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같이 찍어내는 국화빵마냥 말씀이 너무 가볍게 표절되고 있다. ⓒ뉴스앤조이 김승범

설교표절이 미치는 문제에서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할 바는 개신교 정신의 근간이 '말씀으로 돌아가자'라는 점이다. 개신교의 전통은 '강단의 중심성'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말씀이 예배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설교표절이라고 하는 것은 그 중심을 어떻게 세워나가야 할 것인가 하는 데 있어서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 자체가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변화시키고 하나님나라를 열어주는 중요한 동력인데, 그 동력을 교회가 공동체 안에서 길러주고 쏟아내고 배우고 얻어내는 과정과 본질에 문제가 발생하면 어떻게 되는가? 말씀의 기본이 무너지는 것을 뜻하지 않겠는가? 표절을 정당화하는 입장에서는 설교의 여러 가지 내용들을 그 공동체 요구에 맞게 설교자가 편집하고 짜깁기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결국은 설교자가 공동체 안에서 제기되고 부딪치고 고뇌하는 문제를 껴안고 씨름하는 과정이 결여됐다는 얘기다.

남들이 만들어 놓은 것을 분배하는 행위

결국 설교자가 말씀을 위한 영적 고투의 과정이나 강단의 중심을 바로 세우려는 노력을 감당하지 않고 교회를 바로 세우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교회가 말씀의 생명을 나누는 곳인데 그런 고투의 과정 없이 과연 이 말씀의 생명력을 장기적으로 공급해 낼 것인가 하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목회자는 그런 생명력 있는 말씀을 공급해주는 사람인데, 그렇게 하지 않고 남들이 만들어 놓은 것을 분배하는 형태로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고 생각한다면 기본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다른 사람들의 말씀이나 지혜를 충분히 함께 나눌 만한 귀중한 가치가 있는데 남의 것이기 때문에 안 된다 하는 것은 무리한 논리가 아니냐 하는 반박도 가능하다. 그러나 가치 있는 것을 나누는 과정에 있어서도 그 가치 있는 것이 어떤 문제 제기에 의해서, 어떤 과정을 거치면서 만들어 졌는가에 대한 솔직성과 진정성이 요구된다. 표절은 이것이 결여되어있다. 말하자면 책을 읽기 위해서 촛불을 훔쳐도 된다는 이야기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이 그 목적이 지향하는 도덕과 윤리에 반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충분히 인정된다는 식의 이야기가 된다. 이것은 심각한 모순이 아닌가? 교회가 수단과 목적의 동일성을 일깨우는 곳인데 말이다.

말씀의 내용과 메시지의 차원에서도 이렇게 되면 근본적인 모순에 부딪치는 형국이 된다. 윤리적으로 보자면, 목적이 좋으면 수단은 어떻게 해도 좋다는 식의 이야기가 되는 경우, 이는 교회의 진정성을 자해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듣는 청자의 입장에서는 좋은 얘기를 들으면 좋은 것이고 거기에 만족하고 그러한 것을 공급해주는 것만으로 해도 의미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지만 그 교회의 설교자가 교회에 속해있는 사람들의 숨결을 자신의 숨결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고뇌하면서 끊임없이 자기 성장과 함께 쏟아내는 과정이 없을 경우에는 도대체 무슨 내적 열정과 영적 고투가 그 안에 담겨 있을 수 있겠는가? 목회란 선포되는 말씀의 중심에 자신을 걸어야 하는데, 자신을 거는 과정이 없이 그야말로 원고를 읽기만 하는 연설을 하는 셈이 된다. 그러한 것은 설교자로서의 영적인 능력이나 권위에 대해 기대할 수 없게끔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위기다.        

은혜만 받으면 된다?

▲ⓒ뉴스앤조이 김승범
혹자는 은혜 받으면 됐지 그것을 가지고 시비를 거는냐는 반론을 펴기도 한다. 그렇지만 은혜를 받게끔 한 사람에 충분한 경의를 표해야 하는데, 그런 과정 없이 자신의 고뇌 속에서 태어난 것처럼 여기게 만드는 것은 위장이고 연기일 뿐이다. 목회자 자신이 말씀과 현실에 치열한 영적 고투와 고뇌를 거치면서 그것을 토대로 강단을 보다 충실하게 만드는 그러한 과정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표절은 그것을 가로막는 것이다. 강단 자체가 목회자의 삶을 걸고서 살쪄나가는 과정이 중요한 것이다. '청자들의 은혜' 이런 말로 자신의 말씀과의 투쟁의 과정을 그냥 배제시키거나 삭제하거나 건너 뛰려고 하는 것은 설교자 자신의 말씀에 대한 생명력을 죽이는 행위이다. 교인들에게 있어서도 목회자가 볼 때에 그때 그때의 인기 품목을 나누어주는 식이 되는 것이다. 설교를 어떤 패턴처럼 설정해서 소비자에게 인기있는 상품을 공급하는 방식이 될 수 있다. 그래서 하나의 경향이 지배하게 되면 그 경향만으로 가게 된다. 말씀에 있어서 다양한 현실적 욕구와 정황에 대한 대응으로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작업이 불가능해진다.

