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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왜 하필이면 접니까?
설교자와 나누는 욥기 이야기(5)
  • 민영진 (newsnjoy@newsnjoy.or.kr)
  • 승인 2000.10.06 18:18
편집자주/ 민영진 목사님의 '설교자와 나누는 욥기 이야기'는 이번 글로 마감합니다. 곧 <한국성서학연구소(소장, 김지철 교수)>에서 단행본으로 출간할 예정입니다. 참고로 지금까지 연재된 5회 분량은 욥기 전체를 다룬 것 중 일부임을 알려 드립니다.  

설교자와 나누는 욥기 이야기를 준비하는 동안 두 번의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였다. 첫 번 감사절에 즈음하여서는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 도날드 맥컬러 교수의 방한과 그의 책 <하찮아진 하나님?>의 우리말 번역과 출판 기념회를 계기로 그의 저서에 나타난 신학을 읽으면서, 우리가 감사절을 맞이할 때마다 특별히 감사를 하는 그 하나님이 진정한 하나님이기보다는 우리의 이기적 욕망이나 들어주는 우리가 만든 우상일 수도 있다는 반성을 설교의 주제로 삼아 이 난을 통하여 한 편의 설교를 구상했던 일이 있다.
    
다음 해 감사절에는 한 중고등학교 교사들이 드리는 감사절 예배에 설교 부탁을 받았다. 개인적으로는 작년과는 좀더 다른 각도에서 감사에 대한 조명을 하고 싶었다. 새로운 메시지를 기다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와 닿기를 기다리면서, 한 편으로는 성서 이곳 저곳에 쓰여진 말씀을 명상했고, 다른 한 편으로는 지난 한 해 동안에 겪었던 은총의 순간들을 회상해 보면서 젊은 지성인 교사들 앞에서 고백하고 함께 나눌 감격적인 일들이 어떤 것이었는지 돌이켜 보았다. 도대체 내 속마음이 무엇을 바라고 어떤 사건을 기대했는지 나도 모르겠는데, 감사와 관련하여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눌 필자 개인의 감격적인 경험이 별로 생각나지 않았다.
    
그런데, 설교의 영감은 이 두 곳에서 오지 않고,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제 3의 곳에서 왔다. 그것은, 한 편으로는, 필자가 지니고 있었고 해결하지 못했던 한 문제를 숙고하는 것, 그리고 다른 한 편으로는 우연한 기회에 들은 한 설교자의 설교와 맞물려 그 해 감사절에 필자가 전해야할 메시지를 구상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필자가 지니고 있으면서 쉽게 해답을 얻을 수 없었던 문제라는 것은 그 무렵에 있었던 한 동역자의 요절(夭折)과 관련되어 있다. 지금 필자의 뇌리를 떠나지 않고 있는 한 상념이 있다. 한 동역자의 죽음과 뒤에 남은 교인들의 허탈과 그의 친구 목회자 중에 한 사람의 자괴감이 깃들인 탄식과 고백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고 생생하게 남아 있다. 위암으로 반 년 남짓 투병을 하다가, 한창 나이에, 젊은 아내와 어린 자녀와 양떼 같은 교인들과 막 시작하려한 한국 최초의 전원 교회 설계를 뒤에 남긴 채,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의 장례 직전 그를 추모하는 자정 예배에서, 그 교회의 소속 목사로서 그를 돕던 한 동료 목사는, 목회자를 잃고 슬픔에 잠긴 교인들 앞에서 참회를 하고 있었다.

"성도 여러분, 저는 지금 제 마음속에 여러분에게 고백해야할 괴로운 문제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의 목사님이 병상에서 투병하는 동안에 저는 여러분 앞에서 외쳤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목사님을 반드시 살려 주실 것이므로 우리가 할 일은 믿고 기도하는 것뿐이라고 여러분을 격려했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목사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는 목사님의 관 앞에서 조문객의 인사를 받고 있습니다. 제가 이제 여러분에게 무슨 말을 한들 여러분이 저의 말을 믿으시겠습니까? 저는 언젠가는 가까운 장래에 이 문제를 가지고 여러분 앞에 다시 서서 새롭게 깨달은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필자의 심정이 그의 심정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어디, 이 괴로움이 그 동역자만의 것이겠는가? 병원에서 포기한 사람을 대할 때마다 마지막으로 기대하는 것이 바로 기적의 발생이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는 말을 들으시고도 예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딸이 나을 것이다.” 라고 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을 상기하게 된다. 우리의 동료 목사도 병상에 누운 친구 목회자의 임종을 빤히 보면서, 그래서 한 편으로는 장례식 준비를 하고 있으면서도, 교인들에게는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목사님을 살려주실 것입니다.”하고, 기회 있을 때마다 설교하고 권면했다는 것이다. 임종을 맞이한 당사자는 벌써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는데, 그 일에 협조를 못하고, 당사자에게도 끝까지 죽음을 부인하고, 교인들에게도 그가 반드시 회복될 것이니 기도를 열심히 하라고 한 것이 결코 올바른 태도가 아니었음을 그는 뉘우치고 있었다.


