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민 출신으로 연동교회 담임목사가 된 이명혁 목사(앞줄 가운데). 100년 전 교회는 신분제를 극복하며 대부흥운동을 이루었지만, 지금 한국 교회는 새로운 신분제가 득세하고 있다. (사진제공 <사진으로 보는 연동교회 110년사>)
교회는 드러나지 않게 때로는 노골적으로 장로나 안수집사, 권사 등 임직을 수여하면서 헌금을 강요한다. 얼마를 내라는 공문을 보내는 교회도 있고, 건축헌금을 하는 시점에 맞추어 임직식을 거행하는 교회도 있다. 교회 규모가 클수록 액수는 늘어나 일부 대형 교회의 경우는 장로가 되려면 최소한 3천만 원은 있어야 한다는 말까지 나온다. 교인 대부분은 교회가 책정한 금액을 하나님께 바치는 마음으로 헌금하지만, 일부는 '반항'하기도 한다.

경기도 부천의 중형교회 배 아무개 집사는 2003년 양심선언을 했다. "임직은 하나님이 주는 것임에도 장로 2천만 원, 안수집사 5백만 원 등으로 헌금이 책정되어 정해진 금액을 헌금하지 못하면 직분을 받을 수 없다"라는 것이다. 결국 배 집사는 교회에서 제명되었다. 인천의 ㅇ교회 목사는 장로 후보에게 '2천~3천 만 원을 낼 수 있느냐'라는 내용의 공문을 보냈다가 일부 교인들의 제보로 언론을 타 망신을 당했다. 2002년 <뉴스앤조이>와 기독교방송이 교인 304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66명이 직분을 대가로 특별 헌금을 요구받았다고 밝혔고, 19명이 관례적으로 헌금했다고 밝혔다.

"직분은 곧 신분"

목회자들은 흔히 돈이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분량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교회개혁실천연대 공동대표 박득훈 목사는 "직분과 관련된 헌금은 믿음의 분량을 보여주는 대신 장로, 권사라는 명예를 돈으로 사는 것과 같다"라고 말한다. 강남교회 송태근 목사도 "직분이 섬기는 역할이요 기능이 아니라 신분이 되어버렸다"라고 개탄한다. 20세기 초 신앙 선배들이 조선시대의 신분제와 싸우며 평등한 세상을 만들려고 교회를 세웠는데, 21세기 한국 교회는 다시 지긋지긋한 신분제를 복원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교회가 선교 초기 대부흥을 이룰 수 있었던 것도 사회 약자층을 적극 끌어안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당시 지배층 언어인 한문 대신 한글로 성경을 만들었고, 글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학교를 세웠다. 숭실대, 연세대, 이화여대 등 1백 년 전 세워진 학교들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경우다.

에비슨(O. R. Avison)의 일화는 당시 교회가 신분제를 극복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고종황제 시의였던 에비슨은 사무엘 무어(Samuel Moore) 선교사가 시무하는 곤당골교회(몇 년 후 다른 교회와 연합해 승동교회가 되었다)에 출석하던 백정 박씨가 장질부사에 걸려 고생하자 직접 찾아가 치료한 일이 있다. 장신대 김인수 교수는 “황제를 치료하는 의사가 가장 낮은 계급의 천민을 치료했다는 것은 혁명적인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연동교회에서는 1904년과 1907년 양반 출신의 후보들을 물리치고 갖바치 고찬익과 광대 출신인 임공진이 잇달아 장로로 임명되었다. 당장 양반들은 상것들과 더는 신앙생활을 함께 할 수 없다고 선언했지만, 게일(J. Gale) 선교사는 "교회는 신분의 위세를 부리는 곳이 아니며 하나님 앞에서 모두 평등하고, 직업의 귀천도 없다"라고 반박했다.

감리교는 1903년 노예 사용에 대한 구체적인 규정을 연회록에 명시했다. 이 규정에는 △교인은 노예를 소유할 수 없고 노예제도를 교사해서도 안된다 △만일 노예를 소유하고 있다면 그를 해방하도록 지시한다 △과부를 매매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죄악이며 그런 범죄에 참가한 교인은 처벌받아야 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초대 교회의 이같은 노력으로 교회는 민중들의 해방 공동체로 환영받았다. 서울대 신용하 교수에 따르면, 1898년 초 기독교인이 된 백정은 132명이었다. 이후 천민 출신 기독교인은 계속 늘었다. 그러나 수만 늘어난 것이 아니다. 기독교 백정 출신 지도자 박성춘은 관민공동회에 '관민합심'이라는 연설을 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고, 숯장수 출신이었던 전덕기도 상동교회 목사로서 독립운동을 했다. 에비슨에게 치료를 받은 박씨 아들은 후에 세브란스의전을 졸업해 의대 교수가 되었고, 만주로 건너가 병원과 학교를 설립했다는 ‘성공 신화’가 초대 한국 교회의 역사를 장식한다.

