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까지 주민교회의 3·1절 행사엔 '꼴찌마라톤'이란 종목이 언제나 끼었다. 노인 여성 청년 청소년 어린이 등 다섯 명이 한 조가 되어 손을 잡고 뛰는 마라톤경기였다. 이 경기에선 언제나 약자를 돌보고 약자에게 관심이 모아졌다. 태극기를 들고 달리면서 그들은 통일을 바라는 구호를 외쳤다. 무장경찰의 보호를 받으며 반환점까지 이르면 풍물놀이 한마당이 신나게 열렸다. 돌아오는 길은 구호가 변했다. '독재타도', 정권에 저항하는 부르짖음이었다. 길거리의 시민들이 박수를 치며 격려했다. 그러면 경찰의 강제진압도 시작됐다. 그렇게 교회로 돌아와선 조별로 사행시를 발표하고 꼴찌까지 상을 받았다.

빈민촌으로 시작한 도시 성남에서의 주민교회(이해학 목사,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태평2동, www.jumin.org) 30년은 '꼴찌마라톤'의 아름다운 가치를 고스란히 간직한 역사다.

1973년 3월 1일, 성남지역의 민중선교를 위해 기독교장로회 특수지역선교위원회가 파송한 이해학 전도사가 빈민선교를 위해 교회를 창립한 것이 주민교회의 시작이다. 빈민선교는 시혜 차원이 아닌 빈민의 의식을 깨움으로써 자발적으로 일어서게 하는 활동이었다. 의료보장제도인 지역사회의학(community medicine)을 실현하기 위해 주민조직운동을 전개하고, 어린이 독서운동과 공장 근로여성들의 자치모임을 조직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성남은 당시 도시빈민들의 집단 거주지였으며, 정부는 이들을 사회 내부의 잠재적인 분열세력으로 보고 집단 이주를 통해 효율적인 감시망을 형성해 놓은 터였다. 이런 감시 속에서 주민교회의 활동 하나 하나는 살얼음판을 걷는 일이었다.

빈민선교는 결국 독재정권과 연결돼 있어서 정치의 민주화 없이는 구조적인 한계에 부딪치고 만다는 결론에 이르자 자연스럽게 민주화운동이란 정치투쟁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었다. 민중들의 조직적인 저항이 하나의 힘을 형성하지 못하면 두터운 보수 기득권층의 권력구조를 극복하기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이해학 목사는 이런 판단으로 빈민노점상, 철거민 등을 조직체로 묶었으며, 민주노총 내부를 사업장별로 엮는데 매진했다. 주민교회는 성남시에서 이런 사회운동의 '지성소'였다. 여기서 그들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원칙에 따라 방향을 재정비했으며, 영혼의 쉼과 재충전의 기회를 가졌다. 때로는 투쟁의 막다른 골목에서 하나님께로 피해 달려와 희망을 꿈꾸는 '도피성'이 되기도 했다.

1980년 광주항쟁을 겪으면서 이들은 다시 '미국'의 존재를 확인했고, '통일'의 절실함을 깨닫는다. 외세에 의해 강점된 이 땅이 자주적인 공동체로 부활하지 않고는 정치적인 민주화조차 무의미하다는 판단이었다. 빈민선교를 위한 민주화투쟁이 주민교회의 '1막'을 이끌었다면 '2막'은 통일이란 시대정신에 헌신한 시기로 볼 수 있다. 외세와의 역학관계로 역사를 읽을 경우 이를 뚫지 않으면 분단의 해소란 불가능했다. 경제를 읽는 시각 또한 재정립해야 했다. 분단 이전에 경제체제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성남 주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