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여는 교육공동체 꿈나무학교 ⓒ뉴스앤조이 김승범

출근하려고 구두를 신으니 뽀얗게 앉은 먼지가 하룻밤 편안히 주무셨나 보다. 먼지를 털다 보니 어제 만난 사람들이 떠올랐다.

포장도 안된 좁은 길, 자동차 몇 대가 지나가면서 일으키는 시커먼 먼지가 목을 매캐하게, 눈을 따갑게 만들었다. 마치 딴 세상에서 온 이방인에게 야유 섞인 환영인사를 하듯이. 송파구에 있는 여섯 개의 비닐하우스촌 중에 개미마을과 화훼마을을 찾았다. 강남향린교회 김경호 목사가 동행하지 않았다면 헛걸음만 할 뻔했다. 마을들이 이렇게 멀찌감치 따로따로 떨어져 있는지 몰랐다. '그래, 난 어쩔 수 없이 이방인이었어', 이런 생각이 단박에 들었다.

▲대규모 아파트 단지에 눌린 개미마을.
ⓒ뉴스앤조이 김승범
개미마을 초입에 세워져 있는 송파꿈나무학교가 한눈에 들어왔다. 방치된 아이들을 돌봐달라는 주민들의 요청으로 세워진 꿈나무학교. 그 뒤로 우뚝 서 있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다소 위압적으로 보였다.

먼지가 자욱한 길 한복판을 느릿느릿 걸어오는 노인네가 보였다. 난방용으로 쓰려는지 기름통을 끌고 있었다. 먼지를 덮어쓰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보였다.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아이 목사님, 오늘 웬일이예요?" "우리 할아버지는 마이크 한번 잡으면 끝내준다"고 노래 실력을 칭찬하자, 할아버지는 여간 쑥스러워 하는 게 아니다. 그래도 기분은 무진장 좋은가 보다. 웃음이 입가에서 떠나질 않는다.

여기저기 둘러보는데 마을 한 가운데쯤 서 있는 우체통이 눈에 띄었다. 이 우체통은 편지를 보내는 용도보다는 받는 용도로 쓰이는 우체통이란다. 현실로는 버젓이 살아있지만 주민등록번호가 없어서 법적으로는 살아있는 존재로 인정받을 수 없는 것처럼, 이 마을 사람들도 한동안 주소나 주민등록증 없이 살아왔다. 그러니 편지를 받을 도리가 없지 않은가. 김 목사가 우체국과 협의해 만든 것이 이 우체통이다. 사진을 찍던 사진기자가 문득 영감이 떠올랐다는 듯 한 마디 거든다. "희망의 편지를 실어 나르는 사랑의 우체통."

이리저리 사진을 찍고 있는데 강아지를 품에 안은 아주머니 한 분이 따갑게 쏘아부쳤다. "지금 뭐하는 거예요?" "아주머니, 안녕하세요?" 김 목사가 또 인사를 건네자 "아, 목사님 오셨어요?" 하더니 굳은 얼굴이 금세 풀린다. 개미마을 사람들과 김 목사의 사이를 단박 눈치챌 수 있었다. 사진 찍는 걸 극도로 경계하는 사람들, 그들이 먼저 마음의 문을 굳게 닫은 것인지 딴 세상 사람들이 먼저 그런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먼지 때문인지 목구멍이 좁아지면서 가슴이 답답해졌다.

▲아이들은 방과 후 이곳에 지내면서 엄마 아빠가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늦은 밤에야
집으로 돌아간다. ⓒ뉴스앤조이 김승범

하지만 꿈나무학교 안에 있는 10여명의 아이들은 마냥 즐겁기만 하다. 낯선 사람들이 들어와도 전혀 개의치 않고, 놀이인지 숙제인지 끝말잇기를 계속하고 있다. 다른 아이들은 복지관에서 컴퓨터를 배우고 있단다. 주소지가 없을 때는 학교도 다닐 수 없어서 하루종일 여기서 북적대며 지냈는데, 이제는 학교를 다닐 수 있게 됐다. 마을, 교회, 사회단체 등이 힘을 모아 주소지 청구소송을 냈는데 작년에 승소 판결을 받은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방과 후 이곳에 지내면서 엄마 아빠가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늦은 밤에야 집으로 돌아간다. 강남향린교회가 운영하는 이 학교는 마을과 바깥 세상 사람들이 서로 믿고 의지하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소중한 통로 역할을 한다.