하나님, 왜 하필이면 접니까?

어느 해 10월 둘째 주일에 나는 미국인 손님 20여명을 데리고 정동제일교회의 영어 예배에 참석한 일이 있다. 주보를 보니, 그 날의 설교자는 아세아연합신학대학의 기독교교육학 교수인 글렌 젠트(Glenn A. Jent) 목사이다. 성서 본문을 보니, 욥기 3장 25-26절이다. 설교 제목이 길다. '하나님, 왜 하필이면 접니까? 제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고 이런 벌을 내리십니까?'(Why me, Lord? What have I done to deserve this?)이다. 눈이 번쩍 뜨인다. 이것은 당시 이 저서를 준비하고 있던 두 해 동안 내가 만난 두 번째의 욥기 설교였다. 우리의 독자들과 함께 나눌 실제적인 자료가 생긴 것이어서,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관심을 집중하였다. 한 외국인 설교자가 한국교회의 영어 청중을 향해 외치는 욥기의 메시지가 무엇일지 궁금했다. 그의 설교를 우선 다음과 같이 줄여서 소개하고 우리의 감동을 첨삭해 보자.

욥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 믿음이 좋은 사람이었다. 그런 만큼 그는 만사가 형통하는 삶을 살았을 법한데, 실제로는 그러하지 못했다. 그의 믿음과 그의 행 불행은 관계가 없는 것 같다. 오히려, 믿음이 있는 이들 옆에는 늘 사탄이 함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베드로가 한 말, 원수인 악마가 우는 사자같이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닌다는(벧전 4:8) 말이 바로 이것을 두고 한 말인 것 같다. 믿음이 좋을수록,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으면 받을수록, 오히려 사탄의 공격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욥의 경우에서 본다.
    
욥기 1-2장에서 우리는 욥에게 연속적으로 밀어닥치는 불행을 본다. 침략자들이 욥의 소떼를 빼앗아가고 욥의 종들을 살해한다. 곧 이어서, 양떼와 목동들이 벼락을 맞아 죽어버린다. 아직 사태가 수습되기도 전에 또 다른 침략자들이 쳐들어와 욥의 낙타떼를 잡아가고 종들을 살해해 버린다. 이 보고를 막 듣고 있는데, 이번에는 욥은 자기 자녀들이 한 집에서 잔치를 벌이다가 집이 무너져 모두 죽고 말았다는 보고를 듣는다. 모든 재산과 자녀까지 다 잃은 욥은 병이 들어 죽을 지경에 이른다. 욥의 아내는 고통을 못 이겨 괴로워하는 남편을 향하여, 하나님을 저주하면 그 벌로 죽을 수 있으니까 차라리 그렇게 라도 하여 죽음으로써 그 고통에서 벗어날 길을 찾아보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욥은 '우리가 누리는 복도 하나님께 받았는데, 어찌 재앙이라 해서 못 받는다 하겠소?'(욥 2:10) 하고 말하면서 아내의 제안을 거절한다.
    
욥을 위로하려 한 아내의 말이 '어리석은' 생각이라면, 욥의 친구들의 말은 '사려 깊지 못한 말'이다. 엘리바스는 '경험주의'를 대표하고, 빌닷은 '전통주의'를 대표하고, 소발은 '증류하여 얻은 지혜'를 대표하고, 엘리후는 '젊은이의 열정'을 대표한다. 이 친구들은 욥의 문제의 내면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에 관한 진실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충고는 모두 '사려 깊지 못한 말'이 되고 말았다. 친구들의 말은, 하나님이 의로우신 분이라는 것, 그래서 하나님은 의로운 사람에게 복을 베푸시고 악한 사람에게는 벌을 내리신다는 것, 따라서 욥이 당하는 고통은 죄의 결과라는 것이다(욥 4-5장).

오늘의 '성공의 신학'이나 '번영의 신학' 혹은 '축복의 신학'이 이와 비슷한 주장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 바울이나 죄없으신 예수께서 번영을 누리기보다는 고통을 당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평안보다는 고통이, 세상적인 시각으로 보는 성공보다는 실패가 그들의 삶을 특징 지웠다는 점에 착안해야 한다. 친구들의 말이 사려 깊지 못한 말이었다고 말하는 두 번 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 알기를, 사람이 의롭던 불의하던 하나님에게는 아무런 차이가 없고, 다만 차이가 있다면, 개인적으로 의로운 사람은 복을 받도록 되어 있고 악한 사람은 저주를 받도록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일 뿐, 하나님은 이런 일에 무관하시다는 생각이다(욥 22장).

