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어떤 틀이나 제도 속에 들어가 있으면 그 틀 밖의 다른 것을 볼 수가 없다. 우리가 사는 지구의 전체적인 모습을 보려면 우리는 지구 밖으로 나가야만 한다. 아폴로 13호를 통해서 본 푸른색 지구의 아름다운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이렇게 그 틀 밖의 세계를 객관적으로 보는 것을 정신 세계에서는 초월이라고 한다.

종교는 초월의 세계를 다루는 것이며 또한 궁극적으로 다시 자기의 세계로 돌아와서 내재의 경지로 나아가야 한다. 초월만을 주장하는 것은 현실과 동떨어진 신비주의적 환상이요, 초월이 없는 것은 한 발자국도 세속주의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초월과 내재의 균형 잡힌 조화가 바로 오늘 우리 한국교회가 서야 할 자리가 아니던가?
  
이런 의미에서 오강남님은 [예수는 없다]라는 책에서 한국교회와 기독교가 나가야 될 방향을 밝혀주고 있다. 오강남님은 "과연 지금의 교회 안에 구원이 있을까?"하는 심각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기만 하면, 주일날 교회에 가서 '믿숌니다' 하고 예배에 참석하기만 하면 그대로 구원을 얻게 되는가?

싸웠다 하면 교회 내분이요, 사기 쳤다 하면 교회의 직분자요, 세상의 권력과 명예와 돈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하고 그런 것들을 제일 사랑하는 한국교회와 교인들 속에 과연 구원이 있을 수 있는가? "아직도 교회에 다니십니까?"라는 농담이 횡행하고 있는 한국 사회의 풍토 속에서 오늘의 한국교회는 과연 어떻게 나아가야 할 것인가?
  
오늘 우리는 예수와 관계없는 기존의 교회와 과감한 결별을 선언해야 할 터인데 왜 머뭇거리고 있는가? 전남 강진에서 목회도 하고 농사도 짓는다는 임의진 목사는 이렇게 과감하게 결별 선언을 하고 있다. "복음적이고 생명적인 신앙이 아니라 자본의 축적에 대한 집착과 내세의 구원에만 관심을 갖는 신앙, 충분히 학문적인 신학이 아니라 교권에 의해 좌지우지되며 한낱 교회경영학 따위로 전락해 버린 신학, 조선인 자신의 심성과 문화가 녹아난 토착 민족교회이자 아시아적 가치로 피어난 우리들의 교회가 아니라 서구적이고 단선적이며 전투사령부처럼 배타적이고 경박스러운 교회와는 미련 없이 결별해야 할 것이다."

이런 세속적이고 무신론적인 교회와 목사들에게서 과감하게 결별을 선언하고 새로운 시대의 생명적이고 복음적인 교회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 오강남님은 그의 책 [예수는 없다]에서 예언자적인 포효를 하고 있으며, 인자하고 인내심 많은 아버지처럼 자세하고 그의 생각을 펼쳐나가고 있다.

1장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는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말로서, 이제 한국교회는 어린아이와 같은 구시대의 유치한 신앙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대의 패러다임에 맞게 전환해야 할 것을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그는 Glauz-Todrank 목사의 [Transforming Christianity]라는 책을 소개하면서 10가지의 패러다임 변환이 나타나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①배타주의에서 다원주의로 ②상하구조에서 평등구조로 ③저 위에 계시는 하나님에서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으로 ④교리 중심주의에서 깨달음 중심주의로 ⑤죄 강조에서 사랑 강조로 ⑥육체 부정에서 육체 긍정으로 ⑦현실 야합에서 예언자적 자세로 ⑧종말론에서 환경론으로 ⑨분열에서 연합으로 ⑩예수님에 관한 종교에서 예수님의 종교로.
  
이렇게 패러다임의 변환이 나타나고 있는 세계교회의 상황 속에서 아직도 한국교회는 옛날 몇몇의 근본주의적인 선교사에 의해 전래된 기독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금의 한국교회는 James Fowler가 말하는 신앙의 여섯 단계에서 어느 단계에 있는 것인가? 파울러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인간이 살아가면서 신앙적으로 완전히 자라게 된다면 모두 6단계를 거친다고 한다.
  
