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영 기자의 '목회자를 자살하게 현실'이라는 기사에서 보듯이 오늘날 교회의 위기는 결국 목회자의 위기를 직접 반영한다. 한 국가의 위기가 그 지도력에 문제가 발생했음을 의미하듯이, 신앙공동체의 동요와 방향감각의 상실은 그 신앙공동체를 최일선에서 책임지고 있는 목회자의 삶에 이상이 생긴 것을 말해준다. 한국교회의 현실을 말할 때 그 양적 부흥기를 지나 오늘날 물량주의와 출세주의가 지적되고 있는 것은 다름아닌 목회자의 삶이 '시험에 처해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왜 이러한 문제제기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일까?

분명 과거에 비해 목회자들의 지식 수준이나 문화적 역량, 그리고 경제적 기반은 상대적으로 나아졌는데 소명감이라든가 신앙적 결단내지는 지조가 의문시되고, 삶 자체의 타락과 위선이 비신앙인들에게 거듭거듭 지적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한국사회의 풍요와 민주화의 진행, 세계화 등의 과정에서 목회자는 어디쯤 서 있기에 이런 질타와 자괴감, 그리고 자기 정체성의 위기에 몰리고 있는 것일까?

아니, 어떤 경우에는 기업적 사고와 결탁하여 교회를 자본주의적으로 '경영'하는 풍토마저 확대 재생산되고 있는 것을 목회자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가? 그것을 새로운 성장모델로 따라 잡기에 급급한 경향이 있는 것은 또한 어떤 자세로 해석해야 하는 것인가? 이러한 양적 성장론을 기초로 한 교회부흥의 관점에 서서 목회한다는 것은 신앙인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일까? 하나님 나라 운동의 기본 자세는 도대체 현재의 목회자들이 치르고 있는 여러 가지 유혹과 경쟁, 그리고 생존 등의 문제와는 어떤 차별성이 있는 것일까? 무수하게 쏟아져 나오고 있는 한국의 목회자 후보생들은 과연 교회 외에는 갈 곳이 없는 것일까? 그리고 꼭 교회를 목회하는 자만이 진정한 목회자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

열거하자면 숨이 찰 지경인 한국교회와 신앙상황의 문제들 앞에서 돌파구가 열리려면 무엇이 필요한 것일까? 일부 목회자가 기업의 경영자처럼 되어가고, 개교회의 폐쇄주의가 '교주적 위치'를 만들어내며, 역사적 상황에 대하여 반응하지 않는 고립주의들이 한국교회의 현실을 어둡게 하고 있다면, 목회자들은 무언가 새로운 방향전환을 모색하여 예수의 제자로서 이 시대를 깨우고 일으키는 모델로 자신을 내어놓아야 하지 않겠는가?  

유교적 권위주의와 신앙적 독선주의

한국교회가 경험해왔고 경험하고 있는 목회자상의 변모는 그 추세가 분명해지고 있다. 그것은 사회적 존경도의 추락이라든가 교회 내부에서의 권위주의적 행태에 대한 반감 등이 높아지고 있는 것 등을 통해서 우리는 목회자가 더 이상 어떤 고고한 위치에서 대접받는 존재가 아님을 목격하게 된다. 이것은 목회자 자신이 자초한 부정적인 대목이기도 하면서 그와 동시에 한국 사회의 민주적 성숙도와도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측면이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애초에 한국교회의 목회자는 가난하고 어려운 처지에서 그 사회경제적 수준이란 정말 보잘 것 없었으며, 따라서 목회자들의 자제들은 그런 생활을 자신이 경험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굴뚝같이' 먹은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대부분 그런 경제적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그 뒤를 따른 이들이 또한 상당수에 이른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에서 수준이 되지 않는 신학교 교육과 당사자 자신의 자질 등이 문제를 많이 일으켰고, 극심하게 가난한 생활에서 오는 반동이 보상을 요구하면서 교회는 일부 목회자에게 개인적 부의 획득을 위한 근거지처럼 되어버린 경우도 없지 않게 되었다.