이것은 현대의 기계론적 우주관에서 보는 비인격적 하나님 이해와 일맥상통한다. 우주는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기계적인 법칙에 따라 돌아가는 것일 뿐, 살아 계신 인격적인 하나님이 개인의 삶에 구체적으로 관여하시지는 아니한다고 하는 생각과 같다. 친구들의 사려 깊지 못함이 나타난 세 번째 국면은 죄를 고백하기만 하면 만사가 다 형통해진다고 하는 생각이다(욥 36:8-12). 간구하기만 하면 다 얻는다는 것이다. 아무리 죄를 많이 지었어도 그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은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그의 간구까지 다 들어주신다는 것이다. 오늘날도 이런 신학이 있다. 목적을 정하고 주실 줄 믿고 간구하면 다 얻는다는 신학이다.

그러나 의로운 바울에게도 간구했으나 얻지 못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바울은 주께서 그의 몸에 가시를 주셨는데, 고통스럽기가 마치 사탄의 하수인이 그를 괴롭히는 것 같다고 했다. 바울은 그것을 두고서 그것이 그에게서 떠나게 해 달라고 세 번이나 주님께 간구하였지만, 주께서는 '내 은혜가 네가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하게 된다' 하고 말씀하시면서 그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았던 경험을 말하고 있다(고후 12:7-9).
    
욥이 마냥 옳은 것만도 아니다. 욥이 친구들의 말을 들어보니, 헛소리다. 그리하여, 그들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변호하려다 보니, 결과적으로 자신의 의로움만을 내세우게 된다. 처음부터 욥은 친구들의 공격에 이렇게 대처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욥과 그의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우리는 욥의 부적절한 대응을 본다. 사람 앞에서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면 할수록 욥은 하나님 앞에서마저도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무죄한 자가 부당하게 고통을 당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우리는 사태를 올바로 파악하지 못하고 만다. 의인은 없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이 불필요한 그러한 사람은 이 세상에 없는데, 그리하여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비를 간구할 수밖에 없는데도 불구하고, 고통 가운데서 우리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면서 자신의 의로움만을 주장하다 보면, 우리는 '하나님, 왜 하필이면 접니까? 제가 무엇을 그렇게 잘못했다고 이런 재앙을 받게 하십니까?' '왜 착한 사람에게 불행이 닥칩니까?' 하고 불평하게 된다.
    
놀랍게도 이러한 욥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신다(욥 38장). 하나님은 욥의 고난의 원인을 설명하지 않으신다. 욥이 알지 못하는 창조의 신비를 욥에게 상기시키신다. “죄없는 나에게 이런 불행이 닥쳤다.”고 하나님께 항의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이 불의하시다고 선언하는 것이 되버리고 만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것은 용납 받지 못할 일이다. 우리가 늘 예수를 주목해야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욥의 아내도 욥의 친구들도 욥을 위로하지 못했다. 욥의 고통만 더 크게 했을 뿐이다. 하나님의 현현도 욥의 고통을 설명해 주지는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다만 당신 자신이 친히 욥을 돌보시고 사랑하신다는 것을 암시하시므로써 욥으로 하여금 그 고통을 견디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여전히 그를 돌보시고 사랑하신다는 확신이 욥으로 하여금 자신의 고통을 대하는 모든 태도를 바꿀 수 있게 한 것이다. 우리에게도 고통이 온다. 의로운 사람에게도 불행이 닥친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내세에 대한 보장이다. 우리가 받은 고통을 영원한 세계에서 보상받게 될 것이다.

캔사스 시티 로이열 야구팀의 메니저였던 딕 하우서(Dick Houser)가 암 말기에 이르러 죽음을 준비하고 있을 때, 기자가 그에게 물었다고 한다. 왜 이런 불행한 일이 하필이면 자신에게 생겼느냐고, “Why me?” 하고 자문해본 적이 있느냐고, 기자가 묻자, 그는, 그렇게 묻기 보다는, 자기라고 예외일 수는 없지 않겠느냐고, “Why not me?” 라고 묻는 것이 더 적절한 질문이 아니겠느냐고 말했다고 한다. 얼마나 놀랍고 성숙한 통찰인가? 같은 말을 욥은 '우리가 누리는 복도 하나님께 받았는데, 어찌 재앙이라 해서 못 받는다 하겠소?'(욥 2:10) 하고 말하였다.

    
이 설교를 들으면서 필자 자신이 배운 것, 우리 독자들과 함께 소중하게 나누고 싶은 것은 다음과 같다.

(1) 캔사스 시티 로이열 야구팀의 메니저였던 딕 하우서가 한 말을 통하여, 나 자신이 묻고 있던 문제에 대하여 문제점을 새로운 각도에서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창 나이에, 이 세상에서의 삶을 이제 곧 끝내야 한다는 의사의 선고를 받고서, “왜 하필이면 나에게 이런 일이 ... ?”라고 묻지 않고, 그런 예가 극히 드문 예가 아니고 흔히 볼 수 있는 경우라서 그랬을까, 암으로 요절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임종 앞에서 “나라고 이런 일을 당하지 말라는 법이 있느냐?” 하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죽음 앞에서 실제로 이렇게 초연할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죽음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살아 있는 이들에게 큰 감동을 준다. 감동은 어떻게든지 감동을 받은 그 사람에게 구체적인 영향을 끼칠 수가 있다.
    
