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상태의 <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는 책과 또한 여기저기 올리는 “한국교회 목사들에게 고하는 글”을 읽으면서, 마음이 착잡함을 느꼈다. 이미 오강남의 <예수는 없다>가 나와서 한 번 홍역을 치르고 지나갔는데, <예수는 없다>류의 책을 또 한 권 만나게 된 까닭이었다. <예수는 있다>가 쉽고 재미있게 읽혀지는 노련한 책이라면, 이 책은 ‘배반했다’는 그런 점이 좀 부족한 설익은 책이었다. 아마도 대광고 사태를 통해 불이익을 당한 자로서, 해야 할 말이 너무 많았던 까닭이었을 것이다.

▲ 나는 이미 오강남의 <예수는 없다>에 대한 반론으로 <예수는 있다>를 펴낸 바 있다. (사진제공 이국진)
나는 이미 오강남의 <예수는 없다>에 대한 반론으로 <예수는 있다>를 펴낸 바 있다. 이 책에서 이미 류상태가 제기한 대부분의 명제들에 대한 답을 제시한 바 있으므로, 또다시 류상태에 대한 답을 제시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오강남은 책을 통해서 말하는 사람이라면, 류상태는 노동운동가가 그러듯이 전방위적 활동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계속해서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이미 대답을 했다고 해서 침묵하고 있을 수 없다. 대광고를 떠났어도 ‘전 대광고 교목실장’으로 소개되고, 이미 통합 측 교단에 목사직을 반납했다 해도 여전히 ‘전직 목사’로 소개되는 상황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주장을 이해할 수 없는 이유

나는 “한국교회,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류상태의 주장을 이해할 수 없다. 만일 예수가 유일한 구원의 길이 아니고 지옥이 없다면, 한국교회가 죽는 것을 왜 걱정해야 하는가? 만일 예수가 유일한 구원의 길이 아니라면, 예수를 배반하지 않고 따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류상태는 스스로 자신을 자유주의자가 아닌 신정통에 가깝다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류상태의 예수는 19세기 자유주의자들이 생각했던 윤리적 예수상에서 멀지 않다. 보편적 진리를 가르치고, 뛰어난 윤리 도덕을 가르친 스승으로서의 예수이다. 류상태의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친 분이고, 인류 평화와 용서의 복음 그리고 자비가 무한한 사랑의 하나님을 가르친 예수이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는 그런 모습의 예수가 아닌, 믿으면 구원 받는 섬김의 대상으로서의 예수를 전하기 때문에, 류상태는 한국교회가 예수를 배반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도덕 선생이었던 예수를 신앙의 대상으로 바꾸어버린 장본인은 예수의 제자들이며, 바울은 그런 기독교를 교리화한 장본인이라고 류상태는 보고 있다(128~31쪽). 그렇다면 적어도 한국교회는 류상태가 생각한 역사적 예수를 따르지는 않지만, 예수의 제자들과 바울의 체계를 따르고 있다는 것을 그가 이미 인정한 셈이다.

그러면 과연 역사적 예수는 그가 생각한대로, 스스로를 신으로 생각하지도 않았으며 신앙의 대상도 아니었고, 단순히 차원이 높은 도덕을 가르치며 실천한 도덕 선생에 불과했는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료는 대부분 신앙고백이 가미된 복음서뿐이기 때문에, 거기서 역사적 예수의 실체를 찾아낸다는 것이 쉬운 작업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인정하는 역사적 사실을 근거하여, 역사적 예수의 일면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역사적인 사실로 인정하는 몇 가지 사실이 있다. 그것은 유대교에서 기독교가 나왔다는 사실이며, 그 기독교는 예수라고 하는 인물에 대한 신앙적 고백으로 이루어져 있고, 초기 기독교인들이 많은 박해를 받았다는 점이다.

만일 류상태의 주장대로, 예수가 만일 단순히 높은 도덕을 가르치고 실천한 도덕선생에 불과했다면, 어떻게 기독교가 탄생했을까? 그리고 왜 그들은 예수를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었을까? 류상태가 인정한대로, 바울의 고린도전서가 54~55년경에 쓰인 편지라면(129쪽),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은 지 약 30년 정도 후의 일이다. 이미 이 때에는 예수에 대한 신앙이 편만한 때였다. 그렇다고 한다면 예수에 대한 신앙은 십자가 사건 이후 얼마 되지 않아서 일어난 현상이라고 보아야 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바울은 유대교의 저명한 학자로 모든 기득권을 누리고 있었던 사람이었으며, 예수를 주로 고백하던 교회를 핍박하던 사람이었는데, 어떻게 예수를 전하는 자로 변화되었을까?