그러다가 사회가 전반적으로 풍요해지게 되고, 교육수준도 높아지면서 목회자들의 사회경제적 처지도 그에 따라 상대적으로 향상되었고, 자질이 좋은 목회자들이 배출이 되었다. 이러한 요소는 자연히 목회자들에 대한 존경도를 높이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유교적 권위주의와 신앙적 독선주의는 목회자를 예수 그리스도 대신 교회의 머리처럼 만들어버리는 바람에 한국교회는 교권주의적 질서라는 모순에 갇히는 진통을 겪는다.

이 단계에서 한국교회는 풍요해졌으면서도 그 풍요가 개교회의 재산으로 머물렀고, 그 재산의 관리가 교권주의와 결합하면서 목회자의 경영주적 위치를 결과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민주주의적 발상이 도전하기 시작하면서 목회자는 자신의 위치를 방어하느라 자신에게 충성하는 집단을 다소 심하게 표현하자면 '사병화'(私兵化) 하는 전술을 채택했고, 이것은 젊은 세대들이나 지적 수준이 높은 사람들을 교회에서 떠나게 하든지 아니면 교회 내부에서 갈등을 빚게 하는 조건을 제공한 셈이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목회자에 대한 전통적인 존경의 체계가 일부에서는 잔존하고 있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 허물어져 가는 추세이며, 그런 가운데서 여전히 교권주의를 고수하는 이들의 행태는 교회의 진정한 권위를 도리어 추락시키고 있다. 이와 같은 환경 아래 무언가 진솔하고 뜻있게 목회를 해보려는 이들은 쉽게 좌절을 겪게 된다. 목회의 현장 자체가 각종의 사람들을 상대로 하여 이들의 마음을 구석구석 어루만지고, 그 무수한 차별성을 가진 생각과 감정을 대하여야 하는, 실로 만만치 않은 작업인데다가, 이들의 삶을 십자가의 길로 인도한다는 것이 오늘날과 같이 쉽고 편하고 가볍고 풍요한 길만 찾으려는 세대에서 어디 가당키나 한 법인가?

이 시대의 목회자상을 어떻게 확립해 나갈 것인가

더군다나 성장주의 모델이 뿜어내는 유혹 앞에서 사회적 존경도 제대로 받지 못하면서 자칫 패배자 내지 낙오자가 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회의도 있게 된다는 점에서 이 시대의 목회자상을 어떻게 스스로 확립해야 하는가 하는 점은 중요한 질문이 아닐 수 없다. 목회자들에게는 그 소명감의 높이에 못지 않게, 목회의 과정에서 겪고 치러내야 하는 개인적 상처가 또한 적지 않다. 신도들의 생각지도 못했던 공격과 배신, 그리고 비방에 시달려야 하는 경우가 있고, 이를 해결하는 방도가 분명하게 서 있지 않을 때에 목회자는 목회 자체에 대한 좌절과 인간에 대한 환멸로 주체를 하지 못한다. 그것은 실존적 위기를 가져온다. 목회자가 이런 영적 고뇌에 빠지게 되었을 때 교회가 힘있게 서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다.