물론 교회의 신분제 철폐 움직임에 대해 내부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백정이 많이 출석해 '백정교회'로 불린 승동교회에서 안동교회가 분립했다. 연동교회도 양반 계급이 떨어져 나와 묘동교회를 설립하는 분열의 아픔을 맛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반발은 신분제 타파라는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지는 못했다.

양반들 따로 교회 설립하기도

▲ 100년 전 대부흥운동의 동력은 교회가 여성을 신분적 억압 구조에서 해방해 사회의 주체로 세웠기 때문이다. 사진은 정신여학교의 전신 연동여학교 학생들(1895년). (사진제공 <사진으로 보는 연동교회 110년사>)
이런 교회의 신분제 타파 운동에 가장 큰 덕을 본 것은 여성이다. 교육의 권리를 원천적으로 봉쇄당한 여성들이 배울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곳이 교회와 교회에서 세운 여학교였다. 선교사들이 여권 신장을 위해서는 교육이 최우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화학당의 경우, 초기에는 고아나 과부 등 신분제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사람들을 가르치다가 상류층으로 확대되었다. 이화학당에서 성경 공부를 시작한 1888년, 조선어가 서툰 스크랜톤 부인이 남자 매서인을 부인 성경반 성경 교사로 세우자 부녀들이 "어찌 남의 남자를 볼 수 있겠느냐" 하여 성경반에 오기를 꺼려해 학생과 교사 사이에 휘장을 쳐 대면하지 않고 말소리만 들리게 한 일도 있었다. 어쨌든 교회가 그 시대의 문화와 불필요한 마찰을 줄이려는 노력과 배려가 돋보이는 사례다.

여성 교육과 함께 여성을 둘러싼 구체적인 악습을 철폐하는데도 교회는 적극적이었다. 장로교공의회는 여성 인권에 관해 △과부 재가 △조혼 금지 △결혼시 돈 거래 금지 등을 결의했고, 감리교도 일부다처제를 정죄하고 첩을 가진 자는 교회에서 추방하기로 1895년 결의했다. 이러한 교회의 결의가 첫 결실을 맺은 것은 1888년 3월14일. 이 날 과부 박씨는 아펜젤러 선교사 주례로 한국 개신교 역사상 처음으로 재혼했다. 이후 1894년 갑오개혁 때 조혼 금지와 과부 재가 허용을 법으로 공포했지만, 실제로는 지켜지지 않았다(<한국사통론>)는 사실을 고려할 때 충격적인 일이다.

황해도 평산 감바위교회는 '부부가 존댓말을 쓸 것과 한자리에서 식사할 것을 결정'했다. 부인을 하대하는 사회에서 이같은 결정은 획기적인 일이었다. 교회가 그만큼 노력한 덕분에 수많은 여성 지도자를 배출했고, 여성이 전면에 나서 국채보상운동 같은 사회운동도 이끌 수 있었다. 언더우드는 교회의 여성 차별 노력 덕분에 "남성들은 여성이 집에서 고된 일만 해서는 안되고, 즐거움도 가져야 한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라고 말했다. 북한 지역 첫 여성 세례 교인으로 알려진 전삼덕도 "예수를 안 후 자주적 인간이 되었다"라고 고백했다.

국채보상운동 주역은 여성

그러나 지금 한국 교회는 이러한 고백 대신 "여성 지도력을 말살한다"라는 여성들의 아우성이 더 크게 들린다. 최근 예장합동은 2007년 대부흥운동 1백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준비하느라 분주하다. 다양한 세미나와 행사를 마련했지만, 어디에도 교회의 여성 차별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은 보이지 않는다. 예장합동은 1백 년 전 대부흥운동과 여러 사회운동이 기독 여성의 힘으로 확산되었다는 것을 안다면, 여성에게 목사 안수조차 주지 않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한국 교회는 대부흥을 그렇게 원하면서도 대부흥운동의 원인이자 결과였던 교회 내 신분제 타파와 여성 차별 철폐는 여전히 외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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