첫 단계에 들어가기 전의 단계는 '전 단계(pre-stage)'인데 이 단계는 어린애기가 배고프면 울고 엄마가 와서 먹을 것을 주면 그냥 좋아하는 것처럼, 지적 능력 같은 것과는 아무 상관없는 무조건적인 신뢰의 단계로서, 무분별적 신앙(undifferentiated faith)이며 아직 이분법적 사고가 생기기 전 단계이다.
  
제1의 단계는 "직관적·투사적"(Intuitive-projective faith)의 단계이다. 이 단계의 신앙은 2세에서 6, 7세 사이에서 나타나는데, 이 때 아이들은 상상과 환상의 세계에 살면서 이에 걸맞는 믿음을 키워간다.
  
제2의 단계는 "신화적·문자적 신앙"(mythic-literal faith)의 단계이다. 이 단계는 초등학교 학생들에게서 발견될 수 있는 것으로서, 자기가 속한 공동체의 이야기, 설화, 신화나 신앙내용이나 의식을 받아들이되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는 단계이다. 아직 이런 것들의 상징적 뜻에는 관심이 없다.
  
제3의 단계는 "종합적·인습적"(synthetic-conventional faith)의 단계이다. 이 단계는 사춘기 때 형성되는 것으로서, 자기가 지금껏 문자적으로 믿어오던 자기 공동체의 이야기나 신앙내용, 의식이 문자적으로만 받아들여질 때의 모순을 의식하는 단계이다. 이런 의식을 잠재우기 위해 모순을 종합해주고 자기의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종합적·인습적 신앙형태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는 아직도 독립적인 사고에 의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지 않았기 때문에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인정과 외적 권위에 의존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다른 사람들의 사고와 행동에 맞추려는 획일적 사고가 강하게 나타나고, 또 주어진 이데올로기에 따라 모든 것을 설명하려 한다. 그리고 그 테두리에서 벗어나 그것을 객관적으로 성찰해보는 기회를 갖지 못한다.

소위 자기 교회에서 가르쳐주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사수하겠다고 애를 쓰는 열성파 사람들 대부분은 이 단계에서 주저앉은 사람들이다.
  
제4의 단계는 "개성화와 성찰의 신앙"(individuative-reflective faith)의 단계이다. 이 단계는 20대 중반의 청년기, 경우에 따라서는 30대 후반이나 40대 초반에서도 형성되는, 자기 자신의 신앙 내용이나 가치관에 대해 심각하게 반성하고 통찰하는 단계이다. 이 단계는 자기가 지금까지 속했던 그 집단의 구성원으로 집단이 주는 가치관이나 신앙내용이나 이데올로기에 그대로 안주하느냐, 혹은 자기 스스로 하나의 독립적 인격체로서 자유롭고 비판적인 사고와 태도를 가질 것이냐 하는 것이 결정되는 중요한 단계이다. 이 단계에 성공적으로 진입하게 되면 자신과 세계를 보는 눈이 새롭게 열리고, 지금까지 검토되지 않던 상징체계가 의미 있는 것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제5의 단계는 "접속적 신앙"(conjunctive faith)의 단계이다. 이 단계는 주로 중년기 이후에 생기는 것으로서, 이분법적 양자택일이나 이항 대립적 사고방식을 넘어서 '양극의 일치'를 받아들이게 되는 단계이다. 5단계에서는 의식과 무의식이 통합되는 단계이다. 진리란 단순한 일차방정식 같은 것이 아니라 다차원적이라는 것, 사물이 서로 얽히고 어울려 있다는 것, 교리나 상징체계 등은 어차피 궁극 실재에 대한 부분적 표현일 뿐이라는 것, 자기의 종교를 포함하여 모든 종교가 긍극실재와 비교할 때 상대적이라는 것, 따라서 모든 종교가 서로 대화하고 협력해야 한다는 것 등등을 발견하게 된다.