(2) 이 설교자는 그의 전공이 성서학도 아닌데도, 더욱이 한 구절을 본문으로 하여 설교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욥기 전체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우리 설교자들에게 좋은 모범이 된다.
    
(3) 이 설교에서 또 배울 수 있었던 것은, 설교자의 관찰이 욥의 친구들의 사려 없음을 지적하는 것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또한 욥의 친구들의 설교에 나타난 신학 사상이 당시 유대교의 전통적인 신학을 반영한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그것과 유사한 현대의 사상을 소개하여, 그의 설교를 듣는 현대인들로 하여금 욥의 친구들의 사상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것은 그 설교자가 평소부터 쌓은 현대의 여러 사상에 대한 폭넓은 이해의 반영으로써 우리 설교자들에게 역시 모범이 된다.
    
(4) 설교자는 이 설교에서 욥의 친구들을 비평하는 대신 욥을 두둔하는 태도를 나타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욥 자신마저도 친구들이나 하나님께 대한 태도에 문제가 있었던 것을 지적하는 것은 설교자의 깊은 통찰이었다고 볼 수 있다. 욥에 대한 편애가 절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5) 욥의 태도를 비판하는 척도로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을 말하고 있다는 것,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의인은 없다는 것을 지적함으로써 이 설교로 하여금 유대교의 설교에서 머물게 하지 않고 기독교의 설교가 되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 설교는 설교의 지향점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이어야 한다는 것을 재확인시켜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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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4
  • 민영진 2001-11-29 01:21:30

    궁금이 님께,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가 곧 책으로 나옵니다. 마침, 그 책에 들어 갈 글로서 신약과 구약에 나오는 사탄에 관한 글이,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과 함께 취급된 것이 있기에 여기 올립니다. 참고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민영진 드림


    하나님의 아들들

    욥기를 척 열면, 욥에 대한 소개가 나오고, 돌아가면서 열리는 그 자녀들의 생일 잔치와, 매번 생일 잔치가 끝날 때마다 욥이 이른 새벽에 하나님께 바치는 번제(燔祭)가 소개된다. 무대의 배경은 욥과 그의 자녀가 살고 있는 지상(地上)이다.  

    무대가 갑자기 지상에서 천상(天上)으로 바뀐다. 막연히 "어느 날"이라고만 언급된 날에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들(베네이 하엘로힘)"과 "사단(사탄)"이 함께 등장하는 무대가 설정된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하나님을 모시고 서 있고, 욥이라는 인물을 주제로 한 대화는 오직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서만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의 관심사는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탄"이다.

    창세기를 읽기 시작한 이들이 일찍부터 만나는 곤경 중에 하나가 바로 창세기 6장 1-4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베네이 하엘로힘)"이 "사람의 딸들(베노트 하아담)"을 "아내(나쉼)"로 맞아드렸다는 이야기이다.

    "사람들이 땅 위에 늘어나기 시작하더니, 그들에게서 딸들이 태어났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저마다 자기들의 마음에 드는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 주께서 말씀하셨다. '생명을 주는 나의 영이 사람 속에 영원히 머물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은 살과 피를 지닌 육체요,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다.' 그 무렵에 땅 위에는 네피림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와서 자식들을 낳으니, 그들은 옛날에 있던 용사들로서 유명한 사람들이다."  

    여기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등장한다. 욥기와 다른 것은 이것이 사탄이 아닌 사람의 딸들과 함께 나온다는 것이다.

    이 밖에도, 우리말 {개역}에 "권능 있는 자들"이라고 번역되고, {표준새번역}에서는 "하나님을 모시는 권능 있는 자들"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베네이 엘림"(시 29:1) 역시 그 문자적 의미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시편 89편 7절의 같은 히브리어가 {개역}에 "둘러 있는 모든 자"라고 번역되어 있고, {표준새번역}에는 "모시는 자들"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두 번역 모두 다 문자적인 직역을 피한 것이 주목된다. 시편 82편 6절의 "지존자의 아들들"({개역}) 혹은 "가장 높으신 분의 아들들"({표준새번역})은 모두 히브리어 "베네이 엘리욘"의 번역이다.    

