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10월말부터 11월초에 한국교회는 종교개혁에 관한 이벤트성 행사를 치른다. 행사는 16세기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을 회상하는 차원에서 대개 일회성 법석떨기로 끝난다. 몇 신학대학 (신학대학원)과 기독교 기관들도 종교개혁과 교회갱신 세미나를 개최하기도 한다. 이러한 행사는 이 시대가 요구하는 교회개혁, 새로운 교회론, 참된 교회론에 관하여 논의하는 계기를 줌으로서 긍정적 기능을 하기도 한다.

이번 글은 상당 부분 신학적인 것이다. 제2의 종교개혁이 요구되는 한국교회 상황에서 새로운 교회론의 필요성과 내용을 말하고자 한다.

성경말씀 요한복음 1장 14~18절을 보면, 말씀(로고스)이 육신이 되고 그분이 독생자 하나님이었다는 것이다. 말씀(로고스)이 육신이 되어 우리 사이에서 살았다는 주장이다. 그 분은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영광을 가졌는데,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셨고,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는 것이다. 세례자 요한이 이분을 언급하기를 자기가 존재하기 이전부터 계셨던 하나님이라고 증언하였다. 우리는 말씀(로고스·그리스도)인 그분으로부터 은혜를 충만히 받았다. 이전의 종교인 유대교의 율법은 모세 종교로부터 왔지만,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교로부터 나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전에는 어느 누구라도 하나님을 볼 수 없었지만 독생자이신 하나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보고 알 수 있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상기 성경본문을 통하여 우리는 새로운 사고를 통한 새로운 종교와 새로운 교회의 탄생을 유추할 수 있다. 당시 헬라 철학적 사상에 의하면 로고스(말씀)나 하나님이라는 존재는 육신이나 인간의 모습을 지닐 수 없었다. 그런데 사도요한은 로고스가 육신을 입고 인간 예수가 되었다고 증언한다. 이러한 말은 헬라인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스캔들로 비춰졌다. 다른 한편 유대교인에게는 이러한 말씀(로고스) 즉 하나님이 인간이 되었다고 하는 주장은 신성모독에 해당하였다. 이러한 양쪽 문화가 용납 못하는, 독생자로 태어나신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를 사도요한은 과감하게 주장한 것이었다.

사도 요한의 이러한 로고스의 성육신 주장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인간으로 탄생하셨다는 신학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종교와 교회가 탄생하도록 하였다. 말씀이 성육신함으로서 완전히 새로운 시대를 열고, 새로운 종교운동과 교회운동이 일어났다. 과거 유대교로부터 새로운 로고스 종교 즉 예수교가 탄생하였다. 유대교의 껍질을 벗어던지고 새로운 종교로서 기독교(예수교)가 역사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러한 본문 해석을 감안하여 한국교회의 새로운 삶을 살펴보면, 오늘날 한국교회는 전통적으로 유지해온 교회적 관행을 새롭게 변화시켜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사도 요한의 증언에 의하면 모세의 율법 종교로부터 새로운 예수의 메시아 종교가 탄생하고 예수의 교회가 생성되었듯이 관행적 교회 습관을 넘어서서 새로운 한국교회로 태어나야 할 것이다. 지금의 한국교회에서 새로운 교회론이 나와야 할 것이다.

제2의 종교개혁이 요청되는 시대의 한국교회

한국교회 상황에서 참된 교회개혁운동은 무엇인가? 여기에서 우리는 종교개혁이 필요한 한국교회의 현주소를 살펴볼 수 있다. 지금 우리 주위에서는 한국교회가 가짜 교회냐 참된 교회냐? 에 관한 원색적인 논쟁이 일어나고 있다.

