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민영진 목사님의 '설교자와 나누는 욥기 이야기'는 이번 글로 마감합니다. 곧 <한국성서학연구소(소장, 김지철 교수)>에서 단행본으로 출간할 예정입니다. 참고로 지금까지 연재된 5회 분량은 욥기 전체를 다룬 것 중 일부임을 알려 드립니다.  

설교자와 나누는 욥기 이야기를 준비하는 동안 두 번의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였다. 첫 번 감사절에 즈음하여서는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 도날드 맥컬러 교수의 방한과 그의 책 <하찮아진 하나님?>의 우리말 번역과 출판 기념회를 계기로 그의 저서에 나타난 신학을 읽으면서, 우리가 감사절을 맞이할 때마다 특별히 감사를 하는 그 하나님이 진정한 하나님이기보다는 우리의 이기적 욕망이나 들어주는 우리가 만든 우상일 수도 있다는 반성을 설교의 주제로 삼아 이 난을 통하여 한 편의 설교를 구상했던 일이 있다.
    
다음 해 감사절에는 한 중고등학교 교사들이 드리는 감사절 예배에 설교 부탁을 받았다. 개인적으로는 작년과는 좀더 다른 각도에서 감사에 대한 조명을 하고 싶었다. 새로운 메시지를 기다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와 닿기를 기다리면서, 한 편으로는 성서 이곳 저곳에 쓰여진 말씀을 명상했고, 다른 한 편으로는 지난 한 해 동안에 겪었던 은총의 순간들을 회상해 보면서 젊은 지성인 교사들 앞에서 고백하고 함께 나눌 감격적인 일들이 어떤 것이었는지 돌이켜 보았다. 도대체 내 속마음이 무엇을 바라고 어떤 사건을 기대했는지 나도 모르겠는데, 감사와 관련하여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눌 필자 개인의 감격적인 경험이 별로 생각나지 않았다.
    
그런데, 설교의 영감은 이 두 곳에서 오지 않고,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제 3의 곳에서 왔다. 그것은, 한 편으로는, 필자가 지니고 있었고 해결하지 못했던 한 문제를 숙고하는 것, 그리고 다른 한 편으로는 우연한 기회에 들은 한 설교자의 설교와 맞물려 그 해 감사절에 필자가 전해야할 메시지를 구상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필자가 지니고 있으면서 쉽게 해답을 얻을 수 없었던 문제라는 것은 그 무렵에 있었던 한 동역자의 요절(夭折)과 관련되어 있다. 지금 필자의 뇌리를 떠나지 않고 있는 한 상념이 있다. 한 동역자의 죽음과 뒤에 남은 교인들의 허탈과 그의 친구 목회자 중에 한 사람의 자괴감이 깃들인 탄식과 고백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고 생생하게 남아 있다. 위암으로 반 년 남짓 투병을 하다가, 한창 나이에, 젊은 아내와 어린 자녀와 양떼 같은 교인들과 막 시작하려한 한국 최초의 전원 교회 설계를 뒤에 남긴 채,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의 장례 직전 그를 추모하는 자정 예배에서, 그 교회의 소속 목사로서 그를 돕던 한 동료 목사는, 목회자를 잃고 슬픔에 잠긴 교인들 앞에서 참회를 하고 있었다.