무엇보다 종교적 상징이나 의례가, 그것이 나의 것이든 다른 사람의 것이든, 깊이 이해될 때 진정으로 새로운 의미를 전해준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 제6단계는 "보편화하는 신앙"(universalizing faith)의 단계이다. 이 단계는 극소수의 사람만 도달할 수 있는 것으로서, 자아를 완성한 이른바 성인의 경지이다. 어떤 외적 걸림이나 거침이나 울타리에 구애되지 않는 자유와 무애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사랑과 자비와 껴안음의 사람, 그러면서도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정의와 공평함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다. 이런 경지에 도달한 분들은 일반적으로 인습적 사고방식, 가치체계, 사회질서에 대해 '뒤집어 엎는'(subversive) 면을 지니고 있다.

이 단계는 기독교적 용어로 하면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보편적 가치를 위해 다른 모든 일상적 가치를 종속시킨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단계의 사람들은 모든 것을 감싸안을 정도로 큰그릇이 된다. 이들의 사랑과 희생, 열림과 감싸안음으로 인간 개인의 미래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에 미래와 희망이 있는 것이다.

파울러는 대부분의 북미 기독교인은 사실 제2단계나 제3단계에서 성장을 멈춰버린다고 한다. 교회의 권위를 절대적인 것으로 인정하고 성경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는 단계로 일생을 끝내게 되는데, 사실 이 단계에 있는 사람을 교회는 가장 좋아한다. 한국교회는 파울러의 분류에 따르면 어떤 단계에 있다고 볼 수 있는가? 아직 신앙의 전 단계에 머물러 있지는 않는가? 조금 낫다고 하는 목사나 근본주의 신학자는 1-2단계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진정으로 기독교 신앙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고 세상에 진리와 복음을 밝혀주려면 이제 이러한 신앙의 기본적인 단계를 진솔하게 내어놓고 깨달음과 완성의 여정을 향해 십자가를 지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2장 "성경대로 믿는다?"에서 오강남님은 한국교회에서 횡행되고 있는 성경의 문자주의적인 이해에 의문부호를 찍고 있다. 성경은 그 시대의 역사와 상황 안에서 기술한 신앙고백이요 신앙이해이다. 성경은 근본적으로 우리에게 '정보'(information)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고 '변화'(transformation)를 주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믿는다는 것은 성경이 우리의 '궁극적 변화'를 위한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을 열고 우리 속에 있는 무한한 잠재력을 일깨우는 것, 우리의 의식 구조와 가치관이 바뀌어 우리의 삶이 더욱 풍요롭고 자유스럽게 되는데 성경이 절대적 힘을 가졌음을 믿는 것이다. 성경은 기본적으로 우리에게 무슨 "인식 내용"(cognitive contents)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를 비추어 봄으로써 매일 더 높은 차원의 깨달음을 향해 매진하도록 도와주는 일깨움(evocativeness)을 주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인식적 독법'(cognitive reading)을 쓸 것이 아니라, '환기식 독법'(evocative reading)을 써야 한다. 환기식으로 읽는 다는 것은 글이나 말이 고정된 어느 한가지 뜻으로만 이해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요, 읽는 사람이 자기의 환경과 처지, 관점이나 정신적 성숙도 등에 따라 각각 여러 가지 뜻으로, 더욱 깊이, 더욱 의미 있게 읽는 것이다. 예수께서 사용하신 방법이 바로 이러한 방법이다. 예수께서는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지 않으시고, 지금 우리가 처한 구체적 삶에 적용될 수 있도록 더욱 발전적이고 더욱 깊은 해석을 덧붙이셨다. 신약성서의 저자들이 성경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종교적 진술의 이러한 환기식 기능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 진술의 상당 부분은 우리에게 의미 없는 헛소리로밖에 들리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을 읽는 데에 문자주의(literalism)의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주 위험하다고 볼 수 있다. 