이러한 상태는 신앙적으로 목회자를 예상할 수 없는 수준으로 성숙시키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그 과정이 잘 관리되지 못하면 목회적 신념이 흔들리고 대세를 따르는 세속적인 방도를 구하는 쪽으로 치닫거나 목회를 포기하게 되기도 한다. 따라서 신도들에게는 발설할 수 없고 상의할 수도 없는 고뇌로 기진한 목회자들만을 위한 특수상담체제와, 이들의 힘겨움을 위로하고 새로운 기력을 충전할 수 있도록 해주는 '펠로우십 시스템'을 마련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교단정치적 파벌조성과는 구별되는 것이 되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며, 특히 이들이 쏟아내는 하소연과 아픔을 어떻게 성서적 메시지와 만나도록 할 것인가를 주목하면서 공동체적 경험을 축적해나가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성서적 조명의 역량이 쌓이면, 실로 이러한 목회자들의 고뇌는 한국교회를 새로운 차원에서 부유하게 하는 데 귀중한 자산이자, 목회자 자신을 위해서나 교인들을 위해서나 아름다운 열매로 맺어질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들이 증언해내는 메시지는 엄청난 위력을 가지고 한국 사회의 심장을 치게 될 것이 분명하다. 자신의 뼈와 살이 꺾이고 찢어지는 경험 속에서 자라난 메시지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한국교회가 주력하고 있는 목회자 대상의 프로그램은 자칫 이들에게 또다시 성장 콤플렉스를 느끼도록 할 만한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인상이며, 어려운 가운데서도 자신의 일이 진정 의미있고 그런 사명감을 공유하는 사역자들이 도처에 건재하고 있음을 확인하도록 해주는 기회는 적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충전'을 공급해주는 외적 체제의 구비 이전에 목회자의 고뇌는 교회 내부에서 일정하게 걸러지고 정리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서 목회자의 고뇌를 나눌 수 있는 동지적 협력자들이 팀 목회(team ministry)의 차원에서 육성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목회자들의 교권주의적 권위주의가 먼저 정리되지 않으면 안된다. 목회자를 외롭게 하고, 그들 자신의 고뇌가 영적 교통을 통해서 신앙인들의 삶 속에 투영되면서 함께 성장하는 과정을 밟아나가지 못하는 이유는 목회자 자신이 스스로를 여전히 무엇인가로 포장하거나 위장하는 까닭이 크다. 그래서 신도들이 목회자가 겪고 있는 고통의 실체 속에서 신앙적 메시지를 같이 발견하고, 목회자가 위기에 직면했을 때 목회자의 자존심이나 인격적 위상을 훼손하지 않고 따뜻한 사랑으로 다가갈 수 있는 여지를 소멸시켜버리는 결과인 것이다.

교회 내부의 민주적 토양을 이룩해야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목회자들과 교인들간의 새로운 관계를 정립해나가는 실험을 시도해나가는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것은 교회 내부의 민주적 토양을 이룩하는 일이 그 절대적 전제이다. 민주주의는 다수의 의사가 존중되는 것이 그 기본원칙이다. 그런 점에서 대세가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라는 신앙의 메시지와 배치된다. 따라서 교회의 민주화는 그 안에 신앙의 원칙을 파괴할 수 있는 위기의 요소를 출발부터 안고 있다. 또한 민주주의적 원칙을 과도하게 앞세우다가 자칫 목회자의 권위에 대한 성의있고 진지한 존중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점에서 교회의 민주화는 목회 자체가 요구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권위가 설 자리를 없애버리고 말수도 있다.

이러한 점들에 대한 깊은 주목과 고려없이, 단순한 열정만을 가지고 반(反)교권적 운동을 펼쳐나가면 교회는 생각할 수 없는 상처와 시련을 겪게 된다. 결국, 교회의 민주화가 이루어지는 토대인 인간 그 자체의 신앙적 성숙도가 함께 진행되고 고려되지 않으면 '교회의 민주화'는 평신도의 발언권과 주체적 참여를 이루는 측면에서 일단 긍정적이지만, 현실의 대세와 맞서서 신앙의 지조를 힘있게 밀고 나가는 문제는 장애와 직면하게 될 가능성이 있게 된다.

교회의 민주화를 이루자는 가장 근본적인 목적은 목회자가 일방적으로 이끌고 나머지는 이에 따르는 존재로 되는 일을 막고, 한 사람 한 사람이 신앙적 리더십을 가지고 사회 구석구석에서 힘있게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도록 돕자는 데 있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 교회의 민주화에 있어서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요소는 '교회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가를 교인들이 가급적 구체적으로 알도록 해주는 일'이다. 교회운영의 정보가 제한되어 있게 되면 여기에서부터 교회는 일부 소수에게 독점되는 체제가 운명을 피하기 어렵다.

그런데, 대체로 목회자를 비롯하여 교회의 중직을 맡은 사람들은 교회운영의 구체적인 상황과 정보가 공개되는 것을 꺼리는 경향이 있다. 한마디로, '덕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이다. 바로 여기에서 은폐, 의혹, 시비, 부정, 타락이 비롯되게 마련이고, 교회에서 외쳐지는 메시지와 실질적인 현실간의 위선이 폭로된다는 모순에 부딪히게 되는 것이다.

