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건물은 기초가 있고 지상 구조물이 있습니다. 기초가 견고해야 지상의 건물도 튼튼합니다. 지방도시 부산의 명물인 광안대교가 준공하자마자 기초가 내려앉고 있다는 보도를 통해 우리 한국은 아직 기초공사 기술이 부족한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기도 해본 적이 있습니다. 꼭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처럼….

얼굴 화장을 할 때는 먼저 깨끗하게 세안을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그 다음에 기초화장 곧 화운데이션(foundation)을 바르고 난 다음 메이크업(make up)을 합니다. 이 절차를 건너 뛰면 화장이 자연스럽지 못합니다. 세안과 기초화장이 메이크업보다 중요하다는 말은 그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큽니다.

신앙에 있어서도 건물의 토목공사에 해당되는 구원의 기본 원리를 터득하는 것이 거룩과 영광스러운 구원의 건설을 위해 아주 중요합니다. 그런데 과연 구원의 기본에 얼마나 확신을 가지고 있느냐는 그 중요성만큼 그리 흔하지 않음을 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예수의 피를 확실히 믿으라고 외치고, 어떤 사람은 십자가를 굳세게 붙잡으라고 소리를 높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방언을 해야 성령 세례를 받은 증거라고 목청을 높이기도 합니다. 스스로의 수준을 말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근래에는 이래서는 안되겠다 하고, 교회가 신자를 질적으로 양육하고자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도입하고, 계발하고 있음에도 영 마음 먹은대로 안됩니다. 그 이유는 놀랍게도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의 기본 원리에 매우 취약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의 기초공사가 부실하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완전한 이해와 수용이 부족합니다. 어설픈 신앙 위에 이런 저런 직분을 몇 층 올려놓으면 의무와 책임감으로 버티다가 하중을 못 이겨 힘들어하든지 그만 무너지는 모습을 많이 봅니다. 그러므로 개인의 신앙이나 교회가 건강하려면 이 구원의 기본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어야 

신앙은 출발점이 확실해야만 앞으로 계속 나아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려면 그 분과 그 분이 하신 일들을 다 믿어야 합니다. 그 분의 과거와 현재와 영원하신 존재와 그의 피 흘려 죽으심과 다시 사심과 하늘의 보좌에 앉으심과, 성령을 통해 우리의 영 안에 계시고 지금 현재 일하고 계심과 장차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것과 사단을 완전히 박멸하고, 영원 무궁한 하나님의 세계가 이루어질 것 등 그 분의 전부를 다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하나님으로부터 하자가 없다는 보증을 받아야 하는데, 그 보증인은 바로 성령이십니다. 우리는 우리를 믿을 수 없으나 성령의 보증은 확실합니다. 만약 성령이 신자의 영 안에 사무실을 차려 놓고 믿음을 보증하고 작업을 하시면, 이 사람은 기본적인 구원의 관문은 일단 통과한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놀라운 이적과 기사만이 아니라 우리의 영과 생각에서 느낌의 파장으로 일하십니다.

여기서부터 이제 건물로 말하면 지상 구조물을 쌓아 올려 갈 때 나는 신자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상당수의 신자들이 여기서 더 나가지 못하고 제자리 걸음을 걷고 있음을 봅니다. 흡사 이스라엘이 38년 동안이나 광야를 뺑뺑 돌 듯이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의 집은 기초가 그리스도이면 건물도 그리스도로 지어져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성전의 모퉁이 돌입니다. 모양만 기준이 아니라 그 성품도 기준입니다. 거기에 세상의 지식이나 인간의 장점이나 문화의 아름다움을 끼워 넣을 수 없습니다. 만약 이와 같은 것들을 집어넣으면 하나님이 준공 검사를 해주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경외란,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으로 자기 자신을 철저히 낮추어 오직 주만 인정하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경건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그리스도인들은 육체를 좇지 않고 영을 좇아 행하는 적용 훈련을 반복해야 합니다(롬 8:4)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의 동선을 믿고 따르는 영적인 훈련을 계속하므로 신앙의 구조물이 한층 한층 올라갑니다.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채워가는 하나님의 성품인 천국의 시티 타운을 자기 안에 건설해 가는 것입니다. 만약 이런 성숙이 없으면 소경이요 멀리 보지 못하는 영적인 원시이며 죄를 깨끗하게 한 기본을 잊어버린 것이라고 성경은 지적하고 있습니다(벧후 1:5~9).

그리스도로 건설하는 훈련을 해야

이 문제를 제시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큰 부담입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넘어야 할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숙제이기도 합니다. 신앙의 성숙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하나님의 대접은 은혜의 보좌에 가까울수록 더욱 각별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매 맞고 잘 할래 안 맞고 잘 할래' 이 두 가지 외엔 우리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학교는 유급은 있어도 낙제는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끌고 가십니다. 그래서 하늘에 속한 성도들에게 고난이 많습니다. 그 고난은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지 않는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좇지 않고 육신을 좇으므로 받는 하나님의 징계입니다. 진리 안의 거룩함에서 떠났을 때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지팡이요 막대기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라고 고백합니다. 기본적인 계명을 배운 것이 아니라 그 계명을 기초로 해서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따를 것인가 곧 신앙의 집을 건설해 가는 요령을 터득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신앙의 기본과 건설 이 둘은 불가분리의 상관관계입니다. 그래서 기본이 있으면 건설은 자연히 진행되기에 성경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약 2:17)라고 못 박고 있습니다. '행함이 없으면 신자가 아니다'라는 말보다 '행함이 없음은 그 믿음이 잘못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내주하시는 그리스도를 믿으며, 구원의 기본을 항상 반복 묵상하고, 성령의 만져주심과 기름부으심을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지식이나 의욕이나 애착을 좇지 말고, 성령의 감동을 좇는 연습을 반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항상 공부해야 합니다. 쿵후(공부)는 그 투로를 항상 반복하므로 체질화되듯, 진리 또한 반복하므로 확신이 오고 자신의 것으로 배어들어옵니다. 이 공부를 반복하면 반드시 자신 안에 점점 건설되어 가는 천국의 영광스러움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이 영광을 본 사람들은 말이 별로 필요 없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은혜와 약속을 확인하고, 이를 맛보며 묵묵히 자신의 갈 길을 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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