틸리히에 의하면 문자주의에는 "자연스런 문자주의"(natural literalism)와 "반동적 문자주의"(reactive literalism) 혹은 "의식적 문자주의"(conscious literalism)가 있다고 한다. 자연스런 문자주의 단계란 아직 인지가 발달되지 못해서 신화적인 것과 문자적인 것을 분명히 구별하지 못하는 순진한 단계이며, 의식적 혹은 반동적 문자주의의 단계란 나이가 들어 철도 들고 자주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어느 정도 발달해서 여러 가지 증거나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분명한 사실도 여러 가지 이유나 이해관계에 따라 그것을 의식적으로 억누르는 태도이다. 오강남님은 문자주의에서도 더 위험한 것은 바로 이런 반동적 문자주의라고 말한다. 이러한 의식적, 반동적 문자주의는 이 모든 것이 문자 그대로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자기나 자기 집단의 '정치적·심리적' 목적이나 이익을 위해 모두 문자적으로 사실이라고 외치는 인격파산적이고 정신분열적인 자기 기만성 문자주의라는 것이다. 틸리히는 "비판적 신학의 적은 자연스런 문자주의가 아니라 자주적 사고를 억누르고 공격하는 의식적 문자주의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기에 앞서 한 지성인으로서, 아니 한 인간으로서의 정직성과 성실성에 관계되는 일이라는 것이다.
  성경은 문자대로 다 맞지 않더라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은 그 시대에 그 상황에서 그 문자로 기록되어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는 성경을 그 시대에 국한된 문자대로 읽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문자주의에 빠지면 신앙의 자라남이란 기대할 수 없다. 믿을 수 없는 것을 믿어야 한다는 이런 신앙관에 매여 있으면 우리의 신앙은 모두 억지와 뒤틀림과 위선으로 가득 차게 된다. 이것은 우리에게 오늘도, 이 순간에도 계속 말씀하시는 성령의 음성에 귀를 막는 일이다. 오강남님은 한국교회가 과감하게 이런 문자주의를 훨훨 털어 버리고 나서야 신앙이 줄 수 있는 자유스러움과 해방을 맛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3장 "잘못된 신관은 무신론만 못하다"에서 오강남님은 신론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오강남님은 대부분의 기독교인이 현재 받들고 있는 종교는 다신론이나 단일신론, 더 나아가서 무신론이라고까지 볼 수 있다고 한다. 상당수의 기독교인은 기독교의 하나님이 따로 있고, 이슬람교의 알라 신, 힌두교의 시바 신, 중국의 상제, 한국 전래의 하늘님 등이 별도로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말하는 한 '유일신관'을 견지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유일신론을 믿고 그 믿음에 충실한다면 알라 신, 시바 신, 상제, 하늘님 등의 신이 기독교 신과 다른 별개의 존재들이라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런 신들을 한 하나님에 대한 각이한 견해, 생각, 표현, 관념이라고 보아야 한다. 기독교 하나님이 따로 있고 다른 종교의 다른 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궁극 실재에 대해 각각의 종교가 각각 다르게 생각하고 표현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일신관에 충실하려면 신은 어디까지나 절대적인 '하나'- 그래서 그 바깥에도 따로 있을 수 없고 그 안도 따로 있을 수 없는 통전적 전체라는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현재의 기독교인은 실제적 무신론자처럼 살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절대자 하나님보다는 황금의 신, 사업체의 신, 출세의 신, 권력의 신을 섬기고 있지는 않는가?