요사이 <뉴스앤조이>에서 일어나는 가짜교회 논쟁의 발단을 살펴보면, 서울의 서00 목사가 북한 봉수교회를 가짜라 하면서 교류를 중단하고 북한을 방문하는 남한 기독교인은 봉수교회에 들리면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북한 공산당이 이 교회에 다닐 사람을 선정하고 대기시키고 사람을 파견하고 감독하기 때문이란다. 북한교회는 우리 남한교회와 다른 구조를 가진 교회라는 것으로 가짜라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미국 심슨대학의 교수인 신은희 박사가 반론의 글을 썼다. 가짜 교회란 없다는 것, 북한교회는 오직 이질적 교회일 뿐이라는 것, 진짜 교회라고 주장하는 남한교회야말로 오히려 가짜이고 변태적 교회라는 것이다. 남한교회는 교회를 세습하고, 권력투쟁이 일어나 분열하고, 돈으로 교직을 사고파는 교회라는 것이다. 반면에 북한교회는 주체사회에서 민족교회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쟁에 대하여 이만열 국사편찬위원장이 남북교회의 진위논쟁은 승자 없는 게임이라고 일축했다. 봉수교회가 가짜라는 주장에 이만열 위원장은 “북쪽이 남쪽교회에 대해 진위논쟁을 벌인다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형식상 진짜 교회의 모습을 하고도, 교회를 세습하고, 재산 때문에 폭력배를 예배당에 불러들이기까지 하는 남쪽교회의 모습을 들어” 남북교회 진위 논쟁은 승자 없는 게임으로 끝날 것이라고 우려를 표명했다.

봉수교회 손효숙 목사 등 북쪽교회 목사들은 남쪽교회 목사들 앞에서 예수님을 입으로 시인하고 성경을 토대로 설교를 한다. 북쪽 그리스도교인은 이렇듯이 신앙을 입으로 시인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들을 가짜라고 하면 되는가? 이만열 교수는 “입으로 신앙을 시인하는 이상 그와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말을 했다.

이러한 논쟁을 보면서 남쪽교회의 현재 상황을 살피게 된다. 진짜 교회인가? 참된 교회인가? 가짜 교회인가? 이만열 교수의 분석을 받아들이면 남쪽교회는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게 설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자신 있게 참된 교회임을 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면서도 북쪽교회를 가짜라고 주장하여 형제가 형제를 미워함으로 형제 살인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는 반드시 새롭게 거듭나야 할 것이다.

이제 종교개혁 시대의 참된 교회의 모습을 생각해보자.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가 지배적인 역할을 하는 상황에서 루터나 칼빈이 새로운 교회개혁운동을 벌인 것이다. 새로운 교회운동이라기보다는 참된 교회 회복 운동을 벌인 것이다. 루터에게 있어서 참된 교회의 표지 (notae ecclesiae)는 몇 가지가 있다. 참된 교회는 표지(marks)를 갖는다. 가짜 교회 혹은 잘못된 교회에 대하여 교회가 참교회성 혹은 교회의 참됨을 드러내기 위하여 표지가 있다는 것이다. 루터에게 참된 교회의 표지는 세월이 흘러가면서(1521, 1539, 1541년 등) 숫자가 많아졌다. 참된 교회는 여러 가지 표지를 갖는다는 것인데 설교말씀·올바른 가르침·성례전·세례·열쇄(회개)·기도·교회의 십자갇주기도문·교회의 박해 등을 루터는 거론한다.

칼빈에게 있어서 참된 교회의 표지들은 올바른 설교·올바른 성례전·(교인들의) 올바른 경청·치리(목회 차원) 등이었다. 개혁교회(장로교회 포함) 전통은 설교, 성례전 및 치리를 들고 있다. 종교개혁자들은 가톨릭교회의 미사 중심 예배를 비판하면서 성경말씀을 중심으로 하는 설교와 성례전 (세례와 성찬)의 올바른 집전을 강조하였다. 루터교회 전통과는 달리 개혁교회 전통은 여기에 치리를 덧붙였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문화·정치적 전통 차원에서 볼 때, 교회의 표지로서 ‘치리’는 상당히 부정적 기능을 하고 있기도 하다.

루터와 칼빈의 경우를 보더라도 참된 교회의 표지는 사람에 따라, 교회 전통에 따라,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종교개혁 시대의 참된 교회의 표지를 포함하여 각 교회의 교리라고 하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는 아닌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시대가 만들고 시대가 해체를 시키는 것이다. 오늘날 체코의 개혁교회 신학자인 로흐만 교수는 가난과 억압이 가득한 세상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행하는 정행(올바른 행동, 실천)이 참된 교회의 표지라고 했다.