"성도 여러분, 저는 지금 제 마음속에 여러분에게 고백해야할 괴로운 문제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의 목사님이 병상에서 투병하는 동안에 저는 여러분 앞에서 외쳤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목사님을 반드시 살려 주실 것이므로 우리가 할 일은 믿고 기도하는 것뿐이라고 여러분을 격려했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목사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는 목사님의 관 앞에서 조문객의 인사를 받고 있습니다. 제가 이제 여러분에게 무슨 말을 한들 여러분이 저의 말을 믿으시겠습니까? 저는 언젠가는 가까운 장래에 이 문제를 가지고 여러분 앞에 다시 서서 새롭게 깨달은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필자의 심정이 그의 심정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어디, 이 괴로움이 그 동역자만의 것이겠는가? 병원에서 포기한 사람을 대할 때마다 마지막으로 기대하는 것이 바로 기적의 발생이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는 말을 들으시고도 예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딸이 나을 것이다.” 라고 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을 상기하게 된다. 우리의 동료 목사도 병상에 누운 친구 목회자의 임종을 빤히 보면서, 그래서 한 편으로는 장례식 준비를 하고 있으면서도, 교인들에게는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목사님을 살려주실 것입니다.”하고, 기회 있을 때마다 설교하고 권면했다는 것이다. 임종을 맞이한 당사자는 벌써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는데, 그 일에 협조를 못하고, 당사자에게도 끝까지 죽음을 부인하고, 교인들에게도 그가 반드시 회복될 것이니 기도를 열심히 하라고 한 것이 결코 올바른 태도가 아니었음을 그는 뉘우치고 있었다.


하나님, 왜 하필이면 접니까?

어느 해 10월 둘째 주일에 나는 미국인 손님 20여명을 데리고 정동제일교회의 영어 예배에 참석한 일이 있다. 주보를 보니, 그 날의 설교자는 아세아연합신학대학의 기독교교육학 교수인 글렌 젠트(Glenn A. Jent) 목사이다. 성서 본문을 보니, 욥기 3장 25-26절이다. 설교 제목이 길다. '하나님, 왜 하필이면 접니까? 제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고 이런 벌을 내리십니까?'(Why me, Lord? What have I done to deserve this?)이다. 눈이 번쩍 뜨인다. 이것은 당시 이 저서를 준비하고 있던 두 해 동안 내가 만난 두 번째의 욥기 설교였다. 우리의 독자들과 함께 나눌 실제적인 자료가 생긴 것이어서,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관심을 집중하였다. 한 외국인 설교자가 한국교회의 영어 청중을 향해 외치는 욥기의 메시지가 무엇일지 궁금했다. 그의 설교를 우선 다음과 같이 줄여서 소개하고 우리의 감동을 첨삭해 보자.

욥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 믿음이 좋은 사람이었다. 그런 만큼 그는 만사가 형통하는 삶을 살았을 법한데, 실제로는 그러하지 못했다. 그의 믿음과 그의 행 불행은 관계가 없는 것 같다. 오히려, 믿음이 있는 이들 옆에는 늘 사탄이 함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베드로가 한 말, 원수인 악마가 우는 사자같이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닌다는(벧전 4:8) 말이 바로 이것을 두고 한 말인 것 같다. 믿음이 좋을수록,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으면 받을수록, 오히려 사탄의 공격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욥의 경우에서 본다.
    
욥기 1-2장에서 우리는 욥에게 연속적으로 밀어닥치는 불행을 본다. 침략자들이 욥의 소떼를 빼앗아가고 욥의 종들을 살해한다. 곧 이어서, 양떼와 목동들이 벼락을 맞아 죽어버린다. 아직 사태가 수습되기도 전에 또 다른 침략자들이 쳐들어와 욥의 낙타떼를 잡아가고 종들을 살해해 버린다. 이 보고를 막 듣고 있는데, 이번에는 욥은 자기 자녀들이 한 집에서 잔치를 벌이다가 집이 무너져 모두 죽고 말았다는 보고를 듣는다. 모든 재산과 자녀까지 다 잃은 욥은 병이 들어 죽을 지경에 이른다. 욥의 아내는 고통을 못 이겨 괴로워하는 남편을 향하여, 하나님을 저주하면 그 벌로 죽을 수 있으니까 차라리 그렇게 라도 하여 죽음으로써 그 고통에서 벗어날 길을 찾아보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욥은 '우리가 누리는 복도 하나님께 받았는데, 어찌 재앙이라 해서 못 받는다 하겠소?'(욥 2:10) 하고 말하면서 아내의 제안을 거절한다.
    