  사람은 그가 가지고 있는 신론의 한계를 넘지 못한다. 그래서 신론이 중요한 것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관 중 제일 먼저 정리되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부족신관일 것이다. 우리 부족만 사랑하고 내 민족, 내 나라, 내 교회, 내 가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신관은 배타주의와 이기주의로 흐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구약시대 초기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이러한 신관이었다. 또한 율법주의적 신관은 어떠한가? 율법주의적 믿음은 모든 것을 순종, 불순종으로 따지는 믿음이다. 무조건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켜 지상에서도 복을 받아 남보란 듯 잘 살고, 죽어서 내세에서도 천당에 가던지 무슨 상을 많이 받는 것이고, 계명을 어길 때는 이 세상에서도 별 볼일 없고 죽어서도 지옥으로 떨어지든지 큰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믿음이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무조건 기계적으로 하나님의 계명에서 요구하는 사항을 문자대로 준수하는 것이 최대의 관심사가 된다. 이런 식의 믿음을 가지면 내가 충실한 신앙인 이냐 아니냐 하는 것을 순종, 불순종의 잣대로 잴 뿐 아니라, 남의 신앙마저 같은 잣대로 재면서, 믿음이 좋고 나쁜 것을 가리게 된다. 이러한 율법주의적 신관, 율법주의적 믿음을 가지고 살게 되면 우리의 삶은 '해야 된다', '하면 안 된다'의 차원으로 떨어지게 되며, 믿음이라는 것이 큰 부담이 된다. 종교적 삶이 자유와 해방이 아니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으로 느껴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 무엇이나 '해야 된다'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 치고 신나는 것이란 없다. 물론 이런 율법주의적 믿음이 완전히 나쁜 것만은 아니다. 인류의 의식 발달사로 보거나 개인의 정신발달과정에서 볼 때, 어느 단계에서는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율법주의적 믿음에서만 살아간다면, 우리는 참된 믿음이 가져다주는 신바람, 트임, 역동성, 기쁨을 모르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존재와 비존재의 차원을 넘어서는 궁극적 절대자이다. 우리는 절대자를 절대적인 것으로 믿는다. 이렇게 믿기 때문에 절대자가 아닌 것을 절대자로 인정할 수가 없다. 절대자에 대한 인간의 생각이 어쩔 수 없이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는 인식은 인간 자신의 지적 한계를 솔직히 인지하고 이를 겸허하게 받아들인 결과이다. 따라서 절대자에 대해 우리가 어느 한 때 형성한 우리의 생각을 절대화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를 절대자의 위치에 올려놓는 우상화이다. 중요한 것은 절대자 하나님 자신과 하나되는 체험을 통해 삶을 완성시키는 것, 그것을 신앙의 궁극 목표로 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절대자에 대한 믿음의 세계적인 추세는 초월과 내재를 동시에 강조하는 범재신론(panentheism)쪽으로 나아가고 있다. 범재신론은 모든 것이 하나님 안에 있다는 생각이다. 범신론은 신은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가 그대로 신이라는 것을 주장하는데 반해, 범재신론은 우리와 하나님, 혹은 세상과 하나님을 분간은 하지만 유신론처럼 하나님과 우리, 혹은 하나님과 세상이 동떨어진 개별적인 존재로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신은 세상에 존재하지만 그러나 세상의 모든 존재를 합한 것이 아니며 그 이상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신을 이야기할 때 초월적인 존재로 이야기하는 것은 신과의 관계에서 어쩔 수 없이 느낄 수밖에 없는 심리적 거리감, 신의 무한한 신비성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문자적으로 생각해서 신과 우리, 신과 세계 사이에 넘나들 수 없는 존재론적 간극이 있는 것을 생각하면 곤란하다. 이것은 신의 심리적 초월 내 인식론적 초월을 존재론적 초월로 오해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제 종래까지의 신관에서 신을 새롭게 보며 실감 있게 체험할 수 있는 길은 결국 우리의 마음을 열고 우리 스스로 그의 임지를 체험하는 것,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그와 하나됨을 경험하는 일을 통해서만 가능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오강남님은 이렇게 하나님을 직접 체험하고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믿는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을 바로 보는 것이 중요하게 되는 것이다.

