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조계종 폭력사태가 일어났을 때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의 기자가 국내 불교 문제 전문가를 찾아와서 질문을 했다.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종교분쟁을 취재해봤지만 하나의 종교 안에서 분파가 다르다고 이렇게 목숨을 내걸고 폭력투쟁을 벌이는 건 처음 본다. 도대체 종교이념이 어떻게 다른 것인가." 그 전문가는 "그건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1조원 정도가 걸린 돈의 문제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불행하게도 불교계만의 문제가 아니다. 최근 분규를 겪으면서 경호원을 동원하면서까지 예배당을 지키거나 차지하고자 하는 사람을 보면, 어쩌면 신앙이나 신학 때문에 저러나는 것이 아니라 금과 은 때문에 저럴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최근 분규를 겪는 교회들의 현상을 보면 목사 지지파, 혹은 반대파 양측이 경호원을 동원하고 있다. 광성교회, 정릉제일교회, 상도감리교회 등은 물론, 신문에 나지 않은 여러 교회가 경호원을 대규모로 동원하여 교회 문제를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고 있다. 거룩한 교회에 야인들이 돈을 받고 침투하여 판을 치는 것이다.

광성교회 이성곤씨측은 제직회와 성만찬을 할 때도 경호원을 136명 동원했으며, 이성곤씨가 노회에 참석할 때도 신변보호용으로 경호원을 대동했다. 물론 반대측도 지난 6월27일 교회를 점령할 때 100여 명 이상의 대규모 경호원을 동원하여 교회 기물을 파손했다. 대전 목동 감리교회도 경호원을 동원하여 교회 담장을 헐고 교회를 쳐들어갔다. 정릉제일교회 문성남 목사측도 경호원을 동원하여 교회를 점령하고 있다. 한 변호사는 교회들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마다 경호원을 고용하는 교회가 허다하다고 말한다.

이제 경호원 고용은 조계종만의 문제가 아니라 개신교회도 분규가 있을 때마다 반대파를 물리력으로 제압하기 위해서 경호원 고용이 관습화됐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반대파를 제압하고 교회를 점령하면 끝이라는 것이다. 종교의 성스러움과 신비함이 점점 우리 곁을 떠나고, 교회가 세속화를 넘어 폭력시대를 방불케 하는 야인화되고 있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양보, 타협과 용서, 희생이라는 말은 온데간데 없다. 오직 이권과 힘밖에 안남은 모습을 보여준다.

교회분규가 발생한 교회는 노회나 상위 치리회가 문제를 해결하는 데 역할의 한계점이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경호원을 동원하는 경향이 점점 뚜렷해져가고 있다. 이는 교회법이나 사회법이 적절하게 해결해 주지 못하는 법망의 허술한 면을 틈타 물리력으로 해결하려는 것이다.

경호비, 한 달에 3∼4억은 기본

그러므로 많은 교인들의 헌금이 선교나 구제사업에 쓰이지를 못하고, 경호원 고용비로 흘러나가고 있는 것이다. 경호원들도 A급, B급, C급으로 나뉜다. A급을 고용하려면 12시간에 15만 원을 지불해야 하고, B급은 10만 원, C급은 8만 원 정도가 든다. 그래서 하루 고용할 경우, 24시간으로 하기 때문에 적어도 한 사람당, 20∼30만 원은 족히 들어간다.

100여 명을 고용하면 하루아침에 2천만 원에서 3천만 원이 소요되는 것이다. 10일이면 2억에서 3억이 되는 셈이다. 더군다나 교회 점령을 시도할 경우, 경호원비용은 천문학적인 돈을 지불해야 한다. 경호원들이 구속될 경우와 변호사비용까지 고려해야 하고, 성공부담금도 요구한다. 그래서 경호원을 한달 고용할 경우 3∼4억 원이 나가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그러면 경호원의 자격과 경찰신고에 관해서 알아보자. 서울시경의 생활안정계 한 경찰은 "경호원이라는 법적 용어는 없고 엄밀히 말하면 경비원이고, 자격은 전과범이 되어서는 안되고, 출옥한 지 적어도 5년이 경과해야 하며, 최소한 2주간의 교육을 받아야 하고, 경호원 자격증같은 것은 없다"고 말한다.

송파경찰서 생활안정계 아무개 경찰은 "경호업체는 허가를 받아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경호원 고용은 신고제라 그들의 자격을 점검할 수 없기 때문에 전과자들이나 폭력배들이 경호원으로 고용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성도들의 헌금이 일부 폭력배들로 구성된 경호원(경비원)한테 흘러가는 것이다. 교회 분쟁을 겪고 있는 한 장로는 "그렇다고 경호원을 고용하지 않으면 반대파한테 다시 점령당하거나 교회를 빼앗길 우려가 있고, 성도들이 심하게 다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교회분규 중에 있는 한 목회자도 "경호원이라도 고용해서 불법으로 교회를 점령하고 있는 사람들을 내쫓고 싶다"고 솔직한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

교회당을 빼앗길 수 없다는 현실논리에 말씀도 속수무책

교인들의 헌금이 경호원들의 주머니로 흘러 들어가지만, 교회측에서는 총알이 필요하다고 헌금내기를 독촉한다. 이것이 우리 교회의 현실이다. 여기에는 칼빈과 루터의 신학, 칼 바르트의 신학, 예수의 "검을 쓴 자는 검으로 망한다"는 비폭력적 말씀은 속수무책이다.

