각종 전자기기들은 우리들의 생활을 편리하게 빠르게 생활하도록 하게 합니다. 자동차의 눈부신 발달로 전국이 일일생활권이 된지 오래 되었습니다. 의료시설의 현대화와 생명공학의 발달로 난치병의 정복이 코 앞에 온 것처럼 호들갑을 떨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기대는 마치 신기루처럼 여겨집니다. 인간이란 언제나 저 잘남의 오만으로 흥분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자신이 설계하신 창조질서를 거스른 인간의 행위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밤에는 자고 낮에는 일하게 하신 창조질서의 원칙은 변하지 않습니다. 낮에는 자고 밤에 활동하는 사람들 중에 건강한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이렇게 창조질서에 어긋나게 행동하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이상적인 병적증상이 나타납니다. 이런 예는 우리가 평소 생활하는 주위에 수없이 반복되고 있지만 우리는 미처 인식하지 못하고 그저 생활의 편리함과 문명의 진보란 꿀물 속에서 심취돼 있기만 합니다. 새로운 질병이 나타나면 진보된 생명공학이 해결해 줄 것이라는 기대감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 기대가 황우석 교수 주도의 사기극을 낳게 한 것입니다.

성인병과 난치병의 발병, 각종 사고가 일상화된 현재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지 병원의 고객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제 어디를 가나 병원간판이 눈에 띕니다. 이는 그만큼 환자들이 증가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현재 병원에 입원하고 있는 대부분의 환자들은 전염병환자들은 거의 없고 거의가 근골격계, 대사성, 순환장애성 관련 내과, 정형외과, 신경외과, 암과 관련된 환자가 대부분을 차지할 것입니다.

이렇게 환자가 된 것은 대개가 우리들의 생활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정형외과는 거의가 교통사고환자입니다. 자동차가 단순한 운송수단이 아니라 우리 몸을 다치게 하는 흉기로 변질된 셈입니다. 식생활의 서구화와 가공식품으로 인해 대사 장애와 순환장애선 질병들로 입원하는 환자들은 증가하고만 있어 결국 병원과 의사만 돈 벌게 하여 학력고사 점수 결과의 양극화를 낳기도 합니다.

이렇듯 질병을 가져오게 하는 원인으로는 따지고 보면, 고비용의 돈이 지출되는 생활구조에서 비롯된 것임을 잘 알 수가 있습니다. 더 자세히 이야기 한다면 주거공간과 운송수단과 식생활의 서구화 등의 모든 면에서 고급화, 사치화의 생활구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살아가는데 적합한 환경은 지금과 같은 인위적인 환경과 먹을거리가 아닙니다. 자연과 가까이 살면서 자연이 사시사철 생산하는 푸른 열매와 채소와 곡식을 먹을거리로 허용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의 죄성으로 인해 하나님의 선한의도를 외면하고 죄성이 극대화된 오만한 문명의 바벨탑을 쌓으며 멸망의 길로 가고 있는 것이 인류역사와 문명의 진보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병 주고 약 주는 사회구조

여기서 저는 왜 ‘병 주고 약 주는 사회구조 속에서 순응해서 살아야만 하는갗하는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자기 백성들이 건강하게 살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창조하신 자연환경을 거스르지 않고 생태적으로 산다면 병원신세를 지지 않고도 살아가도록 창조하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문명화된 죄성은 우리를 건강하게 살아가도록 허용하지 않습니다. 편리함의 구조가 일상화되고 중독이 된 도시공간속에서 탈출하기란 순교하기보다도 어려운 달콤한 쾌락이 반복되는 공간입니다. 이런 중독 구조 속에 살아가도록 우리는 세뇌당하며 하나님의 창조모습을 스스로 파괴시키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우리 몸을 각종 난치병과 불치병으로 황폐화시키고 있습니다.

현대 크리스천들은 두 가지 종교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교이고 또 하는 질병을 고치는 병원교입니다. 즉 의사를 우리를 질병에서 구원할 자라고 믿고 있습니다. 과거는 사제와 의사의 영역이 통합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나누어진 셈입니다. 아무튼 우리들은 죽어도 병원에서 죽으면 여한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손들은 부모가 집에서 죽는 것 보다 병원에 가서 치료받다가 죽으면 자손으로 할 일은 대했다는 죄책감을 감해주는 주는 것이 병원이 주는 심리적 성역이기도 합니다.

현대의학은 이제 우리에게 우상의 수준으로 일착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건강을 돈으로 실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조금만 이상하다 싶으면 병원 가서 진단하고 주사 맞고 약 먹는 믿음의 실천이 이상하지 않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교통사고나 심한 외상이 아닌 질병은 민간요법이나 대체요법을 가지고 어지간한 것은 치료가 가능한 것도 있는데 무조건 병원으로 달려가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원인을 알고 치료는 지혜롭게 하는 것도 좋습니다. 현대의학의 장점과 대체의학의 장점을 접목하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양·한방 협진 시스템일 것입니다.