지난 11월 27일 기독교시민단체와 학생선교단체, 교계언론사 등 17개 단체가 백주년기념관에서 공동기자회견을 열고, 발표한 '2002년도 교회의 건강한 예산편성을 위한 호소문' 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이들은 △예·결산 과정에서 투명성을 확보해줄 것 △전체 예산에서 구제와 사회봉사에 할당되는 비율을 전향적으로 증가시켜줄 것 △선교·교육비 증가를 위해서도 더욱 힘써줄 것 등 크게 세 가지를 주문했다. 특히 재정운영에 관한 공적 자료를 교인들에게 공개하고, 자료의 신빙성을 확보하기 위해 복식회계를 도입하는 방안도 제안했다.

투명성이 없는 교회운영은 더더욱이 교단정치의 흑막과 오염, 그리고 부패를 가져오는 근거가 되는 것을 우리는 목격한다. 이러한 교회운영의 정보독점체제가 유지되고 있는 상황에서 사회의 민주적 변호를 요구할 근거를 교회는 가지지 못하게 된다.

가령, 교회의 재산상태가 분명하게 공개되고 보고되어야 한다, 따라서 교인들은 자신의 교회가 어떤 재정상태이며, 어떤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고, 목회자의 사례는 어느 정도인지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투명성은 목회자의 권위를 망가뜨리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각종 의혹에서부터 목회자를 자유롭게 해주고 목회 자체에 전념할 수 있도록 돕는다. 돈의 문제에 대하여 확실한 선을 지키고 있는 목회자는 그 발언권에 있어서 다른 문제가 없다면 시비에 걸릴 이유가 없다.

돈이 흐르는 길목마다 목사의 친인척 자리잡아

최근, 어는 대형교회는 돈이 흐르는 길목마다 목사의 친인척을 앉히고 있어 구설수에 오르고 있다는 이야기도 심심찮게 들린다. 사실, 한국교회에서 목회자 또는 교회 중진의 재정 비리가 이따금 터져 나오고 있는 것은 한국교회 내의 민주화가 아직 진전되지 못한 원인이 적지 않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면 교회의 신앙적 권위가 추락하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교회의 민주화에 있어서 정보의 공개와 함께 주목해야 할 바는 교회 운영팀의 일정한 교체와 후속팀의 육성이 시기적으로 제도화되고, 이것이 보장되는 일이다.

경험의 축적과 운영의 지속성을 확보하는 일 못지 않게, 평신도가 교회 운영의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이 각종 통로를 통해서 열려 있도록 하지 않으면 교인들은 교회에 그저 왔다가 가는 수동적 신앙 자세를 갖게 되며, 각종 프로그램에 참석하는 수준에서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것으로 생각하고 만족하게 된다. 늘 그 사람이 그 사람으로 교회의 뻔한 얼굴이 되고, 그들이 교회의 일을 독점하다시피 하는 상황이 지속되면, 어느새 이들이 교회의 주인이 되고 나머지는 이 주인들의 '관리를 받는 손님'이 되고 만다. '교인관리'라는 말은 이러한 관점에서 상당히 심각하게 재고해야 할 단어이자 사고방식이다. 이렇게 누군가에게 관리되는 신앙인의 유형으로는 한국 사회가 역사적으로 도전 받고 있는 갖가지 문제를 주도적으로 풀어나가는 지도력 있는 인물을 교회는 길러 낼 수 없다.

사회 각계각층의 출신들이 그 교회가 소재한 지역적 한계가 있다 해도, 서로간에 어떤 경계선을 긋지 않고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 정기적으로 모이는 결속력 있는 집단으로서 교회만한 조직을 찾아볼 수 없는데, 바로 이러한 현장에서 자신의 공동체를 자신들의 손으로 보람차게 이끌고 가면서, 사회의 새로운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힘있는 역량을 훈련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이 파견한 변혁의 근거지로서의 교회'는 그 시대적 소명에 있어서 능력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하고 마는 것이다. 교회의 민주화는 따라서 사도적 권위와 능력이 그 신앙공동체에 속한 모두에게 나누어지고 길러지는 시스템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만인사제론'(萬人司祭論)으로 출발한 개신교의 기본정신과도 일맥상통한다.

