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리는 크리스마스는 더 이상 그리스도인들만의 축하 절기가 아니다. 크리스마스는 기독교 중요 절기 가운데 유례없이 일반에 깊숙이 뿌리내렸고 급기야 소비와 향락을 부추기고 즐기는 대표적인 날로 전락하고 말았다.

일례로 세계 전체 자원의 70%를 소비한다는 미국은 추수감사절과 성탄절 사이 4주 동안, 한 해에 팔리는 모든 상품의 40%가 팔린다 한다. 놀라운 일 아닌가? 이제 우리는 크리스마스 하면, 아기 예수 탄생과는 그다지 상관없이 보이는 신화 하나도 대중에 깊숙이 자리잡았음을 알고 있다. 약삭빠른 장사꾼들은 성 니콜라스를 아이들에게 선물을 전해주는 신비의 싼타크로스 할아버지로 훌륭하게 둔갑시키는데 성공한 것이다.

따라서 요즘엔 아이들이나 어른들이나 가릴 것 없이 크리스마스가 다가와도 애석하게도 더 이상 아기 예수 탄생엔 별 관심 없는 것 같다. 아기 예수를 기다리느니 차라리 크리스마스를 겨냥한 화려한 헐리웃 영화들의 개봉과 싼타크로스를 기다리는 게 낫다는 생각이 지배하고 있지 않는가?

하지만 이 시점에서 우리는 아기 예수 탄생을 둘러싼 첫 번째 성탄절 전후에 과연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다시 살펴보자. 그리하여 지금의 크리스마스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을 해보는 것도 매우 뜻 깊은 일이리라. 이 일을 위해 호슬리의 책은 우리들에게 첫 번째 크리스마스에 대한 매우 유익하고 중요한 역사적 사실들을 알려주고 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주전 4년, 독재와 철권통치로 악명 높던 헤롯이 사망하자 그 동안 억눌렸던 민중들의 분노가 한꺼번에 폭발하고 말았다. 바로 이 시기에 대중적인 세 개의 메시아 운동이 일어났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로마는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였다. 이때 로마군에 의해 자행된 무자비한 학살과 노예징발은 모두 후에 예수께서 주로 활동하였던 곳에서 일어났다.

시리아 총독 바루스(Varus)가 이끄는 로마군은 저항의 본거지인 나사렛 부근의 세포리스를 초토화시키고 그곳 주민을 노예로 만들었으며, 엠마오 주민은 모두 다 도망갔고, 마을은 완전히 불에 타 없어졌다. 로마군은 반란에 관여된 지역을 모두 소탕했으며, 많은 사람을 가두었고, 약 2천명이나 되는 유다인들을 십자가에 처형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나는 오랫동안 아기 예수 탄생시 한밤중에 나타난 천사와 천군이 "지극히 높은 곳에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눅 2:14)"라고 노래한 것을 그저 신비롭고 아름다운 이야기로만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기 예수 탄생의 역사적 배경을 알고서는 이들의 노래가 전혀 새로운 차원의 의미로 다가왔다.

로마군의 살육으로 산더미 같이 쌓인 시체들, 한 가닥 희망이라고는 도무지 보이지 않았고 참혹한 나날들만 지속되던 때에 그들 가운데서 조용히 구원자 아기 예수가 태어났던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친구를 따라 예수전도단 찬양모임에 다니면서 즐겨 불렀던 복음송이 하나 있었다. "내 영혼 주 찬양하며,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함은 능하신 이가 큰 일 행하시니 그 이름 찬양해". 이 마리아의 찬송이 담고 있는 깊은 정치적 의미도 모르고 그저 찬양에 도취되어 부르던 기억이 있다. 하긴 마리아의 찬송시에 담긴 사회 정치적 의미를 제대로 알고 이를 노래로 만들어 부르는 사람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대부분의 찬양 선교단체들이 탈(몰)역사화 되어있는 한국 실정에서 '복음'송이어야 할 찬양이 복음과는 별로 상관없이 보이는 노래로 만들어지고 불려진다는 것은 서글픈 현실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에 대한 책임을 이들에게만 고스란히 전가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성서 해석학 분야에서 현대 신학의 특별한 관심들은 마리아의 노래와 같은 승리의 노래 속에 담긴 혁명적인 주제를 은폐해왔음"을 저자가 밝혀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학자들이 구원을 지극히 개인적이고 영적인 것으로 이해하는데 치중한 나머지, 예수 탄생의 역사적 배경 속에서 얻을 수 있는 특수한 의미를 간과하게 되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그러다 보니 누가복음서에 나오는 마리아의 찬가, 사가랴의 노래, 시므온의 노래가 각기 담고 있는 당시의 유대사회를 향한 사회 정치적 차원의 메시지가 탈각된 채, 단순히 기독론적인 의미만을 갖고 있는 것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일반적으로 알려졌던 것이다.