    천상에서 여러 무리가 하나님을 모시고 서 있는 장면은, 여러 곳에서 표현을 달리하여 언급되기도 한다. 특히, 열왕기상 22장 19-23절의 내용을 다시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이스라엘에 미가야라고 하는 예언자가 있었다. 이스라엘 왕 아합은 그 예언자가 늘 흉(凶)한 메시지만 말하고 한 번도 왕에게 길(吉)한 것을 예언한 적이 없었다고 하면서, 국가에 어려운 일이 생겨도, 이스라엘 왕 아합은 미가야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예언자 미가야가 아합 왕에게 말한다. 자기가 보니까, 주께서 보좌에 앉으시고, 그 좌우 옆에는 "하늘의 모든 군대(콜 차바 핫샤마임)"가 둘러섰는데, 주께서 그 둘러 선 무리에게, 누가 아합을 꾀어 내어서, 그로 길르앗의 라못으로 올라가게 하여 거기에서 싸우다가 죽게 하겠느냐고 물었다는 것이다. 그러자, 그 둘러 선 무리 사이에서 이렇게 하자느니 혹은 저렇게 하자느니, 여러 가지 의견이 나왔는데, 한 "영(하루악흐)"이 주 앞에 나서서 자기가 가서 아합 왕을 꾀어내어 전쟁을 일으켜 죽게 하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아합 왕을 꾀이겠느냐고 물으시니까, 그 영이 하는 말이, 자기가 "거짓말하는 영(루악흐 셰케르)"이 되어, 아합 왕이 거느리고 있는 왕의 예언자들 입에 들어가서 그 예언자들이 왕에게 모두 거짓말을 하도록 시키겠다고 대답한다. 이 말을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그 안이 아주 묘책이라고 하시면서 그렇게 하도록 허락하셨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보면, 하나님이 홀로 계시지 아니하고, 하늘의 무리들과 함께 계신다. 그 무리를 일컬어 여기에서는 "하늘의 만군(萬軍)"({개역}) 혹은 "하늘의 모든 군대(軍隊)"({표준새번역})라고 한다.

    다니엘이 밤에 본 환상에서도 하나님을 모시고 거 있는 이들에 대한 언급이 있다. "내가 바라보니, 옥좌들이 놓이고, 한 옥좌에 옛적부터 계신 분이 앉으셨는데, ... 수종(隨從) 드는 사람이 수천이요, 모시고 서 있는 사람이 수만이었다"(단 7:9-10).    

    위의 여러 표현에서 사용된 "아들" 혹은 "아들들"이라는 표현 역시 생물학적인 "사내 아이" 혹은 "사내아이들"을 일컫는 말이 아니다. 히브리어에서 "아들"은 우리말의 "아들"이 지닌 뜻 외에, 어느 집단의 소속을 박히는 뜻으로도 사용된다.

    예를 들면, "베네이 하네비임"(왕상 20:35; 왕하 2:3,5,7,15; 4:1,38; 5:22; 6:1; 9:1)은 "예언자들이 낳은 아들들"이 아니라, "예언자 무리에 속한 사람들"을 일컫는다. 마찬가지로, "베네이 하코하님"(대상 9:30; 에스라 2:61; 10:18)은 "제사장들이 낳은 아들들"이 아니라, "제사장 집단에 속한 사람들" 혹은 "제사장 가문의 사람들"을 일컫는다. {개역}과 {표준새번역}이 이것을 "제사장의 무리"라고 번역한 것은 이런 의미를 잘 표현한 번역이다. "베네이 하골라"(에스라 4:1; 6:19,20; 8:35; 10:7,16)는 "사로잡혔던 자의 자손"({개역})이라기보다는 "서로잡혀 갔다가 돌아온 사람들"({표준새번역}) 자신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베네이 네카르"(삼하 22:45, 46 = 시 18:45, 46) 역시 "이방인의 아들들"이 아니라 "이방인" 혹은 "이방 사람들" 자체를 일컫는 말이다. 이상의 여러 구절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아들들"은 하나님이 낳은 "사내아이들"을 일컫는 것이 아니다.      

    욥기 1장 6절, 2장 1절, 38장 7절, 시 29편 1절 등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표현을 초자연적인 존재들을 일컫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다. 더 구체적으로는 "천사"를 일컫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창세기 6장 2절과 4절의 경우는, 신화를 인정하지 않는 유대교의 견지에서는, 사람의 딸들과 결혼을 한 하나님의 아들들은 신적인 존재였다기보다는 순수한 인간이었다고 본다. 유대교적 견지에서 볼 때에 신적 존재인 천사와 순수한 인간이 성관계를 맺는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이교적인 신화이기 때문이다. 시편 82편 같은 곳을 보면, 재판관 같은 지도급의 인사가 "신들(엘로힘)"으로 언급된 예가 있다.

    "하나님(엘로힘)이 하나님의 법정에서 나오셔서 신들(엘로힘)을 모아 들이시고 재판을 하셨다. 하나님께서 신들에게 말씀하셨다. '언제까지 너희는 공정하지 않은 재판을 계속하려느냐? 언제까지 너희는 악인의 편을 들려느냐? 가난한 사람과 고아를 변호해 주고, 가련한 사람과 궁핍한 사람에게 공의를 베풀어라. 가난한 사람과 빈궁한 사람을 구해 주어라. 그들을 악인의 손에서 구해 주어라"(시 82:1-4).