현실은 반대파를 진압하기 위해서 경호원을 동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이 경호원들을 통해서 대신 싸우는 것이다. 교회를 점령하거나 지키면 하나님의 승리이다.

현실 법이 개정되지 않는 한 이탈자들이 교회를 물리적으로 점령하는 사태가 속출할 것이다. 이들은 교회당을 차지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반대파가 진입하지 못하도록 막을 것이다. 가혹한 물리력 앞에 양심과 선한 신앙을 가진 선량한 성도들은 속수무책이다.

현재의 법 앞에서 교회는 물리력을 가진 힘있는 자들의 것이며, 과격한 양상을 띤 폭도들의 것이다. 이들에게 신앙은 차지하는 것이며 점령하는 것이다. 반대파를 내쫓는 것이며, 교회당에 한 발도 들여놓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양보와 사랑과 용서를 찾아보기가 힘들다.

불행하게도 교회의 분규 앞에 "세상법정에 송사하지 말라"(고전 6장6절)는 바울 사도의 말씀과 "검을 쓴 자는 검으로 망한다"(마 26장52절)는 예수의 말씀은 너무나도 먼 거리에 있는 이상적인 말씀이다.

경호원을 고용해서라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건물인 예배당을 차지해야 하는가? 피땀 흘려 낸 헌금이 이들의 수중으로 수억 원씩 들어가야 하는가? 혹자는 그러면 정의는 언제 하수처럼 흐르고 공법은 언제 물같이 흘러야 하는가, 불법을 행하고 예배당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 앞에 정의는 구부러져야 하는가, 선은 악에게 져야 하는가 하고 의문을 가질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정의와 공법을 하수처럼 흐르게 하기 위해서, 선으로 악을 이기기 위해서, "검을 쓴 자는 검으로 망한다"는 예수의 말씀을 배반하면서 경호원을 동원하고 "세상법정에 송사하지 말라"는 바울 사도의 말을 거역하며 변호사를 고용해서라도 교회를 차지하고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정당화 할 수 있을까? 물론 방어 차원에서 변호사를 고용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교회당을 지키기 위해서 경호원과 변호사에게 흘러나간 천문학적인 돈을 북한어린이를 위해서 쓴다면 수천 명의 어린이를 기아의 상태에서 구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교회가 하나님께 축복을 많이 받아서 너무 배불러 하는 짓은 아닌가? 금과 은이 있기 때문에 경호원과 변호사를 고용하는 것이 아닌가?

금과 은은 엄격하게 말하면 성도들의 땀방울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돈인데, 교회 문제를 가지고 성경 말씀을 어겨가면서까지 반대파들에게 승리하기 위해서 변호사와 경호원을 고용하는데 사용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란 말인가?

이 말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너무 비현실적이고 이상적인 얘기로 들릴는지 모른다. 현실은 힘과 법이 지배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법은 힘과 법을 초월하며 사랑과 양보를 포함하는 생명과 성령의 법이 아닌가?

우리는 성경을 공부하고 읽으면서, 설교를 들으면서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면서 사랑과 양보보다는 힘과 법에 비중을 두고 살아간다. 힘이 필요하기에 경호원을 고용하는 것이고, 법이 필요하기에 변호사를 고용하는 것이다.

그러면 경호원을 동원하고 변호사를 고용하여 힘과 법을 가지고 교회가 부흥되고, 교인이 수천 명이 된다고 자랑할 때, 훗날 교회사가들은 무어라고 평가할 것이고, 예수님은 어떻게 판단하실까?

그가 직접적 음성으로 말씀하신다면 그토록 경호원과 변호사를 동원하면서까지 가시적인 건물을 점령하거나 차지하며 지키라고 주장했을까? 그렇다면 예루살렘 성전을 보면서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다"라고 왜 주장했을까?

교회사는 금과 은의 역사가 아니라, 희생과 핍박, 사랑과 양보의 역사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사랑과 양보를 실천하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일시적으로는 패배하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께서는 언젠가는 참다운 승리를 주실 것이다. 그것이 성서의 증언이며 기독교의 역사이기도 하다.

분쟁을 겪는 교회를 보고 세상사람들이 "그건 이념과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1조원 정도가 걸린 돈의 문제다"라고 말한다면 자정능력을 상실한 교회는 그 지역사회에서 이미 황혼을 가져다 주고 저무는 서편의 시들은 태양은 아닐까?

황규학 / 에큐메니칼 연구소/전국교회 재산 보전 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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