성서의 인물들을 보면 하나님과 자신, 현실이라는 세 축을 가지고 끊임없는 고뇌와 깨달음, 결단의 과정을 거친다. 설교는 바로 그런 과정을 하나님의 도구로서 잘 거치도록 가르치면서 일깨우는 것인데 설교자 자신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서 교인들한테 그렇게 하라고 요구 하는 것은 모순이다.

구조적인 시스템을 변화시켜야

구조적으로 볼 때에 문제는 늘 상 제기되고 있는 것이지만 설교를 해야 하는 요구와 회수가 지나치게 과도하다는 점이다. 이 문제를 진지하게 해결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목회자가 나름대로 쉬기도 하고 생각도 하고 묵상도 하고 알짜를 쏟아낼 수 있는 과정을 인정하지 않는 시스템이다. 이러한 시스템에서 설교자의 윤리를 요구하는 것은 무리한 것이 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매너리즘에 빠져 타성화 될 수밖에 없다. 말씀의 깊이나 생명력 새로운 차원에서의 해석은 불가능해진다.

현재 한국교회의 수많은 예배의 패턴, 시스템을 전격적으로 변화시켜서 설교자들이 이러한 예배의 매너리즘과 패턴에 노예가 되지 않도록 해주는 작업도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한 조건 하에서도 여전히 표절을 한다면 문제는 정말 심각하다. 실질적으로 불가능한 시스템 속에서 쏟아내라고 요구한다면 그것은 가혹한 일이다.

말씀에 대한 신뢰성의 붕괴

또하나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표절이라고 밝혀졌을 때의 문제다. 자신이 들은 설교가 표절설교였을 때, 교인들이 받을 충격도 적지 않다. 표절이라고 밝혀진 이후의 문제를 어떻게 감당해 나갈 것인가. 표절이라고 하는 것은 윤리적으로 옳지 않다고 누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의 설교를 그대로 표절했다고 한 상황을 생각해 보라. 자신이 지금까지 은혜 받았다고 생각했던 말씀이 사실은 그 목회자가 표절을 하고 짜집기해서 던져준 것이다 라고 했을 때에 자신 서 있는 자리가 허위인가 진실인가에 대한 심각한 혼란을 줄 수 있다. 그 말씀에 대한 신뢰성에 대한 붕괴, 그것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하는가. 향후에 목회자들의 설교를 대할 때마다 그 사람의 마음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불신의 문제를 감당해 나갈 수 있을까.

또한 목회자 자신이 표절설교자라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에 그 수용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충격을 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표절이 밝혀진 이후에 '표절설교자'라는 낙인이 찍혔을 때에 벗어날 수 있을까.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나갈 것인가. 만일 교회의 합의 아래 용서하고 넘어간다 할지라도 이미 그 사람은 설교자로서 존재할 수 있는 환경과 조건은 심각하게 훼손될 수밖에 없다. 그것을 회복하기에는 엄청난 시간과 세월이 걸린다. 그러한 시간과 세월을 보낼 바에야 제대로 된 설교를 준비해야 되지 않을까? 표절은 스스로 함정을 파는 행위다. 설교자는 하루 속히 표절의 유혹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제 설교자는 정직하고 당당하게 서야 한다. 마른 하늘의 날벼락처럼 갑작스럽거나 요란하게 하지 않아도 된다. 남의 설교로 현란하게 꾸밀 필요도 없다. 아주 단순하고 솔직하게 당신이 사랑하시는 사람들, 삶의 이런저런 어려움으로 아파하는 이들의 신음소리, 억울하게 당하는 이들의 한숨소리, 고통으로 소리치는 울음소리, 아니 말 한마디도 할 수 없어 가슴 속에 삭혀두는 그 무수한 소리를 품에 안고 말씀으로 들어가야 한다. 진정 설교자는 이러한 아픔을 껴안고 영적 고뇌의 과정을 통해 말씀으로 교인들을 향해 온 존재를 열고 겸손 되이 말해야 할 것이다. 그 속에 하나님의 말씀은 펄펄 살아서 나올 것이다. 그 소리들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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