무엇이든 초기가 중요합니다. 화재도 초기진화가 중요하듯이 초기에는 대부분 작은 노력과 스스로 할 수 있는 영역이 많습니다. 부뚜막 위에 소금을 스스로 넣으면 되는데 의사에게 넣어 달라고 하는 어리석음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지혜는 저절로 습득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 꾸준한 연구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작은 교회와 농어촌교회가 연합할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고비용의 의료시스템 사슬고리에 해방될 수 가 없습니다.

고비용 사회구조에서 저비용 사회구조로

문명의 진보란 것도 따지고 보면 고비용의 가속화를 촉진하는 지본주의 진보이기도 합니다. 경제학에서 보면 인간이 움직이는 모든 행위에는 비용이 발생합니다. 따라서 고급 두뇌의 행위에는 그만한 고비용의 부가가치가 발생하기 때문에 천문학적인 연봉이 주어지는 양극화라는 불합리한 사회구조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또한 질병의 진보도 문명의 진보와 비례해서 진보하기 마련입니다. 새로운 의학이론과 최첨단의료기기로 진단하고 치료하므로 고비용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의 영양학적, 예방의학적 등의 각종조건의 개선으로 수명이 연장되어 초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었지만 노후대책에 들어가는 비용이 만만치 않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초 고령화 사회에 접어든 우리나라입니다. 지금 정부에서는 초비상이 걸려 있습니다. 노후대책비용이 수억이 소모된다고 하니 또 하나의 걱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에 해당되는 국민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것은 바로 진보하는 자본주의의 고비용을 고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을 고비용으로 살아가도록 허용하지 않으십니다. 그렇게 믿는 건 그건 일종의 불신앙입니다. 하나님이 만든 창조질서의 원칙은 무비용이지만 지금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단지 차선책으로는 저비용의 노후생활은 가능합니다. 이런 프로그램을 한국교회가 감당하여야 합니다.

이렇듯 질병도 고비용의 원인으로 인해 발생하고, 질병의 치료도 고비용의 의술로 치료하고 있는 것이 현대의학의 모습입니다. 바야흐로 요람에서 무덤까지 고비용으로 태어나고 고비용으로 죽어가는 것이 현대자본주의의 실상입니다. 사람들이 병이 나거나 사고가 나면 일단 병원으로 갑니다. 그곳에서 치료받고 완쾌되기를 원하면서 고비용의 병원비를 지불합니다. 물론 어찌할 수 없어서 그럴 겁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고 맞습니다. 병이 나고 팔다리가 부러지면 병원에 가야 합니다. 거기서 치료를 받고 완쾌하여야 합니다.

현대의학의 진보에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그래서 현대의학의 긍정적인 부분을 인정합니다. 그렇지만 그건 너무나도 고비용이라는 것입니다. 수명은 자꾸만 연장되어지는데 건강하게 수명이 연장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한 가지 이상의 질병을 가지고 늙어가기 때문에 고비용의 의료비 지출은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 정부도 개인도 가족도 현실적 딜레마가 있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아기를 낳을 때 거의가 자연분만으로 집에서 낳지만 산업화와 도시화에 비례해서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역행하는 문명의 일반화로 지금은 아기를 낳을 때 당연히 병원에서 입원하여 낳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존중할 때는 무비용(저비용)으로 아기를 낳지만 역행할 때는 고비용으로 아기를 낳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떤 것이 지혜롭고 현명한 삶이겠습니까. 지금은 자연분만은 상상하지도 못할 것입니다. 아득한 원시인이나 조상들의 먼 이야기로 느낍니다.

이런 고비용의 질병원인 유발과 고비용의 질병치료 결과의 모순을 없애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회복하고 자연의 생태적인 환경을 지키고 우리 몸이 원하는 주거공간과 식생활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런 사명을 교회가 감당하여야 하는데 극히 일부목회자에 한하여 인식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래서 저는 자연자원이 풍부한 농어촌교회와 작은 교회가 이런 사명을 감당하기 아주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는데 활용하지 못하고 있어 그 대안을 마련하고자 합니다.

농어촌 교회 입지조건인 자연자원을 이용하는 지혜

농어촌교회가 위치하고 있는 입지조건은 대부분 자연환경이 아주 좋은 곳입니다. 산속이라면 더욱 좋고 바닷가나 강가라도 좋습니다. 맑은 공기와 맑은 물과 신선한 먹을거리가 있어 질병치료에 아주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기본적인 환경에서 몇 가지 자연요법과 수기요법을 추가하여 치료한다면 어떠한 난치병과 불치병도 무비용 혹은 저비용으로 완치의 확률은 고비용의 현대의학보다 더 높다고 확신을 합니다. 물론 현대의학의 눈부신 발달로 난치병과 불치병의 치료의 성과를 부정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만 하나님의 방법인 무비용과 지혜로운 저비용의 일반적이고 쉬운 치료법이 있는데도 고비용의 현대의학에 너무 의존하는 것은 불 신앙적이고 비용면에서도 불합리하다고 생각합니다.