욥을 위로하려 한 아내의 말이 '어리석은' 생각이라면, 욥의 친구들의 말은 '사려 깊지 못한 말'이다. 엘리바스는 '경험주의'를 대표하고, 빌닷은 '전통주의'를 대표하고, 소발은 '증류하여 얻은 지혜'를 대표하고, 엘리후는 '젊은이의 열정'을 대표한다. 이 친구들은 욥의 문제의 내면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에 관한 진실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충고는 모두 '사려 깊지 못한 말'이 되고 말았다. 친구들의 말은, 하나님이 의로우신 분이라는 것, 그래서 하나님은 의로운 사람에게 복을 베푸시고 악한 사람에게는 벌을 내리신다는 것, 따라서 욥이 당하는 고통은 죄의 결과라는 것이다(욥 4-5장).

오늘의 '성공의 신학'이나 '번영의 신학' 혹은 '축복의 신학'이 이와 비슷한 주장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 바울이나 죄없으신 예수께서 번영을 누리기보다는 고통을 당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평안보다는 고통이, 세상적인 시각으로 보는 성공보다는 실패가 그들의 삶을 특징 지웠다는 점에 착안해야 한다. 친구들의 말이 사려 깊지 못한 말이었다고 말하는 두 번 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 알기를, 사람이 의롭던 불의하던 하나님에게는 아무런 차이가 없고, 다만 차이가 있다면, 개인적으로 의로운 사람은 복을 받도록 되어 있고 악한 사람은 저주를 받도록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일 뿐, 하나님은 이런 일에 무관하시다는 생각이다(욥 22장).

이것은 현대의 기계론적 우주관에서 보는 비인격적 하나님 이해와 일맥상통한다. 우주는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기계적인 법칙에 따라 돌아가는 것일 뿐, 살아 계신 인격적인 하나님이 개인의 삶에 구체적으로 관여하시지는 아니한다고 하는 생각과 같다. 친구들의 사려 깊지 못함이 나타난 세 번째 국면은 죄를 고백하기만 하면 만사가 다 형통해진다고 하는 생각이다(욥 36:8-12). 간구하기만 하면 다 얻는다는 것이다. 아무리 죄를 많이 지었어도 그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은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그의 간구까지 다 들어주신다는 것이다. 오늘날도 이런 신학이 있다. 목적을 정하고 주실 줄 믿고 간구하면 다 얻는다는 신학이다.

그러나 의로운 바울에게도 간구했으나 얻지 못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바울은 주께서 그의 몸에 가시를 주셨는데, 고통스럽기가 마치 사탄의 하수인이 그를 괴롭히는 것 같다고 했다. 바울은 그것을 두고서 그것이 그에게서 떠나게 해 달라고 세 번이나 주님께 간구하였지만, 주께서는 '내 은혜가 네가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하게 된다' 하고 말씀하시면서 그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았던 경험을 말하고 있다(고후 12:7-9).
    
욥이 마냥 옳은 것만도 아니다. 욥이 친구들의 말을 들어보니, 헛소리다. 그리하여, 그들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변호하려다 보니, 결과적으로 자신의 의로움만을 내세우게 된다. 처음부터 욥은 친구들의 공격에 이렇게 대처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욥과 그의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우리는 욥의 부적절한 대응을 본다. 사람 앞에서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면 할수록 욥은 하나님 앞에서마저도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무죄한 자가 부당하게 고통을 당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우리는 사태를 올바로 파악하지 못하고 만다. 의인은 없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이 불필요한 그러한 사람은 이 세상에 없는데, 그리하여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비를 간구할 수밖에 없는데도 불구하고, 고통 가운데서 우리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면서 자신의 의로움만을 주장하다 보면, 우리는 '하나님, 왜 하필이면 접니까? 제가 무엇을 그렇게 잘못했다고 이런 재앙을 받게 하십니까?' '왜 착한 사람에게 불행이 닥칩니까?' 하고 불평하게 된다.
    