    여기에서 사람을 신들이라고 한 예를 볼 수 있다. 사무엘기하 7장 14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다윗의 후계자를 가리켜서 당신의 아들이라고 한 예도 있다. "내가 네 몸에서 나올 자식을 후계자로 세워서,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삼하 7:12-14). 기독교 일각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다른 칭호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신 14:1; 호11:1), 창세기 6장의 "하나님의 아들들"을 셋의 후예로 보려는 입장도 있다. 그러나 달리, 창세기 6장의 "하나님의 아들들"을 신적인 존재로 보는 견해도 있다.

    베드로후서 2장 4절의 "죄를 지은 천사들"과 유다서 6절의 "자기네가 통치하는 영역에 머무르지 않고 자기들의 거처를 떠난 천사들"을 창세기 6장의 "하나님의 아들들"로 보는 견해도 있다. 노아의 홍수와 관련된 다음과 같은 진술에 이런 암시가 들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지은 천사들을 아까워하지 않으시고, 지옥에 던지셔서, 그들을 사슬에 묶어 심판 때까지 어둠 속에 있게 하셨습니다. 그분은 또 옛 세계를 아까워하지 않으시고, 경건하지 않은 자들의 세계를 홍수로 덮으셨습니다..."(벧후 2:4-5).    

    구약의 사탄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주님 앞에 섰는데, 사탄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욥 1:6). 위에서 우리는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에 관한 기록들을 살폈다. 특히, 욥기 1장 6절은 사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들과 함께 하나님 앞에 서 있었다는 진술을 본다.

    사탄은 구약에서 어떤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것으로 나오는가? 그것의 본질은 무엇인가? 욥기에서는 사탄은 욥의 정직함과 그의 신실한 믿음에 대하여 의심을 품는 천상의 시종으로 나온다. 그가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 욥의 사람됨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시험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여기에서 사탄은 타락한 천사라거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천사로 등장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부하로 등장한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사탄의 개념이 성서 안에서도 일정하지 아니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탄이라는 말이 여러 가지로 이해되어 왔다는 것이다.  
      
    우선 구약에서 사탄이 어떤 기능을 수행하는 지를 보면서 그 본질에 접근하여 보도록 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이 말은 "방해자, 반대자(adversary)"를 뜻하는 보통명사로 사용된다. 발람이 모압 왕 발락의 부탁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기 위하여 모압 고관들의 안내를 받아 길을 떠날 때,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진노하신다. 그래서 "주의 천사(말르아크 아도나이)"가 발람의 "사탄"이 되어 길에서 발람을 막는다. 발람이 탄 나귀는 주의 천사가 칼을 빼어 손에 들고 길에 선 것을 보고, 길을 벗어나 밭으로 들어간다. 발람은 나귀를 때려 다시 길로 들어 서게 한다. 그러나 주의 천사가 이번에는 두 포도원 사이의 좁은 길을 막아  선다. 벽 쪽으로 피하는 나귀 때문에 발람의 발이 벽에 긁힌다. 발람이 나귀를 때리지만 좌우 어느 쪽으로 피하지 못하도록 주의 천사가 길을 막으므로 나귀가 발람을 태운 채로 주의 천사 앞에서 주저앉는다. 결국 발람은 자기 길을 막고 있는 천사를 본다. 주의 천사가 발람이 가는 길을 막고 못 가게 방해하는 것을 일컬어 주의 천사가 발람에게 "사탄"이 되었다고 성서는 말한다(민 22:21-35). 여기에 나오는 천사는 타락한 천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심부름꾼이다.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블레셋 왕 아기스에게 망명하여 몸을 의탁하고 살 때, 블레셋과 사울이 다스리는 이스라엘 사이에 전쟁이 벌어진다. 블레셋의 아기스 왕은 이스라엘과의 전쟁에 다윗을 참전시키려고 장군들을 설득한다. 이스라엘 왕 사울의 부하였던 다윗이 블레셋으로 망명을 하여, 수년 동안 블레셋 왕과 함께 사는 동안 그에게서 아무런 허물도 찾지 못한 만큼 함께 이스라엘과의 전쟁에 참여시키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자, 장군들은 이에 반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기에 전쟁에서의 "대적"을 "사탄"이라고 하였다(왕상 11:14, 23).        

    "저 사람을 돌려보내십시오. 왕이 그에게 지정하여 준 곳으로 그를 돌려보내시고, 우리와 함께 싸움터에 나가지 않도록 하여 주십시오. 싸움터에 나가서 그가 우리의 '사탄'으로 돌변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가 무엇을 가지고 자기의 주인과 화해를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군인들의 머리를 잘라다 바쳐야 하지 않겠습니까?"(삼상 29:4).