  4장 "예수는 없다"에서 오강남님은 예수에 대한 그의 기독론 이해를 피력하고 있다. 예수님을 이야기할 때 우리가 명심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us)와 '신앙의 그리스도'(the Christ of faith)를 구별해야 된다는 것이다. 역사적 예수는, 나사렛 예수, 인간 예수는 기독교 역사를 통해 형성된 예수님에 대한 믿음 이전의 자연인으로서의 예수님을 의미한다. 그리고 신앙의 그리스도, 교회의 그리스도, 신조의 그리스도는 인간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 초대 교회 교인, 그 후 많은 그리스도인과 신학자가 예수님과 예수님 사건에 대해 그들이 체험한 바, 반응한 바, 믿게 된 바, 의미 있게 해석한 바에 따라 형성된 예수님 상을 말한다. 최근 신학계의 동향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보다는 '예수님의 믿음'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한다. 예수님에 대해 역사적으로 이루어진 이런 저런 교리나 이론을 무조건 믿는 것보다는 예수님의 믿음, 예수님이 가지고 계셨던 믿음, 예수님이 지니고 계셨던 마음을 알고 우리도 그런 믿음, 그런 마음을 갖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이나 동정녀 마리아 이야기나 청년 예수에 대해서 생각해야 한다. 그런 교리는 어느 역사적 시점의 제약된 정보나 지식에 입각해서 형성된 것이고, 그 때의 특수한 필요에 부응하기 위해 만들어진 특수한 교리 체계인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영원불변한 진리 자체라 여기면 곤란한 것이고 예수님의 참된 정신을 되살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싸움꾼 예수는 지난 세월 군국주의 사고방식이 팽배할 때 군국주의적 시각에서 본 예수 상이었다. 그러나 이제 시대가 바뀌었다. 19세기 제국주의적 낡은 사고방식을 아직도 우리가 지향해야 할 이상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 식민지주의, 군사주의에 입각한 사고는 이제 우리가 사는 세상에 설자리가 없다. 상대방은 싸워서 물리칠 대상이 아니라 껴안아 하나가 되어야 할 이웃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신 분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 이후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인간의 실존적 한계라는 필연적 상황뿐만 아니라, 처참한 식민지 치하에서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며 신음하던 자기의 삶에 새로운 의미와 희망을 불어넣어 준 예수님, 새로운 하나님, 새로운 세상을 알게 함으로 보는 눈과 삶 자체를 완전히 바꾸어주신 예수님, 구원의 기쁨을 가져다 주신 이런 예수님이 더할 수 없이 귀하고 중요한 분이었기에 이제 모든 것을 바쳐 그 예수님을 선포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그들은 예수님을 선포하기 시작하면서 예수님을 구체적으로 어떤 분으로 이해하고, 어떤 분으로 선포하는 것이 가장 좋을까 하는 것에 대한 심각한 고민이 따르게 되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예수님의 삶과 죽음에 대한 여러 해석이 등장하게 된다. 일련의 각이한 기독론의 포물선이 그려지게 된 것이다. 그러면 그들이 당시에 이해하고 해석하고 제시한 예수님 상, 혹은 기독론은 어떤 것들이었을까?
①"마라나타 기독론"이다. 예수님을 재림하실 주님, 세상을 심판하고 완전한 구원을 이루실 구주로 보는 것이다. 이런 기독론에서 강조하는 단어는 바로 '주님'과 다니엘 7:13에 나오는 구름 타고 오실 '인자'이다.
②"신인 기독론"이다. '신인'이란 그 당시 희랍 사회에서는 기사 이적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이 말은 예수님의 신성을 특별히 강조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저 신비한 능력을 소유한 위대한 분이라는 정도의 칭호였지, 그것이 반드시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일한 분이라는 본체론적 의미는 아니었다. 예수님의 이적에 대한 이야기는 바로 이런 기독론을 배경으로 하고 나온 것이라 볼 수 있다.
③예수님을 하나님 '지혜(Sophia)'의 현현으로 보는 것이다. 유대인 사이에서는 잠언 같은 지혜서에 나오는 지혜가 하나님의 지혜로서, 이 지혜에 따라 백성을 가르치는 자가 나타난다고 보았는데, 예수님을 바로 그분이라 본 것이다.
④예수님을 '말씀(Logos)'으로 보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생각이다. 이것이 바로 수육의 기독론이다. 로고스는 우주의 원리나 이성이라는 뜻으로 '지혜'와 비슷하지만, 지혜가 여성적인 면을 강조했다면 로고스는 남성적인 면이 두드러진다. 지혜와 로고스 모두로서의 예수님으로 내려오다가 4,5세기에 이르면 점차 로고스로서의 예수님 상이 우위를 차지하게 된다.
⑤'대속적 기독론'이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희생양으로 이해되었다. 여기에서 나온 것이 '유월절 어린양',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등의 생각이다. 지금 일반 복음주의나 근본주의 교회에서 가장 강조해서 가르치고 있는 기독론이다.
⑥사망의 권세를 이기는 '승리자'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이다. 이 기독론은 특히 핍박으로 죽어 가는 동료 그리스도인을 보면서 더욱 중요한 것으로 굳어졌다.
