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수년 전에 내가 어떤 교회에서 중고등부 부장으로 있을 때였습니다. 예쁘장하게 생긴 고3 여자아이가 있었는데, 이 아이가 어느날 굉장히 충만해 있었습니다. 이유인즉, 자기 학교 학생 중에 한 아이가 예언의 은사를 받았는데, 그 아이가 자기에게 예언을 해주었다는 것입니다. 그 예언의 내용은 바로 "한양대학교 가정학과를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었습니다. 이 아이는 평소에 가고 싶은 곳이었고, 성적도 거기 갈만한 곳이라 무척 고무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이 아이는 매우 열심을 내었습니다. 주일 예배에도 일찍 오고, 기도는 뜨거움이 절절 넘쳤습니다. 신앙생활은 무척 적극적이 되고, 교회 일도 매우 의욕적으로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대학시험을 치르고 합격자 발표가 되었을 때, 그 아이의 이름이 합격자 명단에 없었습니다. 그 아이는 너무도 충격을 받았고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가 그렇게 높게 지원한 것도 아닌데, 예언의 말씀까지 주시고는 아무 이유도 없이 자신의 말을 뒤집는 하나님에 대해 너무도 크게 실망했습니다. 그 아이는 그 뒤에 교회를 떠났습니다.

나중에 몇 번 권고해보았지만, 돌아올 마음이 없었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을 신뢰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예언이 주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면 주님이 너를 실망시킨 것은 아니지 않느냐?" 그러나 그 아이의 실망한 마음을 돌이키기에는 너무 늦었습니다.

그 때, 나는 크게 깨달았습니다. 지금 당장 열심을 불러일으킨다고 좋은 것이 아니고, 반드시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을 일으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의 열심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의 낙심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후, 수년이 지나서... 갑자기 중고등부 학생들이 기도가 뜨거워졌습니다. 이유인즉 어떤 중학생이 예언의 은사를 받았는데 중학생의 예언을 받은 학생들이 불이 붙은 것이었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그 중학생의 입에서 나온 예언을 듣고는 아이들은 감격해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피부로 실감했습니다. 매일 신기한 마음을 가지고 열정적으로 기도회를 가졌습니다.

나는 뒤늦게 소식을 듣고는 즉시 그 중학생의 예언을 검토해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중학생의 예언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님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저는 고민이 생겼습니다. 지금 이 예언으로 학생들이 저렇게 행복해하고 뜨겁게 기도하고 있는데, 이 예언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고 하면 얼마나 실망할까? 혹시 실족하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였습니다.

저는 깊이 고민하면서 이번 사건으로 실족하는 학생이 단 한 명도 발생하지 않도록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실족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생기자, 학생들을 불러서 그 중학생의 예언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님을 말했습니다. 그러자 학생들이 반발했습니다. 그럴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열매를 보면 안다고 성경에 있는데, 지금 그 학생의 예언으로 이렇게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게 되고 열심이 생겼는데 이렇게 좋은 열매가 어디 있느냐고 했습니다.

나는 압니다. 사탄은 100원 주고 10000원을 빼앗는 놈임을! 지금 학생들을 그렇게 열광시켜놓고, 나중에는 엉뚱한 예언으로 그들의 인생을 망치게 함을 잘 압니다. 나는 학생들에게 알아듣게 설명을 했습니다. 학생들은 괴로워하면서도 결국은 내 말을 받아들였습니다. 그 후에 내가 그 중학생을 단독으로 만났습니다.

그 아이도 사탄에게 내 줄 수 없는 주님의 귀한 자녀입니다. 제가 그 아이에게 예언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님을 차근차근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그 아이 입에서 예언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즉시 명령했습니다. "너는 하나님이 아니다. 네 정체를 밝혀라!"

몇 번의 실랑이 끝에, 결국 사탄은 정체를 드러내게 되고, 그 아이는 결국 사탄의 속임수를 극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학생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학생들은 저에게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도대체 앞으로 무엇을 믿죠?" 그것이 내가 가장 우려하는 것입니다. 좌에서 실망해서 극단적인 우가 되는 것입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 아이들이 상처 받은 것과 실망을 치유하기 위해 한동안 거의 매일같이 모여서 기도회를 했습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의 은혜로 그 아이들이 다 잘 회복되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긴 글을 쓰는 이유는, 오늘날 우리로 잠깐 열심을 내게 만드는 멧세지와 책들이 범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중 하나가 '번영신학'(prosperity theology)이라는 것인데, 예수 믿으면 건강해지고, 복을 받아 잘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구미가 당기는 말입니다. 잘된다고 하는데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것은 사람으로 열심을 내게 하는데 매우 효과가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인생을 살다보면, 결코 건강할 때만 있는 것도 아니고 항상 사업이 잘될 때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아무리 내가 신앙생활을 잘해도 사업이 망할 수도 있습니다. 욥의 경우가 그러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사업이 망했다고 해서 그가 버림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는 오히려 그것을 통해 더 큰 가치의 교훈을 배울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참 신앙이란, 예수 믿으면 건강해지고, 부유해진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형편에서도 자족하며 감사할 줄 아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번영신학에 길들여진 사람은 이러한 것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들은 건강이 악화되거나 사업이 조금만 안되어도 하나님이 자신을 버린 것이라고 단정하고, 크게 낙심합니다. 더 괴로운 것은 주변사람들이 불행이 닥친 사람을 향해 신앙에 무슨 문제가 있거나 어떤 숨겨진 죄가 있을 것이라고 수군댑니다. 욥의 친구들이 바로 그러하지 않았습니까?

번영신학, 당장 열심을 내게 만들 수 있지만, 성경적인 것이 아닙니다. 요즘 유행하고 있는 "야베스의 기도"가 어떻게 보면 유익할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위험한 서적이 될 수도 있음을 주의시킨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번영신학의 한 부류로 간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번영신학에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마 6:33)고 하신 말씀이 얼마나 많이 인용되고 있습니까?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진 사람은 결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 "먼저"가 될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말씀에서 "먼저"란 단순히 시간적인 앞이 아닌 우선순위에서의 앞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사람이란, 아이러니하게도 이 모든 것을 더하지 않으셔도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신앙생활은 유행을 따라 잠깐 사는 단기간코스가 아니라 죽을 때까지 가는 장기간 코스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24:13)는 말씀처럼, 우리가 끝까지 주님을 섬기는 삶을 살려면, 성경에 입각한 올바른 신앙을 가지려고 항상 힘써야 할 것입니다.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