이러한 토대가 견고하게 축적되어갈 때 성숙한 평신도 동역자 내지 협력자가 등장하게 되고, 목회자는 보다 진솔한 차원에서 교인들과 동지적 관계를 만들어나감으로써 '팀으로서의 역량'을 확대재생산하는 기쁨을 맛보게 될 것이다. 이러한 기운이 교회 안에 자라나게 될 때, 그 교회는 교회의 사회적 역할과 하나님께서 이 시대를 통해서 요구하시는 목적에 충실한 모습을 갖추어나가게 될 것이다.

목회 영역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고 넓다

그런데, 교회라는 자리만이 목회자에게 허용되고 열려 있는 자리일까? 목사안수를 받으면 교회 이외에는 진출할 길이 없는 것일까? 교회의 개념은 그렇게 제한되어 있는 것인가? 매년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신학생들이 교회에만 목이 매여서 너무 일찍 좌절과 고뇌를 배워야 하고, 때로 미래에 대한 전망이 흔들린 채로 젊은 시절을 안타깝게 보낸다면 그것은 상당한 손실이다.

그 반대로 너무 젊은 나이에 성장모델의 성공적 사례가 되어버리는 것도 그 자신을 위해서 좋게만 보아줄 수 없는 부정적 결과를 가져온다. 여기서 우리는 목회현장은 단지 교회만이 아니라는 파격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도처의, 교회 아닌 목회현장은 여전히 훈련되고 교육될 지도력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신학교육을 마친 이들은 자신들의 능력을 다양화하면서 오늘의 시대가 절실하게 필요로 하고 있는 목회자의 모습으로 성장해가야 할 것이다. 신학교육을 받은 젊은이가 가령, 전업작가로서의 모습으로 이 사회에서 존재하면 안될 이유가 있는가?

자칭 '카페마담'이라고 하는 민들레 영토의 지승룡 목사처럼 새로운 스타일의 카페 경영을 통해 이 사회에 문화의 새로운 차원을 여는 자가 되면 어떠한가? 진주 산골마을에서 민들레공동체를 이끌며 대안학교를 일구어나가는 김인수 전도사님의 삶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또한 아이들을 위한 동화작가는? 영화감독, 시나리오 작가, 언론인, 방송인, 편집인, 교사, 정치인, 컴퓨터 프로그래머, 문화비평가, 농사꾼, 건축가, 화가, 지역 행정가, 대안학교 교사, 사진작가, 출판인, 시인 등 그 영역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고 넓다.

이들이 세상의 이러한 각 현장에서 자신이 받은 신학교육을 바탕으로 인간과 세상을 새롭게 보고 이해하는 운동을 각자의 은사대로 펼치고, 생명이 풍성한 관계를 일구어나간다면 이 세상은 훨씬 빠르고 힘있게 변화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교회를 책임지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에게 엄청난 자극과 도전이 될 것이다. 뿐만이 아니라 이러한 각 영역에서 오랜 세월을 통해 훈련받고 쌓은 경험을 깊은 연륜을 통해 교회라는 목회현장에 성서적 메시지와 연결하여 쏟아 놓는다면 한국교회는 그 내면이 생각할 수 없는 수준으로 성숙해지게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땅끝까지' 가라고 하셨는데, 그것이 어찌하여 꼭 교회를 세우는 일로만 그치겠는가? 이러한 각도에서 목회자들, 신학생들이 자신의 미래를 개척해나간다면 그것은 놀라운 자유가 획득되는 기쁨을 가져올 것이다. 이러한 목회자상에서는 더 이상 교권적 권위주의가 설 자리는 없으며, 우리의 이웃과 형제자매로서 함께 하는 겸손하고 성의 있는, 그래서 진실로 존경할 만한 하나님의 일꾼으로 한국의 목회자들(과 그 후보생들)은 역사를 새롭게 일으켜 세울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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