    두 번째의 뜻은 "초인간적 대적자(superhuman adversary)"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미 보았듯이, 욥기에서는 사탄이 하나님의 아들들 가운데 하나로 묘사되어 있다(욥 1:6-9, 12; 2:1-4, 6-7). 스가랴서에서는 사탄이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을 하나님께 고소하는 자로 묘사되어 있다. "주께서 나에게 보여 주시는데, 내가 보니, 여호수아 대제사장이 주의 천사 앞에 서 있고, 그의 오른 쪽에는 그를 고소하는 '사탄'이 서 있었다"(슥 3:1).

    사탄은 고유명사로 나타나기도 한다. "사탄이 이스라엘을 치려고 일어나서, 다윗을 부추겨, 이스라엘의 인구를 조사하게 하였다"(대상 21:1). 여기에서 사탄은 다윗의 길을 굽게하는 악마적 존재로 묘사되어 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인구조사를 한 것은 전적으로 사탄의 음모였던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것과 병행구절인 사무엘하 24장 1절을 보면 다윗으로 하여금 인구조사를 하도록 부추기신 것은 사탄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다. "주께서 다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셔서, 백성을 치시려고, 다윗을 부추기셨다. '너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여라.'")

    구약을 히브리어에서 그리스어로 번역한 칠십인역의 경우를 보면, 히브리어 "사탄"을 일반적으로는 "악마(디아볼로스, the Devil)"라고 번역한다. 그러나 위에서 이미 보았듯이, 구약에서는 사탄이 악마나 마귀의 모습으로 나타나 하나님을 대적하여 악을 자행하는 존재로 등장하지는 않는다. 구약 자체에서의 사탄의 개념과 칠십인역이 번역될 당시의 사탄의 개념 사이에 어떤 변화가 일어난 것을 볼 수 있다.

    신약의 사탄

    신약에 "사타나스"는 30여 회 이상 나오는데, 히브리어 "사탄" 혹은 아람어 "사타나"의 그리스어 음역이다. "마귀" 혹은 "악마"의 칭호로서, 문자적인 뜻은 구약에서와 마찬가지로 "대적자(對敵者)"를 뜻한다. "초자연적 악마적 존재(the principal supernatural evil being)"이다.    
    마태복음서 4장에 보면, 예수께서 셰례를 받으신 후에,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시는데, 예수께서는 광야에서 "악마(디아볼로스)"에게 시험을 받으신다. 그 악마는 달리 "시험하는 자(호 페이라존)"로 불리기도 한다(마 4:3). 세 번의 시험을 다 물리치신 예수께서는 "사탄아(사타나), 물러가라"(마 4:10)고 호령하시어서 사탄을 쫓아버리신다.

    마가복음서 3장을 보면, 예수의 친척들이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서 그를 붙잡으러 나선다. 예루살렘의 율법학자들은 예수가 "바알세불"이 들렸다고 하는가 하면, 또 그가 "귀신(다이모니온)"의 두목의 힘을 빌어 "귀신(다이모니온)"을 내쫓는다고도 한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사탄이 어떻게 사탄을 내쫓을 수 있겠느냐고 하신다(막 3:20-30). 여기에서 다이모니온과 사탄이 동격으로 사용된 것을 볼 수 있다.

    이 밖에도, 사탄은 "악한 자(호 포네로스)"(마 13:19; 요일 5:18), "참소(讒訴)하는 자(카테고르)"(계 12:10), "원수(엑크트로스)"(마 13:39), "대적(안티디코스)"(벧전 5:8), "귀신의 두목(아르콘 톤 다이모니온)"(마 9:34), "이 세상 임금(호 아르콘 투 코스무 투투)"(요 12:31), "공중의 권세잡은 자(아르콘 테스 엑수시아스 투 아에로스)"(엡 2:2), "벨리알"(고후 6:15)등과 동격으로 나온다.

    이러한 사탄이 가룟이라는 유다에게 들어가 스승인 예수를 팔 생각을 하게 하고 (눅 22:3-4), 베드로로 하여금 스승인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게 한다(눅 22:31-34). 아나니아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의 얼마를 몰래 떼어놓은 것도 사탄에게 홀린 탓이다(행 5:1-4). 사람이 절제하지 못하는 틈을 타서 사람을 유혹하는 것도 사탄이다(고전 7:5). 말씀을 듣기는 들으면서도 삶에서 결실을 맺지 못하는 것도 사탄이 그들의 마음 속에 뿌려진 말씀을 빼앗아 가기 때문이다(막 4:15).

    요한 계시록에서는, 사탄은 "큰 용(龍)" 곧 "옛 뱀"의 다른 이름이다. "리워야단"이나 "라합"이나 "타닌"과 관련되어 있고, 에덴 동산에서 사람을 유혹하던 그 뱀과 관련되어 있다.