대도시에 치중하여 설립하고 있는 노인요양병원도 사실상 노인 수용소이지 치유공간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노인들은 농어촌과 같은 공간에서 산책하면서 맑은 공기와 물을 마시고 움직일 수 있는 한도에서 땅과 가까이 하면서 노동을 함으로 근력운동을 하는 것이 오히려 건강증진을 가져오게 합니다. 이렇게 하면 모든 조건에서 고비용의 요양비는 절감하게 됩니다. 그리고 농촌에서 얼마든지 저비용으로 노후를 보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손으로나 간단한 낚시도구로 피라미 고기를 잡을 수 있는 것을 총이나 폭탄으로 고기를 잡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농어촌교회의 환경은 바로 손으로 고기를 잡을 수 있는 기본적인 환경이 갖추어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거기다가 간단한 수기요법과 대체의학으로 병을 치료한다면 치유사역의 효율성은 배가될 것입니다.

도시의 작은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본적으로는 농어촌교회와 동일합니다만 단지 자연환경이 다를 뿐입니다. 그런 경우 농어촌교회와 연계하여 협력적인 관계로 치유사역을 하면 될 것입니다. 농어촌교회는 인적, 물적 자원이 거의 전무합니다. 허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자연자원은 풍부합니다. 바로 이런 자연자원을 무비용 혹은 저비용으로 이용하는 것이 지혜가 아닐까요? 이게 바로 하나님의 선물이 아닐까요?

도시의 작은 교회와 농어촌교회가 자연의학과 대체의학으로 치유하는 치유사역을 특성화선교 모델로 하면 저절로 하나님의 구원사역이 가시화되고 현실화 될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이제는 말로만 복음을 전파하는 시기는 지났습니다. 선진국은 말할 것도 없고 선진국으로 진입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국민 모두가 어느 한 가지 이상 질병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나 당뇨병을 비롯한 대사성, 순환장애선 질병과 요통과 견비통 등의 근골격계 질병은 우리를 괴롭히게 합니다. 이런 질병을 대체의학으로 손쉽게 무비용 혹은 저비용으로 낫게 한다면 시간적으로나 경제적인 면으로나 유익이 되지 않겠습니까?

스킨십 활용을 잘하는 특성화전도

전도를 하면서 말로만 복음을 전하는 것 보다 결리고 찌뿌듯하고 부분적으로 통증이 있는 부위에 마사지를 하면서 스킨십을 병행하면 친밀도가 높아지고 복음의 전달효과가 증가됩니다. 그냥 전도지를 나눠주고 사탕과 휴지 같은 선물을 주는 물량적인인 전도방법보다는 한층 더 효과적인 특성화 전도방법입니다. 추상적인 목음의 설명보다 가시적인 스킨십으로 통증이 없어지고 몸의 컨디션이 회복되어지는 것을 느끼는 것으로 복음의 수용과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가 있습니다.

도시인들은 오십 견이 없는 사람이 없고 몸 어디라도 불편한곳이 있습니다. 그게 어떤 병명이 붙여질지라도 병이 오는 원리는 단순합니다. 그리고 고쳐지는 원리도 단순합니다. 단지 현대의학은 의학적으로 복잡하게 포장을 잘하여 비전문가인 일반인들이 알아채지 못하도록 한 병명을 달리한 것뿐입니다.

전교인이 특성화교회의 공동사역자가 되어야

이제 마지막 결론을 맺겠습니다. 앞으로의 교회는 공동체 사역이어야 하고 생태적인 공동체 속에서 치유사역의 팀 사역이 활발하게 전개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목사 한사람만 사역 하는 것이 아니라 전교인이 공동사역자로서 협력사역을 하는 것입니다. 치유사역의 특성화 모델에서 치유사역은 전교인이 치유상담사, 스포츠마사지사, 발 마사지사, 침술사, 교정사, 자연요법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서로를 섬기고 이웃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도구로서 이용하여야 합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자연스럽게 전도의 문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전교인이라 함은 초등부에서 청년부, 남선교회, 여전도회 할머니까지 치유사역의 요원이 되어야 합니다. 초등부 어린이에게는 강력한 치유력이 내재되어 있고 할머니에게는 약손의 치유력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현재 치유사역은 내적치유 쪽으로 편중돼 있다고 생각합니다. 균형을 잡기 위해서는 외적치유와 밸런스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렇게 될 때 비로소 온전한 전인치유사역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치유사역 특성화교회가 바르게 실현되어진다면 말 그대로 영육 간 강건한 성도들이 건강하게 이 세상을 살며 성령의 공동체로 회복되어지고 병든 이 세상을 건강한 세상으로 불의한 나라가 하나님의 공의로 변모해지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실현되어지는데 일조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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