결국 저자 호슬리에 따르면, 예수 탄생 설화는 무수한 정복전쟁을 통하여 무자비한 대량학살과 대량노예화로 시저에 의한 로마의 평화(팍스 로마나)를 구가하던 시대에 진정한 평화를 가져올 구원자가 누구인지를 선언하는 민중들의 의미심장한 전승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면서 아기 예수 탄생의 역사적 맥락과 당시 민중들이 아기 예수 탄생 이야기의 전승을 통해 간절히 염원했던 해방이 무엇이었는지를 깨닫게될 것이다.

근데 문제는 이 이야기가 여기에서 결코 그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저자 호슬리는 "그때 거기"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 여기"의 사건으로 아기 예수 탄생 설화는 다시 재현되고 있다고 말한다.

즉 세계적인 초강대국 미국에 의해 세워진 중앙아메리카 괴뢰정부들에 의해 엄청난 피의 살육과 착취, 억압, 투옥, 감시, 초토화가 자행되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게다가 최근엔 어떤 이의 표현대로 "세계 최대의 부자 나라가 세계 최대의 가난한 나라와 전쟁을 벌이는 어처구니없는 참극"이 연출되고 있다. 과연 니카라과,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멕시코, 브라질... 이 모든 나라들에서 가까운 과거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예컨대, 미국에 의해 세워진 괴뢰정부였던 니카라과의 소모사정권은 니카라과를 마치 개인 농장처럼 취급했다. 국가 은행을 자신이 멋대로 유용할 수 있는 개인 구좌로 전락시켰고, 외부의 원조나 구호물자가 있으면 자신의 일가와 국가방위군 장교와 소수 권력층들이 죄다 착복하였다. 소모사 일가 및 미국식 훈련을 받은 국가방위군 장교들은 독재 정권 40년 동안 대략 4만명의 니카라과인을 죽여 권좌를 유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기까지는 물론 미국의 비호와 군사적 원조가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들 나라 각처에서 생겨난 '기초공동체'들은 독특한 성서 읽기를 하면서 자신들이 처한 현실을 점차 직시하게 되었다. 가령, 1970년대 솔렌띠나메의 민중은 독재자 소모사를 헤롯과 동일시했고, 헤롯이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눈이 뻘겋게 찾는 것을 소모사가 니카라과를 해방시킬 자를 미리서 제거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모습과 똑같다고 읽었다. 헤롯이 죽은 뒤에도 예수의 부모들과 어린 예수는 계속 숨어 있어야 했는데, 이것은 소모사가 죽고 다른 사람이 권력을 잡았을 때, 니카라과의 민중들이 계속해서 겁을 먹었던 상황과 똑같은 것으로 인식했다.

이는 자신들이 처한 현실에 대한 전이해(前理解)를 가지고 성서를 읽었을 때, 성서가 담고 있는 의미가 보다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다가오게 되었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이것은 한국에서 유신독재가 횡행하던 1970년대 민중신학이 태동하면서, "민중의 눈으로 성서를 읽자"며 현실 상황과의 유비(analogy)를 통한 성경공부를 주창하였던 것과 그 맥을 같이한다. 이러한 민중의 삶과 분리되지 않는 성서 읽기는 모호하고 추상적인 말씀으로만 다가오던 성서를 우리가 당면한 현실의 우리들 이야기로 바꾸어 이해하게 만드는 "해방의 해석학"을 제공한다.

올해도 어김없이 크리스마스가 다가온다. 아기 예수가 태어났던 당시와 같이 여전히 우리 주위엔 기쁨과 해방의 소식을 간절히 기다리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다. 이들에게 첫 번째 성탄의 의미를 깊이 되새기며 따뜻한 작은 희망이 되고자 하는 모든 분들께 이 책을 꼭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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