⑦'신령한 스승'으로서의 예수님이다. 몇몇 배운 사람이나 넉넉한 사람만 가르침을 주던 그 당시 서기관이나 철학자와는 달리 사회 밑바닥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온갖 사람을 골고루 가르치는 위대한 스승으로서의 예수님을 부각하는 것이다.
⑧예수님을 '만유의 주'로 보는 것이다. 이런 기독론은 로마황제 콘스탄틴 시대에 생겨났다. 콘스탄틴이 그리스도를 자기의 수호신으로 받아들인 이후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로마 황제보다 더 위대한 세상의 통치자로 이해하게 되었다. 이 때 이후 예수님은 로마 황제에게만 허용되던 자주색 두루마기를 입은 하늘 제국의 황제로 그려지기 시작하고, 그 하늘 황제를 위한 알현의 장소로서 거대한 성당이 생겨나게 되었다. 대략 4세기 초까지 생긴 이런 여러  기독론, 혹은 예수 상을 근간으로 해서 4세기 이후 이른바 기독론을 위한 공의회를 거쳐 삼위일체론 같은 복잡한 기독론으로 발전해 온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이런 기독론, 이런 예수 상이 좋다 나쁘다를 따질 필요가 없다. 단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런 것이 그 당시 사람들의 영적 상태와 지적 능력과 심리적 필요와 실제적 문제와 정치적 여건과 사회적 환경 등에 따라 그들이 생각해낼 수 있는 최고의 이해요, 해석방법이었을 것이고, 따라서 당시로서는 가장 의미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분명한 것은 기독론이란 근본적으로 하늘에서 하나님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내 아들 예수를 보낼 터이니 너희는 이렇게 생각하라고 불러준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기독론이나 예수 상은 당신의 문화적 배경과의 관계에서 생겨났으며, 한 가지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또 어느 한 시점에 완전히 주어지고 끝난 것도 아니었다. 다양한 생각이 자유롭게 나타나 서로 대화나 변증법적 관계에서 오랜 기간을 두고 자연스럽게 발전해 나온 것이다. 이렇게 어느 한 시대에 형성된 기독론은 그 역사적 맥락을 떠나서는 제대로 이해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도 이 시대의 구체적인 역사 맥락에서 우리의 삶과 정황에 의미 있는 방법으로 예수를 다시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우리의 믿음이 우리의 실존적 삶과 직결된 것이 되기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만 한다. 그러나 물론 지금까지의 이해와 해석을 무조건 버리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어느 특정한 기독론이 형성될 당시의 예수를 따르던 사람이 그 당신 문화와의 관계에서 예수를 이해하고 해석한 것과 같은 방법으로, 그리고 그들이 예수에 대해 가지고 있던 사랑과 헌신의 태도로 예수를 다시 조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모든 기독교인의 공통적 과제인 것이다.
  이런 이해를 가지고 오강남님은 이 시대의 기독론으로서 장자와 동양사상의 지혜를 빌어 '성불하신 예수님'으로 그리고 있다. 성불하신 예수님은 예수님을 '영의 사람'으로 이해한다는 뜻이다. '성령의 사람이 된다'고 하는 것이다. '성령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엄청난 종교적 체험을'을 갖는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세례 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이"임하였다. 또한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고 기도하며 시험받으실 때도 중요한 영적 체험을 하셨을 것이다. 예수님의 삶은 언제나 성령에 의한 삶이었다. 성령의 체험을 다른 말로 하면, 우주의 궁극적 실재에 접하는 일이다. 그것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일이며, 도를 통하는 체험, 성인이 되는 체험, 진여를 보는 체험이다. 오강남님은 성불하신 예수님의 깨달음은 그가 실천적으로 보여주신 자비였을 거라고 보고 있다.
  결국 예수를 바로 믿는다는 것, 참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의 기본은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초청에 응해 그를 따르는 것이며, 그의 제자가 되는 것이다. 신약성서에 누구의 제자가 된다고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와 '길을 함께 가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과 길을 함께 가는 것이며, 예수님의 '길벗'이 된다는 뜻이다. 항상 그와 함께 다니며, 그에게서 배우고, 결국엔 그와 같이 되는 것이다. 진정으로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간다는 것은 예수님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예전의 나를 죽이고 새로운 나로 부활하는 엄청난 변화를 체험하는 것이다. 가만히 앉아서 입술로 고백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일어서서 직접 그와 함께 길을 감으로 나도 이런 엄청난 변화에 동참하는 것이다.
  5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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