종교사학파(Religionsgeschichte)에서는 이러한 현상은 인간을 신격화하는 동방종교 혹은 황제숭배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데, 일반적으로 황제숭배는 권력자를 숭배하는 것인 반면, 예수는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은 죄인이었다는 점이 달랐다. 나무에 달린 자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라는 신명기의 말씀은 유대인들 사이에서 십자가에 달린 자를 신격화할 이유가 없었다. 또한 다른 종교의 신격화나 황제숭배의 경우, 신격화를 통해 얻는 것들이 많았지만,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대가로 목숨을 잃거나 사회로부터 추방을 당해야 했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요즘 역사적 예수의 제3탐구(The Third Quest of Historical Jesus)에서 다는 아니지만, 많은 학자들이 예수가 단순히 평범한 도덕 선생 정도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의견이 일치한다. 류상태가 생각한 예수는 결코 기독교를 탄생시킬 만한 충분한 동인이 되지 못한다. 나는 이 세상에 인과관계가 분명히 존재한다고 본다. 류상태는 결국 역사적 예수를 제대로 판단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한다면 류상태의 캐치프레이즈인 “한국교회가 예수를 배반했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가?

그가 말하는 예수의 가르침은 보편적 가치인가?

예수의 가르침은 분명 높은 도덕적 교훈이 있다. 하지만 그 교훈은 류상태가 생각한대로, 보편론(universalism)적인 가치가 아니었다. 하나님이 “선인과 악인에게 똑같이 햇빛을 비추어 주시고,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를 가리지 않고 단비를 내려주시는” 것은 모든 지옥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구절이 될 수 없다. 그렇게 말씀하신 예수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통해, 부자가 지옥에 갈 것을 말하고 있으며(눅 16:19~31),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해야만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 했고(마 7:21), 사람들 중에는 어두움에 던져져 이를 갈 자들이 있다고 했다. 선인과 악인에게도 똑같이 햇빛을 주시기 때문에, ‘악인인’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음을 강조하는 말씀일 뿐이며, 그런 은혜를 받은 자로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강조한 말씀이다.

기독교만이 유일한 참 종교요 진리라는 주장은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말처럼 들릴 것이다. 실제로 우리 기독교인들 가운데에는 너무 배타적이고 독선적이어서 타종교인을 향해 적대적인 행위를 하는 어리석고 미숙한 사람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며, 나는 류상태와 함께 우리가 고쳐야 할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굳이 변명을 하자면, 이것은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죄성 때문이다. 우리 편 네 편을 분명하게 구분 짓고, 우리 편에 대해서는 무조건적 편애를 하고, 우리 편이 아닌 자들에 대해서는 무조건적 반대를 일삼는 행태가 아직 복음으로 성화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배타적이고 독선적이라 욕을 먹더라도 예수만이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는 주장을 굽히고 싶지 않다. 류상태는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종교다원론적 입장에서, 기독교의 유일성을 비판하고 있다. 류상태는 질문은 기독교를 믿으면 천국 가는데, 다른 종교를 믿었다고 지옥 간다는 게 옳은가를 묻고 있다. 이러한 질문은 한 가지 잘못된 전제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이다. 하지만 인간은 천국에 갈 만큼 의롭고 선한 존재가 아니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그렇기에 예수가 필요하다고 성경은 가르친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그 예수를 영접한 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오직 예수의 이름 밖에는 구원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고 성경은 말한다(행 4:12).

류상태는 이 표현은 단지 고백적 표현일 뿐, 객관적 진술이 아니라고 한다(91쪽). 하지만  이 구절이 있는 사도행전은 ‘배타적’ 전도로 가득 차 있다. 즉 사도행전 전체에서 타 종교를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서, 당신들이 종교가 틀렸으니 예수 믿고 구원 얻으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사도행전 4장 12절은 고백적 표현일 뿐만 아니라, 객관적 진술로 보아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류상태는 성경의 문자에 매이지 말고, 그 안에 담긴 참 뜻을 깨달아야 한다고 항변한다. 예수가 당시의 유대인들의 문자적 해석을 뛰어넘어 그 문자 속에 들어있던 보편적인 진리를 들추어냈던 것처럼, 우리도 문자에 얽매이지 말고, 보편적인 진리를 발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가현설(doceticism)적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발견해야 한다. 문자에 얽매이지 않고, 보편적인 진리를 발견해야 한다는 말은 우리가 신중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이다.

류상태의 이 말은 결국 성경의 문자가 무엇을 말하든지 간에, 내가 내 마음대로 이해하고 싶은 대로 이해해버리면 된다는 현대 독자반응 비평(reader-response criticism)의 과도한 형태로 귀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것은 ‘예수는 있다’에서 표현한대로 ‘짝사랑 독법’이 될 수밖에 없다. 오히려 힐쉬(E. D. Hirsch)처럼, 텍스트의 뜻(meaning)과 의미(significance)를 구분하면서도 역동적인 관계를 가지고 성경을 읽어야 하지 않을까?

자신이 믿는 바를 선택함과 성경의 의도는 다르다

나는 그런 점에서 건전한 보수적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주석적 방법들이 문자에 얽매인 해석이라기보다는 제대로 텍스트의 의미를 규명하는 작업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한다면 류상태의 과도한 주장은 문자에 얽매이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문자와는 전혀 상관없는 자신의 세계를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류상태는 스스로 자신이 믿는 바를 선택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적어도 성경이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다. 류상태는 성경에서 너무 많이 떠났다.

나는 묻고 싶다. 그대는 왜 한국 교회가 죽는 것을 걱정하는가? 왜 예수를 배반하면 안 되는가? 배반할 예수라도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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