    "나는 또 한 천사가 아비소스(밑바닥이 없는 깊은 곳)의 열쇄와 큰 사슬을 손에 들고, 하늘로부터 내려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느 용, 곧 악마요 사탄인 그 옛 뱀을 붙잡아 결박하여, 아비소스에 던지고 닫은 다음에,그 위에 봉인을 하여 천 년 동안 가두어 두고, 천 년이 끝날 때까지는 민족들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사탄은 그 뒤에 잠시 동안 풀려 나오게 되었습니다"(계 20:1-3).

    유다서 9절에 보면,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를 놓고서 악마(디아볼로스)와 논쟁을 했다는 기록도 있다.

    하나님의 통치 안에 있는 악(惡)

    이상에서 우리는 신약성서에 나타난 사탄의 역할이 어떤 것인지를 살폈다. 구약에서 말하는 사탄과는 거리가 먼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사탄과 관련하여 계속적으로 논의가 되는 것은, 사탄을 하나님과 영원히 대립하는 세력으로 이원론적인 견지에서 볼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허락 하에서 활동하는 악의 세력으로 볼 것인가 하는 것이다. 신구약을 통틀어 이원론이 설 자리는 없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라는 구약의 개념은 우리의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한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다.    

    이스라엘의 첫 왕 사울에 관한 기록(삼상 16:14-16, 23; 18:10; 19:9)을 보면, 사울에게서 "주의 영(루악흐 아도나이)"이 떠나고, 그 대신에 "주께로부터 나온 악한 영(루악흐 라아 메에트 아도나이)"이 사울을 괴롭히곤 하였다고 한다. 여기 히브리어 표현을 보면, 이 악한 영은 "주께서 보내신" 것, 혹은 이 악한 영의 기원이 주님인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같은 현상을, 사울의 신하들은, "하나님의 악한 영(루악흐 엘로힘 라아)"이 사울을 괴롭히고 있다고 하여, 좀 달리 표현하고 있다. 곧, 하나님이 소유하고 계신 악한 영이 라는 말이다. 사울의 신하들은 수금을 잘 타는 악사를 구하여, 이 악한 영이 사울을 덮칠 때마다 수금을 타게 하여 그 "하나님의 악한 영"이 물러가게 하자고 제안한다.

    그리하여 다윗이 수금 타는 악사가 되어 사울의 시중을 든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악한 영"이 사울에게 내리면, 다윗이 수금을 들고 가서 손으로 수   삭제

    • 궁금이 2001-11-25 15:28:59

      욥기에 대한 민영진님의 글을 읽으며 욥기에 대한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욥기에 대한 신학적 연구와 함께 영성 풍부한 은혜의 말씀들이 많이 나오기를 기대합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궁금했던 한가지가 민영진님의 글에서도 해결되지 못하여 글을 올립니다.

      제가 알기론 구약가운데 "사단"이라는 단어와 그 활동이 직접적으로 (문자적으로) 표현된 곳이 오직 욥기만이라고 알고 있는데, 이부분에 대한 신학적 견해로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요? 욥의 고난과 "사단"과 또 욥에게 고난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에 있어서 어떤 관련이 있지는 않는지요?

      또, 신약에서는 무수히 언급되어 있는 '사단'이란 단어가 구약에서는 거의 찾아 볼수없는지요?  물론, 구약에 사단의 등장과 활동으로 여겨지는 곳이 몇 곳이 있지만, 욥기에서 처럼 직접적 표현은 없다고 알고있는데, 이부분은 어떻게 설명되어지고 있는지요?

      저는 소위 "귀신론, 마귀론"과는 전혀 무관한 사람임을 밝혀 둡니다, 개인적인 이 궁금증 해소를 위해 지금까지 나름대로 노력을 해왔는데, 또 민영진님의 글도 주의깊게 살펴보았는데, 욥의 고난의 직접적인 제공자인 사단과 욥기의 중심사상과의 연관성 부분에 대한 설득력있는 해설을 아직까지 들어 보지를 못했습니다.

      제가 잘못 알고 있는 점이 있다면 정정과 함께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도움 말씀을 주실때 신학적 배경 또는 근거를 정확히 제시해 주시면 더욱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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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철수 2001-11-24 02:07:29

        앞의 내용을 다 읽지는 못했지만, 결론 부분을 읽으면서 모든 것에 대한 이해에 접근하는 느낌입니다.
        하지만..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욥이 겪었던 고통이 내게도 예외일 수 없으니..  하나님의 사랑을 알며,느끼며 안심하고 기뻐해야 하는데..   삭제

        • 하나 2001-11-23 21:36:09

          이전 글에서는 좀 의아한 내용들이 있었는데--

          이번 평론으로 만족합니다.

          진리의 길은 육적으로는 고난의 길이요, 영적으로는 승리의 길입니다. 할렐루야!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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