참된 교회가 되기 위해서

지금부터 한국교회는 종교개혁 전통에 뿌리를 두되, 시대에 맞는 새로운 교회론을 만들고 실행해야 할 것이다. 참된 교회가 되기 위한 표지를 기술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오늘날 참된 교회의 표지는 겸손이다. 교회는 하나님 앞에서 부족함을 느껴야 한다. 상당수 한국교회는 너무 많은 것을 가져서 오만하고 방자하다. 자기와 다른 교회는 가짜라고 정죄한다. 가난한 교회를 업신여긴다.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느껴 겸손하게 자기 자신을 비우고 순종하는 교회가 참된 교회가 될 수 있다.

둘째, 교회의 세상 개방성이 참된 교회 표지이다. 남을 위한 교회 즉 타자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개방하는 교회는 참된 교회이다. 일부를 제외한 한국교회는 이미 게토화되어 세상과 사회로부터 스스로 격리되고 있다. 일반 시민사회가 교회를 조롱하고 개혁을 하려고 벼르고 있는 정도가 되었다. 교회가 세상과 사회에서 교회되기를 즉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는 것을 포기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는 사회를 향하여 자신을 열고 사회에 봉사를 해야 한다.

셋째, 참된 교회의 표지는 미래를 향하여 자신을 여는 미래지향성이다. 한국교회는 너무 과거에 집착한다. 너무 오래도록 보수적 교회가 되다보니 아예 수구적 관행이 교회를 휩싸고 있게 되었다. 상당수 목사들의 의식은 과거퇴행적 사고에 젖어 시원한 바람 한 점이 들어갈 여지가 없다. 어떤 목사는 1세기의 초대교회를 이상적 모델로 꿈을 꾸고, 다른 목사는 16세기의 종교개혁 교회처럼 행동하는 것을 소원하고, 어느 목사는 17~18세기의 개혁주의 교회를 꿈꾼다.

시대가 변하고 상황이 변하고 지리적으로 거리가 있지만 과거 그 시대 교회, 그 상황 교회, 그 지역 교회가 좋았다는 식이다. 이러한 교회는 미래를 우리 앞으로 몰고 오시는 하나님을 만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면 남북통일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실 텐데 과거적 교회는 이러한 통일 선물도 놓치고 말 것이다. 과거에 붙잡혀 앞으로 나가려는 교회의 발목을 붙잡고 한 치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한다. 하나님의 미래로 자신을 개방하고 앞으로 나가는 교회는 참된 교회가 될 수 있다.

넷째, 참된 교회의 표지는 사회정치적 책임성이다. 우리 한국사회에서 교회는 책임적으로 사회문제나 정치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사회적·정치적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교회가 참여하고 논의하여 인간의 얼굴을 지닌 사회로 만들어야 한다. 교회 울타리 안에서 안주하여 변하는 세상을 알지 못하고,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되어 있는 교회는 세상과 사회를 향하여 자신을 열고, 책임적으로 살아야 한다. 제3세계의 문제를 풀기 위하여 선교도 해야 한다. 사회정치적 책임을 느끼는 교회는 세계로 선교사를 파송하고 선교를 하는 교회가 된다.

다섯째, 참된 교회의 표지는 교회 연합정신이다. 한국교회는 너무 많이 분열되어 있다. 이제 너무 많은 교파 분열이 하나님을 뜻을 이루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선교에 방해가 되고 있다. 서로 다른 교회나 교단들이 힘을 합쳐 선교를 하고 봉사를 해야 한다. 교회 연합운동은 한국교회 상황에서 참된 교회의 표지가 될 수밖에 없다.

여섯째, 참된 교회의 표지는 고통이다. 예수님을 위하여 일하다가 고통을 당하는 것이다. 오늘날 박해가 없는 세상이긴 하지만, 예수님의 복음 때문에 마음을 아파하고 고통을 느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이 없는 교회는 참된 교회가 아니다. 세상 사람들이 고통을 겪고 있는데, 그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홀로 만족하여 사는 교회는 참된 교회가 될 수 없다. 이외에도 몇 가지 표지가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참된 교회가 되기 위하여 이 세상에서 구원을 펼치시는 하나님의 활동을 주시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에 맞는 참된 교회의 표지를 설정하고 이를 추진하여 참된 교회가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는 종교개혁 488주년을 맞아 참된 교회의 표지를 정립하고 참된 교회가 되도록 운동을 벌여야 할 것이다. 참된 교회는 말로만 해서 되는 것은 아니다. 참된 교회의 표지를 만들고 이를 꾸준히 실천해야 할 것이다. 교회갱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참된 교회를 살려는 모든 사람들에게 함께 하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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