▲풍물놀이를 하는 그림이 그려진 담이 세상과 화훼마을을 구별하고 있었다.
김 목사는 "천국과 지옥으로 나누는 담"이라고 했다.
ⓒ뉴스앤조이 김승범

차를 타고 5분 정도 남쪽으로 내려갔다. '자랑스런 송파, 이제는 내가 주인입니다'라는 문구가 써있고 풍물놀이를 하는 그림이 그려진 담이 세상과 화훼마을을 구별하고 있었다. 김 목사는 "천국과 지옥으로 나누는 담"이라고 했다. 처음 구청에서 담을 세웠을 때 마을 사람들을 설득해서 담을 치웠는데 막대한 예산을 들여서 또 다시 담을 세웠다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에게는 돈 한푼 제대로 쓰지 않으면서 담을 세우는 데 큰돈을 쓰는 것을 생각하노라니 김 목사는 열이 나는 모양이다. 어쩌면 마을 사람들도 자기가 사는 모습을 바깥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을 것이다. 또 바깥 사람들도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 담은 '보고 싶지 않은' 사람과 '보이고 싶지 않은' 사람 모두에게 아주 유용한 벽이다. 잠시 서서, 막힌 담을 허무시는 주님의 임재를 기도했다.

▲ⓒ뉴스앤조이 김승범
코를 찌르는 악취가 날 정도로 썩은 하천이 마을 옆을 흐른다. 물을 끌어올려도 썩은 물만 나오니 꽃 재배가 제대로 될 턱이 없었다. 그렇게 비닐하우스만 남기고 떠난 화훼단지에 사람들이 들어오면서 화훼마을이 됐다. 꽃도 상하는데 사람이라고 멀쩡하겠는가. 마을 사람들은 온갖 질병에 시달렸다. 99년 겨울 마을이 불길에 휩싸였을 때도 물이 없어서 발만 동동 굴렀다. '보상받으려고 일부러 불을 낸 것 아니냐'는 풍문은 불에 그을린 상처 부위를 한번 더 후벼팠다. 숱한 투쟁의 결실로 지금은 수도꼭지가 온 마을에 들어왔다. 있는 사람들이야 '수돗물을 어떻게 믿고 그냥 마시냐'고 하겠지만, 이들은 이 수돗물이 그토록 달 수 없다.

200가구 정도 규모의 화훼마을에 한눈에 들어오는 교회 간판만 4개나 됐다. 여러 생각들이 마구잡이로 떠오른다. 주로 나쁜 것들만 연상되다보니, 내 이성이 심각하게 망가진 건 아닌가 염려될 정도였다. 연상되는 나쁜 생각들은 여기서 더 거론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지역 안에 있는 교회라고 하는 것과, 정말 지역을 섬기고 공동체의 소중한 중심 축이 되어주는 교회라고 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는 점은 분명히 짚고 넘어가고 싶다.

▲돈 없는 사람들이 성남 등 외곽으로 떠났지만 힘겹게 버티고 있는 사람들이 이곳
비닐하우스촌으로 몰려들어서 또 다른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뉴스앤조이 김승범

송파구는 88올림픽으로 급작스럽게 개발된 지역이다. 땅이 있던 사람들은 졸부가 됐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자의든 타의든 떠밀려 날 수밖에 없는 노릇. 돈 없는 사람들이 성남 등 외곽으로 떠났지만 힘겹게 버티고 있는 사람들이 이곳 비닐하우스촌으로 몰려들어서 또 다른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큰 불로 삶의 터전을 몽땅 잃어버리기도 하고 주민등록번호를 받지 못해 '있으나 없는 존재'로 취급받던 2천여명의 사람들.

성탄절이 다가오고 있다. 김경호 목사는 "아기 예수 곁에서 축하하고 경배하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하고 얘기를 꺼냈다. "온몸에서 똥 냄새가 진동하는 목자들이야말로 들판에서 먹고 자는 당시 최하층민 아니었는가. 또 먼 이국에서 아기 예수를 경배하기 위해 찾아온 동방박사들은 유대인들이 사람 취급도 하지 않는 이방인이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우리가 제외시켜놓은 사람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애써 외면하는 사람들, 그들이 예수 탄생의 현장에서 주역이지 않는가."
▲ⓒ뉴스앤조이 김승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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