놀랍게도 이러한 욥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신다(욥 38장). 하나님은 욥의 고난의 원인을 설명하지 않으신다. 욥이 알지 못하는 창조의 신비를 욥에게 상기시키신다. “죄없는 나에게 이런 불행이 닥쳤다.”고 하나님께 항의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이 불의하시다고 선언하는 것이 되버리고 만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것은 용납 받지 못할 일이다. 우리가 늘 예수를 주목해야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욥의 아내도 욥의 친구들도 욥을 위로하지 못했다. 욥의 고통만 더 크게 했을 뿐이다. 하나님의 현현도 욥의 고통을 설명해 주지는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다만 당신 자신이 친히 욥을 돌보시고 사랑하신다는 것을 암시하시므로써 욥으로 하여금 그 고통을 견디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여전히 그를 돌보시고 사랑하신다는 확신이 욥으로 하여금 자신의 고통을 대하는 모든 태도를 바꿀 수 있게 한 것이다. 우리에게도 고통이 온다. 의로운 사람에게도 불행이 닥친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내세에 대한 보장이다. 우리가 받은 고통을 영원한 세계에서 보상받게 될 것이다.

캔사스 시티 로이열 야구팀의 메니저였던 딕 하우서(Dick Houser)가 암 말기에 이르러 죽음을 준비하고 있을 때, 기자가 그에게 물었다고 한다. 왜 이런 불행한 일이 하필이면 자신에게 생겼느냐고, “Why me?” 하고 자문해본 적이 있느냐고, 기자가 묻자, 그는, 그렇게 묻기 보다는, 자기라고 예외일 수는 없지 않겠느냐고, “Why not me?” 라고 묻는 것이 더 적절한 질문이 아니겠느냐고 말했다고 한다. 얼마나 놀랍고 성숙한 통찰인가? 같은 말을 욥은 '우리가 누리는 복도 하나님께 받았는데, 어찌 재앙이라 해서 못 받는다 하겠소?'(욥 2:10) 하고 말하였다.

    
이 설교를 들으면서 필자 자신이 배운 것, 우리 독자들과 함께 소중하게 나누고 싶은 것은 다음과 같다.

(1) 캔사스 시티 로이열 야구팀의 메니저였던 딕 하우서가 한 말을 통하여, 나 자신이 묻고 있던 문제에 대하여 문제점을 새로운 각도에서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창 나이에, 이 세상에서의 삶을 이제 곧 끝내야 한다는 의사의 선고를 받고서, “왜 하필이면 나에게 이런 일이 ... ?”라고 묻지 않고, 그런 예가 극히 드문 예가 아니고 흔히 볼 수 있는 경우라서 그랬을까, 암으로 요절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임종 앞에서 “나라고 이런 일을 당하지 말라는 법이 있느냐?” 하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죽음 앞에서 실제로 이렇게 초연할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죽음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살아 있는 이들에게 큰 감동을 준다. 감동은 어떻게든지 감동을 받은 그 사람에게 구체적인 영향을 끼칠 수가 있다.
    
(2) 이 설교자는 그의 전공이 성서학도 아닌데도, 더욱이 한 구절을 본문으로 하여 설교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욥기 전체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우리 설교자들에게 좋은 모범이 된다.
    
(3) 이 설교에서 또 배울 수 있었던 것은, 설교자의 관찰이 욥의 친구들의 사려 없음을 지적하는 것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또한 욥의 친구들의 설교에 나타난 신학 사상이 당시 유대교의 전통적인 신학을 반영한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그것과 유사한 현대의 사상을 소개하여, 그의 설교를 듣는 현대인들로 하여금 욥의 친구들의 사상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것은 그 설교자가 평소부터 쌓은 현대의 여러 사상에 대한 폭넓은 이해의 반영으로써 우리 설교자들에게 역시 모범이 된다.
    
(4) 설교자는 이 설교에서 욥의 친구들을 비평하는 대신 욥을 두둔하는 태도를 나타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욥 자신마저도 친구들이나 하나님께 대한 태도에 문제가 있었던 것을 지적하는 것은 설교자의 깊은 통찰이었다고 볼 수 있다. 욥에 대한 편애가 절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5) 욥의 태도를 비판하는 척도로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을 말하고 있다는 것,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의인은 없다는 것을 지적함으로써 이 설교로 하여금 유대교의 설교에서 머물게 하지 않고 기독교의 설교가 되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 설교는 설교의 지향점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이어야 한다는 것을 재확인시켜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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