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인터넷을 통해 설교대학원(www.21preaching.com)을 개설, 바른 설교자 육성에 노력하고 있는 장신대 정장복 교수(장신대)는 목사들의 설교 도용(盜用)을 차단하지 않는 한 한국 교회의 개혁은 요원하다며 설교에 대한 바른 이해가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내용이다.

최근 포항 지역의 대표적인 교회 목회자가 유명 목사의 설교를 예배 시간에 그대로 표절해온 사실이 밝혀져 교회 내에서 물의를 빚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설교집을 출판하는 목회자들 가운데도 이런 현상이 비일비재한 것으로 나타나 충격을 더한다. 심지어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목사들조차 그 해악에 대해 민감하게 여기지 않고 있다. 신학교에서 설교학자로 설교가를 양성하고 있는 입장에서 이런 현실을 어떻게 보는가?

표절이 아니라 이것은 도용이다. 설교 도용은 금지돼야 한다. 왜냐면 설교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매일 받아먹었던 만나와 같기 때문이다. 만나는 어제의 것을 오늘 다시 먹을 수 없다. 안식일을 제외한 모든 날들 동안 만나는 그 날 받아 그 날 먹어야 했던 가장 신선한 양식이었다. 생각하면 오늘의 설교도 언제나 신선한 만나와 같은 양식으로 회중의 심령에 넣어주어야 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한 주간 내내 말씀의 전달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 몸부림을 치면서 메시지를 받고, 그 말씀의 깊은 뜻을 헤아리기에 자신의 시간을 아낌없이 내놓아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그 말씀에 먼저 용해되는 감격을 경험하고 난 후 회중 앞에 서서 감격의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 그런데 설교를 도용하는 행위는 곧 썩은 양식을 양들에게 먹이는 행위이며 이것은 중대한 범죄 행위로 봐야 한다. 신앙인에다 성직자이기까지 한 목사들이 이런 일을 범하고, 범죄를 저지르면서도 불감증에 빠져 있는 현실은 안타까움을 넘어 위험 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지적에 대해 많은 목회자들이 ‘해 아래 새 것이 어디 있느냐’는 식으로 반응하고 있다. 그래서 개 교회에서 이런 식의 표절에 대해 눈감아줘야 한다는 이들이 적지 않은데.

자신이 먹이고 가꾸는 양들을 위해 목자는 더 좋은 꼴을 찾아 헤매는 수고를 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 그러나 그런 땀 흘림이 없이 다른 목자가 이미 먹여버린 것을 가져다가 자신의 것인 양 내 양들을 먹여도 되는 것인지 반성해야 한다.

그리고 교회마다 그들의 환경과 수준과 신앙의 특수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만을 위하여 필요한 양식이 요구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결코 남의 설교를 도용하여 그대로 먹일 수 없는 자신들의 양들임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삯꾼된 목사만이 그 이마에서 땀 흘리기를 거부하고 쉽고 편한 곁길을 즐겨 찾을 수 있다. 참 목자는 눈물과 땀을, 때로는 피까지 흘리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그런 자세로 양들의 먹이를 찾아 먹인다.

목회자 자신에게도 해악을 미칠 텐데?

당연하다. 설교는 진화하고 퇴화한다. 설교가는 설교를 만들면서 더욱 좋은 설교가로 진화한다는 이야기다. 그렇지 않으면 퇴화한다. 설교를 만들지 못하는 이름뿐인 설교가가 된다. 설교가가 설교를 만들지 못하면 그것은 죽음이다. 하여 남의 설교를 도용하는 이들이 맞게 될 결과는 생명 없는 양식을 만드는 거짓 목사이며, 나아가 거짓 선지자로 빠지게 된다.

왜 이런 현상들이 일어나는가?

무엇보다도 원인은 설교 교육의 부재에 기인한다. 설교의 이론도 모르고 실제도 모르니 이런 식의 웅변가들만 나오는 것이다. 특히 한국교회 목사들이 너무 많은 설교를 하고 있다. 한 주에 세 차례만 설교한다고 해도 1년이면 165회고, 10년이면 1650회를 해야 한다. 한 사람이 1650편의 설교를 10년 동안 한다는 것은 내 상식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대안을 강구해야 하는 것 아닌가.

설교하는 횟수를 줄여야 한다. 한 주에 한 번이면 족하다. 새벽기도는 적은 분량에 주석을 해가는 것으로 바꾸고, 이것을 본문으로 주일설교로 만들면 좋을 것이다. 또 수요예배를 수요기도회로 바꿔서 기도에 몰두하고, 주일 저녁예배는 찬양 중심의 찬양예배로 드리는 것이 바람직하다.

설교집들이 무분별하게 출판되는 현실은 어떻게 보는가?

설교집이 아니라 그건 설교 보고문이다. 그 보고문을 가지고 또다시 설교를 하고 있다. 그리고 많은 목사들이 도용하고 있는 설교집들 역시 많은 부분 외국 설교가들의 설교를 도용한 것이 많다. 이것은 한국교회 전체가 썩어버린 양식을 먹고 집단 식중독으로 앓아 눕는 꼴이다. 당장 멈춰야 할 행태들이다. 이것은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하나의 이변이다.

게다가 설교집 출판을 당연한 경쟁처럼 쏟아내고 있는데 나는 그 목적을 이해할 수 없다. ‘나는 설교를 이렇게 했다’는 자랑인지, 아니면 단순히 자신의 설교를 기록하여 교인들에게 다시 읽도록 하는 목적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모두 심각한 부작용을 수반한다.

설교집 출판이 설교문화를 살찌게 하기보다 오히려 피폐하게 만든다는 말로 들린다.

그렇다. 홍수처럼 쏟아진 설교집이 오늘의 설교 사역에 에덴동산의 과일처럼 설교자들에게는 뿌리치기 어려운 유혹이 되고 있다. 특별히 자신이 설교하려는 본문과 주제를 결정한 후에 설교자의 손이 서서히 남의 설교집을 만지고 그 눈길이 거기에 머무르려는 유혹은 참으로 곤혹스러운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참된 설교자는 거기서 과감한 결단을 내리면서 야곱처럼 자신의 환도뼈가 상하더라도 하나님을 붙들고 내 양들이 살찔 수 있는 양식을 달라고 매달리면서 펜을 잡고 자신의 설교 원고에 받아쓰는 과정을 되풀이해야 한다.

본 회퍼가 조국에 돌아가 히틀러의 칼날을 피하여 지하의 신학교에서 설교학 교수로서 열강하며 이런 말을 남겼다. ‘설교는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그 자신이다. 말씀으로서 회중 가운데를 걷고 있는 그리스도 그 자신이다’라고. 한국 교회의 목회자들이 가슴에 담아야 할 금언인 셈이다.

설교 도용을 막기 위해서는 특단의 대책들이 강구돼야 할 것 같다. 특히 설교학을 공부하고 전문 지식을 가진 이들이 이 일에 나서야 하는 것 아닌가?

공감한다. 다행히 설교학을 전공한 젋은 학자들이 각 신학교에 배치되고 있어 희망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결국 환부를 도려내는 아픔을 겪어야 할 것 같다. 그것은 교인들의 분노와 언론의 감시를 포함한다.

그런 점에서 <뉴스앤조이>가 이런 시도를 한 것에 대해 박수를 보낸다. 한국 교회가 왜 25%의 교세를 가지고도 사회를 변혁시키지 못하는지 아는가? 모두들 죽은 양식을 먹기 때문이다. 그러니 한국 교회의 개혁은 무엇보다 강단의 개혁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